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예솔
역사는 반복된다.
무솔이 변복하고 여러 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오사카성 주변을 둘러보았다.
성문이 아닌 다른 곳으로는 잠입이 거의 불가능한 구조였다.
몇 번을 둘러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오늘도 성 외곽에서 인상을 찌푸린 채 혼마루와 천수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까지 가려면 해자를 건너고 성벽을 올라 다시 해자를 건너 또 다른 성벽을 올라야만 닿을 수 있는 하늘의 구름과 같은 머나먼 곳이었다.
쉬이 길이 보이지 않아 고민하고 있던 그때 수레 몇 개가 오사카성 서쪽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저, 저것은······. 성에서 필요한 물품들이다!’
다시 한번 오사카성 내로 들어가는 수레들을 보고는 되돌아 교토로 향했다.
올빼미 우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토굴로 들어와 횃불을 밝히고는 어둠을 내쫓으며 앞으로 달렸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의 토굴이었다.
끝도 없이 이어진 토굴을 지나자 창살로 막힌 문이 나왔다.
여기저기를 횃불로 비추며 손으로 더듬었다.
무엇인가 돌 사이에서 손가락에 묘한 느낌이 전해졌다.
돌을 떼어내자 열쇠가 나왔다.
열쇠로 자물쇠를 열고 들어가 십여 보를 가니 달빛 아래 천수각이 반짝였다.
“보자. 오늘은 어전에 있을까? 천수각에 있을까?”
손가락으로 날짜를 세고는 어두운 그림자를 이용해 혼마루 어전을 지나 천수각으로 숨어들었다.
천수각 꼭대기 망루에서 달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지붕으로 내려가 굳게 닫힌 창문틀 여기저기를 만지다 구멍을 확인하고는 품에서 꺼낸 열쇠를 구멍에 넣고 조심스레 창문을 당겼다.
창문으로 고개를 밀어 넣어 앞과 좌우를 살폈다.
복도의 사방등이 미닫이문에 희미하게 비쳤다.
발소리를 죽이고 창을 열고 들어갔다.
다다미가 두 장 정도의 방이었다.
방을 가로질러 귀를 쫑긋 세우고는 아무 소리도, 움직임도 없다는 것을 아니 곤히 잠을 자는지 숨소리가 들렸다.
‘하나, 둘···.’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고는 미닫이문을 살며시 열었다.
곤히 잠을 자고 있던 자의 머리로 가 조용히 깨웠다.
“누, 누구냐?”
“소리 지르지 마십시오. 료우타입니다.”
“료우타? ······아! 그런데 웬일인가? 이 야밤에.”
히데츠구의 작은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미카를 주십시오.”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누워 있던 히데츠구가 몸을 바로 세워 앉았다.
그 옆에 한 여인이 숨을 새근거리며 잠들어 있었다.
“음, 준비되었다는 말이지. ······좋다. 내일 바로 내보내겠다.”
“관백 전하 무슨 일이십니까?”
장지문 건너 있던 경호 무사가 무슨 소리가 들리자 히데츠구의 신변에 관해 물어왔다.
“아무 일도 아니다.”
무솔이 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는 모습에 히데추구가 놀라 뒤로 몸을 움직이려 했다.
품에서 나온 쿠니요시 단검을 히데추구 앞으로 밀어 올리자 그때 서야 숨을 크게 내쉬며 씁쓸한 미소로 무솔을 바라보았다.
창을 나와 천수각 지붕을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달빛에 반짝이는 천수각을 한 번 더 올려다보고는 들어 왔던 길을 되짚어 성을 빠져나왔다.
몰래 들어갔다가 나온 토굴은 지난번 성에 들어갔을 때, 시게코레가 알려준 비밀 통로였다.
주라쿠성처럼 오사카성도 비밀 통로가 있을까 싶어 여기저기를 살폈지만,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었다.
교토의 한 여각에서 예솔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오라버니.”
“울지 말거라.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 연금되어 있었다고 하던데. 히데츠구가 죽이면 어떻게 하려고 그랬어?”
“그게, 저도 잘 모르겠어요. 오라버니가 오기 전에는 어머니와 동생이랑 일본인으로 살자고 마음먹었는데, 오라버니가 다녀간 이후 조선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본인으로 살아온 제가 밉고 싫었어요. 그, 그리고 어, 어머니가······.”
말을 하다 어머니 생각에 울음을 터뜨렸다.
무솔도 어머니 생각에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겨우 진정한 예솔이 말을 이었다.
“구루시마 성주가 주라쿠성으로 보낸 뒤 얼마 있다가 관백에게 불리어 갔는데, 잠자리하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대로한 관백이 절 당장 끌어내 죽이라고 했는데, 그의 가신이 구루시마 성주의 얼굴을 봐서라도 목숨만을 살려 두라고 간하였습니다. 성격이 불같은 관백이 칼을 들고 저의 목을 치려고 해서 눈을 감았습니다. 흑흑."
얘기하다 북받쳐 우는 예솔을 무솔은 가만히 안아 주었다.
겨우 울음을 참은 예솔이 말을 이었다.
"한참을 있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눈을 살며시 떴는데 푸른빛이 나는 물건을 손에 든 관백이 의미심장하게 저를 쳐다보고는 가신에게 데리고 나가 감금하라고 했습니다.”
가만히 예솔의 말을 듣던 무솔은 혹시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청동방울을······.’
“관백이 왜 살려 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살아있으니 다행이다.”
두 사람은 그동안의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해솔이에 대해서는 아는 게 있니?”
동생에 관해 묻자 예솔이가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당황한 무솔이 그녀를 쳐다보며 눈으로 물었다.
“그, 그게 지난번 성주가 찾아왔을 때 물어보았는데 미치유키와 함께 조선으로 출병하였다가 지는 바람에 죽었거나 조선 수군에게 붙잡혔을 것이라고 했어요.”
놀란 무솔은 말을 잇지 못했다.
“조, 조선에서 죽었거나 포, 포로가 되었을 것이라고······.”
‘그럼, 그때 미치유키를 베었던 섬에서······. 이런 못난 놈!’
자신이 조선에 있었으면서, 그것도 미치유키를 만났으면서도 해솔이를 구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고 억울했다.
정말 죽지 않고 포로가 되었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그날 많은 왜놈이 죽었다.
만약 해솔이가 살아 있었다면 미치유키의 죽음을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는 다른 왜놈들이 없었다.
‘살이 있을 수가 없어.’
무솔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져 갔다.
“아니, 오라버니 왜 그러세요?”
“잠깐, 해솔이의 일본 이름이 뭐지?”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예솔에게 물었다.
“왜 그러세요······? 동생의 일본 이름은 다테모노예요.”
“다, 다테모노라고······!”
동생의 이름을 듣고 놀라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해솔의 이름을 되뇌었다.
“분명 다, 다테모노라고 했지.”
갑자기 생각이 난 듯 해솔의 이름을 되뇌고는 머리를 붙들고 괴로워했다.
“오라버니 왜 그러세요?”
나고야에서 자신에게 포도주를 가져다준 아이가 다테모노라고 했다.
바로 그 아이가 해솔이었다.
동생을 알아보지 못한 자신이 한없이 미웠다.
‘그놈들이 날 시험한 것이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바보같이.’
“자, 잠깐, 그 아이도······.”
갑자기 한산섬 감옥에서 본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둡고 등을 지고 있어서 잘 보지는 못했지만 어디선가 본 얼굴이라 생각했었다.
“젠장! 그때 그 아이가 분명 나고야에서 본 다테모노, 아니 해솔이었어. 해, 해솔아!”
옥에 갇힌 어린 일본 포로에게 이 순신 장군이 준사를 통해 책을 읽어 주던 아이가 바로 자기의 동생 해솔이었다.
예솔은 무슨 일인지 몰라 눈물을 닦으며 무솔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마음을 진정시킨 무솔의 말을 들은 예솔은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혔다.
“오라버니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 있잖아요.”
오사카에서 센을 통해 몰래 빼낸 아카쿠마를 타고 이또보코산을 넘었다.
산을 넘기 전 잠시 사이가 형님을 찾아갔다.
많은 병사가 조선에서 일본으로 돌아왔기에 사이가도 당연히 돌아왔을 것으로 보고 찾아갔다.
하지만, 무솔은 사이가를 만날 수 없었다.
그들은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누구는 전쟁 중에 죽었다고도 하고 또 누구는 사이가가 부하들을 이끌고 조선군에게 항복했다고도 했다.
진주성에서 만난 철포대장의 말이 떠올랐다.
“정말 조선군에게 투항한 것일까? 사이가 형님, 부디 무사히 살아 계시기를.”
고개를 넘어 코카와성으로 향했다.
키노카와를 따라 내려오다 어느 신사에 들어가 하룻밤을 청했다.
신사에서 저녁밥을 얻어먹은 뒤 밤이 깊어지자 신사를 빠져나와 강을 따라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내려갔다.
달빛에 강물이 반짝거렸다.
코카와성 근처에 도착했을 무렵 달이 머리를 지나 서쪽 하늘로 향하고 있었다.
달빛 아래 봄이라 강가에 이름 모를 풀들과 꽃들이 피고 있었지만, 밤바람은 아직도 차가웠다.
검은 그림자가 달빛 그림자를 이용하여 코카와성의 성벽을 기어올랐다.
성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그림자의 움직임에 거침이 없었다.
전쟁 때라면 몰라도 평상시에는 경비가 소홀한 북쪽 절벽을 기어 올라갔다.
절벽을 넘고 다시 이리저리 건물들을 돌아 다시 내성을 타고 넘었다.
성은 검은 그림자의 접근을 알지 못하는지 조용했다.
복도를 살금살금 다가가 어느 방 장지문 앞에 섰다.
방안에서 코 고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코를 골며 잠들어 있는 방주인은 피곤했는지 자기의 머리를 칼로 톡톡 건드려도 살짝 몸을 움직일 뿐 반응이 없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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