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 하나
역사는 반복된다.
무솔은 천수각의 한 방에서 차를 마셨다.
관백에게 차를 따르고 있는 라나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녀는 이제 머나먼 꿈이 되어 버린 것일까?’
연서의 얼굴이 라나와 겹쳤다.
자신을 따르고, 기다리고 있는 연서, 그녀를 생각하면 마음이 짠했다.
하지만 무솔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라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도 라나와의 추억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창문이 흔들렸다.
‘바람이 거세군. ······히데츠구가 나에게 어떤 명을 내릴까?’
라나의 생각에 찬 기운이 들면서 히데추구의 기회를 준다는 말이 떠올랐다.
방안이 싸늘했다. 답답한 마음에 밖으로 나갔다.
천수각 앞 혼마루에 있는 연못가에 서서 사시사철 푸르른 소나무를 바라봤다.
‘언제나 푸름을 간직하고 우직하니 서 있는 네가 부럽구나!’
무솔은 그윽한 눈길로 소나무를 보다가 멀리 누군가가 어전 건물에서 나와 천수각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저자는······. 구, 구루시마 미치후사! 저, 저 원수 놈!”
무솔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그, 그런데 저자가 여기에 왜 왔지?······. 그렇구나! 동생 예솔이······.”
무솔이 머물고 있던 방으로 들어 온 관백의 참모인 시게코레가 자리에 앉았다.
“방이 싸늘하군. 여기 화롯불 하나 가지고 오느라.”
시게코레가 밖을 향해 소리쳤다.
“음, 차향이 그윽한 게 정말 좋구나. 자네도 맛을 느껴보게.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라네.”
“그렇습니까? 제 마음처럼 떫기만 합니다.”
시녀가 화롯불 하나를 들여다 놓고 나갔다.
“너도 나가 보거라. 주위에 아무도 얼씬하지 못하게 하고.”
차를 따르고 있던 시녀가 대답하고 밖으로 나갔다.
마룻바닥의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멀어졌다.
“료우타!”
“네, 말씀하십시오.”
“지금부터 나누는 대화는 무덤까지 가져가야하네. 그 누구와도 상의해서는 안 돼. 주군께서도 모르는 일. 알겠는가?”
“넷? ······넷”
“이 일본 하늘 아래에 머리가 둘이네. 머리가 둘이면 어떻게 되겠는가?”
“······.”
“머리는 하나가 되어야 나라가 태평성대가 되지 않을까?”
‘머리가 둘이라면, ······하나는 관백, 다른 하나는 오사카에 있는······? 이것이 히데츠구의 명이구나! 내가 실패 시 히데츠구는 모르는 일이라 잡아뗄 것이다. 직접적으로 그 머리가 무엇인지 말을 하지 않았으니······.’
“왜 말이 없는가? 이해를 못 했다면 다시 설명하겠네.”
“아닙니다. 이해했습니다. 다만,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라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람 하나를 제게 주십시오.”
“사람이라니?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혹 라나를 말하는가? 쉽지 않은 부탁이야.”
무솔은 속으로 뜨끔하며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어떻게 내가 라나를 좋아하는 것을 알았을까?’
“아, 아닙니다. 저···, 구루시마 미치후사공이 관백 전하에게 바친 여자 하나가 있습니다. 그 여자를 저에게 주십시오.”
시게코레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허허, 그 소원은 들어줄 수가 없을 것 같네. 라나를 달라는 것보다 더 어려워. 미치후사공이 충성의 대가로 바친 여자라서 말이야.”
“이 단도를 관백 전하에게 바치겠습니다.”
무솔이 내민 단도를 본 시게코레가 난감한 표정이었다.
지난날 관백이 쿠니요시에 타다츠구 글자가 박힌 단도를 무솔에게 주면서 어떤 소원이든 말하면 들어 준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다른 소원은 없는가? 내가 알기로는 라나님을 좋아한다고 들었다만.”
“······.”
무솔은 안간힘을 썼다.
그녀를 생각하지 않으려 하면 할수록 괴로움이 배가 되고 있었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생각을 깊게 하지 말게. 미카가 아닌 라나님를 원한다면 들어 줄 수도 있어.”
“아니, 미, 미카는 왜 안 된다는 말씀입니까? 혹시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긴장된 모습의 무솔이 시게코레 앞으로 나아가 머리를 숙였다.
혹 무슨 안 좋은 일이 일어났을까 봐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미카와 무슨 사이인지는 모르지만, 미카는 지금 연금 중이라네. 여기 온 후로 주군께 시중을 들지 않겠다고 거절해서 말이야. 어제 미치후사공이 와서 한 번 더 달랬지만 소용이 없었네. 그녀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어. 포기하게나.”
깜짝 놀란 무솔은 마음이 저려 오는 것을 참으려 했지만 밀려오는 아픔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동생을 죽게 만들 수 없어. 예솔아! 내가 꼭 널 살릴 거야. 꼭!’
“부탁드립니다. 미카를 주십시오.”
“허허허, 자네의 뜻을 잘 알겠네. 하지만 주군께서 자네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게 되면 라나님도 잃어버리는 게야. 그래도 괜찮은가?”
무솔은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창틈으로 들어 온 바람에 무릎이 시렸다. 자신도 모르게 다다미를 손가락으로 움켜 지고 있었다.
‘만약 예솔이를 구하지 못하면 라나님도 구하지 못하게 된다. 차라리 라나님을 달라고 할까? 아니야, 아니야.’
시게코레가 담담한 얼굴로 가만히 무솔을 바라보며 기다려주었다.
“시게코레님, 제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게 관백 전하께 아뢰어 주십시오.”
시게코레가 무솔이 내민 단검을 손으로 슬쩍 밀었다.
오마찌로 찾아갔지만, 지난번 불탄 이후로 버려져 폐허가 되어 있었다.
씁쓸한 마음을 달래며 오사카로 가는 배를 얻어 탔다.
오사카의 오마찌로 들어갔다.
상점에서 일하는 아이가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료우타! 어서 오게. 살아오다니 꿈만 같군.”
작은 오마찌 스스무는 료우타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잘 계셨습니까? 건강한 모습을 뵈니 기쁩니다.”
“하하하, 그런가? 여기도 많은 일들이 있었지. 자 우선 별채로 가 있게.”
무솔은 별채의 거실로 들어와 차를 마시며 많은 생각에 잠겼다.
‘스스무님은 나의 정체를 안다. 그러고 보니 촌장님과 라나도······. 또 누가 알고 있을까? ······그 물건은 누가 가지고 있을까?’
오사카에 온 타이요우와 마주쳤다.
심기가 불편한 듯 타이요우가 무솔을 째려보고는 없는 사람 취급했다.
그를 따라온 하루토도 애써 무시했다.
무솔 또한 그들과 마주치기 싫었다.
“무사해서 다행이네.”
코카와성에 와 있던 칸베에 부관이 무솔을 기쁘게 맞이했다.
“네, 감사합니다.”
칸베에가 관백으로 부터 자신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너무도 자신을 아껴주고 배려해 주는 칸베에 부관이 꼭 아버지 같았다.
무솔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형!”
“오! 센, 아니지 도도 요시카쓰님, 그동안 별일 없이 잘 계셨습니까?”
무솔이 자리에서 일어나 센에게 절을 하려 했다.
“아이 씨, 형마저 이르면 나 다시 안 볼 거야.”
“요시카쓰님, 이것이 현실입니다. 도도가에서 살아남으시려면 강한 남자가 되어야 합니다. 더 이상 철없는 닌자로 살아가시면 안 됩니다.”
“어이구, 알겠습니다. 형님, ······우리 둘만 있을 때는 예전처럼 형으로써 대해줘요. 네?”
무솔은 센, 아니 요시카쓰의 눈을 바라보았다.
맑고 티 없는 눈이었다.
“좋습니다. 아니. 하하하. 그럼····, 험험.”
무솔이 어색한지 헛기침했다.
“·····좋아. 센, 신수가 훤해졌다. 대충은 들었지만 궁금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 봐.”
“하하하, 이래야 내 형이지. 이야기하자면 길어. 나도 이제 어른이라고. 술 한잔합시다.”
“하하하.”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로 밤이 깊어 가는 줄 몰랐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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