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회차) 그들에게 간절한 마법들
“저 멋진 왕자님은 누구요.”
“가만, 재상 아들이 아닌가?”
재상이 삼라트 옆에 앉아 권과 우마리를 아무 표정 없이 바라보고 있다.
“공작 황조 2인 자에 실세인 재상의 아들이면 여느 왕국의 왕자보다 훨씬 낮지 않은가.”
“말이라고.”
“삼라트에게 황금 동아줄을 공주가 잡아주는군.”
연회장에 도착한 우마리가 숨을 몰아쉬며 권의 손을 놓는다.
“난 가봐야겠어요.”
“가다니.”
“시간이 이렇게 지난 줄도 모르고 혼나게 생겼어요.”
“누구한테 혼나지. 내게 말해봐요. 도와주겠소.”
“고맙지만 내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요.”
“나 때문에 뛰어다니게 해서 미안하군. 이름이라도?”
그녀가 또 달린다.
“정말, 사랑스럽군.”
황후 모리야가 우마리의 흐트러진 매무새와 보내준 드레스를 입지 않은 모습에 시녀들을 부른다.
“다들, 여태······”
눈치 빠른 유모, 멀리서 황후를 보고 심상치 않음은 읽고는 서둘러 우마리 공주에게 간다.
“헉헉, 공주님, 죄송해요. 제가 세심하게 신경 써야 했는데.”
“아니야, 내가 잘못한 거예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다급한 마음에 시녀들은 뭐부터 해야 할지 몰라 헤매자 유모가 나선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에요.”
“그럼, 뭐가?”
“황후님이요. 지금 이리로 오고 계실 거예요.”
유모가 빠른 손놀림으로 움직인다.
“서둘러, 자! 다들 내가 시키는 대로 해요.”
시녀들은 유모의 지시에 따라 차례차례 빠른 속도로 타마라 공주가 마음에 들지 않아 벗어 놓은 연보라색 드레스를 입히고 진주 목걸이를 건다.
“공주님, 됐어요.”
성난 황후가 막 들어왔다.
“우마리! 드레스를 보냈는데 어찌 아직도 입지 않은···!”
공주가 헤벌쭉 웃으며 빙글 돈다. 화려한 드레스 자락이 나풀거렸고 진주 목걸이에서 파도 소리가 들린다.
“믿을 수가 없구나.”
황후는 생각했던 화려함을 넘어 더 화사한 우마리의 자태를 보고 질투가 난다.
“어쩜, 하늘에서 내려온······ 그럼, 나도.”
말하다 말고 황후가 급히 나간다. 그러나 한숨을 돌리자마자 이어달리기를 하듯 황제가 들어왔다.
“넌 도대체! 생일날, 손님들 앞에서.”
삐쭉 튀어나온 황제의 코털이 성난 콧바람에 바늘처럼 세워진다.
“죄송해요. 아버지께서 받고 싶은 생일 선물을 말하라 하셨잖아요. 이제야 원하는 게 생겼어요.”
“그래?”
황제는 우마리 공주의 입에서 욕망을 듣고 기뻐한다.
“네 입에서 뭔가를 갖고 싶다는 말을 처음 듣는구나.”
황제는 온화한 얼굴로 접견실로 공주를 데려간다. 가진 것이 많은 황제는 주둥이가 너무 작은 기괴한 물병 같다. 혹은 아귀(餓鬼:탐하고 질투하는 마음만 가진 굶주린 귀신)를 닮았다.
“그래, 타마라 공주는 예쁘고 진귀한 것을 늘 달라 행복하게 떼를 쓰지. 이제야 너도 원하는 게 있다니 기쁘구나.”
“기쁘세요.”
“그럼, 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으냐.”
“저는 사람들과 나누······”
“궁금하니 어서 말해 봐라.”
우마리는 잠깐 뜸을 들이다 황제께 무릎을 꿇는다.
“부모님 사랑으로 열여덟 살이 되었어요. 타마라 언니와 저를 똑같이 대해주셨고요.”
“아무렴.”
“이제부턴 함께 차린 생일 상이 아니라 따로따로 차려주세요.”
황제는 의자에 앉아 딸의 야무진 말에 흥미가 생긴다.
“왜, 갑자기 따로따로 지?”
“그것은.”
“무엇 때문에 생일 상을 따로 차려 달라는 것인지 묻는 것이야.”
삼라트는 공주의 맑은 눈에 비친 자신을 본다. 정복을 향한 넓은 대륙과 긴 눈썹이 배의 돛처럼 깜빡거릴 때마다 야망이 커진다.
“쌍둥이라고 언제까지 모든 것을 함께 해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옳지. 쌍둥이지만 다른 삶을 살 수 있지.”
그때, 황후의 드레스를 잡고 시녀 둘이 황후를 따라 접견실에 들어온다.
“삼라트여~”
자랑하듯 두 팔을 벌리며 돌더니 걸어와 통통한 손을 우마리에게 내민다. 손가락마다 낀 황후의 보석 반지에 우마리의 아름다움이 비친다.
“얘야, 삼라트께서 그렇게 해주실 거란다. 이제 곧 잔치가 시작됩니다.”
“갑시다. 방금 결정을 내렸소.”
“무엇을 요?”
황제가 황후에게 묘한 눈짓을 보낸다.
“우마리 공주도 화려함을 선보여야지. 어서 가서 자리에 앉거라.”
공주는 황후와 황제에게 다가가 볼에 입을 맞춘다.
“생일 상을 받은 주인공은 음식의 주인이니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죠.”
황제는 우마리의 욕심이 커지는 것이 매우 흐뭇하다.
“의심하지 마라. 넌 공주니까 당연하지.”
우마리를 보내고 삼라트는 모리야에게 귓속말을 한다.
“정략결혼이 저 애 때문에 내 위주로 성사될 것 같소.”
“이젠 정략결혼이 아니에요. 재상한테 굽힐 일도 없고 그와 거래는 그의 아들 때문에 더 돈독해질 거라고요.”
삼라트와 모리야는 손뼉을 치며 좋아한다.
“첨성관이 양기가 충만하다더니 그 말이 맞았소.”
쌍둥이 공주의 생일 상은 어떤 신도 받아 보지 못한 진귀한 음식들로 차려졌다.
“귀빈들은 먹고 마시며 생일잔치를 즐기시오.”
두 공주의 생일을 통해 삼라트는 그만의 방식으로 위엄을 드러내고 싶었다.
“내가 별의별 잔칫상을 보았지만 이건 정말 눈으로 봐도 믿을 수가 없네.”
“공작 왕조가 부유하다 하지만 이 정도 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니까.”
“자네만 알아둬. 잔치를 위해 황금 열 수레가 들어갔다더군.”
“굉장하구먼, 하늘도 도와서 연년이 계속 풍년이지 않나.”
“되는 집안은 된다더니 공작 왕조를 두고 하는 말이야.”
“부럽네, 부럽다 못해 배가 아파.”
타마라와 우마리 공주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화려한 치장으로 귀빈들의 입이 떡 벌어진다.
“눈이 부시다고 하잖아 이럴 때 쓰는 말이야.”
"여신은 분명 저런 모습일 거야."
“황제는 얼마나 행복할까, 저리 아름다운 공주 둘을 가졌으니.”
그들의 첫 칭송은 순수했으나 눈빛들이 음흉하게 두 공주를 더듬는다. 타마라는 새침한 얼굴로 머리카락을 귀 뒤로 자꾸만 쓸어 넘기며 눈이 초조하다. 눈앞에 조금 전 우마리와 궁을 뛰어다닌 잘생긴 권이 있다. 타마라가 자꾸만 힐끗거리며 권을 쳐다보았고, 권은 우마리 공주에게 시선을 떼지 못한다.
“우마리 공주!”
***
우마리가 손으로 민 파우치 지퍼가 다 내려갔다. 몽롱한 장면들이 희미해지며
파우치 속에서 작은 물건을 꺼낸다.
“이것은?”
모차르트의 가곡(제비꽃, Das Veilchen KV 476)이 귓가에 흐른다.
“어릴 적 내 머리띠에 달렸던 제비꽃인데.”
“잊지 않았네.”
권이 우마리의 반가움을 알아챈다.
“··· 그럼. 그곳에서 처음 마주쳤던 오빠가 권?”
그녀가 반가움에 일어날 때 티파니 더블 롱 링크 귀걸이가 찰랑거린다.
“전혀 몰랐어요.“
"휴우! 다행이군. 당신이 기억하고 있을 줄 알았어.”
미니 테이블에 그가 내민 추억을 내려놓고 우마리가 권의 손을 잡는다.
“왜 미국에 있을 때 말하지 않았어요.”
“그건······”
그녀의 사랑스러운 미소에 권이 부끄러워 한 손으로 뒤 목을 긁는다.
“왜?”
“그냥 당신이랑 있으면 좋았어. 내가 누구인지 뭐가 중요해.”
“그런데 왜 이제야.”
“너무 중요해졌어. 당신을 놓치고 싶지 않은 간절함에 추억까지 들췄지.”
권의 울대가 복사나무 목에서 오르락내리락 요요 놀이를 한다.
“잘했어요. 그 덕분에 몰랐던 추억들을 알 수 있게 되었잖아요.”
우마리가 권을 안아주자. 그가 그녀의 등을 강하게 끌어안는다.
“당신도 나처럼 내가 간절했으면 해.”
권과 우마리의 포옹을 보고 용수가 재희에게 항의한다.
“증표를 확인하면 되는 것을 스킨십······”
불만이 쌓였던 타스도 이의 제기를 한다.
“재희, 이건 너무 편파적이지 않소. 뭐 하자는 거지. 나는 우마리 가까이도 못가게 하면서 권에게는 관대하다니.”
재희는 타스의 말을 무시하며 권의 등을 토닥이며 자리로 안내한다.
“앉아요.”
그리고 타스의 어깨를 재희가 엄지로 내리누르며 속삭인다.
"당신을 평정심을 가졌잖아요. 왜 그걸 쓰지 않죠."
재희의 아리송한 말과 타스의 부자연스러움이 섞여 이상하게 자연스러워진다.
“알아주니 고맙지만···”
조용해진 분위기에 재희가 용수를 지목한다.
“증표를 가지고 오세요.”
용수는 낡은 박카스 상자를 내밀었고 재희가 아닌 우마리에게 건넨다.
"열어봐요."
엉겁결에 용수가 건넨 상자를 받아 들고 우마리가 긴장한다.
‘이 안에는 어떤 추억이 있을까?’
“그 그래요.”
“우마리, 증표라고 하기엔 우습겠지만 난 그걸 보면 당신이 떠올라서 준비한 거야.”
용수가 긴장했는지 발을 살짝 벌려 그녀 앞에 나무처럼 선다.
“막상 앞에 서니 떨리네.”
평범한 박카스 상자 속에 담긴 증표를 궁금해하며 열었다. 상자에는 하늘과 바다에 뭉게구름이 걸친 여러 장의 사진들이다.
“어쩜, 신기해요. 뭉게구름을 보면서 사람들을 생각하곤 하는데 어떻게 알았어요.”
“나한테 뭉게구름 놀이하자고 했잖아.”
“맞네요. 세심하게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니.”
그녀가 사진들을 만지작거리다 어슴푸레 오래된 추억이 떠오른다.
***
후덥지근한 바람과 뭉게구름 차라스(charas,인도 대마)의 초록빛 물결 위에 뿔매가 빙빙 돌고 있다.
“삼라트가 편지를 보냈군.”
용수가 담비 가죽을 흔들어 내려놓자 매가 창가에 앉는다.
:우마리 공주가 고아에서 사라졌소.
허걱!
용수는 놀람과 걱정에 한순간 바닥으로 쓰러질 듯 의자에 잠시 앉는다.
“왜. 왜? 공주 혼자서 왜 고아에······”
그가 구슬을 만지며 반응을 살폈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곳은 나와 함께 가기로 약속했는데. 혹시 그곳에서 사고라도 났다면 큰일인데 제발 우마리가 무사해야 할 텐데.”
쪽지를 매의 다리에 묶고 서둘러 황제에게 날려 보낸다.
“당장 떠나야겠어!”
- 작가의말
첫사랑의 향기, 정신적 금단의 열매 첫사랑의 냄새 맡아보기.
:기억은 간직한 과거 경험을 되살리는 정신 활동에 가깝고, 추억은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는 것에 가깝지요. 기억과 추억은 에너지를 쓰는 양도 다르지만 무엇보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98%가 다르다는 것이죠.
비가 오거나 눈 내리는 날, 첫사랑을 떠올려 향기를 맡아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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