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회차) 무건리에서 옵스와 무명
“잘 들어, 당신 털끝 하나 잘못되면 괴물로 변할지도 몰라. 나 정말 무서운 사람이라고.”
미스 한이 코를 찡긋거리며 장난을 친다.
“무섭다고 하는 사람 치고 무서운 사람 없던데, 그럼 헐크로 변하기 전에 도망쳐야지.”
김 실장이 험상궂게 인상을 쓰며 얼굴을 들이댄다.
“자기는 내가 무섭지 않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과거에 날고 긴 사람이 어디 한둘이에요. 나도 한때는 껌 좀 씹었다고요.”
그가 구겼던 얼굴을 펴며 천장의 LED 조명을 본다.
“그래, 두 손 두 발 다 들었어. 내가 너를 너무 사랑하는 죄지.”
“산하 씨, 나 봐요. 오빠! 걱정하지 않도록 내가 조심할게요.”
김 실장이 미스 한을 안아주며 중얼거린다.
“적당히 얼버무릴 때만 오빠라 하고. 너한테 듣는 오빠라는 애칭이 제일 좋다.”
“나 말고 다른 누가 산하 씨를 오빠라고 불러.”
그가 미스 한 말을 듣고 대충 얼버무린다.
“내가 사연이 좀 많아서···”
“오빠는 사연이 아니라 비밀이 너무 많아요.”
“그런 비밀이 많은 나를 왜 좋아하지.”
“나도 처음엔 내 마음을 인정하지 않고 이웃 아저씨다 라고 무시했는데, 그게 내 마음대로 되질 않더라고요.”
그가 피식 웃으며 그녀의 콧등을 그의 코로 비빈다.
“난, 변하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봤어. 그래서 영원을 약속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죽을 때까지 꼬맹이 너만 사랑할게. 죽을 때까지 사랑해줄게. 나도 너도 외롭지 않게.”
둘은 지하 사무실에서 반딧불이처럼 불을 밝힌다.
리타앨리스퀀텀이 합병되고 우마리 집들이 겸 리타 가문과 퀀텀 화합의 장으로 모인 자리는 엉망이 되어버렸다. 리베라타 가문은 그날부터 분위기가 경색되어 삭막해져 그늘이 드리운다.
달빛이 비치는 서재 창가 테이블에 앉아 이스타가 습관처럼 별채를 바라보고 있다.
삐리리 삐리리
인터폰 벨소리가 울린다.
“김 실장입니다. 늦은 시간 죄송합니다. 불이 계속 켜져 있어서··· 잠시 뵈었으면 합니다.”
“2층 서재로 올라오세요.”
***
무건리 야반도주로 시작되는 리베라타가문과 퀀텀
김 립은 부인 소화와 아들 김 희토를 데리고 새벽이슬을 맞으며 도망친다. 앞 산 능선 언덕에 잠시 서서 눈으로 무건리 수작골과 이별을 고한다.
'우리 가문이 망해서 도망치듯 이렇게 떠나지만 반드시 일어날 거야.'
세 람이 콩잎이 달빛을 받으며 푸르게 초록 물결이 펼쳐진 한가운데 우뚝 솟은 물푸레나무를 본다.
“서방님, 우리 이렇게 도망치면 피해 보는 이들이 많을 텐데요?”
“이미 다 손을 써 놨으니 걱정은 말구려.”
김 립은 영악한 옵스 가문의 후손답게 남은 재산을 모두 챙겨 손을 써 놓았다.
“아버지, 어디로 가는 거야? 무명이가 있으면 심심하지 않을 텐데.”
“희토 말처럼 아무리 종이지만 돌과 무명 댁이 불쌍해요. 오랫동안 밀린 품삯도 주지 못했는데”
“나도 사람이야, 고봉산 아래 돌밭이 있는데 팔려고 내놓으면 사람들이 침을 뱉고 욕을 하더군. 그래서 그거라도 가지라고 문서를 쥐여 줬어.”
“거긴 아무짝에 쓸모없는 땅이라고 풍수지리 보는 박 첨지도 혀를 내두른 곳이잖아요.”
“그러게 그런 쓸모없는 땅을 할아버지 부터 아버지는 여태 가지고 계셨던 이유를 알 수가 없었지. 내가 아버지 몰래 팔아먹으려 했는데 사려는 작자가 아예 없더라고.”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어머님이 말씀하시는 걸 들었는데 아버님이 그 땅은 묵혀 두면 용이 되는 땅이라고 하셨어요.”
립이 고개를 가로젓다가 가래침을 뱉는다.
“언젠가는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박 첨지가 그러는데 전쟁이나 터져서 땅이 갈라지고 피가 흘러서 쑥대밭이 되면 용이 나올 터라고 했어. 그런데 그럼 뭐하나, 전쟁 나면 다 죽을 텐데 뭐하러."
퉤 퉤 퉤!
"어쨌거나 품삯도 줬고 다시는 돌과 무명이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라고 재수 없어.”
“아부지, 무명이는 종놈이지만 달라 언젠가 꼭 다시 만났으면 좋겠어."
"아서라 착해도 똑똑해도 종놈은 종놈이다. 어딜 감히 양반과 종놈······"
캬아악, 퉤!
립이 온갖 묵은 감정을 끓어 올려 게워내듯 침을 뱉는다.
"그런 말은 입에 담지도 꺼내지도 마라. 세상이 망조가 드니 종놈들이 기어 올라오고 어딜 감히 종놈이 양반보다 똑똑해서 재수 없어. 됐고! 희토야. 우리는 바다 구경이나 갈까.”
“여보, 혹시 부산으로 가는 건가요?”
“어떻게 알았소.”
“돌아가신 어머니 친정이 부산이에요. 어릴 적 가 본 적이 있어요.”
“거기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이제 부산으로 갑시다.”
“그래요. 가요.”
“무건리에서는 망했지만 다시 새로운 곳에 가서 새 출발 해봅시다.”
세 사람이 부산까지 오는 길은 순탄했다. 워낙 잔머리가 잘 돌아가는 립은 남들에게 피해는 줘도 본인이 손해 볼라치면 얼굴에 철판을 깐다. 그 모습을 희토가 하나하나 보고 배운다.
무사히 부산에 도착한 김 립은 여관을 잡고 아들과 아내를 두고 일본으로 향하는 배편을 알아보기 위해 나선다.
“곧 올 테니. 여기 있어요.”
김 립이 나가자마자 아들 희토가 기다렸다는 듯 떼를 쓴다.
“엄마, 답답해. 나도 나가고 싶어.”
“아버지께서 금방 다녀오실 거야. 오시면 함께···”
“그럼, 나 혼자 나간다.”
고집이 센 희토는 아버지 립도 말리지 못하는데 소화는 더욱 그랬다.
“그럼 요기 앞에서 아버지 기다릴까.”
“부산에 할머니 친정집이 있다면서 거기 가보자.”
“으응. 어릴 적 몇 번 와 보긴 했지만 거기가 어딘지 몰라? 뭐였더라··· 양조장 옆에 배를 수리하는 곳이긴 했는데.”
어느새 희토의 성화를 못 이기고 밖으로 나온 소화는 아들 희토 손을 잡고 시장을 돌아다닌다. 생선을 항아리 대야에 놓고 파는 여인들이 즐비하게 앉아 있다.
“뭣, 좀 물어볼게요. 이 근처 어디에 양조장이 하나가 있었는데 이름을 몰라서요?”
“양조장?”
생선을 손질하던 여인이 칼로 도마에 내리치며 말한다.
“일본 사람이 하던 데를 말하는 건가?···”
“그래, 맞다 아이가! 지금은 허 씨가 하는 거기.”
“그러게. 거긴 가 보내.”
코 옆에 큰 사마귀가 있는 여인이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알려준다.
“저짝을 보면 전봇대 끼고 돌아서 쭈우욱 가 보래이. 범일동인데 거 가서 다시 물어 보래이.”
“네, 정말 고맙습니다.”
희토가 얌전하게 소화 옆에 붙어 있다가 떨어지며 여인들을 돌아보며 비웃는다.
“저 사람들도 종이야. 아버지 말처럼 목소리만 크고 무식해.”
소화가 희토를 세워 얼굴을 만져주며 타이른다.
“아들아, 세상이 달라졌단다. 양반이니 종이니 그런 것 따지지 말아. 저분들이 우리가 모르는 길을 알려줘서 친정집을 찾아가고 있잖니. 고마운 분들께 무식하다느니 종놈이니 하는 것은 더 무지한 사람이야.”
“어머니는 아버지 말처럼 착해 빠졌어.”
“아버지가 너에게 그렇게 말하셨니.”
“사실은 아니야.”
“그럼 네 생각이구나. 아들이 보기에 엄마가 착해 빠져 보여서 바보 같니.”
“으응··· 네.”
“오늘은 솔직하게 말해 주었구나. 알았다. 알아두거라. 착해 빠지고 바보 같은 엄마 뱃속에서 네가 나왔다는 것을.”
희토는 어머니 소화 말에 듣고 걷는 내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용히 졸졸 따른다.
“실례합니다.”
“어머! 이게 누구야. 너······”
김 립은 소화와 희토를 반기는 외가 친척들의 환대에 잠시만 부산에 머물기로 한다. 외가는 작은 배를 수리하는 집안으로 부산 유지였다. 옆집은 양조장으로 술이 잘 팔리는 반면 관리가 부실해 보이는 것이 립에 눈에 들어온다.
“적산 양조장이지만 이 근방에 술을 대고 있어. 근데 영 시원치 않아 주인이 내놓았다네.”
“요래 봐도 알짜인데.”
“그럼, 운영을 해보세요.”
“근데 우린 대대로 배를 수리하는 집안이라. 자네가 한 번 해보지 않겠나?”
“제가요?”
“내가 보기에 자넨 돈 냄새를 잘 맡게 생겼어.”
“돈 냄새는 무슨.”
“저 양조장 진짜 돈 보따리라니까.”
“글쎄요. 저는 곧 일본으로 들어갈 거라서요.”
소화의 외가는 립의 조언대로 양조장을 사들였고 립과 아들 희토는 일본으로 떠나기 전까지 양조장 일을 돕기로 한다.
“립이 자네가 도와주니 양조장이 매출이 눈에 띄게 오르는군.”
“뭐, 한 것도 없고 뭘 했다고요.”
“아니, 자네처럼 수완이 좋은 이를 본 적이 없어.”
김 립은 살면서 이 빠른 소리가 아닌 진심이 담긴 칭찬을 처음 들어 본다.
'양조장 일을 본격적으로 해볼까?'
흉흉한 소문들이 매일 들리던 어느 날.
“호외요. 호외”
“북침이오. 전쟁이 터졌소!”
립은 희토와 소화를 데리고 내일 일본으로 들어가기로 한다.
'성급하게 결정 내리지 않길 잘했어.'
술 한 병을 들고 김 립이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늙고 추레한 노파가 그의 등짝을 후려치며 싸늘하게 웃는다.
“너 아직도 여기 있었던 게냐?”
비렁뱅이 노파가 김 립 앞을 가로막는다.
“아니 당신은? 음폐리 서낭당 무당 곰씨.”
“나, 배고프니 국밥 한 그릇 사줘.”
“그러지요.”
곰씨는 얼마나 굶었는지 돼지국밥 세 그릇을 해치웠다.
“잘 들어.”
“어디 가지 말고 이제 여기서 살아도 돼.”
“떠나야 한다면서요.”
“불의 힘, 여기가 불바다가 됐잖아 이 멍충아.”
“전쟁이 너를 살려주는구나.”
“싫습니다. 전쟁 통에 어찌 될지 알고 저는 여길 떠날 겁니다.”
“여기서 자리를 잡아. 전쟁은 곧 끝나.”
“우선 술장사 하면서 참고 살아. 자식들이 너처럼 대를 이어 떠돌게 하고 싶냐 등신아!”
김 립은 곰씨에게 대를 이어 떠돈다는 말에 목에 핏대가 서며 손을 떤다.
“정말 내 아들 희토가 나처럼 떠돈다고요!"
- 작가의말
“적당히 얼버무릴 때만 오빠라 하고. 너한테 듣는 오빠라는 애칭이 제일 좋다.”
애칭(愛稱) : 본래 이름이 아닌 귀엽게 불리는 이름
부드럽고 살가운 인간관계에서 애칭은 참기름같이 고소한 감정을 추가합니다.
엘레강스 언니는 당신의 애칭이 무엇인지 문득 궁금하네요?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