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회차) 막대기와 아카시아 이파리
멜리에 라나는 명동 지하 성당에서 쓰러진 이후부터 새벽 1시에 나가 3시에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멜리에 라나님!”
밖으로 나가는 라나를 잡으려 불렀지만 어찌나 빠르고 날랜지 자스링은 잡을 수 없었다. 고서를 필사하고 있는 노암에게 자스링이 다가간다.
“노암, 아무래도 확인해 봐야겠어.”
“으음, 무엇을. 뭐 문제 있나?”
“한두 번이면 그치겠지 했는데 새벽마다 멜리에 라나께서 홀연히 사라지셨다가 돌아오신다네.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아 혼자 알아보려 했는데 어렵더군.”
“새벽마다?”
자스링이 노암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심각한 얼굴로 궁리한다.
“아직 그곳이 어디고 무엇을 하고 오시는지 알 수는 없지만 누군가를 만나고 오는 것은 확실하네.”
노암이 필사를 멈추고 돌아본다.
“누군가를 만나고 온다고 그걸 어떻게 아는가? 멜리에 라나께서 한국에서 태어나시기는 했지만 아는 이는 서울에 없지 않은가.”
“그러니까, 설명하기 어렵지만 느낌 촉이라는 것이 있잖아. 수상해서 계속 뒤를 밟았지만 성당 밖을 나가는 순간부터 어찌나 빠르시던지. 아무래도 CCTV를 확인해 봐야겠네.”
“CCTV를! 나가실 때와 들어오실 때는 모습이 도대체 어떠하시길래.”
자스링이 책상에 엉덩이를 살짝 얹으며 노암을 본다.
“좋은 질문이네. 나가실 때와 다르게 들어오시는 모습이 신기할 정도로 밝은 모습으로 들어오신다네. 뭐랄까?”
“밝은 모습이라면.”
허공을 손을 뻣어 무언가를 그리던 자스링이 씁쓸해한다.
“꼭 사랑에 빠진 청년처럼 발그레해져서 돌아오시지.”
“자네가 이토록 확신하는 걸 보니 뭔가 있기는 있군. 만약 라나님을 따라갈 볼 요량이라면 CCTV으로 일일이 확인하는 것보다 위치 추적기를 달아보는 것이 어떤가.”
“그래, 그 생각을 못했어.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자스링과 노암은 멜리에 라나가 매일 같은 시각에 사라지는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위치 추적기는 신발에 달았다. 라나는 서울 종로구 와룡공원길 192에서 계속 멈췄다.
“노암, 항상 이곳에서 멈추네.”
“좋아 이제 우리가 먼저 그곳으로 가서 라나님을 기다려 보세. 드디어 무엇을 하시는지 알 수 있겠어.”
노암과 자스링은 와룡공원에 도착해 외진 곳 벤치 뒤에 숨어 멜리에 라나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노암, 오시겠지.”
“늘 이곳에서 멈췄으니 오실 거야.”
“2시가 넘었네. 우리 이러고 있으니까 꼭 무슨 탐정 같지 않은가.”
"자네, 바티칸에서와 달리 한국 오더니 말투나 행동이 상당히 달라진 것 같아."
자스링은 노암 말에 인정을 한다는 듯 노암의 어깨를 어깨로 친다.
"사람이 환경의 동물이 맞더군. 자네의 조언처럼 유년부 성경 교실을 운영하면서 무거웠던 뭔가가 가벼워졌어. 라나님에 대한 실망과 회의적인 태도도 누그러지더군."
“잠깐, 저기! 익숙한 걸음걸이··· 라나님 아니신가.”
“어디, 맞네. 이제야 오셨군.”
새벽 2시가 지나자 라나가 와룡공원에 모습을 나타냈다. 두 신부는 숨을 죽이며 라나의 행동을 지켜본다. 익숙한 듯 라나는 신발을 벗고 땅바닥을 몇 번 온몸으로 뒹굴더니 맨발로 성곽 쪽으로 재빠르게 향한다.
"요즘 괜찮았는데 또 왜 저리시는 건지."
속상한 자슬링이 벤치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집중하라고 감정적이 되면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 자스링, 지금이야.”
“노암, 거리가 너무 가깝지 않나? 이러다 들키겠어.”
“여기서 머뭇거리면 놓치네. 올라오면서 표지판을 얼핏 보았는데 길이 많은 것 같던데.”
“어서 따라 가보세.”
“그래!”
노암과 자스링이 라나를 따라가려 뒤를 쫓았지만 감쪽같이 사라졌다.
“방금 전까지 여기 계셨는데 어디로 가셨지.”
노암과 자스링은 주변을 몇 번씩 돌아보았지만 라나를 찾을 수 없었다.
"자슬링, 자네 말처럼 라나께서 이렇게 빠르시다니. 확실히 뭔가 있어."
“게다가 여기 오셔서 신발을 벗을 줄은 생각도 못했네.”
“그러게 말일세. 노암, 라나께서 도착하시고 하셨던 행동 말이야. 자네가 보기에 무슨 의식 같지 않았나.”
"맨발에 바닥을 뒹굴었지. 뭘 하시려고 일부러 그런 행동을 하셨을까?"
“노암, 혹시 신발에 달아 놓은 위치 추적기를 아시고 신발을 벗고 가신 것은 아니겠지.”
“그건 아닌 것 같네."
자스링은 라나가 벗어 놓은 신발을 보다가 벤치로 향한다.
"노암, 이리 오게. 신발을 벗어 놓고 가셨으니 신발때문에도 이곳으로 다시 오실 거야. 숨어서 기다려 보세.”
노암이 자스링을 따라가며 묻는다.
"자스링! 요즘 라나님 건강이 어떠셨지."
"지하 성당 일로 앨리스 병원에서 산소포화도 치료받고 그 후엔······"
"맞아, 자네나 내가 안심한 정도로 건강해지셨지. 그동안 변화가 뚜렷했지만 우린 그걸 놓치고 있었어."
"듣고 보니 인형놀이도 멈췄고 기도하시는 시간이 몇 배로 늘어나지 않았나."
"노암! 그때를 안다."
"맞아. 우리가 너무 감정적이었어. 밀어 두었던 멜리에 라나 고서를 다시 펼쳐봐야겠어."
자스링과 노암은 라나가 보여주는 행동에 각성을 일어났고 일대기에 대한 토론을 한다. 얼마나 지났을까. 희미한 그림자가 보였고 라나가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나타났다.
"쉬이 잇"
라나가 신발을 신고 빠른 걸음으로 내려가자, 두 신부는 라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 곧바로 따라간다. 서울 국제 고등학교 근처에서 전동 킥보드를 타고 멜리에 라나는 유유히 사라진다.
“······?”
“자스링 이제 알겠나. 우리가 라나 님을 잘 안다고 여겼지만 전혀 낯선 모습이네. 이 새벽에 여기까지 오셔서 도대체 무얼 하시는지 알아봐야겠어. 내일 낮에 와보자고.”
“정말 궁금하군. 먼저 이 주변에 대해 알아봐야지.”
자스링이 낯설다는 듯 두리번거리며 묻는다.
“노암, 차는 어디에 주차했나.”
“저기 명륜 국제 공영주차장이네.”
“잘했군.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워, 내가 알던 멜리에 라나 님이 아니셨어.”
라나는 방에 들어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책상 앞 의자에 앉는다. 검은 비닐봉지를 내려놓고 가만히 눈을 감는다.
숙청문 아래에서 만난 소녀는 날이 갈수록 말수도 많아지고 무엇보다 매우 밝아졌다.
“가져왔어?”
“여기, 가져왔어요.”
“맛있어. 라나는 착해.”
“요즘은 어떤 놀이가 재미있나요.”
“별거 없어.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잘하면 그다음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 아, 꽃향기 그대로가 좋아. ”
“시키는 일이 재미있는 일인가 봐요? ”
소녀가 라나를 째려보면서 신경질을 낸다.
“아니거든. 라나는 다 좋은데 만나기만 하면 떠올리기 싫은 할머니 이야기를 자꾸만 하는 거야.”
“할머니와 함께 산다고 하니 궁금해서 묻는 건데 생각하기도 싫으세요.”
“생각하기 싫어! 내 할머니가 아니니까.”
라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렇지 않게 아카시아 이파리를 꺾어 부채처럼 흔든다.
“내 말 들었어. 라나?”
“네!”
“그 여자, 내 할머니가 아니라고.”
“아니군요.”
“대답이 그게 다야?”
“또 물어보면 싫어하시잖아요.”
소녀가 막대기를 주워 바닥에 그림을 그려 놓고 보여준다.
“이거 봐. 이게 뭔지 알지.”
“항아리 같기도 하고 글쎄요.”
“이것도 몰라. 호리병이잖아. 물도 담고 맛있는 라씨도 담을 수 있는 통 같은 거야.”
“아, 이렇게 생긴 게 호리병이 이구나.”
답답한 듯 소녀가 호리병 그림을 막대기로 다시 크게 그리며 땅바닥을 탁탁 친다.
“라나! 라나는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만날 때마다 가르쳐 줘야 한다니까.”
“대신 만날 때마다 맛있는 라씨를 가져다 드리잖아요.”
그가 바보처럼 히죽거리며 웃는다.
“맞아, 그래서 내가 착한 라나를 세 번째로 좋아해.”
“속상하네요. 저 말고 좋아하는 분들이 있다니.”
“난 그 둘을 너무너무 사랑하지만 못된 할멈이 가로막고 있어. 대신에 시키는 일이 다 끝나면 막지 않겠다고 했어.”
“할멈이 시키는 일을 빨리 끝내면 되겠네요.”
소녀는 집고 있던 막대기를 집어던졌다.
“손톱 발톱이 자라긴 하지만 쑥쑥 자라는 게 아니잖아.”
라나는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손톱과 발톱을 만졌고 아카시아 이파리로 손톱과 발톱을 쓰다듬는다.
후 우우 후 우우
라나가 아카시아 이파리 한 장을 떼어서 입으로 불어 날린다. 소녀는 라나의 모습에 흥미를 보이며 먹던 음료를 내려놓는다. 그리고 라나가 들고 있던 아카시아 이파리를 빼앗았다.
“내 손톱아 내 발톱아 제발, 빨리빨리 자라라. 이곳은 정말 조용하고 향기가 가득해서 좋아. 자주 놀러 와야지.”
라나가 소녀의 손톱과 발톱을 손으로 가리키며.
“이파리로 손발톱을 쓸어 주었으니 이제부턴 빨리 자랄 겁니다.”
“정말?”
“그럼요. 아카시아 이파리로 마법을 부렸잖아요.”
소녀가 이파리를 흔들며 일어나 빙그르르 돌면서 춤춘다.
“마법이 풀리면 자유··· 그렇게 함께 뭄바이로 돌아갈 거야.”
라나는 손으로 호리병을 그리며 노래를 부른다.
“예쁜 호리병에 무엇을 담으면 좋을까. 시원한 물, 맛있는 라씨 찰랑거리는 소리 듣기 좋겠네.”
소녀가 돌기를 멈추며 아카시아 이파리로 라나의 입을 때리며 화를 낸다.
“바보야. 그건 그냥 호리병이 아니야.”
“예! 호리병에 그런 걸 담는 거라라고 말해 놓고서.”
“하기야. 원래 그런 걸 담지만 할멈 호리병은 그런 걸 담는 게 아니라고 했어.”
라나가 하늘의 별을 보며 행복하게 웃는다.
“무지개 같은 것 아니면 별처럼 반짝이는 보석 같은 것을 담을 건가 봐요.”
“그런 게 아니야. 내 생각에 나쁜 걸 감으려고 하는 것 같아.”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 할멈은 아주 심술쟁이거든. 사람들을 괴롭혀.”
“착한 소녀는 그런 나쁜 심술쟁이 할멈과 함께 지낼까요.”
소녀가 시무룩한 표정과 맥 빠지는 소리를 내며 아카시아 이파리를 내려놓는다.
“오랫동안 아파서 잠자고 있는 나를 할멈이 깨웠어.”
돌담에 기대며 소녀가 볼펜을 꺼내 들고 달을 본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는데 그 할멈이 나를 깨웠······”
멜리에 라나는 소녀가 들고 있었던 막대기와 아카시아 이파리를 비닐봉지에 담는다.
- 작가의말
그때를 안다.
사랑하고, 만나고, 채우고, 버리고, 기다리고, 나아가고, 멈추고, 물러나고, 달리고, 끌어안고······
그때를 알고 싶지만 우리는 자주 놓치고?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