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회차) 옵스 가문의 그들
“정말 내 아들 희토가 나처럼 떠돈다고요.”
“그러니 자리 잡고 마음도 잡아 알아들었어. 밥값은 다 했다.”
일어나는 곰씨를 보며 김 립은 나무 탁자를 손톱으로 긁는다.
“어디로 가시려고요.”
“네가 알아서 뭣··· 정말 신경 쓰이면 여비나 좀 줘봐.”
김 립은 주머니에 든 돈을 곰씨에게 탈탈 털어 준다. 곰씨가 김 립의 표정을 살핀다.
“측은함인가, 아니면 길을 잃고 포기한 것인가. 간절하지만 말은 못 하고 그래도 떠도는 내게 돈도 주고, 진즉에 네 가문이 이랬다면 멸문은 피했잖아. 너!”
김 립은 노파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우물우물거린다.
“저와 아들을 신경 써 주셨잖아요.”
“어디보자. 기가 막히는 군. 네 가문이 끝난 난 줄 알았더니 소화 낭자가 있었구나. 이건 탈탈 네가 털어 내게 준 여비에 대한 덕담이니 새겨 두어라.”
“덕담이오.”
“다른 거 말고 네 아들 희토 성품이나 신경 써. 자손들이 좋은 인연을 만나야 가문이 다시 일어날 거다.”
탁자를 긁고 있던 손이 멈춘다.
“됨됨이에 신경 쓰라는 것인가요.”
“그러니 아깝더라도 번 돈은 호주머니가 아닌 가난한 이들에게 무조건 나누고 베풀란 말이다. 엄청난 복으로 돌아올 테니까.”
곰씨가 문을 열고 어두운 골목길로 사라지자 김 립은 멍하니 곰씨를 향해 절을 한다.
“가문이 일어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해야죠.”
그는 양조장을 인수해 ‘대성 발효공업’으로 명칭을 바꾼다.
어느 날, 립이 아들을 불러 빈 그릇에 막걸리를 따라준다.
“희토야, 나와 너는 이번 생에 태어난 목적은 가문을 일으키는 것이다. 돈을 벌어 무조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라.”
막걸리를 받아 들고 침을 꼴딱거리던 희토가 눈을 희번덕 뜬다.
“왜요? 우리가 번 돈을 왜 남에게 그냥 줘요.”
“저기 바다에 물이 가득하지. 물고기가 살기 위해 물이 필요하듯, 또 나무가 물을 찾듯이 가문이 바로 서기 위해서는 바탕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바탕으로 일어서기만 하면 그때부터는 시절을 따라 번성하고 얻는 것이 많다.”
김 립이 무엇을 상상하는지 흐뭇한 얼굴로 허공을 본다.
“싫어요. 내가 번 돈은 내가 쓸 거예요. 아무한테도 주기 싫어요.”
“그럼, 네가 낳은 자식들이 거지꼴로 세상을 떠돌면서 살게 되면 어쩔래.”
“내가 돈을 좋아하니까, 자식들도 돈을 좋아해서 돈을 잘 벌 거예요.”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면 좋겠지만 바다가 그릇이듯 나무에게 흙이 그릇이듯 사람은 덕을 쌓아야 그릇 하나는 번듯하게 만든다. 우리 가문은 그게 부족해서 이 꼴이 났어. 그러니 나와 너는 이번 생애는 덕을 쌓자.”
부스럭 거리는 소리, 희토는 막걸리를 방바닥에 내려놓으며 돌아 앉는다.
“아버지, 죽을 때가 되었어요. 자꾸 이상한 말을 해요.”
“난, 분명히 너한테 말했으니, 반드시 지켜라. 약속을 잘 지키면 내가 큰 상을 줄 것이다.”
돌아 앉은 희토가 궁금해 쳐다본다.
“무슨 상인 데요?”
“이놈아 내가 네 머리 위에 있다. 너 하는 거 봐서 알려 줄 테니 약속이나 지켜.”
소화가 밥상을 들고 들어온다.
“여보, 친한 친구 내외가 난리 통에 죽고 아들 하나가 남았는데···”
소화가 희토를 보고 멈칫한다.
“왜, 말을 하다가 멈춰요.”
“아니, 아직 어린 희토에게 막걸리를 주셨어요."
"그냥, 따라만 놓은 거야, 보라고 먹지도 않았어."
립이 소화 눈치를 보며 밥상을 보고 수저를 만지작 거리는 아들을 본다.
"먼저 먹거라."
소화가 아들 희토에게 뭐라 하려다 멈춘다.
"열두 살 아이가 편지를 들고 혼자 저를 찾아 부산까지 찾아왔어요.”
“그 녀석 대단하네. 그러고 보니 희토랑 동갑이군.”
희토가 밥을 먹다 목이 메어 물을 마신다.
“지체 높았던 양반에 독립 단체를 도왔고 좋은 일도 많이 했어요.”
“양반은 무슨 우리 가문이 망하는 것을 당신도 보았잖소.”
“아이가 총명하고 떡잎부터가 달라요.”
“조심스러운 당신이 뭘 보고 장담하는지 궁금은 하군."
”그 아이를 돌봐주고 싶어요.”
“아이는 어디 있소.”
“외가 댁에 잠시 머물게 했어요. 내일 데려올까요.”
“당신은! 우리도 외가댁에 신세를 하도 져서 죄송한데 왜, 그 애를··· 당장 데려와요.”
희토가 밥상을 물리는 소화를 따라 나와 자기 방으로 간다.
‘큰일인데, 이상한 놈이 내 자리를 위협하고 있어. 이러다 죽도 밥도 안돼. 내 밥그릇부터 잘 챙겨야지. 아버지 말이라도 잘 듣는 척 해야겠는데.’
립이 앉아 있는 사내아이를 보니 한눈에 보아도 기품이 남다르다.
“네 이름이 뭐냐.”
“김 수혁입니다.”
“어디 김 씨지. 넌 무엇을 할 줄 아느냐.”
“경주 김 씨입니다. 저는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네가 왜 여길 찾아왔지.”
“어머니께서 더 큰 일을 위해 도움을 받으라 하셨습니다.”
“그것이 다냐.”
“도움을 베풀어 주신다면 몇 배로 갚을 것입니다.”
“그래 무슨 도움을 받고 싶으냐.”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그가 괜히 의자를 들었다 놓으며 답답해한다.
“하필 왜 공부지.”
“가문을 일으키고······”
“에잇 제길! 전쟁으로 모든 것이 사라졌어. 그게 무슨 소용이라고.”
“그럼, 무엇이?”
“이젠 돈이 가문을 만들고 돈이 제일인 세상이 될 거다.”
“돈이요.”
“돈을 알고 돈을 벌어야 한다고.”
“그럼 돈을 벌겠습니다. 도와만 주십시오.”
립이 그제야 말이 통한 다는 듯 수혁에게 가까이 다간다.
“잘 들어. 일본으로 유학 보내 줄 테니. 그놈들이 빼앗아 간 것 몇 배로 모조리 배워와라. 학비 걱정은 말고 해 봐.”
“일본 유학이요.”
“왜 싫어. 겁나는 거냐.”
“아니요. 좋아서요. 저 일본말할 줄 압니다. 영어도 조금 할 수 있고요.”
그는 수혁의 자신감에 기세가 눌리며 부드럽게 말한다.
“좋아, 그럼 먼저 내 양아들로 들어와라.”
“양아들이요?”
“열여덟 살이 되면 파양해 줄 것이니 그때 네가 알아서 하고 잘 들어. 일본에 지인이 있어. 내가 준비해 준 서류만 들고 가면 수월할 거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립이 망설이면서 손을 비비고 주물거리다 말을 꺼낸다.
“그럼, 이제 내가 너한테 부탁할 차례다. 차후 우리 가문에 딸이 생기면 네 자손 하고 반드시 혼인을 시켜라. 그리고 대성이 어려울 때 반드시 도와준다고 약속해!”
“네!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만약 약속을 어기면 내가 악귀가 되어서라도 괴롭힐 거다.”
우스개 소리가 아닌 진심 어린 립의 겁박에 수혁이 깜짝 놀란다. 립이 아차 싶었는지 시치미를 뗀다.
“농이다. 농담 허허.”
“아, 예에.”
“너의 눈빛이 담보다. 의심할 수가 없어.”
수혁이 18살이 되자 립이 약속대로 파양을 해주었다. 여전히 학비며 여러 후원을 수혁에게 아끼지 않는다. 수혁은 편지를 통해 안부를 물으며 자신의 학업과 성취에 대해 알렸다.
'··· 드디어 내일이 졸업식입니다.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성장했습니다. 이 은혜를 꼭 갚겠습니다.'
여름 어느 날, 김 립은 날 회를 먹고 급성 패혈증으로 삼일 만에 죽었다. 김 희토는 장례식을 치르고 아버지 립의 사업을 이어받아 ‘대성 발효공업’은 대성 주조(주)로 상호를 변경한다.
김 희토는 늦은 나이에 교육자 집안의 최 씨 부인과 결혼해 첫째 김 강산과 둘째 김 강식을 낳았다. 처음에 그는 자신의 입지를 지키기 위해 아버지 립에게 잘 보이려 했던 행동들이 점차 칭찬과 지지를 받게 된다. 어느새 희토는 돈에 대한 의지와 다르게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열심히 돈을 벌었고 번 돈으로 남들을 도울 때 여전히 아깝고 배가 쓰렸다. 하지만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가난한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챙겼다.
“이번 생은 그다지 재미는 없었지만 자손들을 위해 살았다. 나쁘지 않았어. 아버지께서 주신다는 상이나 받으러 가야겠다. 유언이다. 강산이는 대성 주조를 강식이는 대장간을······”
옵스 가문에서 처음으로 굴곡 없는 평탄한 삶을 산 김 희토가 세 개의 유언을 남기고 사망한다.
“대성은 희토의 덕망과 좋은 평판을 가졌고, 영리한 두 아들이 잘 이끌어갈 것이니 죽어서도 행복할 거야.”
“두 말하면 숨차지, 게다가 대성 주조는 대통령이랑 연줄도 있다며.”
“부럽다, 부러워!”
강산과 강식은 아버지 희토의 두 번째 유언에 따라 교육자 집안의 부인을 얻는다. 둘째 강식이 먼저 유치원 선생과 결혼한다. 첫째 강산은 한량 짓을 하다가 고등학교 교사와 결혼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대성에 돈은 쌓이지만 빛나기는커녕 흐려진다.
“돈 좀 벌었다고 저렇게 달라지나.”
“부모를 보면 그 자식을 안다고 했는데.”
“돈맛을 잘못 들이면 저렇게 되지.”
결혼 순서는 달랐지만 강식은 형이 조카를 낳을 때까지 아이 낳기를 늦추며 기다린다. 강산이 늦게 산하와 산석을 낳았고 강식이 범수와 딸 윤미를 낳았다.
부산에서 서울로 유학을 보낸 산하가 방학이라 부산 집에 내려왔다.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소파에 앉은 어머니를 걱정하던 산하가 방에서 나온다.
“어머니 아직도 이러고 계셨어요.”
“아버지가 들어오지 않으셨단다.”
“새벽 3시가 넘었어요.”
“그러게 몸 상하실 텐데.”
“술이랑 여자가 좋아서 매일 늦는데 아시면서 왜 그러세요.”
“너는 아버지께 그게 무슨 막말이니.”
산하가 어머니의 멍든 눈을 쏘아본다.
“아버지는 무슨 아버지예요.”
“그만두지 못해.”
“부인이나 때리고 우린 아버지랑 밥도 함께 먹어 본 적이 없어요.”
“그건 돈 버시느라 바빠서······”
“다른 아버지는 돈도 잘 벌고 가족이랑 잘 지내요. 승우형네 보니까 다정하게······”
그녀가 승우라는 말을 듣고 안도하는 표정으로 산하 손을 잡는다.
“아버지께 승우네와 지내는 것 말 안했지.”
“네, 아버지는 돈이면 다 되죠. 돈, 돈!”
“산하야, 엄마 힘들어 그만하자.”
“아버지가 없었으면 좋겠어요. 지긋지긋해.”
“그만!”
거실에서 큰 소리가 나자 산석이 눈을 비비며 나온다.
“엄마랑 형아 또 싸워.”
“막내가 떠드는 소리에 깼구나.”
최 씨가 산석을 토닥이며 눈물을 쏟는다.
“산하야, 산석아 엄마가 못나서 미안해.”
그녀는 이튿날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사망한다. 그 일로 첫째, 산하의 방탕한 생활이 시작됐고 둘째, 산석은 위태롭다.
- 작가의말
“너의 눈빛이 담보다. 의심할 수가 없어.”
당신이 가진 무형의 담보는 가치를 매길 수 없습니다. 두려워 말고 세상과 거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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