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바다 3
역사는 반복된다.
나고야에 도착한 태합 히데요시는 자신의 수군이 조선 수군에게 세 번의 전투에서 모두 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다카도라공 어떻게 생각하오?”
불벼락이 떨어 질 것 같은 태합이 다카도라 성주를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우리 아군이 방심하다가 당했다고 봅니다.”
히데요시가 지그시 다카도라를 쳐다보았다.
등줄기에서 써늘한 바람과 함께 땀방울이 흘러 내렸다.
“방심했다고······.”
히데요시의 중얼거리는 듯한 말에 다카도라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다다미만 쳐다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침묵이 흘렀다. 다카도라가 입이 말랐는지 침을 삼켰다.
“천하무적 나의 군사들이 그깟 조선 수군에게 방심해서 당했단 말인가?”
낮고 조용한 목소리였지만 음침한 살기가 묻어났다.
“······.”
“모두 할복하라고 전하라.”
히데요시의 부드러운 명령이 내려졌다.
아니 천근만근의 명이었다. 하지만 다카도라에게는 힐난조로 들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옆에 가만히 눈을 감고 앉아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보다 못해 낮은 자세로 한마디 했다.
“태합 전하! 고정하십시오. 지혜라면 제갈공명도 울고 갈 구키 요시타카가 당했다면,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사정을 보아 명을 내리심이 타당할 줄 압니다.”
이에야스를 가만히 쳐다보던 히데요시, 그의 이마가 꿈틀거렸다.
바짝 엎드려 긴장하고 있는 다카도라를 보고는 화를 누그러트렸다.
“에도의 성주께서 말씀하시니 기회를 주겠다. 도도!”
“핫, 태합 전하.”
“가서 전하라.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전라도를 가기 위한 교두부로 그대가 보아 둔 사천에 성을 쌓아 전초기지로 삼고 조선 수군을 섬멸하라.”
히데요시가 이전과 달리 단호하고 엄한 명(命)을 내렸다.
나고야성을 나와 막사로 돌아온 다카도라가 타이요우를 불렀다.
“타이요우의 특수부대는 본대보다 먼저 조선으로 가 죠유지에게 전하라. 부하들과 함께 가덕도 일대와 거제도 일대를 돌아보고 주력부대가 주둔할 수 있는 곳을 물색하도록.”
타이요우는 본대보다 사흘 먼저 나고야에 남아 있던 쥰세이와 게닌들을 이끌고 부산포로 들어왔다.
료우타와 게닌들은 안골포 부근을 정찰하고 돌아왔다.
멀리 창원과 웅천 일대를 돌아다녔지만 조선 수군뿐만 아니라 육군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일본군의 위력이 전해지자 조선 육군은 일본군이 온다는 소식이 들리기도 전에 도망을 가버려 육지로의 위협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여수에 웅크리고 기회를 보고 있는 조선 수군이 문제일 뿐이었다.
조선의 바다 3
보급을 위해 부산포 일대에 남은 일본 육군 소속의 병사들은 마을과 마을을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였으며, 집들을 샅샅이 뒤져서는 온갖 재물들을 훔쳐 왔다.
또한 미처 도망가지 못한 여자들을 어린 여자나 나이 든 여자를 구분하지 않고 겁탈했으며, 그들을 주둔지로 데리고 와 노예처럼 부렸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비참한 모습에 료우타의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파져 왔지만, 동료들과 함께 움직이는 상태에서는 어떤 일도 할 수가 없었다.
분노의 가슴만이 타들어 갈 뿐이었다.
구키 요시타카는 조선 수군을 방어하기 위해 안골포만 안에 성을 쌓기 시작했다.
성을 쌓은 자들은 대부분 부산이나 경상도에서 잡혀 온 조선인 일꾼들로 작업을 감독하는 일본 무사들에게 온갖 학대와 매질로 누더기처럼 된 몸으로 작업을 했다.
또한 먹을 것은 아침과 저녁으로 두 끼를, 그것도 간에 기별도 가지 않는 양을 주면서 일은 밤이 늦도록 시켰다.
채찍에 나뒹구는 조선인들을 보며 료우타는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픈 가슴을 누군가가 알아차릴까 봐 해안가를 걸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잔잔한 파도가 자신을 어루만지듯 다가왔다가 밀려가고 다시 아쉬운 듯 다가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바다는 저렇게 평화스러운데······.’
조선 수군, 아니 이 순신의 수군이 활약하자 조금 마음의 위안이 되었지만, 그 이후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었다.
애타는 료우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갈매기가 머리 위를 평화롭게 날고 있었다.
고바야 배 한 척이 안골포로 들어왔다.
“아니, 타이요우님!”
“······잘 있었나. 료우타.”
타이요우가 쥰세이와 그 게닌들을 이끌고 배에서 내려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무엇보다 쥰세이와 료우타가 서로를 보며 미소 지었다.
타이요우가 태합 히데요시의 명령서를 죠유지에게 전하자 죠유지는 수군 대장부 막사에 있는 구키 요시타카에게 전달했다.
요시타카는 분노하는 태합을 떠 올리며 써늘한 가슴을 쓰려 내렸다.
곧바로 수장들의 회의를 소집했다.
“태합 전하께서 상당히 분노하고 계십니다.”
“조선 수군의 기습으로 당한 것이오. 방심해서 진 것이니 다시 기회를 주시오.”
호리우치 우지요시가 벌떡 일어나 좌중을 둘러보았다.
“한 번 패장이 무슨. ······ 아, 그리고 싸울 병사는 있소?”
사다하루가 핀잔을 줬다.
우지요시가 자리에 앉으며, 일그러진 얼굴로 분을 참으려는지 볼이 씰룩거렸다.
“병가지상사라 했소. 그만들 하시오. 태합 전하께서 하루빨리 전라도를 돌아 한성으로 출병하라는 명령을 내렸소. 또 다른 명령은 뱃길을 여는 것이 어려우면 육군이 진주성을 지나 전라도를 들어갈 수 있도록 지원하라 하셨소.”
요시타카가 지도를 펼쳐서 제장들에게 보이며 말을 이었다.
“전라도 바다로 가든, 진주성 공격을 지원하든 여기 사천을 공략하여 성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오. 여기 다카도라공이 성 축성 설계도를 보내왔소. 나의 부대와 요시아키공 부대는 사천으로 나아가 성을 쌓을 것이오. 그리고 미치후사공과 고레노리공의 부대는 거제도와 사천 중간쯤 있는 당포의 산성을 보수하시오.”
요시타카가 제장들 앞으로 성 축성 설계도를 내밀었다.
“공! 우리 부대도 전라도로 진격하게 해 주시오. 이거 부산포에 가만히 있으려니 좀이 쑤셔서 힘듭니다.”
스가와라 우지무네가 답답하다는 듯 요시타카를 봤다.
다른 왜장들도 전라도로 가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제장들의 용기와 충정은 충분히 알겠소. 만에 하나 조선 수군이 부산포로 오게 되면 부산 사령부가 위험하오. 그러니 우선적으로 안골포에 성을 쌓아 주시오. 이것은 태합 전하의 명이오.”
태합의 명이라는 소리에 모두 오른손을 들어 가슴에 대고는 고개를 숙였다.
요시타카가 남해안이 그려져 있는 지도를 가리키며 다시 한번 각 부대의 진격 지역과 임무, 그리고 작전을 설명했다.
“제장들도 아시다시피 우리에게 굴욕감을 안긴 적장은 전라좌수영의 이 순신이라는 자요. 그 전법이 이상하기는 하지만, 그자의 유인책에 속지 마시오. 작전 중 만나게 되면 해안으로 피하고 가능하면 거점을 빨리 확보하여 적의 배후를 공격하는 것이 이기는 길이오.”
“무슨 개 소리요. 피하다니요. 듣도 보도 못한 조선의 작은 이름 없는 장수를 피하라니 대 일본국의 창피요. 내가 선봉을 서겠소. 당장 전라좌수영이 있는 여수로 갑시다.”
스게 다쓰나가가 제장들이 한심하다는 듯이 탁자를 주먹으로 쳤다.
일부 왜장들은 그의 말에 더 공감하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놈이 안 당해 봐서 설치는구나! 그러다 지옥으로 먼저 가게 될걸.’
이 순신에게 당한 장수들은 속마음을 숨기고는 다른 할 말 없이 다쓰나가를 쳐다보았다.
“요시타카공! 너무 겁내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방심하다 기습당해서 그런 것이지 나아가 싸우면 반드시 우리가 이길 수 있소이다. 나가서 싸우게 해 주시오.”
고레노리가 손에 든 금부채를 펼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저놈의 금부채는···. 어떻게 저런 자에게 태합께서는 금부채를 하사하셨는지.’
요시타카가 고레노리의 금부채를 보고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 금부채에 태합 히데요시가 고레노리에게 류쿠제국을 주겠다는 서약이 적혀 있었다.
태합의 명령을 전달받은 제장들은 태합의 은혜를 갚기 위해 당장 출전 준비를 마치는 대로 각자 부여받은 명령을 수행하기로 합의했다.
우선 구키 요시타카의 부대가 사천일대로 진격하여 성을 쌓아 거점을 삼기로 했으며, 당포 지역에는 가메이 고레노리가, 거제도 일원에는 가토 요시아키의 부대가 성을 쌓고 나머지 부대는 안골포에 남아 그 일대를 주력 거점으로 삼을 수 있도록 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