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회차) 룸미러를 통한 버그
재희가 얼굴을 내밀며 동그라미 이중 테두리 거울을 손으로 가리킨다.
“저, 저기.”
“쉿! 손을 내리고 당신은 눈을 감고 못 본 척해.”
범수는 테이블 모서리 끝 거울에 두리번거리는 노인을 발견한다. 못 본 척 고개를 슬며시 돌리며 가운에서 손거울을 꺼내 비춘다.
“좋아, 우린 아무렇지 않은 듯 이렇게······”
그는 손거울에 노인이 보이자 손으로 거울을 가리고 호주머니에 넣는다.
“됐어. 재희 잘 들어. 우린 저기 보이는 계단으로 올라갈 거야. 평상시처럼 웃으며 이야기해줘.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알았어요.”
그녀는 범수 어깨에 기대 루시드폴의 ‘알고 있어요’를 흥얼거리며 계단을 오른다. 그가 다시 손거울을 호주머니에서 꺼내 테이블을 비추며 고개를 숙여 거울을 본다. 칙칙한 붉은 옷을 입는 노파가 테이블 주변을 돌며 거울을 본다.
‘침입자가 분명하군.’
“노파가 테이블 중간에 놓인 가장 큰 거울을 만진다.”
그때, 범수는 코츠월드 집을 떠올렸고, 둘은 차 안에 앉은 채로 서로를 바라본다.
“어, 어떻게 된 거예요?”
“모르겠어, 분명한 건 침입자 혹은 버그야.”
“아직도 저택에 있을 까요?”
“손거울의 신호가 약한 걸 보면 우리가 나오면서 노파도 있던 곳으로 되돌아갔겠지.”
“당신이 연결을 위해 만든 장소가 노출된 거죠.”
“아니, 노파는 다시는 저택에 올 수 없어.”
“그걸 어떻게 장담해요.”
“기가 막히게도 노파가 테이블에서 가장 큰 거울을 만질 때 우리가 나왔거든. 그 거울은 혼돈으로 되돌릴 수 없어. 길을 잃고 헤매는 거울이지 실리와 암흑만 다룰 수 있는 거울이야.”
“다행이네, 너무 어둡고 흐릿해서 누구인지 알 수가 없어서 그게 아쉬워요.”
“버그는 내 손거울에 담겼어.”
범수가 작은 손거울을 재희에게 보여준다.
“옴리 탭이야. DNA와 인지, 초감각을 통합해서 일치하면 열리지. 하지만 모든 것이 만족되어도 내 생각과 정서가 허락하지 않으면 열리지 않아.”
“고도의 기술이 융합된 갤럭시 탭 같은 건가 봐요. 인간은 아직 거기까지 발전하지 못했는데.”
“그 이상이지만······ 재희, 부러워하지 마. 데제리오네쳐는 소멸되었으니까.”
“데제리오네쳐?"
"우주 최고 문명 행성이었지."
"그런 행성이 왜? 무슨 이유로 소멸되었어요."
범수가 거울을 꺼내 만지작거리며 멍해진다.
“수·과학과 양자 AI 두뇌에 대한 맹신으로 생명체의 존엄과 사랑을 우습게 여겼어. 그 대가는 엄청났지. 우주 108계 중 초고도화로 연결된 50%가 소멸되었으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급속한 기술 향상을 무턱대고 좋아할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아. 무서운 사례네.”
"아무튼 혼돈의 겨울을 함부로 만지지 못하게 큰 테이블 가운데 놓은 건데. 노파의 탐욕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야. 내리자."
그가 차에서 내려 재희를 에스코트하며 거실 소파에 앉는다.
“범수 씨, 연결을 통해 버그가 흘러 들어왔다면 안전하지 않은 건데 어떡해.”
“사실 어떤 식으로 연결될지 몰랐지만 연결이 된다면 장소가 필요할 것 같아서 마련한 저택인데, 무엇보다 내가 거울을 잘 다루거든.”
그가 으쓱하며 소파에서 엉덩이를 들썩거린다.
“아이처럼! 모일 장소라면 룸미러를 통해 연결되는 이들은 어디 있어요.”
“몰라, 연결 신호라도 내가 먼저 보내야겠어. 나도 선택받은 존재라 그들이 누구인지, 몇 명이 내려 왔는지 전혀 아직은······”
그녀가 무언가 골똘하더니 걱정이 스친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비밀을 인간인 내가 알아도 돼.”
“당신은 이미 나를 비롯해 우마리와 연결되어 있었잖아. 실리는 인간을 함부로 나프타와 연결하지 않지. 인간이 나프타를 만나려면 합당한 크기의 고통을 통해 선택되는데 당신도 그 시험을 치렀을 거야.”
“!······ 있었어.”
“으응, 뭐라고.”
“그러니까, 어떻게 고풍스럽고 멋진 저택을······”
“좋은 질문이야. 오래전 데이터를 쌓아 업그레이드 차원에서 휴가를 선택했고 지구로 왔지. 영국의 작은 어촌 발리타바에 살았어. 매우 가난했고 부자가 되기 위해 베네치아로 가지. 그 길에서 윗마을 영주의 성에서 큰 도움을 받았어. 결국 베네치아에 도착해 거울 장사로 엄청난 부를 이루고 사람들에게 지혜를 알려줬지. 이곳이 바로 윗마을 영주의 성 별채가 있었던 곳이야. 성도 사라지고 흔적은 없지만 그 자리였다는 것은 확실해.”
“무슨 게임을 한 것처럼 말하네. 약 올라."
"미안, 우주에는 다양한 체계의 여러 세계들이 있어. 나프타가 누리는 특권 중에 하나라고만 해두지.”
"그렇게 말하니까 더 얄미워!"
그가 그녀의 목에 입을 맞추며 얼굴 표정으로 재롱을 부린다.
“이번엔 게임이 아니야. 선택받고 내려와서 인간처럼 겪어내야 해. 당신에게 버림받고 떠돌아다녔고, 추억이 가득한 코츠월드로 왔지. 어쩌면 당신이 나를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머물기로 했어. 서울을 떠나기 전 사촌 형이 아들을 맞아 달라고 부탁했었는데 무진이 말이야. 형 집안 사정이 최악이었어. 그런데 그땐 나도 힘들어서 그 말이 들리지 않았지. 이력서를 옥스퍼드에 넣었는데 연락이 왔고 무진이를 영국으로 불렀어.”
재희가 범수의 어깨를 떨어주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이를 보면 부모가 보인다고 하잖아. 김 교수가 궁핍한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좋은 아버지와 좋은 삼촌을 만나 훌륭한 교수가 되었네. 참 이스타 원장도 당신을 엄청 따랐던 것 같던데.”
범수가 몸을 돌려 재희 얼굴을 부드럽게 감싼다.
“당신 정말! 내 조카 이스타는 또 어떻게 알아.”
“여기에 올 수 있었던 건 바로 이스타 원장 덕분인데.”
“짜식, 또 빚졌네. 여동생 윤미 아들로 내 아들 같은 조카야.”
“윤미 씨, 결혼했었어?”
“아니, 미혼모.”
“그럼, 혼자 이스타 원장을 키운 거야.”
그가 일어나 서성거리며 창 밖을 본다.
“이스타야말로 정말 대단한 아이지. 생각해 보니 특별한 점들이 많았어. 이스타도 무진이도······ 가만! 여태 중요한 포인트를 놓치고 있었어.”
“뭐를! 왜 그래.”
“당장 알아봐야겠어. 잠시만 다녀 올게.”
그는 부리나케 차로 향했고 재희가 다급하게 그를 부른다.
"범수 씨, 옷 입고 가! 가운만 걸쳤잖아."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 놓으며 어렴풋이 기억을 떠올린다. 여름방학 기간, 서울에 돌아오면 루틴처럼 빼놓지 않고 총장과 학과장을 만난 자리에서 교수 소개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유재희 교수님, 김무진입니다. 총장님과 학과장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아 아, 네.”
‘웬일로! 서울대에서 젊은 피를 파격적으로 수혈했네.’
재희가 얼떨결에 김 교수 방에 앉았다.
“30분이면 충분합니다. 영국에서 보내온 블랙티인데 드시고 가세요.”
그녀와 무진은 3시간을 넘기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범수 씨 말고 남자와 단둘이 30분을 넘긴 적이 없는데 말이 통하네.’
“진행 중인 실험과 논문 이야기로 시작했었지. 궁금하지도 않았던 시시콜콜 일상 이야기까지 뭔가 특별하고 정겨웠어.”
***
대한항공 뉴욕 출발 인천 도착. 보잉 747-8 I 편, 미국 시간 오후 5시. 일등석에 멜리아 라나와 자스링 신부 그리고 경호원 둘이 앉아 있다.
“멜리에님, 피곤하지 않으신지요.”
“늘 상상하던 곳을 드디어 가는군.”
“제가 일정에 없는 뉴욕을 넣었습니다.”
“왜, 그랬지.”
“성 패트릭 성당 시몬 주교가 멜레에 님께 워낙 극진했고, 서울에 가시기 전 꼭 뵙고 싶다고 간절하게 부탁해서······”
“성하께서는 아시나?”
“모르십니다. 예전 UN 본부에 들렀다 가시는 줄로만······ ”
멜리에가 발을 슬쩍 들어 올리며 흔든다.
“그럼, 잘했군.”
“네에?”
“늙은이는 질색이야. 순결한 어린양들이 좋아. 시몬도 꽤 늙었던데··· 뭐 내게 극진했다니 됐고, 이젠 서울로 가는 거지.”
멜리에가 퉁명스럽게 말하고 창밖을 본다.
“네, 직항 노선이라 푹 주무시면 도착할 겁니다. 불편하시면 약을 드릴까요.”
“컨디션이 나쁘지 않아서 약은 필요 없어. 전용 비행기를 거부한 이유가 시몬 때문이었어.”
“아닙니다. 전용기가 뜨면 기자들의 눈에 띄기 때문에.”
“라쿠카라차들!”
멜리에가 급하게 들어오는 여인을 힐끔 보며 숨을 들이켠다.
‘귀걸이 한 짝이 떨어진 줄도 모르고 ··· 서울에서 한 짝을 찾겠군.’
거북이 목걸이를 반짝이며 사무장이 자스링에게 부탁한다.
"마지막 손님께서 타셨습니다. 안전벨트를 매주십시오."
경호원이 멜리에의 안전벨트를 확인하고 자리에 앉는다.
‘으으음! 좋은 향, 특별한 존재에게서 풍기는 사랑의 향기.’
“내 소명이 서울이라는 징조군.”
“멜레에님 부르셨습니까?”
“자스링은 쓸데없이 귀가 밝아.”
활주로를 달리며 이륙하는 비행기에서 멜리에가 슬그머니 향기를 쫓으며 슬라이딩 도어로 막은 우마리 좌석을 본다.
‘따분한 생활도 이젠 끝이야.’
자스링은 멜리에와 함께 서울로 향하는 마음이 착잡하다.
‘오랜 된 믿음을 믿으며 얼마나 열심히 준비하고 기다렸는데 이게 뭐야. 실망을 넘어서 내가 그렸던 성자의 모습이 아니라고.’
원장 수녀 마농과 보육 수녀의 정성스러운 보살핌으로 12개월이 지났다.
우웅웅우웅웅
(교황) 노암.
(노암) 성하!
(교황) 멜리에 라나 님을 모시고 바타칸으로 들어오게. 몽크레 가문이 전용 비행기를 띄웠으니 다들 들어와.
(노암) 계속 일상과 특이사항을 보내 드렸습니다. 12개월이 지났지만 의사의 소견이 좋지 않습니다.
(교황) 바티칸 닥터 마태오도 비행기를 타고 갔네. 그가 내리는 진단에 따라 하자는 대로 하게.
(노암) 성하, 따르겠습니다.
교황의 부탁으로 몽클레 가문에서 전용 비행기를 은밀하게 서울로 보냈다. 멜리에 라나의 보육을 책임지던 원장 수녀 마농과 노암 그리고 자스링이 바티칸에 돌아왔다.
마농이 자스링 신부를 다급하게 찾는다.
“자스링 신부님, 함께 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마농 수녀님, 무슨 일로?”
그녀가 가슴에 손을 얹고 놀란 마음을 진정시킨다.
“감히 입에 담기가 어려워서······”
“그럼 어서 갑시다.”
- 작가의말
오래된 믿음!
자신이 변함없이 따르고 있는 믿음, 당신이 간직한 오래된 믿음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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