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회차) 과거를 되돌리지 마
“부모님께서 이모랑 모레쯤 돌아오시는데 추기경님을 찾아뵙는 게 좋겠어요.”
“맞다, 프로젝트로 아프리카에 있어서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지.”
“추기경님께서 직접 주례를 서주셨어요. 이모가 잘 알고 있으니 알아보고 연락해 드릴게요..”
그가 우마리의 생기 넘치는 모습을 보며.
“우마리, 그리고 하나만 더. 검은 고양이를 본 대로 그려 줄 수 있을까.”
"고양이를 요!"
갤럭시 노트 알파를 꺼내 그녀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네 남자가 끙끙거리는 일을 쉽게 한 방에 해결하다니. 우마리 대단한데···”
"뭘요!"
우마리는 심취한 듯 그리기에 열중하고.
“재미있는데요."
“어렵겠지만 특히 눈을 제대로 그려줘."
“눈이라··· 어렵지 않아요.”
"굉장한데!"
“자, 얼추 다 그렸어요.”
우마리와 문을 나서던 무진이 쌍둥이 형이 앉았던 의자와 구석진 곳을 눈으로 더듬는다.
“잠깐, 우마리 먼저 가지. 디저트 좀 사 가야겠어. 직원들이 부탁했거든.”
그녀가 손으로 인사하며 총총 걷는다.
***
리사와 승우, 재희는 잠깐의 휴식처럼 유럽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식솔들 모두가 현관 밖에 줄지어 서서 회장 내외를 반갑게 맞이한다.
“여행 갔다 온 건데 이렇게들 나와서··· 김 실장이 벌을 세웠구먼.”
“아닙니다. 모두가 자발적으로 나온 것입니다.”
승우가 발을 멈추고 키가 작은 메이드에게 묻는다.
“김 실장 말이 맞는가.”
그녀는 갑작스러운 회장 승우의 질문에 상기된 얼굴로 대답한다.
“그렇습니다. 회장님!”
재희와 리사가 승우를 밀며 장난을 친다.
“형부, 우리가 빨리 들어가 주는 게 도와주는 거예요.”
“여보, 눈치 챙기고 어서 들어갑시다.”
바깥바람을 쐬고 돌아온 주인의 빈자리가 채워지고 무게감에 안정감이 생긴다. 리타 가문의 분위기에 생기를 부여하는 이는 우마리다. 예전과 다르게 적극적으로 리앨퀀 일에 참여하고 리사와 승우를 더 가까이에서 챙긴다.
"우마리, 네 이야기 들었어. 힘들었을 텐데 너무 애쓰지 마. 나도 범수 씨도 곁에 힘껏 도울 거야."
"이모, 고마워. 하지만 모든 일을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어. 아버지가 쓰러지면서 많은 것을 되돌아보게 되었어. 그리고 많이 약해지셨더라고."
재희가 우마리를 안아준다.
"리타 가문에 네가 있다는 것이 행운이다. 그리고 형부 나이도 그렇고 쌩쌩하시던데 다만 어릴 적 트라우마가 문제인데 별거 아니래."
"별거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우마리가 팔을 풀고 재희를 민다.
"그게, 유럽 일정을 잡은 이유가 따로 있었어. 스탠퍼드 심리학부 필립에게 소개받은 심리학자와 범수 씨가 영국에서 권위 있는 닥터를 추천받아 여러 검사와 치료를 받았는데 의외의 결과를 받았어."
몹시 긴장한 우마리가 소파에 앉으며 재희를 바라본다.
"결과가 어때? 어떻게 나왔는데 이모."
***
지황(타스 아레)는 인터컨티넨탈 서울 파르나스 스위트룸에 머물고 있다. 와인을 들고 온 이스타가 아무렇지 않게 들어와 소파에 앉는다.
“집으로 안 가고 또 여기로 온 건가.”
“그럼,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자네는 나한테 절대 이러면 안 되지.”
허리를 굽신 거리는 지황.
“알았습니다요. 그나저나 오늘은 술 마시지 말고 이야기 좀 하자고.”
“뭐, 맨날 같은 말만 하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자고.”
“손님이 올 거야.”
“누구?”
“올 때가 되었는데.”
인터폰이 울리고 지황이 확인 후 버튼을 누른다.
“왔군. 암튼 변함이 없어.”
“혹시?”
“왜, 우마리 일까 봐. 내가 그 정도로 간이 큰 사람이 아니지. 기다려 손님인데 마중 나가서 모셔와야지.”
“누군데 이렇게 엉덩이가 들썩거려.”
그가 이스타 말에 손을 번쩍 들어 보이며 현관으로 향한다.
“내가 존경하는 벗이네.”
잠시 후, 지황이 반갑게 인사하며 함께 돌아오는 이는 무진과 크리스다. 이스타가 그 둘을 보고 인상을 쓴다.
“아, 난처하군.”
소파에 편하게 앉아 있던 이스타가 일어나며 외투를 챙긴다.
“손님이 왔으니 난 이만 가보겠네.”
이스타가 무진과 크리스를 보고 냉담한 반응에 월화가 무진을 본다. 차갑게 셋을 지나치는 이스타의 손을 무진이 잡으며 무릎을 꿇는다.
“데제로스 님!”
무진의 말에 이스타가 돌아본다.
‘어, 어떻게.’
크리스도 무릎을 꿇고 지황은 고개를 숙인다.
“그럼, 다들 알고···”
무진이 손을 풀었자 지황이 이스타를 소파로 안내한다.
“앉으시죠. 듣고 가셔야 후회가 없을 듯합니다.”
눈이 충혈된 이스타가 소파에 앉았지만 가시방석이다.
‘늘 나 혼자라고 불평했는데.’
이스타는 무진의 말을 듣고.
“데제로스가 아닌 이스타라는 인간으로 이곳에 와 있소. 에너지와 계층과 상관없이 크리스가 샛별에게 형님이라 부르듯 그냥 편하게 불러주시오.”
이스타의 말에 크리스가 반응한다.
"그걸 어떻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더니 이스타가 목놓아 울자, 천장에 달린 대형 샹들리에 두 쌍이 심하게 요동치며 흔들린다.
“제발, 진정하십시오.”
크리스가 소리치자.
“크리스, 잠시, 잠시만 감정을 추스를 수 있도록···”
무진이 크리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아니, 이러다 저번 리타 가문처럼 호텔도 난장판 될까 봐 그러지요. 그날 속보로 뜨고 뉴스에도 나왔잖아요. 서울에 순간 지진 진도 6.2라고···”
크리스가 말을 해놓고 서둘러 입을 손으로 틀어막는다. 그러나 이스타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꿈이라고 여겼는데 꿈이 아니었군.”
한숨을 길게 내쉬는 무진.
“꿈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내가 착각을 할 수 있지. 말도 안 된다고! 꿈이라고 여겨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고.”
크리스가 곤혹스러워한다.
“죄송해요. 입이 방정이라 무진 형님, 내가 이래서 실수할까 봐. 여기 안 간다고 한 거라고요.”
겁을 잔뜩 집어 먹은 크리스를 보며 이스타의 목소리가 보드랍다.
“크리스, 진정하게. 뭐라고 하려는 게 아니야. 알다시피 난···”
무진이 차분하게.
“루피 섬 모래와 자갈 때문이었습니다.”
“루··· 루피 섬!”
말까지 더듬던 이스타는 그대로 맥이 풀려버린다. 소파에 등을 기대며 천장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고 눈물을 닦으며.
“이제야 방문턱 의문이 풀리는군. 그렇게 모든 걸 알고 있었어.”
그가 자신의 셔츠를 무자비하게 잡아당겼고 시뻘겋게 목에 피가 쏠린다.
지황이 서둘러 일어나 제비꽃 향초에 불을 켠다.
“진정하게. 잠시 호흡을 가다듬어 보라고.”
“쓰레기가 된 기분이야.”
머리를 미친 듯이 흔들며 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이스타를 본 무진.
“선택하셨군요.”
“끝까지 감추려 들키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무진 앞에서는.”
“저는, 데제로스 님께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무진이 손바닥을 보이자.
“그러지 마세요. 지금 여기는 저 위에서 무엇이었든 상관없는 자리입니다. 난 데제로스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시험을 치르는 중이죠. 이스타로 불러주세요.”
데제로스의 말에 크리스가 싱글벙글.
“내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요. 무진 형님, 편안하게 이스타라고 부르세요.”
“크리스, 말처럼 그렇게 하세요.”
지황이 차를 가져와 테이블에 놓자 크리스가 박차고 일어난다.
“타스! 아니, 지황. 난 시원한 캔 맥주 마시고 싶은데.”
“저기, 내가 가지고···”
“아니, 맥주를 냉장고에서 막 꺼낼 때 그 차가운 느낌을 빼앗길 수 없지.”
지황이 냉장고를 가리킨다.
“형님은 안 드시니까.”
이스타가 소파에 깊게 묻었던 등을 일으킨다.
“형님은, 무엇을 하지 않지만 상대는 형임을 보면서 자신을 돌아보더군요.”
“여기저기 과거를 너무 들춰보았군요.”
귀를 후비는 이스타.
“아르덴과 골리고담 형님이 고통을 통해 자유를 얻는 것을 봤어요. 나도 그 모습에 반해 따라 해 보려 하는데 아무나 힐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요즘 겪고 있지요.”
맥주 두 캔을 비우고 또 한 캔을 따는 크리스를 보며 무진이 보고 지황에게 부탁한다.
“크리스를 좀··· 약해서.”
“아! 내가 말렸어야 하는데.”
지황이 일어나 크리스에게 가자 무진이.
“이스타, 그럼 오래된 믿음도.”
말없이 이스타가 고개를 끄덕이고.
“그렇다면?”
“내가 형님처럼 고통을 통해 자유를 얻으려 하는 것같이, 내가 마곡귀계에서 나를 시험하며 기다린 것처럼 형님도···”
기분이 좋아진 크리스를 지황이 데리고 왔다.
“형님, 냉장고에 종류가 어마어마합니다.”
무진이 지황에게 묻는다.
“자네도 과거를 다닐 수 있나?”
“아니오, 알아본 것으로는 이스타만 현재와 과거를 오갈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렇군.”
안색이 어두워진 무진의 표정과 주저함에 대해 이스타가.
“형, 무엇을 그렇게 신경 쓰는 거야?”
계속되는 무진의 망설임에 크리스가 홀로그램을 켠다.
“가만 어떤 거였더라. 실리기에서 우주 서···”
산만하게 꼼지락거리는 크리스를 대신해 월화가 버튼을 누르자 우주 서가 뜬다.
“무무의 시절 수·과학에 대한 맹신과 브레인 탑에 의존한 완벽 체계에 대한 집착이 소멸을 불렀지. 불안정성을 간과한 대가는 너무 컸지. 이를 본 어린 실리는 일찍이 우주 서에 쓰셨어. 과거와 미래를 부득이하게 드나들지라도 절대 잘못된 것을 고치거나 절대 손대지 말라.”
무진의 말에 이스타는 얼굴이 창백하다.
“솔직하게 대답해주세요. 형님은 실리와 연결되어 있습니까.”
“감히 내가 어떻게!”
“형, 의심해서 미안해. 사실 과거를 돌아다니며 되돌리려 했어. 하지만 그 방문턱을 넘어서 들어갈 수 없었어. 몇 번을 재시도하고 수없이 그 장면을 삭제시키려 했지만 소용없었지.”
크리스가 불쑥.
“아니, 천하의 데제로스가?”
흐리멍덩한 크리스의 눈이 지황의 눈 맞춤에 스르르 감긴다.
“숙취를 제거하기 위해 잠시 재우는 것이 좋을 듯해서.”
무진이 크리스의 꺾인 고개를 바로 세워주며.
“잘했어.”
이스타는 무척 괴롭다는 듯 머리를 긁적인다.
- 작가의말
좋은 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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