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회차) 반드시 알아봐야 할 인연
귀빈들은 이색적인 상황을 주시하며 웅성거린다.
“저기, 우마리 공주 생일상 좀 봐요.”
“아니?”
“무슨 일이야.”
딸들 자랑에 더해 허풍을 떨던 황제가 웅성거림에 둘러보다 우마리의 생일상이 텅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한다. 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무슨 일인지 당장 알아보라.”
하지만 황제의 왼쪽 눈 밑에 큰 사마귀가 떨리고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내지른다.
“악장에게는 연주를 더 흥겹게 하라 전하고 주방장에게 음식이 부족하지 않게 계속 내오라 하라.”
타마라 공주는 아무렇지 않게 생일상 앞에 앉아 받은 선물을 풀며 시녀들과 농담을 주고받고 있다. 우마리가 없는 빈자리와 휑한 생일상이 유독 도드라진다.
“타마라 공주님. 우마리 공주님께서 대형 사고를 치신 것 같습니다.”
“그냥, 둬 한 번은 혼나 봐야. 정신 차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여자답게 가꾸고 순응해야 하는데 재는 너무 나대잖아.”
“그래도, 황제께서 화나시면 아시잖아요.”
“설마 감옥에 가두고 매질이야 하겠어.”
“생각만 해도 너무 끔찍합니다.”
“그러니까, 쟤는 끔찍함을 몰라. 된통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지.”
음식을 실은 마차가 성 밖으로 나왔다.
토각 토각
우마리를 시중드는 두 명의 시녀와 유모가 마차에서 내려 음식을 꺼낸다. 음식 냄새를 맡은 배고픈 아이들이 하나 둘 몰려든다. 먹을 것을 달라며 단풍잎 같은 손을 내민다.
“배고파요.”
“저도 주세요.”
구석지고 그늘진 곳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부랑자들도 어슬렁거리며 줄을 선다.
“여기, 나도 좀 주십시오.”
“황궁에서 어쩐 일로 음식을 나눠 주는 것입니까.”
“이게 뭔 일이야. 혹시 먹고 죽는 거 아냐.”
음식을 받아 든 초라한 행색의 여자가 손을 떨며 침을 닦는다.
“먹어도 되는 건지 몰라 처음 보는 진귀한 음식이라.”
“난 먹다가 죽는 게 소원이야.”
“그래, 굶어 죽는 것보다 먹다 죽는 건 복이지.”
더러운 손이 혹시나 닿을까 주저하던 시녀의 입가에 웃음이 번지고 유모도 싱글벙글 소리친다.
“오늘이 공주님, 생일이라 음식을 나눠 드리는 것이니 안심하고 드시구려."
아까부터 조용히 마차 옆에 서서 우마리가 굶주린 자들을 반긴다.
“따뜻한 음식입니다. 천천히 드세요.”
평민들이 입는 옷으로 갈아입은 우마리는 모자를 눌러썼다. 공주가 음식을 나눠 주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고 눈치채지 못한다.
“황제께서 웬일이래, 암튼 고맙습니다.”
“오래 살고 볼일이야. 잘 먹겠습니다.”
태양이 모든 정체를 밝히는 한낮의 정오가 되었다. 틱세 히말라야 끝자락의 곰파(사원)에서 막 도착한 용수가 성문 앞에 멈춘다. 그는 모자 달린 검정 사제 옷을 입었다. 배고픔에 시장기를 못 참고 손을 내민 용수다.
"저도 좀······"
“여기, 받으세요.”
배가 고파 이것저것 살피지 않고 서둘러 음식을 입에 넣는 순간 우마리가 용수의 음식에 덤으로 애플망고를 얹는다. 한 입 크게 벌린 입속에 공주의 손가락이 쪼옥 빨린다.
"아암, 으음... 오?"
그가 찰나에 닿은 우마리와의 첫 접촉과 공주가 눌러쓴 모자에 가려진 맑은 눈과 마주쳤다.
‘한 번도 무엇을 가져야겠다고 매달린 적 없어. 하지만 저 여인을 갖고 싶다.’
용수에게 죽음과도 바꿀 간절한 순간이 된다.
황후는 황제 곁으로 돌아와 우마리 공주의 상황을 듣는다.
“저기 좀 봐요. 우마리 공주가 차려준 음식을 가지고 사라졌소.”
“아니 우마리 공주가 뭐가 아쉬워서요,”
“나도 모르지. 그러니 당신이 어서 알아봐요.”
“욕심도 없는 우마리가 무슨 일이래요.”
“무슨 일인지 궁금하니. 어서?”
황후는 근위대장에게 이른다.
“동쪽 보좌관에게 알려 당장 우마리 공주를 찾으라 하라.”
모리야는 황궁에서 제일 영리한 덩치 큰 동쪽 구역 보좌관에게 공주를 찾아오라 시킨다.
“황후님!”
턱에 큰 점이 윤기가 흐르는 침착한 동쪽 보좌관이 얼마 되지 않아 보고한다.
“우마리 공주님께서 성 밖의 가난한 이들에게 음식을 나눠 주며 생일잔치를 하고 계십니다.”
공주가 빈자들에게 음식을 나눠 주고 있다는 소식을 황후에게 들은 황제는 어이가 없어 말을 잇지 못한다.
“아니, 무슨 생각으로······”
그때, 근위대장이 검은 사제 옷을 입고 모자를 뒤집어쓴 사내를 황제 앞으로 데려왔다.
“또, 무슨 일이냐.”
황제가 근위대장에게 물었는데 엉뚱하게도 시커먼 사제가 대답한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왔소.”
황제는 피곤하다는 듯 고개를 돌려 귀를 후비며 사제를 보내려 한다.
“음식이나 내어주거라.”
용수는 황제 앞으로 몇 걸음 나와 코까지 가렸던 모자를 벗는다.
‘아둔한 것은 여전하군.’
“당신이 정체를 알아야겠다며 모든 것이 드러나는 한낮에 찾아오라 했잖소. 해서 태양이 모든 정체를 밝히는 날 한낮에 찾아왔거늘.”
황제는 사제가 자신에게 하대 말을 하자 얼떨떨해 말을 잇지 못한다.
“이, 이자가 죽으려고 미쳤······”
얼핏 보니 눈썹은 칼처럼 예리지만 눈썹의 결이 고르지 못해 지저분한 사내다. 하지만 뱀의 눈과 독수리 눈을 가진 오묘하고 소름 돋는 눈빛에 뾰족한 턱이 찍어 누를 듯 위협적이다.
“근위 대장! 생일잔치라 해도 황궁에 아무나 들이다니. 누구 하나 목이 달아나야 정신들을 차리지. 다들 뭣들 해, 당장 이자를 끌어···”
황후는 황제 옆에서 사제의 말을 듣고 흐릿하게나마 뭔가를 기억해낸다.
“삼라트, 안 됩니다. 근위대장! 당장 이분을 접견실로 안내하라.”
황후가 사제를 살갑게 반기며 아무나 들이지 않는 접견실로 그를 안내한다.
“이쪽으로···”
화려한 금색 비단 방석 위에 황제와 황후가 앉으며 황후가 방석을 밀어준다.
“앉으시지요.”
용수는 방석을 밀어내며 바닥에 앉는다.
“난, 용수!”
황후는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하대 말을 들으면서도 개의치 않는다.
“아, 네. 용수님이 시군요.”
그렇게 말하고 황제와 황후는 뭘 물어봐야 할지 몰라 빈 전자레인지를 켜고 돌리듯 맹탕 시간만 보낸다. 황후가 황제의 옆구리를 찌른다.
“뭐해요.”
“어!······ 용수님 말처럼 황후가 쌍둥이를 낳았소··· 낳았지요.”
용수는 황제를 물끄러미 본다.
'간단한 인사도 없이 본론으로 들어가는 황제는 사람 다루는 법이 서툴군.'
“용수님! 왕자도 낳았지요. 고도 왕자가 어떻게 잘 클지 말해 주셨으면 합니다.”
모리야는 물 한잔도 융숭한 대접인데 혼자 차를 마시며 왕자에 묻는다.
'황후는 매우 이기적이군.'
용수가 고개를 젓는다.
'저 둘은 날카롭게 이가 나간 채 상에 올려진 유리컵 같아. 아무것도 모르고 입을 대면 무조건 다치게 만드는 칼처럼.'
“삼라트 황조는 큰 번영을 위해 소중한 초석을 쌓을 것이오. 그 바탕엔 우마리 공주가 있고 곧, 우마리아황조를 세우게 될 것이오.”
황제는 왕자가 아니라 공주라는 말에 기분이 상했는지 눈 밑에 검은 사마귀가 더 검게 변한다.
“왜, 막내 고도 왕자가 아니고 일개 공주인 것이오··· 것입니까.”
용수는 대리석 바닥을 쓸며 조금 전 밀어낸 금색 비단 방석을 슬그머니 당겨 앉는다.
‘멍청한 황제 같으니 자기가 가진 최고의 그릇을 알아보지 못하다니.’
“한 번만 말할 것이니 잘 들으시오.”
황후가 먹던 차를 내려놓고 용수 앞으로 방석을 밀며 앉는다.
“네, 어서 말해 주시지요.”
“지금의 성문 여덟 개가 육십사 개로 여덟 배가 될 것이네. 영토의 탑은 일백십사 개지만 오백칠십 개 다섯 배로 번성할 것이지. 그러나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별의 힘을 가진 우마리 공주가 스스로 사랑하는 인연을 알아봐야 하고.”
용수는 황제와 황후가 말을 못 알아듣고 모래알처럼 이리저리 휩쓸리는 것을 본다.
“만약 일이 틀어져 변수가 생기면 복잡해질 것이니.”
답답함 참지 못하고 황후가 끼어든다.
“그러니까 우마리 공주가 공작 왕조를 더 번성시키는 삼라트가 된다는 건가요.”
“삼라트 중에도 으뜸이 될 삼라트지.”
“어쩐지, 생일상 가지고 밖으로 나갈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용수 님, 쉽게 말해 주시면······”
“공주가 인연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네. 서른세 번 만남 기회가 주어지는데 그 중에 한 번이라도 둘 중 하나가 상대를 알아보고 이름을 네 번 부르면 부의 영원성을 얻게 된다는 것이지.”
황후가 더듬더듬 알아챈다.
“아! 세른 세 번 중에 한 번은 반드시 상대를 알아봐야 한다는 말이시죠.”
“그렇지. 영원성을 부여받은 그 자리가 어디든 그곳에서 엄청난 기운이 탄생해 세상과 우주의 번영이 그 자리에서 이뤄지게 될 거야.”
"네, 그곳이 바로 여기 공작왕조가 될 겁니다."
용수는 말끝에 두리뭉실 요구사항을 붙인다
“참고로 황궁에 있는 흰 소는 모두 치우게. 흰 소가 없어야, 황궁을 지켜주는데 수월해질 테니.”
“그럼, 당장 흰 소를 치우라 하겠습니다.”
탐욕의 황제와 하루에도 수백 번 마음이 변하는 황후는 화려한 꽁지깃을 펼치는 공작새를 닮았다.
“용수님이 지켜 주신다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지요.”
황후가 약삭빠르게 방석을 발로 밀며 일어난다.
‘대충 이야기를 들어 보니 우마리가 대세이고, 스스로 인연만 선택하게 해주 면 된다는 말을 어렵게 빙빙 돌리긴······’
“용수님, 그럼 저는 이만. 아직 생일잔치가 끝나지 않아서요.”
모리야는 체면이고 뭐고 치마를 치켜 잡고 다급히 나간다. 황제도 볼일이 끝났다는 듯 서둘러 용수를 어정쩡하게 배웅하고 중얼거린다.
‘용수에게 흰 소가 약점이었군.’
- 작가의말
당신은 상대방이 이야기를 할 때 어떻게 듣나요?
잘 듣는 행위만으로도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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