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회차) 영원이란 말엔 주술이
이스타 원장이 서울역 대합실 같은 문 앞에 도착했다. 우마리가 타스를 안고 있다.
'뭐야. 저러고 여태 계속 있었던 거야.'
원장은 그 모습에 돌아서서 어찌할 바를 몰라 서성거린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볼까, 아니면 슬쩍 목걸이만 들고 나올까.’
광택을 낸 크링크 구두 안 원장의 엄지발이 구두 바닥을 비빈다.
‘저 둘이 다정하게 붙어 있는데 어떻게 들어가냐고. 정말 화가 나는 군! 꿈은 꿈에 불과한 건가. 오랫동안 반복된 여인의 꿈, 분명 그 여인은 우마리였어. 허무한 꿈속에서 거리를 두며 그녀를 지켜야 했지만 끝내 하나가 되었는데 현실은······’
***
모두가 나간 비밀의 방. 길을 잃고 빙빙 도는 한 마리 독수리.
휘익 휘익
떴다는 착시에 방향을 감각을 잃은 용수는 할 말을 못 해 죽은 아귀(바닷물고기)를 닮았다.
용수는 우마리가 고아에서 사라졌다는 쪽지를 받고 독수리로 변해 고아로 날아갔다. 돌무더기 근처 붉은 타래실을 걸친 노인이 용수의 기운이 가까워지는 것을 느낀다.
“서둘러야겠군.”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바람도 불지 않는 날. 돌무더기 근처 제비꽃이 핀 곳에 붉은 타래실이 걸려 있다.
“우마리 공주와 잠시 할 말이 있으니 모두 자리를 비켜라.”
타스가 작별을 위해 일행들을 물러나게 했다.
“우마리, 아주 잠깐일 것이오. 황제를 뵙고 결혼 승낙을 받을 것이오.”
그의 살갑고 따뜻한 말과 함께 강한 동남풍이 분다.
“어머나!”
“갑자기 바람이···”
센 바람이 우마리의 치맛자락을 높이 잡아끈다. 그녀가 우아하게 치맛자락을 잡으며 발아래 제비꽃을 본다.
“우리 사랑을 기억할 수 있도록 약속의 증표를 받고 싶어요.”
“증표! 그렇군. 이렇게 정신이 없어서야.”
"바라는 것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것을 주겠소."
그가 눈치 빠르게 토끼풀을 꺾어 그사이 제비꽃을 보석처럼 얹는다. 제비꽃 반지를 공주에게 묶어주며 보물을 감싸듯 포갠다.
“하찮게 보면 한없이 작은 것이지만 귀하게 보면 소중한 것이오. 그대를 닮은 향기를 묶은 제비꽃 반지요. 여기 소망의 돌무더기 앞에서 바람의 입김으로 약속하오.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오.”
"영원을 함부로 꺼내서는 안 됩니다. 영원이란 말에 주술이 담겨 있어요."
"알고 있소. 이룰 수 없다면 고통이 되고 여한의 고리를 만든다는 것을."
"타스, 사랑한다는 말이면 충분해요."
"아니, 절대로 충분하지 않소. 난 우마리를 영원히 사랑하며 이 맹세를 지킬 것이오."
우마리는 제비꽃 반지를 낀 손으로 그의 양 볼을 감싼다.
“사랑해요, 타스.”
타스는 사랑스러운 우마리를 한입에 삼켜 버릴 듯 거칠게 키스하며 그녀의 타액도 숨까지 우마리 전부를 삼켜 버릴 듯 마신다.
“당신과 함께라면 무엇도 두렵지 않소. 바라고 원하니 내가 그대를 찾아가 무릎 꿇고 손을 내밀면 당신은 따뜻한 손으로 양 볼을 만지며 사랑한다고 말해주시오.”
“당신이 바란다며 그럴게요.”
점점 강해지는 동남풍이 타스와 우마리 떠밀자 둘은 다음을 기약하며 서둘러 떠난다.
“기다릴게요”
“기다린 줄도 모르게 그대에게 갈 것이오.”
타스는 굴라 왕궁으로 우마리는 삼라트 황궁으로 향한다.
비자야푸르 입구 돌무더기 근처를 맴도는 용수.
“분명, 이 근처에서 우마리의 향기가 느껴지는데 어디 보자. 저기! 우마리와 일행들이 보이는군. 그런데 뭔가 다른 이 싸함은 뭐지. 고아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어.”
: 삼라트, 우마리 공주를 비자야푸르에서 찾았소. 일행들 모두가 무사하니 걱정 마시오. 도착 전에 쪽지를 보낼 것이니, 받거든 동쪽 성곽으로 마중 나오시오.
용수는 공주 옆을 지키며 수행원들의 눈을 일일이 훔쳐본다. 하지만 고아에서 있었던 어떤 일도 읽어 낼 수가 없었다.
“수상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마치 누군가 지워버린 것처럼.”
주황빛으로 물든 하늘. 용수는 물이 맑은 호수 주변 노란 양지꽃을 보고 움직인다.
“여기가 좋겠군.”
그가 작은 성을 만들었고 종일 걸었던 일행들은 저녁을 먹자마자 모두 잠에 곯아떨어졌다.
쿨쿨쿨
깊은 밤. 부엉이가 울고 사부작사부작 걷는 소리와 꽃잎이 흔들리는 진동에 용수가 잠에서 깼다. 호수 주변을 걷던 우마리가 물에 비친 달을 보고 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군. 도대체 고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용수는 공주가 놀라지 않도록 헛기침을 하면 다가간다.
“공주님, 피곤하실 텐데. 잠 못 이루고 계십니까.”
“용수, 나 때문에 깬 건가요?”
그는 공주와 눈을 마주칠 자신이 없다.
“아, 아니요.”
가죽신 뒤꿈치로 용수는 괜히 잡초를 찍는다.
‘공주의 눈을 통해서라도 읽어 봐야겠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이야.’
호수에 비친 공주 눈을 통해 용수는 고아의 일을 읽어 보려 애쓴다. 그런데 잔잔하던 물결이 파동에 의해 밀린다.
‘물결 때문에 제대로 볼 수가 없잖아.'
그가 호수 가까이에서 공주를 자세히 보려 하다 발을 삐끗한다.
어! 엇
불안한 그의 모습을 보고 있던 우마리가 재빨리 용수의 손을 잡았지만 무게 중심을 잃고 호수에 같이 빠진다.
첨벙!
치명적인 눈 맞춤, 용수가 의도치 않았던 공주와 두 번째 밀접한 접촉에 잠시 암전 되는 상황에 우마리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어프, 어프.”
“우마리가 위험해.”
용수는 기를 쓰며 정신 줄을 붙잡고 그녀의 양팔을 낚아채 뭍으로 나온다.
“공주님.”
호수에 쏟아진 많은 별로 하늘과 땅이 어디인지 헷갈리는 밤. 공주의 적나라한 실루엣 그의 눈과 정신이 또 길을 잃는다.
‘이게 뭐야. 제멋대로 억제할 수가 없···’
발작적인 짧은 신음. 그는 큰 입에 주먹을 처넣고 첫 몽정을 한다.
아흐흐·····
처음엔 온몸이 물이었고 다음은 땀이었다가 정액이 아랫도리를 흥건히 적셨다.
컥컥컥.
과하게 진한 밤꽃 냄새에 물을 토하며 공주가 일어난다. 용수는 찌릿하고 떨리는 전율에 마취된 상태였고 공주가 그를 터치한다.
“용수, 괜찮나요?”
“그, 그게.”
용수가 몸을 몹시 떨고 있다.
‘얼치기가 되고 말았어.’
뱉지 못한 용수의 중얼거림 앉은 자세로 용수가 나자빠진다. 그는 잠들고 깨기를 수없이 반복했고 고열이 오르내렸다. 그때마다 소합향을 맡으며 어느새 편안히 잠이 들었다.
“아니 무슨 마법사가 이렇게 약골이람.”
용수는 상사병을 끙끙 앓았고 충혈된 뜨거운 눈을 뜬다.
“우마리 공주······”
“이제 정신이 드십니까. 아직도 열이 나네.”
“여긴 어디인가.”
“어디긴 어디겠어요. 공주님 방이죠.”
“내가 왜 여기에?”
“그러게요! 공주님은 밤새 용수님을 호수 근처에서 간호하셨어요. 다들 곤하게 자니 아무도 깨우지 못하셨나 봐요.”
유모 말에 용수가 목소리에 힘이 실리며 바로 일어난다.
“공주님은 지금 어디에 계신가.”
머리를 문밖으로 돌리던 유모가 하늘을 쳐다본다.
“저 안쪽 방에서 주무세요. 오늘은 출발시간을 늦춰야 할 것 같아요.”
뭔가 못마땅한 유모가 뭘 찾으려다 쌩하니 나간다. 윗옷이 벗겨진 상태로 젖은 옷은 말라서 벽에 걸려 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개망신이야.”
옷을 집으려 할 때 등에서 꽃잎이 떨어진다. 꽃잎을 주워 보통 사람은 볼 수 없는 등을 얼굴을 돌려 본다.
“이게 뭐지.”
유모가 되돌아왔고 물그릇을 집어 들었다가 그의 등을 보고 심각하다.
“아니 이를 어째. 공주님이 아시면 속상하실 텐데.”
“유모, 내가 공주님을 속상하지 않게 해 드릴 테니. 말해 보시오. 이게 무엇인가.”
유모가 눌려 짜부라진 꽃반지를 만지며 툴툴거린다.
“제비꽃 반지요. 타스 왕자님과 공주님이 약속한 정표죠. 장난 같아도 엄연한 증표로 받은 귀한 예물인데 이렇게 망가졌으니 어쩌나.”
“반지, 그리고 약속의 증표.”
용수는 손에 쥔 꽃을 입에 넣고 등에 보랏빛으로 물든 제비꽃을 그린다.
“어떤가, 얼추 비슷한가. 이것은 열흘이 지나면 사라질 것이지만.”
꽃반지를 만드는 그를 보고 유모가 손뼉을 치고 발을 동동 구른다.
“이리 줘보세요. 어쩜, 제비꽃 반지가 맞네요.”
유모가 요란하게 발을 굴렀고 그 소리에 깬 우마리가 들어온다.
“무슨 일이지. 용수가 어찌 된 것인가?”
호들갑스러운 소리에 놀란 공주가 유모에게 묻는다.
“무슨 일이기에 그러···”
우마리가 보랏빛에 끌려 빠른 손길로 제비꽃 반지를 잡는다.
“여기 있었네. 소중한 증표를 잃어버린 줄 알았어.”
용수는 우마리의 눈을 읽었고 주먹을 불끈 쥔다.
‘고아에서 일로 복잡하게 꼬이게 생겼어.’
***
용수가 현실로 돌아와 아귀처럼 쩍 벌어진 입을 닫고 눈을 뜬다.
“당신은 타스 흉내를 내면서까지 나를 속이려 했어요. 왜죠?”
정체를 들킨 용수는 눈만 멀뚱거린다.
‘어떻게 알았지. 완벽했는데.’
그렇게 소원하던 손을 우마리가 잡아주고 있지만 용수가 뿌리치려 한다.
‘왜, 안 되는 거지. 힘을 쓸 수가 없어.’
“손을 놓고.”
손을 뿌리치려 할수록 보이지 않는 끈이 그를 조여 온다.
“제비꽃 향기와 재로 주문을 걸어서 그걸 풀 수 없을 텐데.”
“용수! 아직도 자신을 믿지 못하는군요.”
우마리가 냉정하게 그의 손을 뿌리친다.
“당신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는데.”
용수가 우마리를 향해 예전처럼 겁주려 윽박지른다.
“내 눈을 보라고 우마리 날 봐. 당신은 나를 벗어날 수 없어.”
몸을 배배 꼬고 머리를 치켜든 독사처럼 보이려 한다.
“우마리, 난 한다고 하면 반드시 해낸다고. 알잖아.”
“용수! 가진 재주를 다룰 줄 모르면 그 재주가 당신을 파멸시킬 거예요.”
“난 누구보다 나를 잘 알아.”
"당신은 나를 넘어 더 넓은 시야로······"
우마리가 용수의 머리를 검지로 살짝 만지자 쪼개질 듯 극심한 통증을 호소한다.
“아, 아파! 아프다고.”
“당신이 내 눈과 코, 귀를 막은 것처럼 나도 당신의 눈, 코, 귀를 막았어요.”
용수는 뭔가 생각이 났는지 깜빡거림 없이 눈이 흐리멍덩해진다.
“알고 싶어. 어떻게 진짜 타스를 알아봤지?”
- 작가의말
당신에게 기회를 주고 싶은데...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대가 바라는 기회는 무엇인가요?
일과 행동을 바랄 때 우리가 바라는 것, 기회가 주어진다면 잡으세요. 기회는 주인을 만날 때까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영원의 꼬리에 달란 비늘이 기회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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