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회차) 쌤 마음을 훔치다
우우웅우우웅
(수 지) 응, 엄마. 지금 가고 있어.
(수지어머니) 미안해서 어쩌니, 오늘 저녁 안 되겠다. 너도 알지 성북동 친구들 오늘 다 모였잖아. 얘들이 모처럼 만났다고 놓아주질 않네.
(수 지) 오늘 목소리가 밝네. 모임 중에 통화하면 늘 우울했었잖아.
(수지어머니) 그러게, 골이 깊었는데 나이가 드니까 너그러워졌는지 재미있네.
(수 지) 그럼 좋은 거지. 재미있게 놀다 와.
(수지어머니) 넌? 저녁은 먹었어.
(수 지) 우마리랑 있어. 내 걱정은 말고.
(수지어머니) 휴우 다행이다. 그럼 엄마 쬠만 더 놀다가 갈게.
(수 지) 알았으니까, 천천히 와.
뚜뚜뚜뚜
수지는 인사동으로 차를 돌린다.
‘우마리는 혼자 있고 싶다고 했으니깐, 그래 시험해 보자.’
***
인사동 하나로빌딩 옆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운 수지가 아이폰 등판을 문지르며 망설인다. 그녀는 베제로의 책상에서 그의 스마트 폰을 발견했었다.
‘어! 비밀번호가 걸려 있지 않네. 김무진은 누구야 많이도 걸었네. 그리고 크리스··· 그래도 연락하는 사람들은 있었어.’
베제로의 스마트폰을 닫으려다 순간적으로 전화를 건다.
우우웅.
‘됐어. 쌤 번호는 땄고, 내가 전화 걸면 놀라서···’
***
우웅웅우웅웅
(베제로) 여보세요?
(수 지) 쌤, 저예요. 수지.
(베제로) ······!
(수 지) 왜, 말이 없어요.
(베제로) 내,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요?
폰으로 들리는 베제로의 목소리가 커진다.
(수 지) 아까 책상에 있길래.
(베제로) 정말, 이 아가씨 못쓰겠네. 허락도 없이 남의 폰을 함부로 만지고.
(수 지) 그러게! 비번을 걸어 둬야죠. 무조건 쌤 잘못이에요. 그것보다 전화한 건 제가 손버릇이 좀 있는데 나도 모르게 쌤 물건을 가져왔지 뭐예요. 아무래도 다시 돌려 드려야 할 거 같아서요.
(베제로) 나 원 참, 기가 막히는군. 뭘 가져갔지?
(수 지) 이게··· 메모리 카드.
(베제로) 지, 지금 어디요. 당장 갈 테니.
(수 지) 하나로빌딩 옆 공영주차장에······
뚜뚜뚜뚜
“성격도 급하셔라. 하기야 메모리 카드면 나도 놀라지.”
수지가 차 안에서 기다린 것도 잠시, 멀리서 보아도 베제로 쌤으로 보이는 사람이 슬리퍼를 끌고 뛰고 있다.
“아니, 육상 단거리 선수셨나. 슬리퍼를 신고서 저렇게 뛰다니!”
수지가 차에서 내려 손을 흔들자 베제로가 콧바람을 뿜으며 달려와 손을 내밀며 멈춘다.
헉헉헉
“이리, 어서! 메모리 카드 내··· 놔··· 요······”
수지가 그 말을 듣고 쌩하니 차에 타더니 앉아 꿈쩍도 앉는다.
똑똑똑
“이봐요. 아가씨!”
수지가 문을 열어 준다.
“타세요.”
“장난하지 말고 그냥 주시오.”
“장난 아니에요. 타셔야 할걸요.”
“아니, 절대 안타!”
“홈런도 아니고 기껏 안타!”
차 문을 슬쩍 잡은 베제로가 쌀쌀맞다.
“아가씨랑 농담할 기분 아니니 메모리 카드나 내놔요.”
“그게 아니라, 잠깐 우마리 일로 드릴 말이 있어서 그래요. 훔친 것도 드릴게요.”
“우마리가 왜?”
“안 잡아먹어요. 나도 시간 없다고요. 확인만 하면 돼요.”
베제로가 주춤거리다 차에 올라탄다.
“뭐요?”
“숨 좀, 돌리세요.”
베제로가 몸을 돌리며 재촉한다.
“우마리에게 무슨 일이 있소.”
“그것보다. 김! 김무진이 누구예요.”
베제로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 수지를 추궁하려 든다.
“김 교수는 어찌 알고 있소.”
“아니, 하도 전화를 많이 하셨길래, 궁금해서리.”
“이, 아가씨가 정말! 남의 핸드폰을 가지고 도대체 뭔······ 우웁”
수지가 베제로의 입술을 훔쳤고 놀란 베제로가 입을 벌리는 순간 수지의 혀가 더듬자 베제로가 더 깊숙이 들이밀며 감싼다. 눈을 질끈 감는 베제로와 달리 눈을 멀뚱 거리는 수지. 잠시 후 그녀가 입술을 뗄 때까지 베제로는 눈을 감고 파르르 떨고 있다.
“쌤, 혹시나 했는데 아니네요.”
“······!”
“심장이 막 뛰고 전기가 찌릿하게 통해서 온몸이 풀려 버릴 것 같은 사람하고 결혼하고 싶어요. 근데 쌤은 심심해요, 찌릿함이 없어요.”
베제로가 눈을 떴고 여밀 것도 없는 낡을 티셔츠를 살포시 잡는다.
“사람이 어설프고 멍청하게 보인다고 날 가지고 장난치는 건가.”
수지가 손과 머리를 흔들며 부정한다.
“절대 아니에요. 보자마자 좋았고 행복한 기분이 들어서 혹시 내 반쪽이 아닐까, 생각을 했다고요. 확인하려고 그래서 다시 돌아온 거예요.”
“그럼, 메모리 카드는?”
“카드는 없어요. 쌤 마음을 훔친 것 같아서······ 죄송해요.”
“아가씨, 사람을 들어다 놨다 하면서 비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군.”
수지는 베제로와 달리 매우 심각하다.
“책임질게요.”
“뭘, 또?”
“한 사람이 남아 있는데 그 사람 확인해 보고 그도 아니면 쌤이랑 결혼할게요.”
베제로가 두 팔을 올렸다 내리며 입술로 바람을 분다.
“기가 막히는군. 요즘 아가씨들은 이렇게 맹랑한가.”
“제가 봐도 미친 것 같아요. 이상하게 오늘 처음 본 쌤께 이러는 내가 이해가 안 된 다고요. 제가 원래 숫기도 없고 내성적이라 겁도 많아서 조심스러운데 쌤을 보자마자······”
“흥칫! 숫기도 없고, 조심스러워?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이 당돌한 아가씨야.”
수지가 베제로에게 얼굴을 가까이 댄다.
“쌤이 내 말 안 믿어주면 누가 믿어요.”
수지 눈이 충혈되고 입술이 씰룩거리자 베제로가 당황한다.
“그, 그렇다고 울기는 내가 뭐랬다고··· 아 아, 알았으니 울지 말아요. 난 여자의 눈물에 약하다고!”
수지가 눈물을 흘리며 미동도 없이 베제로를 쳐다본다.
“우리 아무래도 전생에 부부가 아니었을까요. 쌤은 날 보면서 막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아요.”
“그런 기분은 모르겠고, 내가 원래 치마 두른 인간은 상종도 하지 않는데···”
“상종이 뭐라고요?”
울다 그친 눈으로 수지가 째려보자 베제로가 벌벌 떤다.
“아니 그게, 나도 아가씨가 이상하게 가족 같고 그래서 장난이 아닌 것도 알고 있고 내가 뭔 소리를 하는지. 아가씨랑 있으면 아메바가 되는 것 같아.”
“확인해 보고 곧 알려드릴게요.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세요.”
“뭐? 얌전히.”
“얌. 전. 히.”
“그, 그러라면 그래야지.”
꼬르륵
공복인 수지 뱃속에서 소리가 난다.
“이제 내리셔도 돼요.”
베제로가 눈으로 웃자 수지도 빙그레 웃는다.
“선생님! 근처에 맛있는 백반집 있어요?”
“여기저기 말썽 부리고 다니려면 힘이 있어야지. 내려요, 맛집을 알고 있으니까.”
***
비밀의 방. 수지의 입맞춤으로 용수는 여기저기 오만 다리를 걸쳤던 다리를 풀고 오로지 그녀에게 집중한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고 있어. 다리에 힘도 풀리고 이대로···’
“수지야. 사랑해!”
용수와 수지의 헐떡거림은 한 사람이 내는 소리 같다. 세상에 둘만 있는 것처럼 대놓고 몸을 비비며 훑는다. 눈을 감고 있지만 둘은 처음으로 또렷하게 서로를 읽는다. 수지가 용수의 귀를 바짝 잡아당기며 속삭인다.
“나두, 사랑해!”
둘 사이 띄엄띄엄 말없음표가 굵은 선으로 이어진다.
“너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수지야.”
“정말 나빴어.”
용수가 뜨거움에 땀을 흘리며 잠시 느슨하게 수지를 풀어 준다.
“나가자, 이제부터 다 채워줄게.”
“정말이지!”
“그동안 밀린 것 모두······”
“그럼 오빤 수지 꺼야!”
“두 말하면 숨차지. 오빠한테 바라는 거 있어.”
“오빠랑 결혼할래.”
수지가 용수 엉덩이를 꽉 잡자 용수가 엄살을 부리며 좋아한다.
“그건, 당연한 거고.”
“그럼! 인사동부터 가자.”
“인사동에?”
“베제로 쌤한테 보고하고, 다음 쌈밥 먹고, 그다음은······?”
“좋아, 네가 하자는 대로 다 할게.”
수지가 좋아서 펄쩍 뛴다.
“레츠고!”
둘은 주변을 낯 뜨겁게 만들어 놓고 뛰어나간다. 권과 최 실장, 용수와 수지가 나간 비밀의 방에 열기는 여전히 뜨겁다. 재희가 두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해 눈을 계속 비빈다.
“······!”
“그렇게 더디던 일이 이렇게 순식간에?”
타스와 우마리는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차가웠던 재희 심장이 따뜻해지며, 믿기지 않는 행복한 여운을 느낀다.
'나도 행복해지고 싶어. 다들 제자리를 찾고 있어?'
책장 구석에서 책을 보고 있던 원장이 재희가 일어나자 책을 덮는다.
“좀, 시끄럽긴 했지만 사랑의 작대기가 오가고 조용해졌군.”
재희와 원장 눈에서 알 수 없는 스파크가 튄다.
“마사! 우리도 슬슬···”
원장이 책장에 책을 꽂으며 부드럽게 손짓한다.
“······ 가 갑시다!”
“잠시만 기다려요.”
크리스털 테이블에 널브러진 타래실을 재희가 시원섭섭한 표정으로 본다.
“정말 끝난 건가. 이렇게 쉽게 마무리가 될 줄은···”
이스타 원장이 어정쩡하게 걸어와 언제 쩍 오렌지족 흉내를 내며 손을 까딱거린다.
“눈치가 없기는 이 둘도 이제 시간을 가져야 하지 않소.”
재희가 처음으로 타스를 부드럽게 본다.
“미안해요. 차갑게 굴고 싶지 않았지만 아버지 부탁이었어요. 결국 이렇게 될 것을 하지만 뭔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죠.”
타스는 말없이 우마리를 보며 눈물을 흘린다.
“마사, 둘이 알아서 할 것이니······ 우리야말로 할 얘기가 많잖소.”
재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우마리를 본다.
“우마리! 이젠 행복한 거지.”
힘들 때 등을 쓸어 주던 재희처럼 우마리가 재희 등을 쓸어 준다.
“수고했어, 이모! 정말 고마워.”
그동안 내색하지 못한 재희의 응어리가 내려간다.
‘우마리 넌 누구보다 가까웠지만, 누구보다 제일 멀게 느껴졌어. 난 너와 달리 너한테 순수하지 않았거든. 하지만······ 흐르더라. 어린 너에게 많이 배웠다.’
“이모, 내가 더 고마워. 나도 이제 자유니까 행복을 찾을 거야.”
우마리와 재희 사이 시냇가 흔적만 있던 곳에 시냇물이 흐른다. 이제 별들이 찾아올 것이고 흐름이 흔적을 남길 것이다.
“우마리, 전화할게.”
“으응.”
미적거리는 재희를 원장이 잡으려 한다.
으흐흐흑
재희가 뛰쳐나가고 이스타 원장이 내민 손이 부끄럽다. 대신 우마리에게 손을 흔들며 방긋 웃는다.
“그 그럼!”
“암튼, 여자들이란······”
- 작가의말
······ 내색하지 못한 재희의 응어리가 내려간다.
당신의 응어리가 내려가도록 이야기로 빗질을 해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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