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회차) 사소한 배려는 축복이 되고
그녀가 앓아누워있는 동안 귓가에서 내내 맴돌던 이름이 있다.
‘나를 찾아온 작은 나비야. 일어나.’
‘좀 더, 지켜봐야 하겠습니다.’
‘죽는 건 아니겠지.’
‘발을 크게 다치긴 했지만··· 깨어나질 못하고 있어서.’
‘무조건 살리게.’
‘네······ 좀 주무시는 것이, 이러다 이 여인이 아니라···’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럼 저는 심신에 활기를 넣는 약재를 추가해보겠습니다.’
‘좋은 약을 구해보게.’
"······ 후우"
‘나는 타스, 너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많다.’
타스가 우마리 손을 잡는다.
‘첫눈에 너를······ 타스, 타스라고!’
우마리는 몇 번 눈을 깜박거리더니 긴 잠에서 깨어난다.
“타스!”
시원한 허브향이 코를 간질이며 코가 맞닿을 정도로 너무 가까운 남자의 큰 얼굴과 마주쳤다.
“당신이··· 타스?”
눈 깜빡하는 사이에 남자 얼굴이 손 터치 한 번에 스마트폰 화면이 넘어가 듯 사라졌다.
“어?”
침실 토란(Toran)에 달린 황금 테슬이 무언가에 부딪쳐 흔들린다.
‘유치하게.’
그녀가 누워있는 자신을 보니 다른 옷으로 갈아입혀져 있다.
“뭐죠! 함부로 여인의 옷을 갈아입힌 건가요.”
“······”
“혹시, 당신 변태는 아니겠죠.”
그녀는 낯선 가운이 입혀진 것에 불길한 억측을 하기 직전이다. 숨어 있던 남자가 침대 뒤쪽에서 쭈뼛거리며 걸어 나온다.
“참나, 살려 놓으니 깨어나자마자 한다는 말이.”
우마리의 눈초리가 올라가며 따지려 하자 그가 정색한다.
“어이가 없군! 오만한 것인지 겁이 없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하녀들을 시켜서 손 하나 까닥하지 않았으니 안심하시오.”
그의 태도와 목소리에 담긴 신뢰감에 안심한다.
“믿을게요.”
“아 암! 믿어야 하지.”
밖에서는 계속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문뜩 걱정이 밀려온다.
“저기요. 난 아무래도 집으···”
우마리가 걱정에 대해 말하려 하자 그가 도망치듯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그가 밖의 누군가에게 일러둔다.
“호세, 난 지금부터 ······ 알았지. 그동안 이 주변을 나를 보좌하듯이 철저히 지키게.”
우마리는 일어나려 했으나 오른쪽 발이 묵직하다. 퉁퉁 부어 오른발을 천으로 감싸 호박처럼 커져 있다.
“다들 걱정하고 있을 텐데.”
그녀는 어렴풋이 사고 장면이 떠오른다. 엄청난 속도에 매달아 놓은 화분과 충돌하고 화분이 발등에 떨어지면서 다음 기억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땐 오로지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 좀 다르게 대처했더라면 모두를 걱정시키지 않았을 텐데.'
누워있으니 우마리는 생각만 많아지고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자주 들린다.
“한쪽 다리는 멀쩡하니 빈틈을 노려 달아날까.”
공주는 움직이기 어려웠지만 며칠이 지나자 혼자 움직임이 가능해진다.
“몸을 일으키고 걸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지 아파보고 알았어.”
밖에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도대체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우마리의 귀를 시끄럽게 만든 이는 집사 호세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목소리를 낸다.
“저희 모두는 우마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나요.”
“······”
아무 대답도 없이 사라진 호세. 그는 타스를 보필하며 시중을 드는 자로 처음엔 우마리를 첩자 대하듯 경계했다. 그러나 점차 타스 보다 더 극진하게 우마리를 대한다. 그는 아침마다 문밖에서 말했다.
“우마리님, 감사합니다.”
호세가 구해 온 사스레피나무와 약재를 활용해 하녀들은 부기를 빼기 위한 노력을 했고 덕분에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날아갈 것 같아, 이렇게 홀가분하다니.”
혼자 남겨진 방. 그녀가 걸을 때마다 나무판자 소리와 빗소리가 합쳐진 합주는 재미있다. 창가에 치렁치렁 달린 레이스를 밀고 밖을 내다본다.
촤아아촤아아
“비가 더 많이 쏟아지네.”
계속되는 비를 바라보는 그녀는 어깨가 축 늘어진다.
“타스가 오면 떠나겠다고 말해야겠어.”
헐레벌떡 하녀가 뛰어 들어와 창가 커튼을 서둘러 내린다.
“아가씨, 이러시면 큰일 납니다.”
“큰일이라니? 무슨 말이지.”
“창가에서 멀리 떨어지셔야 합니다. 아직도 위험이 사라지지 않았으니까요.”
“위험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게 뭔지 자세히 알려주렴.”
“그러니까, 그게요.”
시녀는 커튼을 다시 살짝 밀어보고 닫는다.
“반역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반역?”
밖에서 발소리가 들리자 놀란 하녀가 발을 동동 구른다.
“아가씨, 저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타스가 내는 발소리와 전혀 다른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멈추고 노크한다.
“들어오세요.”
하녀가 끊어진 천조각처럼 늘어져 문을 열자, 호세가 고개를 돌리자 하녀가 꽁지를 빼며 나간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호세가 인사를 하면서 우마리의 발을 확인한다.
“많이 좋아지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아닙니다. 저는 왕자님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시킨 일은 하나인데 여러 가지로 더 많이 애쓰셨죠.”
“알아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드디어 모두의 염원을 왕자님께서 다 처리하셨습니다.”
우마리가 타스가 왕자라는 말에 놀라지 않아 호세는 의아해한다.
“호세가 내 이름을 알고 있듯 나도······”
"사실, 고아에 공주님을 찾느라 어린아이까지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다만 이곳이 왕자님께서 은신하시는 곳이라 알릴 수 없었음을 알아주십시오."
“그랬군요. 좋지 않은 일이 있었군요.”
“맞습니다. 굴라 왕국에서 세력다툼으로 큰일을 겪었습니다.”
호세는 우마리가 초라한 의자에 앉아 있지만 고상한 언행을 짐작해 그녀의 탁월함을 간파한다.
“세력다툼이라면 혹, 난을 일으킨···”
“그렇습니다. 굴라 왕국에는 첫째 타스 왕자님을 빼고 세 명의 왕자님이 문제셨지요. 굴라 왕국은 황금 금맥 위에 만들어진 왕국으로 왕자님들이 금에 대한 욕심에 반역을 저지른 것입니다."
"왕께서 어떻게 되셨나요."
“당시 지하 감옥에 감금당한 상태셨습니다."
호세는 그동안 굴라 왕국에서 벌어진 일과 타스가 반역을 일으킨 왕자들을 소탕하고 문제를 해결했음을 알려주고 나갔다.
"왕자님께서 내일 이른 새벽에 오신다고 연락병이 알려왔습니다. 그럼 쉬시지요."
우마리는 호세가 들려준 굴라 왕국에 대한 여운을 느낀다. 타스는 왕의 심부름으로 영지 시찰에 나서던 중 반역이 일어난 것을 알았다. 재빨리 중립 지역인 남인도 고아로 피신한 것이다. 반역을 주도한 왕자들끼리 권력 싸움이 일어났고 그중 막내 왕자가 죽는다.
“왕자님, 상황이 변하고 있습니다. 어서 움직이셔야 합니다. 대신들이 왕자님을 돕겠다고들 합니다.”
타스는 전혀 움직이려 하지 않다가 우마리를 만나고 달라진다.
"반역을 일으킨 왕자들을 소탕해 굴라 왕국은 제 모습을 되찾을 것이다."
굴라 왕국의 어수선한 일들을 모두 처리한 타스 왕자가 이른 새벽에 돌아왔고 그가 문밖에서 서성인다.
'우마리 공주를 보내줘야 할 때가 되었어.'
해가 뜨자 타스가 우마리를 찾아왔다.
"많이 좋아졌다고 들었는데 이제 보니 다 낫았군. 그동안 갑갑했을 텐데 나와 함께 나들이를 나가보는 것이 어떻겠소."
"좋아요. 당신과 함께 나들이 가고 싶어요."
“저 높은 담 넘어 숲을 끼고 있는 마을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거기로 갑시다.”
“잠시만요. 옷을 갈아입고 나올게요.”
“?”
“어때요, 잘 어울리죠.”
타스가 활짝 웃는 우마리를 보고 따라 웃는다.
“당신은 아주 고상한 취미가 있군.”
“눈에 띄기 싫어서요.”
“거울을 봐요. 당신은 뭘 입어도 눈에 띌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래도 이게 좋을 것 같아요.”
“당신이 좋다면 나도 좋소.”
“이제 갈까요.”
“어서 갑시다.”
우마리는 몸가짐과 행동이 입방아 오르내리는 과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어.'
타스는 그녀와 관련된 몸짓, 심지어 그녀가 아침에 먹고 버린 바나나 껍질까지 사랑스럽다.
‘내가 봐도 제정신이 아니군, 정신 차려 타스!’
그는 호세에게 부탁해둔 도시락을 들고 그녀와 처음으로 밖을 나왔다.
“타스, 새로운 세상에 온 것 같아요.”
“나오니 홀가분해서 얼마나 좋겠소. 당신이 행복하니 내가 더 좋군.”
“어머, 저길 봐요. 내가 타고 왔던 흰 소를 닮았어요.”
딸랑, 딸랑
풍채가 왜소하고 목에 붉은 타래실을 건 노인이 방울을 흔들며 구걸한다.
“축복을 받으시오.”
노인 옆에 화려하게 치장한 흰 소는 몸이 탄탄하고 윤기가 흐른다.
“소원을 기도해 드립니다.”
우마리는 소원보다 애처롭게 마른 노인을 위해 선 듯 도시락을 건넨다.
“이것 좀 드세요.”
도시락을 받아 든 노인이 축복의 기도해주기 위해 우마리의 눈을 보다가 다리가 풀려 주저앉는다.
“세상에나··· 만상에나···”
“괜찮으세요. 저기 그늘에 쉬면서 물과 음식 좀 드세요.”
우마리가 다가가자 대신 타스가 날래게 노인을 일으켜 나무 그늘로 데려가 앉힌다.
“노인장, 남들 소원을 기도해주기 전에 자신부터 기도해야겠소.”
“할아버지, 너무 야위셨어요.”
노인이 도시락을 끌어안고만 있자 도시락을 조심스럽게 품에서 꺼내 열어 준다.
“어서, 드세요.”
노인이 고개를 연신 숙이며 도시락을 허겁지겁 먹는다. 마을 구경을 위해 우마리와 타스는 노인을 뒤로하고 걷는다. 노인이 그 둘을 보며 축복의 기도를 한다.
“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땅에 풍요로움이 가득하고 그곳이 시작과 끝으로······"
- 작가의말
당신에게 간절한 것은 무엇인가요?
당신의 간절함을 말했지만 아무렇지 않게 여긴다고 속상해하지 마세요. 당신에게 간절한 것은 ‘지극히 정성 어린‘ 것으로 함부로 혹은 가볍게 발설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간절함을 이루는 마법은 당신에게만 달려 있으니까요.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