57회차) 너만 행복하지 않아
주변 지인들의 도움과 강식의 노력으로 앨리스 포철이 날개를 달고 연이어 입찰에 성공해 수주를 따낸다.
“강식 씨, 요즘 너무 무리하고 있어요.”
“괜찮아, 아직 펄펄해.”
“그렇게 무리하다가 쓰러진다고요.”
“알잖아. 앨리스 포철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도움 준 이들을 위해서라도.”
“한 번에 다 갚을 것도 아니고 쉬엄쉬엄하세요.”
“부희야, 나 지금 너무 행복해.”
김 강식이 아내 부희를 앉아 주며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린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요. 근데 퀀텀 그룹 손여사와 통화했는데 정략결혼 뭐라고 하던데···”
“다행이야, 윤미가 진준이를 좋아해서. 사실 정략결혼은 할아버님들이 했던 오랜 약속이셨데.”
“그래도 은연중에 나온 구두 약속이었을 텐데 이렇게까지··· 손 여사에게 듣고 놀랐어요. 통화 중에 곁에서 윤미가 듣고 너무 좋아해서 놀랐지만 기분은 좋았어요."
부희가 강식 손을 잡아 포개며 입을 맞춘다. 그리고는 테이블에 놓인 한약을 눈으로 가리킨다.
“그러니 아이들 생각해서라도 건강 챙기세요. 게다가 범수 건강이 몰라보게 좋아지고 여자 친구도 생긴 것 같아요. 자, 그러니 이 보약 드시고 힘내세요.”
아내가 건네는 한약을 받아 든 강식이 단숨에 마시고 얼굴을 찡그린다. 박하사탕을 부희가 입 속에 넣어주며 엉덩이를 두드린다.
“그래, 범수도 그렇고··· 집안일이 풀리니까 모든 것이 술술 풀리기 시작하네. 이번 사우디 계약 건만 해결되면 마님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요.”
“사우디 계약 따내면 그렇게 하는 거예요.”
“약속할게. 당신과 약속인데 반드시 지켜야지. 부희 없었으면 나 여기까지 못 왔어.”
강식이 아내 머릿결을 만지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무슨 말이에요. 당신이 주인공이면서.”
“주인공! 나 혼자 잘하다고 무슨 이야기가 만들어지나. 주연도 조연도 모두가 있어야 이야기가 되든 전설이 되던가 하지. 이제 당신과 범수 그리고 윤미 다시는 험한 꼴 당하지 않게 할 거야.”
강식은 성공의 발판을 다지기 위해 사업 확장을 넓히며 일에 대한 애정이 용광로처럼 펄펄 끓는다. 그가 드디어 사우디 계약 건을 따냈고 김포공항에 내렸다.
“어느 정도 되었다고 마음을 놓을 줄 알았는데 더 바쁘게 생겼어.”
“사장님,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아니, 서울 지사에 들렀다가 곧장 회사로 가지.”
기사가 시계를 보며 걱정스러워한다.
“계속 연락을 주셨습니다. 사모님께서 기다리실······”
“알지! 따로 연락할 테니 출발하게. 앨리스는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고."
강식이 눈을 감고 구름 위 비행기에서 느꼈던 생각을 떠올린다.
'평화로워 보이지만 잠잠할 수 없는 사연들을 품고 있었어. 단순함은 복잡한 것들을 거르고 나온 핵심이야.'
강식은 임시 임원 회의를 막 끝냈다.
“회식 장소로 먼저들 가 있게. 집에 전화하고 30분에 출발할 테니.”
“네, 회장님 천천히 오십시오.”
“부희한테 한 소리 듣겠네. 머리가 왜 이렇게 아프지. 얼굴만 비추고 집에 가야겠어.”
강식은 의자에 앉아 정수리를 누르고 머리를 돌리며 피곤한 눈을 잠시 감는다.
"전화해야 하는데, 부희야, 오빠가 미안하다. 빨리 끝내고 갈게."
김 강식의 마지막 말, 그는 영원히 깨어나지 못했다. 이제 막 발판을 딛고 우뚝 서려는 앨리스 포철이 핵심 동력인 리더의 죽음에 길을 잃고 흔들린다. 미국에서 잠시 나왔던 범수는 어머니 부희와 윤미의 절규에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재희에게 교수 자리를 양보한 대가는 배신으로 무너진다.
"우린 여기까지야, 이젠 갈길을 가자고 난 더 이상 수컷이란 동물에 관심이 없어."
앨리스 포철과 범수는 한 몸처럼 거대한 소용돌이에 휩싸여 끝을 모르는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
이틀이 지나고 삼 일째 되는 날, 리사와 우마리는 퇴원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강 기사가 아닌 김 실장이 직접 운전하는 차를 탄 우마리가 창 밖을 보며 생각이 많다.
“회장님께서 불행한 경험에 압도당하셨습니다. 어릴 적 겪었던 경험과 말을 아주 힘이 강하지요. 하지만 이 정도까지 아니셨는데 뭔가 지속적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회장 승우는 공황장애가 심각해 입원 치료를 통해 경과를 더 지켜보기로 한다.
가족들이 앨리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김 실장을 비롯한 집안 식솔 중 조 여사와 미스 한이 왔다 갔다. 회사에서는 프로젝트 진행 수장들인 베제로와 크리스 그리고 김 무진이 한걸음에 달려와 위로를 했다. 권과 용수는 마순과 수지가 입원해 있어 점심시간에 잠시 들러 염려를 해준다.
"회장님, 오늘은 시간이 부족해서 알까기 한 판 어떠십니까?"
"알까기! 얘처럼 무슨······ 저기 바둑판 가져오게."
회장 승우와 리사 그리고 우마리가 산소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그녀가 일어나 권과 용수를 반기며 승우에게 알린다.
“아버지, 기쁜 소식이 있어요.”
기쁜 소식이라는 말에 승우가 바로 반응한다.
“으응? 무슨.”
“수지와 마순이 임신을 했데요.”
승우가 우마리의 말에 눈가가 촉촉해지며 손뼉을 친다.
“축복 같은 소식을 전해주는구나.”
손을 내밀어 권과 용수의 손을 잡아주며 승우의 낯빛이 밝아진다.
“새 생명의 소식을 알려주다니. 권과 용수야! 아버지가 된 것을 축하한다.”
리사도 진심으로 축하하며 의자에서 일어나 좋아한다.
“김 회장님이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권과 용수가 면회를 짧게 마치고 나와 복도를 돌아설 때였다. 우마리가 두 형제에게 부탁할 말이 있어 나왔다가 용수와 권의 말을 엿듣게 된다.
“형, 우리가 나라를 구한 거야.”
“알잖아, 리베라타 가문은 생명에 대한 사랑과 자유를 바탕으로 세상에 이로움을 주는 거야. 나도 알고 있었지만 왜, 인재들이 리타로 모이는지 알겠다.”
“그러니까, 리앨퀀이 내 일부인 것 같아. 합병이 아니라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용수야, 맡은 프로젝트에 신경 쓰고 있겠지만 더 세심하게 살펴라. 한 팀이 아니라 우린 가족이다.”
“말이라고, 그런데 이스타 형이 총괄이고 부총괄이 우마리인데 어째!”
권이 용수의 어깨를 잡고 기댄다.
“두 사람 다 우리와 달리 이성적이잖아. 공과 사를 잘 구분할 거야.”
“근데 큰형은 병원에 오지도 않았다고 하던데.”
“그러니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용수가 어깨를 부르르 떨며 몸서리를 친다.
“나 저번에 이스타 큰형 눈을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권이 뭔가를 알겠다는 듯 용수를 본다.
“너도 봤구나.”
“그럼, 형도!”
“그래, 그 눈빛 살면서 처음 보는 눈이었어.”
“흠 하나 없는 대단한 형인데 양파같이 까도 까도, 암튼 큰형 험담도 꺼림칙해서 함부로 말하기 무서울 정도라니까.”
“큰형이 그렇게 무섭냐?”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험담하기 싫어. 이유가 있을 것 같아서.”
“동감. 이럴 때 보면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퀀텀 삼 형제잖아. 우마리를 생각하면 화가 나고 안타깝지만 기다리자. 형이 말해 주겠지.”
권과 용수는 회장 내외분과 우마리가 자신의 일처럼 좋아하는 모습에 미안한 마음이 든다.
“워어, 권이 형! 큰형에 대한 신뢰가 장난이 아닌데.”
“넌, 아니었어.”
“솔까말, 나도 큰형 믿어. 하지만 임원들은 우리와 다를 텐데.”
“그러니까, 명분이 생겼으니 어떤 식으로든 돌을 던지고 끌어내리려 하겠지.”
“걱정이네.”
“큰형! 걱정은 마라. 범수 이사님이 간신히 붙잡고 있던 앨리스가 이리저리 잘려 나가고 사라지셨어. 간신히 이름만 남은 앨리스를 대학생이던 이스타 형이 살려냈잖아. 큰형은 우마리 빼고 아무도 못 건든다. 무슨 담력인지 병원에 나타나지 않았지만 대신 여기가 어디냐 앨리스 병원이 아니냐. 뭔가 감이 딱 오지. 우리도 형 품 안에 있는 거야. 짜샤!”
용수가 이마를 탁 친다.
“그러게. 우리 걱정이나 해야겠네. 형, 나 소원이 생겼거든.”
“소원?”
“회장님처럼 존경받는 아버지가 되고 싶어.”
권이 호주머니를 뒤지며 용수를 본다.
“너, 말해. 도청 달았어?”
“엉? 뭔 말이야.”
“나도, 그런 생각을 했거든.”
"작은 형이 이제 우스갯소리도 잘하고 많이 부드러워졌는데."
"인정! 마순 때문인지 안정감도 느끼고 여유가 더 생겼어."
"난 요즘 매일매일이 좋아."
조용한 차 안에서 우마리는 생각을 정리한다. 리사가 조용히 김 실장을 부른다.
“실장님이 있어서 아무 걱정 없이 병원에 있었어요. 감사해요. 늘 생각은 했지만 이럴 땐 의지할······”
리사가 억눌렀던 울음을 터트린다.
“엄마!”
“난, 아직도 그날 너를 두고··· 이스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게다가 임신이라고 했잖니. 결혼한 네가 아니라 엉뚱하게 혜리라니.”
흐흐흑 흐흐흑
“오빠, 미안해요.”
김 실장이 손수건을 꺼내 우마리에게 준다.
“여기서라도 울고 싶으면 실컷 우세요.”
김 실장의 말에 리사가 대성통곡을 하자 우마리와 김 실장이 놀라면서 살짝 웃는다. 리사가 울고 나서 진정이 되었는지 딸을 본다.
“우마리, 김 실장님과 미스 한은 식은 올리지 않았지만 혼인신고도 했고, 미스 한도 아기를 가졌단다.”
우마리가 앞 좌석 등받이를 잡고 얼굴을 내민다.
“정말이에요. 김 실장님! 축하드려요.”
“얼마나 행복하고 축복받을 일이니. 수지도 마순이도 다들 그런데 왜? 너는···”
김 실장이 리사에게 따끔하게 말한다.
“상심하지 마세요. 우마리 아가씨가 어떤 분이신지 아시잖아요. 슬기롭게 해결하시고 행복이 무엇인지 보여주실 겁니다. 아가씨, 자신 있으시죠.”
우마리는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자세를 고쳐 앉는다.
“모르겠어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아직 생각이 많아서 뭐가 뭔지 뒤죽박죽이라서.”
김 실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점잖게 수긍한다.
“웬만한 사람이면 정신 못 차릴 텐데 잘하고 계십니다.”
그가 우마리와 리사를 위해 모차르트 제비꽃(Das Veilchen KV 476) 가곡을 틀어준다. 모녀는 서로의 손을 포개며 그날 이후 처음으로 환하게 웃는다. 운전을 하던 김 실장이 룸미러에 비친 우마리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본다.
- 작가의말
'평화로워 보이지만 잠잠할 수 없는 사연들을 품고 있었어. 단순함은 복잡한 것들을 거르고 나온 핵심이야.'
보는 것과 아는 것은 다릅니다. 요즘 당신의 시선은 어디로 향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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