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전등화
역사는 반복된다.
대부분의 상단에 소속된 무사들이 항복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타이요우의 명을 받는 것이라 서로 이해하고 용서했다.
상황이 정리되고 난 뒤 상단에 속한 무사들은 다카도라의 죠유지 아래 병사들로 편제되어 들어갔다.
죠유지, 아니 다카도라의 도움을 받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형, 정말 조선으로 갈 거야?”
“그래, 그곳에 내 동생이 포로로 잡혀 있어. 하루라도 빨리 갔어야 하는 건데 여기 사정 때문에 이제야 가는 것이야.”
“그럼, 라나님은 어떻게 하고······?”
“······.”
센이 안타까운 듯 무솔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버렸으니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그녀의 운명에 맡겨야지. 뭐.”
무솔은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저택을 방문했을 때가 생각이 났다.
“무솔님과의 인연도 이것으로 마지막입니다. 오늘 밤 저와 함께 있어 주세요.”
무솔은 라나가 딱하기도 하고 밉기도 했다.
그녀의 말처럼 후시미성의 내성으로 들어가면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녀의 단호한 의지에 무솔은 더 이상 설득할 수가 없었다.
“성주께서 허락하실까요?”
“이미 허락받았어요.”
나란히 눕자 지난날 몰래 다카도라 성주의 교토 저택으로 잠입했을 때가 생각이 났다.
라나와 무솔은 서로를 보며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호롱불을 껐다.
무솔은 손으로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어둠 속에서 서서히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창을 통과한 달빛에 어렴풋이 비친 그녀의 눈동자가 사슴의 눈동자처럼 맑았다.
오사카 오마찌 상점에서 낭인으로 만났을 때 자신을 보던 그녀의 눈동자, 섬에서 죽어가던 자신을 보살피던 그 손길, 코카와 성벽에서 별을 헤아리고, 강가를 걷던 추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자 얼른 그녀를 꼭 껴안았다.
그녀도 무솔의 품 안에서 소리 없이 흐느꼈다.
그런 그녀를 꼭 안고는 등을 쓰다듬었다.
섬에서 코카와성으로, 남자들의 야욕에 다시 주라쿠성에서 후시미성으로, 그녀는 오롯이 그녀일 뿐인데, 세상은 그녀를 가만두지 않았다.
무솔은 자신의 운명도 기구하지만, 그녀의 운명 또한 그 못지않은 삶이라 생각하니 안타까움과 애절함에 눈물이 멈춰지지 않았다.
두 팔에 힘을 주며, 그녀를 꽉 껴안자 그녀가 무솔의 품 깊은 곳으로 들어오며 무솔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촉촉한 눈을 보며 살며시 입술을 가져갔다.
그도 그녀의 마음을 헤아렸을까?
그녀에게 몸을 맡겼다.
부드러운 손길과 뜨거운 입김에 온몸이 불덩이가 되는 것 같았다.
이 밤이 가면 다시 못 볼 마음에 그녀는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그를 계속 보챘다.
온몸에 뱀이 기어 다니는 것 같이 짜릿함이 전율로 변했다.
방안은 두 사람의 애절한 열기로 가득했으며, 새벽닭 우는 소리에 마음이 다급해졌다.
목마름은 달이 서산으로 져도 해결되지 않았다.
창이 어슴푸레 밝아 올 때까지 장지문이 흔들렸다.
*
돛이 풍만하게 부풀어 오르며 거친 망망대해의 파도를 헤치고 군함들이 속속 부산포로 들어갔다.
멀리 부산포가 눈에 보였다.
‘다시 조선으로 왔구나! 아직도 나는 일본 병사인가?’
무솔은 이요의 칸베에를 찾아가 조선으로 함께 가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조선인인 자네가 왜?”
“네, 제 동생이 조선에 포로로 잡혀 있습니다. 당연히 형으로서 동생을 찾으러 가야 합니다.”
“조선 군사를 벨 수 있겠느냐?”
“······.”
“조선인인 너를 어떻게 믿고 함께 갈 수 있겠나?”
고개를 떨구고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부관님, 섬사람들이 모두 죠유지님의 병사들로 편성이 되었습니다. 두령패도 이제는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코카와성에서 도움을 많이 주신 것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섬사람으로서가 아닌 일본인은 더더구나 아닌 한 개인으로서 동생을 찾고 개인적인 복수만 생각하겠습니다.”
무솔의 말에 한참을 생각한 칸베에,
“너의 마음은 잘 알겠다. 성주님이 아시면 큰일 날 일이다. 네가 아닌 다른 네가 함께 가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다.”
칸베에는 물러가는 무솔을 따스한 눈길로 바라봤다.
“어찌 너에게 그런 것을 요구할 수 있겠나! 네가 조선인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해도 관여치 않겠다. 다만, 적으로서 칼을 들고 마주 서지 않기를 바랄 뿐.”
장지문을 닫으려던 무솔이 칸베에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내가 아닌 다른 나와 함께······!’
조선이 다시 풍전등화에 놓였다.
이른 봄이 되자 기요마사가 병력을 이끌고 부산포로 건너갔다.
뒤이어 임진년보다 더 단단해진 군사들이 밀물이 되어 조선의 땅으로 밀려들어 갔다.
히데요시는 바다를 건너간 모든 무장에게 조선의 전라도를 점령하라는 명을 내렸다.
또한 임진년과는 달리 점령군으로서 수탈을 명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요시라를 이용하여 조선 조정과 조선 수군을 이간질 했으며, 가토 기요마사와의 관계를 이용해 더디어 이 순신을 수렁에 빠뜨릴 수 있었다.
고니시의 간계로 임진란 때부터 남쪽 바다에서 연전연승하며 일본 수군의 발을 묶어 일본군의 후퇴를 가져왔던 이 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모든 일본 수군들이 잔치라도 벌어진 듯 춤을 추고 술을 돌렸다.
무솔은 이 순신 소식에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의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언덕에 올라 홀로 눈물을 흘렸다.
‘조선이 스스로 무너지는구나!’
초여름의 열기를 뚫고 일본 수군이 속속 부산포로 들어가고 있었다.
“형, 저기가 형의 나라야? 아름다워 보여.”
“응, 그래서 마음이 더 아파.”
“미안해, 형.”
“네가 미안해할 이유야 없지. 히데요시의 야망이 많은 사람을 고통 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 게지. 조선이나 일본이나.”
“하이난님!”
센이 무솔과 이야기를 하다 바다 건너를 보고 있는 하이난을 불렀다.
하이난은 부산포를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무솔의 두 눈에 들어왔다.
“무솔님, 저도 조선으로 같이 가게 해주세요.”
“안 됩니다. 그곳은 전쟁으로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곳입니다.”
하이난이 무솔을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
“저의 부모님은 조선 사람이에요.”
“네?”
너무도 뜻밖의 말에 놀라 두 눈을 크게 뜨고는 하이난을 쳐다봤다.
“조선의 바닷가에 사시다가 왜구들에게 붙잡혀 오셨는데, 어느 상단의 노예로 팔려 와서 절 나으셨어요. 제가 어릴 때 부모님은 상단의 배를 타고 나갔다가 폭풍에 침몰해 돌아가셨어요. 그 뒤 저는 우여곡절 끝에 마천루의 주인인 레이 어머니의 눈에 띄어 여기까지 온 거예요. 부모님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센 리큐 스승님께서 늘 조선을 동경하셔서 저도 조선에 대한 그리움이랄까? 부모님의 고향을 가 보고 싶다고 생각하곤 했어요.”
“그런 사연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하이난님도 아픔이 많으시네요. ···좋습니다. 함께 가죠.”
“저곳이 부산포라는 곳으로 일본군의 전진기지가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아마 부산포를 들렀다가 수군의 본거지인 안골포로 가게 될 것입니다.”
하이난은 무솔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마냥 조선의 바다와 육지, 그리고 아무 적대감도 없이 일본의 배들을 구경하고 있는 갈매기를 쳐다보았다.
일본 수군의 수장들이 안골포 다카도라의 막사에서 작전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 순신이 없는 조선의 바다는 유람하기에 딱 좋은 바다올시다. 우리의 정보에 의하면 원균이라는 자는 다혈질에 성미가 급하다고 들었소. 또한 이 순신 아래 있던 무장들과 불협화음이 많아 통제가 잘 안된다고 하더이다.”
다카도라가 특수부대가 수집해 온 정보를 간략하게 말했다.
그의 말에 와키자카 야스히로가 거들었다.
“맞습니다. 이번 작전은 태합 전하의 명을 따르는 것으로 수군이 길을 열어야 육군이 전라도로 진격할 수가 있습니다. 지난날 이 순신에게 당했던 것을 되갚아야 합니다.”
와키자카가 지난날을 떠 올리는지 몸서리를 쳤다.
수장들은 앞에 놓인 술상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작전회의에 열중했다.
“이번만큼은 지난날의 수모를 되갚아 줍시다. 일본 수군의 자존심이 걸린 작전입니다. 제장들은 작전대로 잘 준행해 주시오. 이번 작전명은 호랑이 가죽 벗기기입니다. 하하하.”
요시아키의 말에 다른 수장들도 따라 웃었다.
“시마즈 요시히로 부대의 육지에서 활약이 중요합니다.”
요시아키가 다시 한번 육군과 수군의 협력을 강조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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