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수군의 포로가 된 쥰세이
역사는 반복된다.
“료우타!”
북쪽 해안가로 달려가는데 누군가 불렀다.
“어? 누구? 아! 쥰세이······.”
숲속에서 자신을 부르고 있는 쥰세이를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달려갔다.
쥰세이가 구릉지 아래에 숨는 것을 확인하고는 일부러 조금 먼 곳으로 쥰세이가 잘 보일 수 있도록 달려갔었다.
“쥰세이, 아, 아니 와키자카 성주님!”
와키자카 성주에게 목례하고 쥰세이와 스이키를 돌아보았다.
“여기는 어쩐 일인가? 넌 대기였잖아.”
“아! 내가 답답해서 칸베에 부관님에게 부탁해서 정찰을 나왔어.”
“언제?”
“어제 늦게.”
“그래?”
쥰세이가 료우타 얼굴을 보며 의아한 듯 고개를 살짝 옆으로 숙였다.
“어? 스이키, 상처가······. 괜찮은가?”
“네, 화살에 맞았습니다만 큰 부상은 아닙니다.”
쥰세이가 화살이라는 말을 들으며 료우타의 화살통을 유심히 살폈다.
“료우타, 자네 화살 좀 몇 개 주게. 조선 병사들이 섬에 올라오면 대응해야 하는데 화살이 부족해.”
“그래, 여기.”
마음껏 가져가라며 화살통 전체를 건네주었다.
쥰세이가 긴장된 얼굴로 화살통에서 긴 화살을 살피더니 작은 화살 다섯 개를 꺼냈다.
“그거면 충분해?”
“긴 화살은 필요 없고, 너도 작은 화살이 필요하잖아. 나보다 더 위력적이기도 하고.”
화살을 살피던 쥰세이가 인상을 펴며 긴장을 푸는 모습을 보고는 아무도 모르게 긴 숨을 속으로 내뱉었다.
쥰세이가 스이키의 다리에 꽂힌 화살이 혹시나 료우타의 것인지를 확인한 것이다.
지난 오아포를 정찰할 때 조선 수군이 버리고 간 편전용 화살 몇 개를 가져갔었다.
스이키를 맞힌 화살과 와키자카를 겨눈 화살도 그 화살이었는데 쥰세이가 나타나자 오아포에서 가져온 나머지 화살을 모두 풀숲에 버렸다.
이를 알지 못하는 쥰세이는 자신이 괜한 의심을 한 것이 미안했는지 웃음으로 넘기려 했다.
“와키자카 성주님, 지금은 조선 수군이 섬들을 감시하고 있으니 며칠은 여기 숨어 있다가 경계가 풀리면 빠져나가야 합니다.”
조선 수군이 몇 날 며칠을 섬과 바다를 돌며 패잔병들을 찾고 있었다.
료우타를 비롯한 다섯 명은 처음에는 가져온 찐쌀과 육포로 끼니를 해결했지만 며칠째 섬을 빠져나가지 못하여 더 이상의 먹을 것이 없었다.
료우타와 쥰세이가 밤에 어둠을 뚫고 바다로 나가 미역과 해조류를 따왔다.
몇 날 며칠을 생미역으로 허기를 달랬다.
조선 수군에게 들키지 않고 움직이다 보니 활동 반경이 좁아져 먹을거리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았다.
와키자카 성주를 비롯한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먹을 수 있는 것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먹었다.
미역을 그나마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몇 날을 대부분 미역으로 허기를 달랬다.
그렇게 며칠이 흐르자 조선 수군의 감시가 뜸해졌다.
료우타가 가라앉혀 둔 배를 찾아 나섰다.
갈대밭 사이로 가고 있는데 맞은 편 바다에서 협선 한 척이 다가왔다.
앞서가던 쥰세이가 놀라 급히 뒤로 신호를 보냈다.
료우타와 와키자카, 그 부관이 몸을 약간 구릉진 풀 속으로 바짝 엎드렸다.
배가 땅에 닿자 조선 무관 한 명과 병사 수십 명이 배에서 내렸다.
“여기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다. 주변을 샅샅이 뒤져라!”
병사들은 상관과 달리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며, 멀뚱히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상관의 눈치를 보며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조선 무관이 갈대를 헤치며 앞으로 다가왔다.
몇 보 앞에 몸을 숙이고 지켜보던 료우타와 와키자카 잔뜩 긴장한 채 조선 무관의 행동을 지켜 보았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료우타가 살며시 칼집을 밀어 올렸다.
바로 앞까지 온 조선 무관이 구릉지 앞에 서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구릉지 바로 아래 있어 조금만 신경을 쓰면 조선 무관의 눈에 들킬 찰나였다.
내키지 않았지만 상황이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료우타가 와키자가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앞으로 달려 나가려 일어서려 했다.
“저, 살려주십시오.”
조선 수군의 배 근처에 숨을 죽이고 숨어 있던 쥰세이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쥰세이!’
칼을 들고 달려 나가려던 료우타가 급히 자세를 낮추어 몸을 숨겼다.
“왜놈이다.”
조선 병사들이 쥰세이를 향해 창을 들고 포위했다.
조선 무관이 구릉에서 되돌아 쥰세이에게로 다가갔다.
“휴.”
와키자카가 크게 숨을 내뱉었다.
“혼자인가?”
조선 무관이 주변을 둘러보며 쥰세이를 다그쳤다.
“호, 혼자 ······살아남아 며, 며칠째······ 먹지도 못했습니다.”
서툰 조선말로 대답했다.
쥰세이의 행색을 살핀 조선 무관이 다시 주변을 휙 훑어보고는 포박된 쥰세이를 앞세워 배로 올랐다.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쥰세이가 걱정이 되어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달려 나가 싸우기에는 적의 수가 너무 많았다.
아니 료우타는 전혀 칼을 뽑고 싶지 않았다.
괜히 화살을 겨누기도 하고 싸움을 걸어 보는 척도 해 보았다.
그런 료우타가 못내 불만인지 와키자카의 부관이 계속 팔을 저지했다.
허기지고 며칠을 굶주린 몸으로 싸울 수 없는, 아니 수적으로도 불리한 와키자카가 료우타를 진정시켰다.
조선 병사들이 주변을 대충 훑고는 쭈뼛쭈뼛 배로 걸음을 옮겼다.
조선 무사와 쥰세이가 뭐라고 배 위에서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이봐, 철수하라.”
대충 주변을 수색하던 조선 병사들이 상관의 명이 떨어지자 부리나케 배로 올라갔다.
쥰세이를 태운 배가 부드럽게 땅에서 벗어나 바다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자리에서 일어나 갈대 사이로 쥰세이를 쳐다보았다.
‘쥰세이!’
쥰세이가 포박이 된 채 료우타 쪽으로 돌아보며 아무도 모르게 입 모양으로 무엇인가 말을 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겨우 참고는 그를 향해 몰래 손을 흔들었다.
“쥰세이가 우리를 살리기 위해 항복을 한 것 같습니다.”
와키자카의 부관이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와키자카와 부관은 엎드린 채 서로 눈을 마주 보며 손을 잡고 있었다.
마음이 착잡했다.
준세이가 탄 배가 깊은 바다로 향했다.
쥰세이가 섬을 바라봤다.
료우타와 쥰세이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만나 빛났다.
쥰세이의 모습이 작아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지난날 쥰세이와의 일들이 떠올랐다.
‘쥰세이, 반드시 살아있어야 해.’
쥰세이가 포로로 잡혀가고 난 뒤 남은 사람들은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밤이 깊어지자 료우타가 여기저기 배를 찾는 척했다.
숨겨 둔 배를 찾아 와키자카와 부관, 그리고 스이키와 함께 배를 띄우고는 건너 뭍으로 올라와 무사히 안골포로 돌아왔다.
한산섬 앞 바다에서 전투가 벌어진 지 이십여 일 만에 안골포로 돌아온 것이다.
돌아온 안골포도 성 외곽과 굴강이 파괴되어 있었다.
많은 군함이 조선 수군의 대포에 박살이나 갯벌에 처박혀 있었고 언제 죽었는지 모를 일본 병사들의 시체가 처리되지 못하고 갯벌 여기저기에 떠다니거나 나뒹굴고 있었다.
이 순신 함대의 공격을 받은 안골포의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 도도 다카도라는 수많은 함선이 침몰하고 불탔지만 나가 싸우지 못하고 굴강 안에 움츠리고 있었다.
구키와 가토부대는 밤이 되어 조선 수군의 경계가 허술해지자 남아 있는 배를 타고 부산포로 도망을 갔다.
다카도라의 함대는 와키자카 함대를 따라갔다가 겨우 도망처 왔지만, 안골포에서 불타거나 부서졌다.
사십여 척의 배가 적의 포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다.
전투력을 상실한 부대는 안골포 깊숙이 숨어 조선 수군이 물러나길 기다렸다.
료우타가 돌아온 며칠 뒤 타이요우도 한산섬에서 빠져나와 안골포로 돌아왔다.
한산 전투에서 겨우 살아남은 일본 병사들이 한산섬으로 올라왔지만, 수백 명의 병사가 먹을 것이 없어 절규했다.
조선 수군의 배 몇 척이 한산섬을 돌며 감시하여 빠져나갈 구멍도 없었다.
항복하지 않는 적들을 굶겨 죽이기, 즉 아사 작전을 한 것이다.
섬을 빠져나가지 못하자 일본 패잔병들은 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먹을 것을 찾았다.
산짐승들과 뱀들을 잡기 위해 온 섬을 이 잡듯이 뒤졌고 그마저도 없자 나무껍질과 뿌리를 캐 허기를 달랬지만 동료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몇몇은 떠내려온 널빤지들을 이용해 뗏목을 만들어 어두운 밤, 경계가 소홀한 틈을 타서 뗏목을 바다에 띄웠다.
하지만 그들이 가는 방향은 일본 수군이 있는 안골포나 부산포가 아니라 일본, 즉 자신들의 고향이었다.
한산섬에서 굶어 죽기도 싫고, 다시 수군으로 돌아가 이 순신과 싸우는 것은 죽기보다 더 싫었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타국에 끌려 온 그들에게 이 전쟁은 무의미했다.
오직 가족들과 고향이 몸서리치게 보고 싶었다.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장담은 할 수 없지만,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고향으로 가다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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