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회차) 속이지 말자
‘혜리! 왜 내 침대에?’
온몸이 경직된 상태로 우마리는 눈 만 크게 뜬 채 천천히 방을 둘러본다. 바닥에는 드레스 룸에서 꺼낸 옷들이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져 있다. 화장대에는 색조 화장품들과 브러시들이 널브러져 엉망진창으로.
‘그럼, 이 난장판을 만든 장본인이 혜리란 말이야. 왜! 내 방에서 이런 행동을 도대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머리가 백지처럼 하얗게 변한 가운데 혜리가 부스럭거리며 몸을 돌린다.
“어···엇? 우, 마리!”
혜리의 말에 알람 소리에 맞춰 일어나는 척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알몸으로 일어난다.
‘자, 우마리. 진정하고 아무렇지 않게 가운을 걸치고 소파에 앉는 거야. 아직은 화를 내거나 노여워해서는 안 돼. 기다려.’
놀란 혜리가 태연한 우마리를 본다.
'같은 여자지만 아침에 보는 우마리는 방금 꽃봉오리가 터진 꽃보다 아름다워.'
미니 냉장고에서 미네랄워터를 꺼낸 우마리가 소파에 앉아 뚜껑을 따며 혜리에게 들어 보인다.
“마실래?"
"아··· 아니."
소파에 앉는 우마리.
"나, 할 말이 있어. 넌 나보다 할 말이 아주 많을 것 같고···”
혜리는 허물처럼 바닥에 벗어 놓은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는다. 그 모습을 우마리가 물을 마시며 지켜보고.
"저기, 우마리 그게."
주저하는 몸짓으로 가만히 서있는 혜리.
“앉아, 왜 그러고 있어.”
옷을 입고 소파 옆에 선 혜리가 우마리 눈치를 본다.
“미··· 안 해!”
“목마르지 않아, 물 좀 마셔.”
“고맙지만 나중에 마실게. 미안한데 정말 오해하지 마.”
“임신했는데 배가 생각보다 나오지 않았네. 반대로 많이 야윈 것 같아?”
배를 만지는 혜리.
“엊그제 유산했어.”
유산이라는 말에 우마리가 물병을 떨어뜨릴 뻔.
“어쩌다! 그래서 몸이 그렇게··· 그것보다 병원에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속일 수 없이 걱정 가득한 우마리 말에 혜리는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민다.
“정말 궁금해. 넌 도대체 악마니 천사니?”
혜리 질문에 우마리는 어처구니가 없지만 정신을 바짝 차리며.
“둘 다야.”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이스타 아이를 유산했다고 하면 좋아할 줄 알았는데 상대를 엿 먹이듯 선한 얼굴이 정말 꼴 보기 싫다. 걱정해주는 표정이 완전 리얼이야."
"그치, 내가 화를 냈어야 정상인데···"
"넌 어릴 적부터 그랬어. 또래들은 너 때문에 부모한테 혼났지. 공공의 적! 저기 우마리를 봐라, 우마리 반에 반만 닮아라. 난 가난으로 고아원에 있었지만 나도 매체를 통해 보는 네가 재수 없었는데 다른 얘들은 오죽했을까?”
물병을 내려놓는 우마리.
“그래, 하도 들어서 무디네. 괜히 말 돌리지 말지. 걱정돼서 유산도 아이를 낳은 것과 같다고 들었는데 괜찮니? 어쩌다 아기를 잃었어. 이스타가 전문 여성 요원 둘을 배치했다고 들었는데.”
혜리가 손을 떨며 옷을 잡고 쏘아본다.
“고모 덕에 리타 가문 주변 그늘진 곳에서 너를 지켜봤어. 그래서 내가 너를 잘 알지. 넌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하지 마.”
순진하게 턱을 괴는 우마리.
“아무것도 몰라. 그냥 내 마음 있는 그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있을 뿐이야. 단지 차분하려고 무척 애를 쓰고 있어. 알몸으로 일어나 가운 입을 때도 얼마나 다리가 떨렸는지 몰라 하지만 의연하려고 노력했어. 그냥 다 그렇게 한 거야.”
부정하 듯 고개를 저으며 혜리 입꼬리가 떨린다.
“보통 여자라면 아니 나였어도 이렇게 담담할 수 없어.”
“그건 이미 결정을 내렸어. 이스타에게 이혼하자고··· 많이 생각하고 내릴 결정이야. 짝사랑하는 거 재미없더라. 둘 사이에 내가 껴서 방해하고 싶지도 않고.”
입이 쩍 벌어진 혜리가 얼굴을 내민다.
“그 말 진심이야.”
“여전히 그를 많이 좋아하고 너무 사랑해. 내가 살기 위해 놓아주는 거야. 빵보다 내겐 물이 더 필요해. 자유에 대한 갈증을 견딜 수가 없어. 진심이니까, 몸 잘 추스르고.”
“생각할수록 너는 우아하게 무섭다. 어쩜 이렇게 냉정한 할 수가 있지. 웬만한 여자들은 울고불고 난리를 치고 멘털 정도는 나가는 게 보통이야.”
우마리가 물을 마시며 팔짱을 낀다.
'그래 나도 그랬어. 유난스럽게 티를 내지 않았을 뿐, 지금도 너무 힘들어.'
혜리가 신경질 적으로 우마리의 팔짱을 풀어버린다.
“난, 엉킨 실타래를 풀어야 하는 숙제처럼 조급했어. 그런데 너는 아무렇지 않은 듯 여유로운 모습에 죽도록 얄미웠어. 그래서 너를 더 자극하고 과장되게 행동하면서 못되게 굴었는데··· 내가 지쳐버렸지. 넌 아예 영혼이 없는 사람 같아서 상대할 수 없었다고.”
우마리가 천천히 일어나 창가로 향한다.
“역시 혜리네. 맞아 영혼이 코마 상태였어. 그와 난 오랫동안 서로를 찾았고 알아봤어. 본능이 나를 지배했고 충실했어. 둘은 차에 올라탔고 욕정에 휩싸인 순간 그가 차갑게 돌변했어. 찰나였어, 멘털이 아니라 내 영혼이 무너지더라.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 나 자신을 잃어버렸고 절망적이라 한동안 나는 없었어.”
창가에 서서 등을 보이고 있는 우마리를 혜리가 보며.
‘한 번도 본 적 없는 우마리의 슬픈 모습, 힘들었구나. 사실 모두가 걱정했지만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아서 다를 네가 힘들어하는지 몰랐어. 마음의 굳은살이···’
“그렇게 아프면서 내색도 않고 너만 힘들어. 나도 그래 봐서 아는데 마음의 병만 깊어지더라. 너도 그만해! 이제 더는 그러지 않아도 되니까.”
돌아보지 않고 고개만 젓는 우마리.
“내가 살기 위해 그를 놓아주는 거야. 이스타와 잘 지내, 내가 너무 질투가 나서 결혼이라는 것을 다시 꿈꿀 수 있도록 말이야.”
“미안하지만 그건 정말 곤란하겠는데, 혹시 그렇게 된다면 그건 호러물이야.”
우마리가 통창 조절 버튼을 눌러 유리 색상을 없애고 투명하게 만든다.
“혜리야, 나 진심이야. 너도 솔직했으면 해.”
“그래 그럴게. 모든 쇼는 끝났어! 잘 들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따로 있거든. 유산했지만 그 사람의 아기였고, 오늘 리타 가문을 나가 그의 집으로 들어갈 거야.”
몸을 돌리는 우마리의 펄럭거리는 가운 소리가 채찍 소리를 낸다.
“너 끝까지.”
목이 붉어질 정도로 우마리가 목소리를 눌러 불안정하게 떨리고.
“날 구석으로 몰면서까지 장난치지 마. 이런 말장난에 누군가는 마음에 피멍이 든다는 생각 안 드니. 그만··· 해!”
걱정스러운 얼굴로 혜리가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주무르며.
“믿어줘. 말장난 아니야. 그리고 다시는 널 질투하지 않고 아프게 하지도 않을 거야.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떤 설명도 하지 마. 그냥 여기까지만 해.”
우마리가 손을 놓으려 하는데 혜리는 손을 놓아주지 않는다.
“이스타는 너를 한순간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을 정도로 너를 많이 사랑해. 이건 내 목숨을 걸고 맹세할 수 있어. 그리고 진실은 이스타와 난 아무 관계도 아니라는 거야.”
손을 뿌리치고 일어나는 우마리.
“제발, 제발 그만! 이제 나가 줘야겠어. 내가 이혼해주겠다는데, 얼마나 고통스러운데 왜 이제야 돌변하는 건데 왜!”
혜리가 두 손으로 우마리 손을 부여잡는다.
“이게 사실이고 진실이니까. 듣고 싶지 않아도 들어 우마리,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따로 있어. 유산한 아기는 그와 관계를 통해 생긴 아이라고."
혜리를 밀어내며 관자놀이를 누르는 우마리.
“뭐가 뭔지 모르겠어. 어지러워.”
“자! 숨을 천천히 들이쉬고 내쉬면서 앉아 봐.”
우마리가 앉아마자 등을 쓸어주는 혜리가 우마리 어깨를 잡아준다.
“전임 교수님 부탁으로 통역 부탁이 들어왔어. 중요 내용은 서울 도착 전에 미리 받은 상태였지. 그런데 시차 적응이 힘들었는지 잠이 오지 않는다고 전화를 여러 번 하더라고 그러려니 했고. 근데 고집이 얼마나 세던지··· 세상에, 오후에 서울에 도착해서 다음 날 일정을 빡빡하게 잡는 그런 워커홀릭이 어디 있니. 처음 봤다니까.”
우마리는 소파에 머리를 기대고 미동도 없다.
“전경련 20명 회장단을 만나고 중요한 계약 건이 있었나 봐. 암튼 미리 입을 맞추는 작업으로 워밍업 하자 조르더라고 그래서 그가 머무는 칵테일 바에서 이야기를 나눴고 잠자리를 가졌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우마리.
“서로 동의한 거야. 혹시 일방적으로 폭행당한···”
“절대 아니야.”
“너 누구보다 남자에 대해 의심도 많고 유교 걸이잖아.”
혜리가 달아오른 얼굴을 만진다.
“그게 말이야. 그런 느낌이 처음이라 벙벙하긴 했는데, 술김이라고 하기엔 첫 감정부터 남달랐어. 신기한 건 그냥 좋았다니까.”
납득할 수 있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우마리가 웃는다.
“알지, 조절할 수 없이 온몸의 감각들이 다 깨어나서···”
“맞아, 그렇게 그와 하룻밤을 보내고 끝났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다음은 더 강력한 감정이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거야. 떨어질 수 없이 계속 붙어 있게 되더라고.”
상기된 혜리의 얼굴을 가만히 살피는 우마리.
“너! 정말이구나."
"그렇다니까."
"혜리가 그 정도로 끌렸다면 그 사람은 홀딱 빠졌다는 건데.”
두 발을 까닥거리며 장난치는 혜리.
“뭐, 둘 다 제정신이 아니었어. 다만 어느 날 하루만 빼고··· 오랜 미련을 소멸시키는 날이라고 했어. 그리고 서로에게 미친 듯이 몰입했고 아이가 생겼고.”
빈 배를 어루만지는 혜리가 우마리에게 기대자.
“그는 알아?”
“그 사람한테 임신했다고 말하지 못했어.”
“왜, 말했으면 정말 좋아했을 것 같은데.”
“그는 미국에 들어가야 한다면서 서둘러 떠났어.”
방석이 삐져나올 정도로 엉덩이를 돌리는 우마리가.
“그냥 미국으로 갔다고 나쁜 남자네.”
“그가 떠나고 난 영혼이 가출한 상태로 멍해 버렸어. 사실 임신을 볼모로 그를 붙잡고 싶지 않았지만 마음 한편으론 아니었나 봐. 미움보다 그가 너무 보고 싶었어.”
둘은 서로의 얼굴을 보다가 팔을 벌려 안아준다.
“우마리, 그런데 임신하고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어.”
팔을 풀며 우마리가
“무슨 일?”
- 작가의말
: 여전히 그를 많이 좋아하고 너무 사랑해.
내가 살기 위해 놓아주는 거야.
빵보다 내겐 물이 더 필요해.
자유에 대한 갈증을 견딜 수가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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