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회차) 시공이 열렸다
에스델이 중얼거린 말이 떠돌아 라나와 재희의 귀에 닿는다. 지켜보는 타인도 궁금할 정도로 둘의 분위가 오묘하다.
둘은 고고하게 핀 백합처럼 숙연하다.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 나그네 중 안녕이(Gute Nacht)가 흐른다. 카페 안을 휘돌아 둘을 주변을 감싼다.
··· 난 내 여행을 떠날 때를 정할 수 없지만 내 길을 스스로 찾아야 하네. 이 어둠 속에서 달빛에 드리워진 그림자와 함께 그를 벗 삼아 떠나리 짐승의 발자국을 따르리 이 하얀 벌판에서······
마치 한가하기로 약속을 한처럼, 둘은 맑고 시원한 냇가에 발을 담그고 흐르는 가곡에 귀를 담근 듯 눈을 감고 있다. 에스델 조차 그 모습이 너무 편안해보인다. 차와 음식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물러난다.
'라나.'
먼저 눈을 뜬 재희.
“라나! 처음 본 누군가와 말없이 앉아 상대의 양해나 이해를 구하지 않고 통할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네요.”
그의 손이 가볍지만 느리게 올라간다.
“지금 이대로가 다 좋습니다.”
모자를 벗어 의자에 내려놓을 때 그녀가 그의 가느다란 숨소리를 맥을 짚듯 더듬어 본다.
“힘들어 보이세요. 어디 아픈 곳이라도?”
“눈으로 보면 몹시 부실해 보이지만 이 모습은 저 다움이고 온전함입니다.”
그녀가 입술을 떨며.
“아마도 라나가 아픈 것은 모두 이 사람 때문일 것입니다. 생명을 지우기 위해 온갖 방법으로 해악을 저질렀으니까요.”
“혹자가 그랬습니다.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갈 때, 개가 주인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할 수는 있어도 주인을 떠날 수는 없다고, 과연 그럴까요?”
“이건 투자가 앙드레 코스톨라니가···"
"그저 보이는 그대로···"
"사람이 끈으로 묶은 개 줄을 잡고 있다면 모를까. 개 마음에 따라 주인을 떠날 수도 있겠지요.”
“혹자는 주인의 입장에서 개를 보았습니다. 그 누구의 입장도 아닐 때, 개도 주인도 지우면 끈만 남습니다. 연결고리지요.”
“그래도 그렇게 다 지우면 무슨 관계가 성립···”
“이번엔 끈을 지우고 사람과 개를 따로 보세요. 시야와 시선에 따라 개가 주인을 끌고 가는 것인지, 주인이 개를 데리고 가는지.”
“아!”
“어떤 끈도 쥐지 말고 자유롭게 두고 봐야 합니다. 연결이라는 것이 잡고 놓는 것에 따라 상태가 변합니다. 그러니 나를 보고 괴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대로였음을···”
“듣고 보니 어엿한 모습으로 제대로 보입니다.”
라나가 재희 말에 빙그레 웃으며 갑자기 모자를 쓰고 일어나 손을 흔든다.
"라나, 필요한 것이 있으면 제가 주문을 하겠습니다."
그녀가 라나를 따라 일어나 손을 흔든다.
뚜벅 뚜벅
카운터에서부터 걸어오는 소리가 묵직하게 들린다.
'발소리가, 에스델이 아닌 것 같은데?'
모자를 쓴 라나를 바라보며 귀를 쫑긋 세운 그녀 앞에.
“형수님 아니세요. 어떻게 여기에.”
무진이 재희를 보고 반갑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자리에 재희가 있어 난처한 모습이다. 그런 그를 보고 재희가 의자를 빼며.
“오셨네요. 이쪽으로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 네! 저를요?”
목을 길게 빼고 놀란 모습이 타조를 닮아 그녀가 그의 어깨를 토닥여 준다.
“차는 미리 시켰습니다.”
무진이 재희에게.
"형수님은 이 자리에 제가 나오는 것을 아셨군요."
"전혀 몰랐습니다. 제가 억지를 피워 끼어든 자리라 불편하시지요."
"아닙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생각지 못한 곳에서 존경하는 분을 만났는데요. 너무 의외라서 조금 놀랍고 당황스러워서."
그녀가 무진을 볼 때마다 짓는 함박 미소가 큰 웃음으로 변한다.
"따뜻한 스페셜 커피로 시켰습니다."
엄지를 치켜세우며 무진이 미소로 답한다.
“역시! 감사합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에스델이 무진이 앉기도 전에 스페셜 티를 가져왔다. 다들 의자를 두고 서있다가 셋이 자리에 앉아 에스델이 커피를 내려놓는다.
‘뭐야, 아직도 신부님은 모자를 쓰고 계시네. 왜 저러신대.’
트레이를 든 에스델에게 라나가 묻는다.
“제 모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 봅니다?”
화들짝 놀란 에스델이 하마터면 트레이를 떨어뜨릴 뻔했다.
“에엣! 그게 아니라 얼굴도 궁금하고 언제 모자를 벗으시나··· 에구구.”
재희가 무례한 그녀에게
“에스델, 예의를···”
화력 좋은 갈탄처럼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민망한 에스델.
“어머머, 이 주책바가지 좀 봐. 정말 죄송합니다. 말씀들 나누세요.”
염탐하다 들킨 사람처럼 꽁무니를 빼며 그녀가 도망친다.
라나 옆에 무진이 앉았고 재희가 그 둘을 흐뭇하게 번갈아 보면서.
“이제야 알 것 같아요. 이런 마음이군요.”
무진이 아리송한 재희 말에.
"어떤···?"
모자를 뒤집어쓴 라나와 재희에게 무진이.
“형수님, 신부님과 서로 아시는···”
재희가 헛기침을 하고.
“라나! 모자를 벗기 전에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괜찮을 까요.”
“그러세요.”
그녀가 일어나 무진에게 간다. 오른손 약지 손가락을 만지며 푸른 점을 확인하고서 반지를 빼고 무진에게 오른손 약지 점을 보여준다.
“저와 똑같은 점이.”
재희가 무진과 라나 그리고 자신의 오른손을 테이블에 편다.
“떠돌이별처럼 다니던 푸른 점들이 한 지점에서 만나니 이렇게 빛나네요.”
무진이 한여름에 내리는 흰 눈을 모아 뭉치듯 재희와 라나의 손을 주무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라나가 모자를 벗고 무진을 본다.
“때가 올 줄 알았지만 갑작스럽게 만날 줄 몰랐어. 또 멜리에 네가 아니라, 내가 너를 찾을 줄은 더욱 몰랐고. 이렇게 서로를 끌어당겨 만나다니. 혼자 일 수 없는 내가 이제 너를 따라 움직이고 드리워질 수 있어서 좋아.”
무진이 라나 얼굴을 보고, 덕장에 놓인 황태처럼 표정이 얼었다가 녹으며 낯빛이 변하기를 반복하더니 기겁한다.
“제발, 두 사람 중 아무나, 무슨 상황인지 설명 좀 해주세요.”
무진 얼굴을 어루만지는 재희.
“그냥 다 좋습니다. 너무 좋아서···”
그녀가 말을 다 하지 못하고 하염없이 그리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서럽게 눈물을 흘리며 자리에 앉는다.
“준비되지 못한 사람이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두 분 앞에 있는 것이 너무 부끄럽습니다.”
시야가 흐려지고 귀가 먹먹해지는 순간, 라나가 무진을 힘껏 안아준다.
"으윽! 멜리에··· 라나."
훌쩍 거리며 라나가 건네줬던 손수건으로 그녀가 얼굴을 닦고 쌍둥이를 눈에 담는다. 라나와 무진은 담담하고 평온한 미소로 재희에게 손을 내민다.
무진이 그녀에게.
“처음 학장님 실에서 뵌 날부터 닮고 싶고 존경했습니다. 지혜롭고 아름다우신 분이 어머니라니.”
그 말을 듣고서 그녀는 서러운 북받침에 꺼이꺼이 울음이 목에 걸린다.
‘무진이 내게 어머니라고 불렀어.’
손수건을 잡은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눈물이 테이블에 흐른다.
주르륵
쌍둥이 라나와 무진이 흐르는 눈물을 보고 라나가 먼저.
“눈물의 강!”
무진이 서둘러 테이블에 놓인 티슈로 눈물을 닦으려 애를 쓰지만 눈물은 닦아도 그대로다.
“처음 마주하게 되었는데···”
라나가 읊조리듯 노래를 부른다.
“눈물을 강을 건너야 하지. 손을 내밀고 발을 붙잡아도 어차피 눈물의 강에 이르렀다면, 이 강에 건너야 하지. 눈물의 강을 건너야 우린 다시 별이 될 수 있기 때문이지.”
재희는 구슬픈 노래를 듣고서 무진이 닦지 못한 눈물을 급히 손수건으로 닦는다.
“라나, 눈물을 닦았습니다.. 이젠 울지 않을 테니 그 노래를 부르지 마세요.”
라나는 모자를 쓰고 일어나 단호하게 말한다.
“셋이 모여 흔적이 더 커지면 모두 제자리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여기서 안녕을 고해야겠습니다.”
모자를 빼앗으려 그녀가 손을 뻗으며.
"제발, 가지 마세요."
흔들림 없는 라나가
“내 분신인 멜리에, 노암을 보낼 테니 함께.”
"그럼, 라나는?"
"자슬링이 있다는 것을 다 알면서! 난 늘 뒤에서 너의 등을 보며 앞서고 싶었어. 그러다 내가 처음으로 앞에 서보았는데··· 이제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야."
무진이 깍지를 끼며 조용히.
“밖을 보느라 내 안과 뒤를 제대로 보지 못했어. 라나 미안해.”
라나가 얼굴을 돌리며.
“고마워, 나도 미안해. 내가 이렇게 만든 거야. 우리가 만난 순간 우마리타스의 시공이 열렸어. 그것도 너무 빨리 앞당겨졌고.”
라나가 태연하게 걸어 나가고 재희가 그를 잡으려 할 때 무진이 말린다.
"여기 그대로 있습니다."
"무진! 라나를 이대로 보낼 수 없어요."
애처롭게 사정하는 그녀가 고개를 돌렸을 때 이미 라나는 사라지고 없다.
"아, 그새 라나가 없어! 어디로 간 거지."
“아닙니다. 우린 본래 하나입니다. 여기 그대로 있습니다.”
“무진! 왜 이렇게 모질게 구는 겁니까."
무진이 재희를 안아주며 살며시 의자에 앉힌다.
"라나는 그림자입니다. 저도 제 그림자를 보고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림자? 그럼 멜리에 라나에게 나는 무엇입니까. 혹시 나도 그림자."
사랑스럽게 그녀를 바라보는 멜리에 라나.
“나와 그림자를 잠시 분리시켜준 틈입니다.”
“틈이요!”
“당신은 제게 찾아온 겨를이며 여유입니다. 우주에서 자궁은 정감 어린 휴식이며 쉼터입니다. 지구에서는 어머니라 부릅니다.”
도무지 무슨 상황인지 몰라 헷갈려하는 재희에게
"머무르고 싶지만 제자리로 돌아가야 할 통로가 너무 빨리 열렸습니다. 이대로 문이 닫히면···"
멜리에 라나가 눈을 깜빡거린다.
범수가 나타나 재빨리 재희 눈을 가리자 그녀가 잠이 든다.
“재희가 여기 왜, 어떻게 된 거야."
"우마리타스 시공이 열렸어."
"벌써? 아직 여유가 있다고 이스타가 그랬잖아."
잠든 재희를 멜리에 라나가 지긋이 바라보며.
"시공이 틀어졌어. 난 당장 이스타를 만나봐야겠어. 잠깐이었지만 인간들에게 그림자가 노출됐으니, 거울을 써서 꿈으로 만드는 것이 좋겠어."
"알았으니. 어서 가, 서둘러야지."
멜리에 라나가 사라지자, 범수가 레몬 수를 채웠던 빈 컵에 거울을 비춘다.
- 작가의말
준비되지 못한 사람이,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있는 것이 너무 부끄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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