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회차) 멜리에 라나
삐그덕
흠칫!
자스링이 신경질적인 눈빛으로 뒤를 돌아본다.
‘발소리가 가볍고 옷깃 스치는 소리가 일정한 것을 보니 노암!’
아무 말도 없이 다가와 앉아 노암이 노래를 듣는다. 알몸의 멜리아와 발가벗겨진 여자아이 인형을 보면서 묻는다.
“멜리에 라나 여, 이 어린양을 어디로 데려가려 하십니까.”
"궁금하지? 그런데 말해 줄 수 없어.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눈과 귀가 있어서.”
노암이 인형들을 가리키며 멜리에에게 간청한다.
“어린양들이 추워 보입니다. 옷을 입혀 주시지요.”
“안돼, 순수한 모습으로 가야 해. 실오라기 하나 걸쳐서는 안 돼. 그건 찌꺼기를 남기고 또 다른 오염이 될 수 있어.”
노암이 고개를 숙이고 나직이 묻는다.
“그럼, 저를 비롯해 옷을 입고 있는 존재는 찌꺼기이며 오염이 되는 것입니까.”
“순수함 자체가 불길해. 어떤 티끌로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불길함을 그대로 가져가 잠재우면 나도 자유로워져.”
자스링이 손으로 바닥을 치며 운다.
“열여덟 살 이십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자네, 멜리에 라나 님께 이 무슨 경솔한 행동인가.”
“에잇!”
그가 일어나 창문을 가린 커튼을 밀치려 할 때 노암이 조용히 다가가 말린다.
“자스링, 진정하고 그냥 원하시는 대로······”
“왜, 빛을 싫어하시는지 사탄이 아니고서야 이상하지 않는가.”
“아프시고, 이유가 있지 않겠나.”
“내가 알고 있는 성인이며 성자이신 멜리에 라나 님이 절대 이런 분이 아니야.”
“자네, 왜 자꾸 흔들리는가.”
자스링이 커튼을 부여잡고 목이 메어 말한다.
“난 흔들리고 있지 않아. 자네와 내가 중요한 뭘 놓친 거야. 오래된 믿음에 대해 의심해봐야 해.”
“수없이 지금도 알아보고 있지만 틀림이 없지 않았나.”
"아니야!"
차갑고 무거운 공기가 흐르는 방안에 멜리에 라나만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인형 놀이를 하고 있다.
"천사야,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데려다줄게. 나를 따라 어서 가자······"
길게 드리운 커튼을 자스링이 밀었고 햇빛이 방 안으로 들어오자 멜리에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다.
아아악!
바티칸 최첨단 치료실은 한국 앨리스 바이오 기술로 만든 병상이다. 깨끗한 무균실로 산소 포화도를 높여 치료와 재활을 돕는다.
“마태오, 멜리에 님은 괜찮으신가.”
“노암! 구강 내 출혈과 피하 출혈이 생겼어. 빠르게 조치는 취했지만 워낙 예민하셔서 스트레스나 여러 부정적인 감정에 노출되지 않도록 해야 하네. 아무래도 서울 앨리스 센터에서 치료를 받으시면 좀 더 효과가 클 텐데.”
“내 탓이네.”
"자스링, 자책하지 마. 자네 탓이 아니야."
"내 탓이 맞아. 일부러 그랬거든. 아파하실 줄 알면서."
자스링이 유리벽 넘어 병상에 누워있는 멜리에가 아닌 벽을 보고 서 있다.
“저런 모습으로 오래 사시면 뭐 하시겠는가? 변태적인 놀이나 하고 인형을 끼고 있는 성자를 본 적이 있는가 말이야.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성인과 성자들은 과장된 설화나 전설일 수 있어. 난 요즘 모든 것을 의심하고 괴리감이 들어.”
마태오는 떨고 있는 자스링의 손을 유심히 보다가 노암을 본다.
“노암도 그렇게 생각하나.”
“잘 모르겠네, 내가 무엇을 알겠는가?”
노암은 누워있는 멜리에를 보다가 눈을 질끈 감는다. 마태오는 들썩 거리는 노암의 어깨를 토닥인다.
“그래, 그래. 환경과 문화적인 영향일지 모르지만 한국에서는 성인들을 바보라고 부르기도 하지. 이상하고 기괴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때는 몰랐던 일이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거든. 노암과 자스링은 이미 많은 시험을 거쳤고 게다가 교황님께서 ‘오래된 믿음’에 대해 자문을 요청할 정도로 특별한 사제가 아닌가."
자스링이 슬그머니 돌아서 유리문 넘어 멜리에를 천천히 훑는다.
“틀렸어, 아직도 난 밑바닥이고 그 무엇도 아니거든.”
그는 고개를 완강히 저으며 빠른 걸음으로 나갔지만 할 말이 있는지 되돌아와 병실 앞에서 마태오와 노암의 말을 엿듣는다.
“자스링!”
“노암, 그만둬. 멜리에 님께 자스링이 얼마나 헌신했는지 모두가 알고 있잖아. 자네 역시 그랬지만 자스링은 유별스러웠잖아.”
뒷 머리를 긁으며 노암이 안절부절못한다.
“마태오, 멜리에 님 상태가 어떤지 솔직히 말해 주게?”
“솔직히 말해 내 소견은, 서울 앨리스에서 치료를 받으면 자연사도 가능할 거야."
"자연사! 정말 가능한가?"
"알잖아, 리베라타 그룹과 권텀이 앨리스 영생 치료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임상에 들어갔는데 왕족이나 사회 고위 층이 임상에 참여한다고 하더군."
눈물 자국이 마르지 않은 노암의 눈빛이 반짝거린다.
"한국에 있을 때, 리타그룹 회장님 초대로 내외분을 뵌 적이 있었는데 아주 좋은······ 도움을 요청해 봐야겠어."
"서둘러야 할 거야. 여기에서 계속 지체하는 것은 위험해."
"그런데 성하께서는 무슨 이유인지 서른세 살을 고집하시네."
"생각 좀 하게! 자네는 언제가 중요한 때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누구보다 멜리에님을 잘 알고 있으니 알 거 아냐."
"그게!"
"멜리에 님을 살리고 싶다면 고서에 남겨진 사건을 중심으로······ 무슨 말인지 알지."
"자스링과 얘기해 봐야겠어."
"혈액 응고 단백질이 1% 이하 신체 생성인 중증인 것은 알고 있지. 최근에는 뇌 내부 출혈도 있었어. 게다가 선천적인 다른 병까지 계셔서 늦어도 서른 살을 넘기기 전에 앨리스에 가야 할 거야."
마태오와 노암은 말없이 멜리에 라나를 본다.
“그렇군.”
“그리고 되도록 멜리에 님께서 옷을 벗지 않도록 해주게. 타박상 위험이 커.”
초점 없이 멜리에를 보는 노암이 대답한다.
“그렇군.”
“노암, 내 말 듣고 있는 건가.”
“그렇군.”
“도대체 두 사람! 요즘 왜 이러나. 아니 뭘 보았기에 계속 얼빠진 사람들처럼 꼭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들 같아.”
***
멜리에 라나는 다른 때와 달리 의젓했고, 하늘 위라 그런지 편하게 잠이 들었다.
'저런 모습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다른 분 같아. 거기에 잠자리가 달라지면 까탈스러웠는데······ '
생각이 많은 자스링은 계속 뒤척였고, 마태오가 준 응급상자를 만지며 눈을 감는다.
'계속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았으면 좋겠어. 이렇게 마음 편한 날이 얼마 만이야.'
서울에 먼저 도착한 노암은, 멜레에 라나가 머물 곳과 앨리스 센터와 리타 그룹 이승우 회장과 만났다. 고요한 명동 성당에 노암은 묵주를 잡고 차가운 바닥에 엎드려 기도 중이다.
"믿습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기도를 마친 노암이 탈진한 상태로 나무 의자에 간신히 앉아 공처럼 몸을 말고 앉았다.
사악 사악
붉은 카디건을 입은 누추한 노파가 텅 빈 성당을 헤집고 다니며 중얼거린다.
“쿠쿠니가 분명 여기라고 했는데.”
구시렁거리는 소리와 퀴퀴한 냄새에 노암이 헛구역을 한다. 그가 성당 안을 둘러보다 노파를 보고 일어났지만 현기증으로 잠시 서 있다가 움직인다.
‘뭘 잃어버리셨나.’
“무엇을 찾으십니까?”
노파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그가 노파가 서 있던 자리를 맴돈다.
“어디 가셨지.”
노암이 그 자리에서 연신 기침을 해댄다. 팔로 코와 입을 가리며 자리에서 벗어나자 그의 잔기침이 멈춘다.
“사무장에게 성당 환기를 부탁해야겠군.”
때마침 사무장이 노암 신부를 보고 인사한다.
“신부님. 입구 공사는 끝났고 안쪽 공사를 해야 하는데 기도를 마치셨나요.”
“미안합니다. 나 때문에 지체되었군요.”
“아닙니다. 마침 인부들 새참 시간이었고 이제 시작하려고요.”
“그렇군요. 시작하세요. 아, 참. 방금 웬 노인분이 여기 계셨는데 뭘 잃어버리셨는지 찾고 계셔서.”
사무장이 노암의 안색을 살핀다.
“공사 중이라 신부님 빼고 아무도 이 안에 들여보낸 사람이 없는데요.”
“여자 노인분 목소리가···”
“저 아래 노인 대학 소속 몇 분이 계셨는데 소리가 들렸나 봅니다.”
“많이 피곤해 보이세요. 오시자마자 시차 적응도 못하셨지요. 계속 숙소와 여러 가지 일들에 틈나면 기도 하셨잖아요.”
노암이 이마를 만지며 한 숨을 쉰다.
‘너무 피곤해서 환영을 본 것인가?’
“사무장 말처럼 멜리에 라나님 오시기 전에 시차 적응을 끝내야겠네요. 그럼 일들 시작하세요.”
그가 어지러움을 참으려 의자를 짚어가며 걷는다.
‘아무리 피곤해도 이러지 않았는데······’
월요일 6시 30분, 오전 미사가 끝나고 조용해지자 멜레에 라나가 지하 성당 구석진 자리에 앉아 엎드린다.
또르르
아무도 없다고 여긴 곳에서 볼펜이 떨어져 구르는 소리에 멜리에가 일어나 걷는다.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울고 있는 여자가 그에게 손을 내민다.
“죄송해요. 볼펜 좀 주워주세요.”
멜리에는 말없이 볼펜을 주워 여자에게 보여준다.
“일어나 의자에 앉아요.”
“볼펜 주세요.”
“의자에 앉으면 주겠소.”
“내 거야, 내놔.”
여자가 돌변하더니 아이처럼 칭얼거리며 조른다.
“도둑놈!”
“도둑이라, 뭐 틀린 말은 아니네. 내가 너의 볼펜을 가졌고 넌 빈손이니까. 공손하게 달라고 하면 줄게.”
“공손하게?”
“내 손에 입을 맞춰. 그러면 주지.”
여자는 울음을 그치고 멜리에가 내민 손을 잡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멜리에는 발작을 일으키며 피를 토했고 여자를 보면서 멜리에가 웃는다.
“차, 찾았다! 너였구나.”
- 작가의말
“내 탓이야.”
당신 탓으로 돌리기 전에 먼저 감정을 들여다보세요. 자기감정에만 충실해 자신을 질책하는 것은 자학이며 폭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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