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회차) 넌 나를 미치게 만들어
범수가 문 앞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호기심에 긴장한다.
똑똑똑
“나가라··· 또?”
모습이 헝클어진 재희와 말끔한 범수의 시선이 부딪치며 어색하게 서로를 바라본다.
“재희 씨, 들어가도 될까요.”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다.
“드··· 들어오세요.”
재희는 그를 보면서 낯설지 않은 친근감을 느낀다.
“누구시죠?”
“저, 그날··· 교수님 뵙고 잠시 도서관에 잠시 들렀다가 재희 씨를 만났죠.”
“쓰러진 날! 병원으로 데려 오신 분이세요."
범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저를 지옥에서 끌고 나온 은인이세요."
“은인이라뇨. 때마침 그 장소에 있었고 도운 것뿐인데.”
“고맙습니다. 저는 생명공학과 1학년 유 재희입니다.”
“생명공학··· 한 범수입니다.”
생명공학이라는 말에 재희가 정신이 번뜩 든다.
“혹시, 2학기 시작되었나요?”
“방학 기간 중이라···”
재희가 급하게 주변을 둘러본다.
“가만, 거울을 좀 봐야겠어요.”
뜬금없이 거울을 찾자 범수가 벽에 걸린 둥근 거울을 떼어 그녀를 비춘다.
“재희 씨, 여길 봐요.”
그녀가 얼굴을 만지며 머리를 매만진다.
“얼마 만에 보는 거울인지 몰라요.”
퀭한 얼굴과 다크 서클을 보고 그녀가 푸석한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는다.
“이렇게 앉아서 화만 내고 있다고 변하는 건 없는데 아무래도 그만둬야겠어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름답지요.”
“고향이 어디세요.”
“부산입니다.”
그녀가 거울을 보다가 얼굴을 기이하게 일그러트린다.
“인간은 쳇바퀴를 이탈해야 시야가 열려요. 신은 늘 일방적으로 믿음을 강요하고 섬김을 요구하죠. 하지만 마사는 일방적이지 않고 거래를 해요.”
재희가 침대에서 내려온다.
“잘생긴 오빠, 잠시만요.”
세면장에 들어갔다 나온 재희가 소파에 앉아 있는 범수 앞에 선다.
“오빠? 아니 범수 씨는 지금부터 나와 거래를 할 거예요.”
범수는 갑자기 거래를 운운하는 그녀의 모습에 벙 찐다.
“네? 무슨 거래를···”
“먼저 내 감사 키스를 받으세요.”
재희가 범수에게 입을 맞추자 범수가 술에 취한 사람처럼 흐느적거린다.
“저기, 나! 첫 키스인데···”
그녀의 관능적인 터치는 자극적이고 치명적이다. 범수가 붉게 물드는 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일어났어! 말도 안 돼. 난 의학적으로 남자의 물건이 설 수 없다는 성불구자로 진단받았는데.’
“오늘이 우리 첫날이에요. 이제부터 나를 믿고 섬겨요.”
범수가 그 말에 몸이 반응하며 재희 허리를 강하게 잡는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절대 질리지 않는 즐거움을 줄 거니까요.”
“··· 좋아! 너를 믿고 섬길게.”
재희는 다음 해 MIT 생명공학부에 합격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범수도 MIT 대학원 진학이 결정된다.
“결혼하고 미국에 들어가는 게 좋지 않겠니.”
어머니 마부희는 둘째 아들 범수의 180도 달라진 변화에 어린 재희가 예쁘고 기특하기만 하다.
“그러려고요. 조만간 재희 부모님 찾아뵙고 인사드릴게요.”
“진짜 잘 생각했다. 하늘에서 네 아버지가 보고 얼마나 좋아하시겠니.”
흐트러진 침대에서 벌거벗은 채 재희가 일어나 베란다 커튼으로 몸을 가리고 밖을 본다.
“오빠, 좋아?”
“미치도록! 하루하루가 행복함에 두근거려. 재희야, 우리 결혼하자.”
“오빠만 변하지 않으면 항상 그대로 일 텐데 뭘 그렇게 서둘러. 그보다 오빠 목 가운데 큰 사마귀 점이 있더라. 귀여워서 꼭 장난감 태엽 같아.”
“한성 가문 내력이야.”
“만져 봐도 돼.”
그녀가 요염하게 걸어와 사마귀를 만진다.
“느낌이 생각보다 좋네.”
“좋으면 이것도 가져.”
재희가 이불을 들추며 가리킨다.
“난 이게 더 좋은데”
범수가 웃으며 이불에서 나와 가운을 걸치고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연다.
“당연히 네 거야. 다 가져.”
“정말 다 줄 거야.”
“네가 원하다면 다 줄게. 목숨도···”
“이래서 마사가 뮤라뉴를 제일 좋아하는 거야.”
“어! 내 세례명 알고 있었어.”
“응! 미국에 가면 오빠는 뮤라뉴 난 마사.”
“마사?”
“이제부터 오빠는 무조건 나를 마사라고 불러.”
“그래, 내 사랑 마사!”
뮤라뉴와 마사는 학교 근처에 집을 얻어 동거를 시작한다. 결혼을 염두해 범수 집에서는 불편함이 없도록 아낌없이 지원해 준 집이다.
“재희야, 어머니가 편찮으시다고 연락이 왔어. 여름 방학에 논문도 잘 진행되고 있으니 한국에 함께 나가자.”
몸매가 훤히 비치는 검정 슬립을 입은 재희가 긴 머리를 빗는다.
“난, 못가. 이번 포럼 주최한 핵심 멤버 중 한 사람이 나잖아. 중요한 스펙이라 빠질 수 없어. 오빠는 방학이면 늘 서울에 가려고 하더라. 예쁜 애인이라도 숨겨 놓은 거야.”
“내가 너 말고 누가 있어."
"······"
그녀는 말없이 그를 보며 서있다.
"그럼, 빨리 다녀올 테니까 약속해. 거실 홈캠 끄지 않는다고.”
재희가 그의 무릎 위에 앉는다.
“왜?”
범수가 그녀를 훑는다.
“널 혼자 두는 게 불안해.”
“왜 그래.”
“불안하니까, 종일 너만 생각하게 될 것 같아서 그래.”
“왜, 그러냐고?”
“넌 나를 미치게 하잖아.”
“그래서!”
“마사, 네가 바··· 바람날까 봐. 두려워.”
재희가 범수의 귀를 만지며 속삭인다.
“바보! 아직도 몰라. 내 관심은 사람들이 칭송하는 명예를 얻는 거야. 내 존재를 인정받고 싶을 뿐이야.”
“그래 알아, 그래서 네가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도.”
“알면서 그런 말을 해. MIT 최연소 종신교수, 유 재희.”
“하지만 난 남자야. 어떻게 너를 혼자 두고 마음 편히···”
“뮤라뉴! 불안해하지 마. 아예 홈캠을 치마 속에 달고 다닐까. 그렇게 해줘.”
“그런, 말이 아니잖아!”
범수가 속상해하자 재희가 입을 포갠다. 그의 심장이 파블로브의 개처럼 요동쳤고 그녀는 그의 사마귀를 만진다.
“또, 시작이군······”
재희의 손길에 범수는 흥분하며 아득히 멀어지는 소리를 낸다.
***
이스타 원장은 외삼촌의 일기를 통해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재희를 보니 때려 주고 싶다.
“그렇게 착한 사람을 버리고 이렇게 힘든 척하는 이유가 뭐지. 어떻게라도 피해 보려고 불쌍한 척 내 앞에서 쇼라도 하는 건가!”
원장은 할 말을 해놓고 재희를 보면서 두려움을 느낀다.
‘사람의 눈물과 콧물이 저렇게 많은 것인가. 어쩌면 사람 몸에 피가 아니라 눈물과 콧물이 섞인 액체 덩어리는 아닐까.’
그녀는 콧물과 눈물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나는, 나를 저주하고 증오했어요. 그나마 사람들의 관심과 인정을 받으면 잠잠해졌죠. 그러다 범수 씨가 떠나고 나서 알았어요.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인지. 진심으로 범수 씨에게 응답하고 싶었지만 그때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고요.”
재희의 말에 원장이 성난 울음을 소리를 내며 도로 경계석을 주먹으로 마구 친다.
“외삼촌 일기장에 쓰인 절규를 당신은 몰라. 죽어도 모를걸!”
그의 손등이 찢어지며 튄 피가 재희의 손등에 튄다. 바늘에 찔리는 따끔함에 재희가 뭔가가 생각난 듯 머리를 흔든다.
“아까··· 조금 전 무슨 말을 했었죠. 일기장 찢어진 뭐라고 했죠?”
피가 엉긴 손을 치켜세우며 원징이 외쳤다.
“라토스케! 물의 나라, 요정의 나라 크로아티아를 탐정과 함께 샅샅이 뒤졌지만 없었다고.”
“라토스케!”
후회의 죄목으로 벌을 받고 있는 그녀가 비수처럼 던진 원장의 말을 집어 자신의 심장에 꽂는다.
“찾지 못하면 죽을게요. 내가 귀신이 되어서라도 범수 씨 찾을 거라고요.”
“정말, 당신이라는 사람은 상대를 미치게 만드는 재주가 있군.”
“미치게 만드는······”
“반지를 보니 결혼도 한 것 같은데, 범수 씨를 찾아야 하는 이유라도 있나요.”
원장이 주먹에 힘을 빼고 허탈하게 피 묻은 금반지를 닦는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주신 유품이오. 결혼 같은 소리를 내게 하다니. 외삼촌 일기장을 보고도 내가 결혼 생각한다면 그건 머리가 없는 거지.”
재희는 으스스한 소리를 내며 원장을 소름 돋게 만든다.
“난 그곳이 어딘지 알아요. 라토스케!”
재희가 일어나더니 파란 페라리 앞에 선다.
“당신이 찾아 헤매던 라토스케는 거기가 아니에요. 내가 왜 거길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곳은 영국이에요. 나와 범수 씨만 알고 있는 장소.”
우우웅우우웅
(우마리) 이모, 아직 출발하지 않았으면 잠깐 올라와 주세요.
아무래도 붉은 타래실 목걸이는 이모가 챙겨야 할 것 같아요.
하아아···
우마리의 문자를 받은 재희가 한숨을 내뱉고 아이폰을 던져버린다.
짜짝!
아이폰이 바닥에 튕겨 산산이 부서진다.
“아버지는 내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범수 씨를 찾고 다니자 내게 말했어요. 우마리 곁에 있으라고, 우마리가 인연을 선택하는 순간 범수 씨를 찾을 수 있다고, 그러면서 타래실 목걸이를 걸어 주셨어요.”
재희는 파란 페라리를 만지려다 감히 만지지 못하고 물러선다. 그녀가 힘없이 돌아서 퀀텀 건물로 향한다.
“안돼! 영국이라면서 돌아버리겠군. 끈인지 목걸이인지 내가 찾아줄 테니 가라고. 지금도 늦었는데 더 늦기 전에 외삼촌한테 가서 용서 빌라고. 불쌍한 외삼촌 좀 찾아줘요. 제발요!”
원장이 재희를 대신해 퀀텀 건물 시크릿 룸으로 무섭게 돌진한다.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재희가 페라리를 바라본다. 정숙했던 재희의 눈빛이 야릇하게 변하며 팜므파탈로 변신한다. 범수의 파란 페라리에 다가가 검지와 중지로 천천히 애무한다.
“범수 씨 이젠 내가 당신을 섬길게.”
아무도 볼 수 없고 재희만 볼 수 있는 페라리에 핏발이 선다.
“페라리를 다루려면 오른쪽 다리를 먼저 집어넣고 엉덩이 그리고 왼쪽 다리를 넣어 자연스럽게 놀라지 않도록 타야 하지.”
운전석에 올라탄 그녀가 산발이 된 머리를 정리하고 손으로 핸들을 사랑스럽게 쓰다듬는다. 룸미러에 달린 비즈 DNA 모형을 떼어내 브이라인 원피스 가슴에 넣으며 눈을 감는다.
“마사가 아니라 이젠 재희가 당신을 찾는 거예요. 기다려요. 범수 씨!”
죽은 듯 늘어진 파란 사자의 머리채를 잡듯 그녀가 핸들을 잡자 엔진이 뜨겁게 달궈진다.
“라토스케에서 내가 돌아오길 바라고 있었던 거예요. 그렇죠, 범수 씨!”
페라리가 주인을 만난 듯 달리고 싶어 했고 재희가 액셀을 밟자 날렵하게 달린다.
- 작가의말
인간은 쳇바퀴를 이탈해야 시야가 열려요.
당신이 돌리고 있는 쳇바퀴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나요?
집착, 일탈, 반복, 탈선, 애착, 미련, 이동, 집중, 탈출, 강박, 분리, 반복, 탈락, 이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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