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회차) 라나와 김 무진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바위처럼 굳어진 상태로.
“무슨 일이십니까?”
재희는 그를 붙잡기 위해 손을 잡았을 뿐인데 마음이 한없이 먹먹하다.
“저는 마리아입니다.”
그가 재희의 오른손 약지에 낀 반지 아래 푸른 점을 본다.
“저를 아십니까.”
손을 슬며시 놓는 그녀.
“잠깐 여쭤볼 말이 있어서··· 갑자기 손을 잡아 당황하셨지요.”
비도 오지 않는 맑은 날.
톡, 톡, 톡.
재희 손등에 투명한 물방울이 떨어진다.
‘비는 아닌데··· 뭐야! 신부님이 눈물 흘리고 있어.’
눈물이 손등을 적시며 재희 마음 한구석이 흠뻑 젖어든다.
“신부님, 오늘은 왠지 삶에서 최고의 운수 좋은 날이 될 것 같아요.”
떨리는 숨소리 파동.
그녀는 다리가 풀리면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방언처럼 터지는 말.
“아름다운 코린트와 천국 같은 세상에도 비천한 사람은 있다고 하지요. 겉모습을 비추는 거울은 있지만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 없다고 합니다. 참 대행인 것은 저는 비루한 사람으로 제 비천한 영혼을 비추는 거울을 본다면 이곳에 있지 않을 겁니다."
"비루하고 비천함은 무엇이 되기 전입니다. 인간이었던 실리도 그러했으니까요."
그녀가 고개를 들고.
"저는 실리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나를 본다면 죽음의 계곡을 떠돌며 괴로워하고 있을 겁니다. 비루함을 인정하며 운명을 바꾸려 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자신 그렇게까지 밑바닥에 놓으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더럽혀졌으니까요. 또 그렇게 품은 생명을 저주하고 잘라버렸으니까요."
"가는 길을 막고 네게 이러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신부의 바지를 잡았다가 놓으며 재희가 손을 깨끗이 닦고 그의 신발을 만진다.
"다 털어놓고 용서를 구하고 싶어서입니다."
"그럼, 먼저 당신을 용서하셨나요."
고개를 숙이고 그의 신발을 만지려던 손을 뗀다.
'용서한다고, 내가 나를···'
"비천한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습니까?"
신부는 허리를 숙여 재희를 일으켜 세운다.
“스스로 비천하다고 말하는 사람 치고 그러한 이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녀가 신부에게 조르듯 말하고 또 무릎을 꿇으려 한다.
“용서해 주세요.”
신부가 먼저 무릎을 꿇고 말한다.
“함부로 무릎을 꿇지 않으며 아무 곳에서 용서를 구걸하지 마세요.”
"구걸하는 게 아니라. 애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무턱대고 사정하는 것은 다를 바가 없슺니다."
그가 단호하게 재희를 뿌리치며 걸어간다. 그녀는 따라가지 않고 그대로 서서 정중하게.
“신부님, 잠깐 시간을 내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몇 걸음 걷던 신부가 멈춰서 흔들리는 가로수를 보며 뒤를 돌아본다.
“그러지요.”
막 초록 신호등을 바뀐 횡당보도로 재희가 그에게 인사하며 그를 이끈다. 그녀의 뒤를 따라가는 신부의 등을 살랑 거리는 실바람이 떠민다.
“신부님, 저기 보이는 카페 안에 조용한 자리가 있습니다.”
“······!”
재희는 무엇을 전하려는 것인지 무의식적으로 신부의 옷깃을 터치하려 한다.
“초면인데 실례가 많습니다. 원래 저 이런 사람이 아닌데.”
재희가 손을 꼼지락 거리자 신부의 시선이 그녀의 손을 주시하고.
“일부러 저를 기다리신 겁니까.”
“네.”
"저를 아십니까."
"아··· 압니다."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
"바티칸 그리고 노암 신부님···"
재희의 발걸음 보폭이 커진다.
“마리아, 자매님!”
“신부님, 제가 알고 모르고는 것은 이젠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그녀의 보폭에 맞춰 걸으려 애를 쓰고 재희는 비로 뒤를 자꾸만 돌아보며 신경이 온통 그에게 쏠린다.
‘숨소리가 왜 저렇게 약하지. 어디가 아프신가?’
걸음 속도를 늦추며 재희가 카페로 먼저 들어가 에스델을 찾는다.
'어디 있는 거야. 늘 카운터 앞에 있더니.'
“어머나, 마리아!”
그때, 문이 열리고 에스델이 신부를 보고 인사한다.
"어서 오세요."
재희가 그녀에게 두 눈을 깜빡이며 웃었고, 약삭빠른 에스델이 조용한 자리로 안내를 한다.
“VIP 전용 좌석입니다.”
“에스델, 고마워요. 주문할 때까지는···”
“그럼요,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천천히 이야기 나누세요.”
에스델이 뒤꿈치를 들고 걷는다. 반면 숨을 쌕쌕거리며 힘들어하는 신부.
‘아, 숨소리! 견딜 수가 없어. 듣고 있는 나조차 힘들어서 숨 쉴 수가 없을 정도야. 마치 내 심장을 칼로 찌르고 베는 소리 같아서.’
재희가 참다못해 일어나 카운터 보조 테이블에서 직접 레몬수를 챙긴다. 에스델이 그 모습을 보고 움직이려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지켜본다.
"무슨 일이야. 저렇게 마리아가 긴장한 모습을 처음보는데."
신부는 스마트 폰을 꺼내 뭔가를 확인하고서 호주머니에 넣는다.
상큼한 레몬 수를 가져온 재희가 신부에게 얌전하게 내민다.
“불편하신 것도 모르고 배려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해요.”
“아닙니다. 태어나길 이렇게 태어나서 적응하며 살아가는 중입니다.”
“네, 그러셨군요.”
그가 재희의 오른손을 보며 물을 마시고 모자를 벗는다.
‘어떤 분이실지 궁금했는데 이제야 모자를 벗으시네.’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그녀의 기대가 컸던지 상체가 테이블 쪽으로 기울어진다.
‘바티칸에서 오셨다니 유럽인 인가?’
그가 손을 가볍게 들어 검은 모자를 꽃잎처럼 잡는다. 에어컨과 실링팬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는 모자를 잡아, 푸석하고 짧은 검은 머리카락을 모자가 스친다. 모자에 가려졌던 그의 얼굴이 모자가 내려오며 보일 듯 말 듯하다, 마침내 테이블에 모자가 내려앉는다.
“어, 엇!”
짙은 안개를 걷히며 나타난 그의 얼굴은 여러 가지 표정이 모두 담긴 얼굴이었다. 재희는 더 자세히 보려 하나씩 뜯어본다.
‘턱과 입술 뺨과 눈을 하나씩이 낯설지만 모아보니 아주 낯익은 얼굴인데.’
드디어 그녀가 신부 얼굴 전체를 눈에 모두 담고서야 알아챈다.
‘김 무진 교수랑 똑같···’
“멜리에 라나입니다.”
너무 놀라 떡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재희.
“어떻게 이럴 수가!”
초점을 잃고 마구 흔들리는 눈동자를 본 라나가.
"마리아··· 마리아 님."
허공에 손가락을 연신 움직이는 그녀는.
“세상에! 뿡어빵을 찍어 놓은 듯 닮아서.”
창백한 얼굴로 말을 잇지 못하고 혼잣말을 하는 그녀의 오른손을 라나가 잡아준다.
“운명은 전혀 예기치 못한 날 시험한다고 하지요.”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면서 그녀의 심란했던 마음의 파도가 이내 잠잠해진다. 재희는 손을 잡아준 그의 손을 보면서 무엇을 발견한다.
‘저건 대대로··· 나와 똑같이 오른손 약지에 푸른 점!’
평온을 찾아가던 재희의 감정이 요동치며 눈물을 쏟아내자 라나가 말한다.
“심하게 장난을 즐기는 운명이지만 이유가 있는 장난입니다. 반드시 한 번은 마주해야 할 인연을 오늘 마주한다고 여기세요.”
“신부님, 운명이 아니라 제가 장난을 친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세요.”
“아무래도 신부님은 이 미천한 사람에···”
재희의 눈물과 떨림에 라나도 손을 떨고 있다
“평정심이 가장 필요할 때 평정심이 부족해지는데 오늘인 것 같습니다.”
두 손으로 떨리는 라나의 오른손을 잡고 약지 손가락 점을 만지는 재희.
“누군가를 오랫동안 아주 많이 원망하지 않으셨나요?”
가만히 손만 바라보는 라나의 보고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손에 입을 맞춘다.
“너무 어리석었고 닥친 일에 대한 용기도 세상을 보는 아름다움도 없었습니다. 비천한 사람이 되어 복수만 생각했고 욕망만 키웠어요. 커지는 욕망에 가려져 비루해진 저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고 살았습니다. 지워졌다 여겼는데 새겨져 있는 것을 이제야 보다니 얼마나 어리석은지.”
피를 토하듯 재희가 몹시 괴로워한다.
“자책하지 마세요.”
재희의 괴로움이 라나에게 더 크게 옮겨 버티고 있던 그가 고개를 떨군다.
“그러지 마세요. 어···어머니!”
한 점과 한 점이 만나는 지점. 그동안 움직이며 그린 선이 겹친다. 유난히 굵은 선이 그어지고 있다.
“비루하게 품었다고 여겨 내내 죽어야 한다고 주문을 걸었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분을 제가 그랬습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재희 얼굴을 라나가 다가와 뺨을 비빈다.
“동생은 잘 있나요.”
뭔가를 잘못 들었나 싶은 재희.
“동, 동생··· 이라니요!”
“조금 전 생각하셨잖아요. 김 무진 교수를.”
라나가 시계를 보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내가 늦었으니 그 아이가 이곳으로 오겠네요.”
“김 교수가 이곳으로 온다고요. 어떻게?”
“노암과 자스링을 통해 여러 번 듣고 오늘 만나기로 했었습니다. 아마 이곳으로 올 겁니다.”
생각이 뒤죽박죽 된 재희가 어쩔 줄 몰라가 하는 가운데 라나가 손수건으로 그녀의 눈물과 콧물을 닦으며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준다.
“아주 어릴 때 상상하고는 했는데 그 모습보다 아름다우세요.”
“난, 지금 뭐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세요. 지금 이렇게 서로를 보고 있으니까요.”
“그, 그래요. 멜리에 라나.”
“친근하게 라나라고 불러주세요.”
오물거리는 입술을 손으로 만지던 그녀가.
“그래요, 라나. 지금 너무 혼란··· 기다리는 동안 뭐 좀 마실까요?”
“저는 따뜻한 우유 한잔이면 충분합니다.”
그녀가 긴 숨을 몰아 쉰다. 모자를 라나에게 살짝 씌워주며 벨을 눌렀고, 에스델이 궁금하다는 얼굴을 하고서.
“주문받겠습니다.”
“따뜻한 우유랑 스페셜티 G 두 잔으로, 스페셜티 한 잔은 손님이 오시면 따뜻하게 내려주시고 나머지는 바로요.”
느리지만 차분하고 점잖은 부탁에 기분파 에스델이.
“네에! 그리고 오늘은 신부님도 오셨고, 특별 서비스로 애샤 샐러드(애플 망고, 샤인 머스켓)도 함께 드릴게요."
에스델이 돌아서며 모자를 쓰고 있는 라나를 힐끔 보고 아쉬워한다.
"모자 좀 벗지 궁금해 죽겠네."
- 작가의말
한 점과 한 점이 만나는 지점.
그동안 움직이며 그린 선이 겹친다. 유난히 굵은 선이 그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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