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섬에서 만난 쥰세이
역사는 반복된다.
“이봐, 굴강으로 급히 오라는 통제사의 명이시네.”
처소에서 장비들을 손질하고 있던 병사들이 건물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놀라 병사하나가 문을 열었다.
“으따, 믄 소리당가?”
“통제사께서 늦게 오는 놈은 볼기를 치신다고 하셨네.”
이미 조선 수군으로 변복을 한 무솔이 저만치 달리며 뒤로 말을 던졌다.
볼기를 친다는 소리에 병사들은 앞뒤 가리지 않고 신발을 신는 둥 마는 둥 창을 들고 굴강으로 달렸다.
건물을 지날 때 별빛 그림자 아래로 숨어들어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며 굴강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는 속으로 웃었다.
그들 뒤로 따라붙어 같이 달렸다.
제일 먼저 달려갔던 병사가 무안한 얼굴로 되돌아 올라왔다.
“거시기? 날짭하게 가더니 우짠다고 그냥 오노?”
“언 씨부랄 망태 같은 눔이 장난을 친 겨?”
“지미, 남세시러버서 원. 거시기! 누구한테 듣고 소리친 거이가?”
“시방 내한테 문는 기가? 내도 장군이 볼기친다는 소리에 놀래 달린다고 바빴제. 눈지 어이아노!”
병사들은 되돌아 올라오면서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올라왔다.
뒤에 엉거주춤 서 있던 무솔이 병사들 사이로 멀리 통제사와 쥰세이를 보았다.
그 주변 굴강의 어두운 그림자를 찾았지만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휴!’
투덜거리며 올라가는 병사들 뒤를 따라가다 한 건물 처마 아래로 숨어들었다.
처마 아래에서 혹시 모를 위험을 감지하기 위해 굴강 쪽을 계속 지켜보았다.
얼마 후 굴강에서 올라오는 이 순신과 몇 명의 무장들이 보였다.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다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무장들 조금 뒤에 올라오는 쥰세이가 보였다.
쥰세이의 움직임을 관찰하면서 그 뒤를 밟으려던 무솔은 검은 그림자를 보고 흠칫 놀라 어둠 속으로 몸을 다시 숨겼다.
검은 그림자는 반대편 어둠 속에서 담을 넘고 있었다.
어둠 속 형체가 하루토로 보였다.
‘장군보다 먼저 위치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리라!’
이 순신과 무장들이 안마당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무솔은 검은 그림자가 넘어간 담을 급히 따라 넘었다.
담을 막 넘자마자 담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건물 여기저기를 살폈다.
눈앞 작은 건물 처마 아래에서 검은 그림자가 이 순신을 향해 단궁을 드는 모습이 보였다.
검은 그림자를 향해 편전을 들거나 공격하기에는 시간도 여건도 좋지 못했다.
무솔은 급하게 수리검 하나에 헝겊을 묶고는 힘차게 던졌다.
막 마루로 올라서려던 이 순신이 얼굴을 스치며 지나간 무엇에 놀라 주춤 뒤로 물러났다.
이 순신이 무엇인가 나무 기둥에 박히는 소리에 눈을 돌렸다.
이 순신을 따라가던 무장들이 수상한 낌새를 알아채고는 이 순신 주변을 경계했다.
하루토가 이 순신과 그 부하들의 반응에 놀라 단궁을 내려놓고 우두커니 웅크리고 있다가 경계가 삼엄해지는 것을 보고는 건물 뒤로 돌아 나가는 것이 보였다.
주변을 살핀 군관 하나가 나무 기둥에 꽂힌 수리검을 뽑았다.
수리검에 감긴 헝겊을 펼쳐 들고는 놀란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군관이 이 순신과 눈빛을 교환한 후 방안으로 급히 들어갔다.
황급히 방 안으로 사라지는 이 순신과 부하들이 들어간 방을 보며 한동안 담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는 혹시 모를 위험을 찾아 눈동자를 굴렸다.
타이요우와 다른 게닌들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타이요우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조심스럽게 담을 넘어 밖으로 나와 담 옆 큰 소나무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어두운 병영 안을 살폈다.
갑자기 병영 안이 시끄럽기 시작했다.
얼마 뒤 병사들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여기저기 횃불이 켜지고 병장기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소나무를 보고는 위로 잽싸게 올라가 몸을 숨기고 조선 병사들의 움직임과 그림자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넓은 지역이 어둠 속에서도 한눈에 들어왔다.
이 순신이 있는 건물 주변에는 병사들로 둘러싸였다.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자시가 되기에 이른 시간이었다.
무장을 한 무사 몇 명이 달려와 이 순신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반 각 정도 시간이 지나자 이 순신의 방에서 무장들이 물러갔다.
그 뒤로 낯익은 무사 하나가 나와 어디론가 가는 모습이 보였다.
‘쥰세이?’
주변을 한 번 더 살펴보고는 쥰세이가 사라진 곳으로 숨어들었다.
쥰세이가 방문을 뚫고 들어 온 수리검을 보고는 깜짝 놀라 벽에 붙어 바깥 동정을 살피며, 수리검을 빼 들었다.
‘이것은 료우타의 수리검이다.’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나가 주변을 살폈다.
비상이 걸린 지도 반에 반 시진이 지났다.
섬과 병영 곳곳에 경계가 강화되어 있었다.
쥰세이가 어둠 속으로 손짓하자 멀리 처마 아래에서 누군가 내려왔다.
순식간에 쥰세이가 열어 놓은 방문으로 들어와 몸을 낮추었다.
“이게 누군가? 료우타, 살아 있었어.”
“누가 할 소리, 쥰세이 반갑다.”
“하하하, 여기선 준사라고 하네. 그리고 누가 지나가다 들을 수 있으니 조선말로 하게.”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아서도 맞잡은 두 손을 놓지 않았다.
서로 안부를 묻는 네네 눈이 벌겋게 충혈되었다.
“그래? 준사라. 쥰세이나 준사나. 하하하. 조선말이 꽤 늘었군. 그래. 그런데······.”
무솔은 말을 하려다 멈췄다.
‘혹시 쥰세이, 아니 준사가 간자라면, 나의 정체를 몰라야 한다.’
“뭔가? 왜 말을 하려다 마는가? 오히려 자네가 조선말을 더 유창하게 하는군.”
‘이런.’
“우리는 이 순신을 암살하고 우리 측 간자를 만나러 왔네. 혹시······ 자네인가?”
“아니, 자네는 간자가 누군지도 모르고 여길 잠입했다는 말인가?”
“그게······, 타이요우님이 말을 해 주지 않더군.”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군. 쩝.”
무솔과 준사가 서로 얼굴을 보며 계면쩍게 웃었다.
그런 와중에도 혹시나 해서 준사의 표정을 살폈다.
평소에 타이요우가 료우타를 미워하는 것을 알고 있던 준사, 적진을 침투하는 중요한 임무 수행에 료우타를 배제하려고 정보를 숨겼다는 것이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지 웃는 표정이 묘했다.
‘혹시?’
“자네가 간자가 아니라면 조선 수군이니 날 붙잡아야 할 거고, 간자라면 정보를 주겠지? 아니 벌써 정보를 타이요우에게 넘겼나?”
“이런, 료우타! 곤란한 말이군. ······오히려 자네의 정체가 더 궁금하이.”
준사의 말을 이해 못해 그를 쳐다보았다.
“무, 무슨 말인가? 나의 정체라니. 난 비록 기억이 없지만 지금까지 섬의 닌자로 너의 동료가 아닌가?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지?”
준사의 얼굴을 살폈다.
“내가 너에게 여러 번 목숨을 빚졌으니 오늘은 하나 갚은 걸로 하세. 사실 난 여기에서 준사로 살기로 했네. 네가 날 죽인다면 어쩔 수 없지. 어차피 네가 살려준 목숨이니 거둘 수 있는 자격이 충분해.”
준사의 말에 놀라 한참이나 그를 쳐다보았다.
‘혹시, 날 떠보려는 것은 아닐까?’
묘한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음, ······어쩔 수 없군. 이만 가볼게. 다시 만날 때는 서로의 목숨을 노려야겠지. 준사! 행복해라. 우리들은 이번 임무를 마지막으로 본국으로 돌아간다.”
무솔의 말에 잠시 놀란 표정이었던 준사가 일어나 무솔을 안았다.
“너도 행복해라. 꼭 기억이 되돌아와 너 자신을 찾기바래. 그리고 섬의 그녀에게는 잘 말해줘. 용서해달라고, 아니 나 같은 놈 용서할 필요가 없다고. 그리고 기다리지 말라고 전해줘.”
마음이 찡했다.
‘준사!’
마음이 복잡했다.
정말 조선인으로 살기로 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속이기 위한 간계인지.
차마 기억이 돌아왔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미안한 마음에 더 꼭 안았다.
“참, 내 정신 좀 봐. ······이별주를 안 할 수가 없지. 조금만 기다리게. 내 나가서 술을 좀 가져오지.”
말을 마친 준사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밖으로 나갔다.
'···········.'
준사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방안을 몇 번 왔다 갔다 하다가 방문을 살며시 열고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갔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쥰세이도···········.'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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