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의 목을 베다
역사는 반복된다.
“부관님, 움직이게 해 주십시오.”
칸베에 부관이 무솔을 돌아보았다.
조류가 바뀌며 적과 아군의 처지가 바뀌자 일본 수군의 배들이 급격히 밀리기 시작했다.
일본 배들이 급류의 힘에 못 이겨 밀려나자 뒤에 대기하고 있던 배들과 충돌이 일어나면서 아수라장이 되고 있었다.
배들이 밀려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서도 피할 여유가 없었다.
울돌목 입구의 아카타부네가 있는 곳까지 전선들이 뒤죽박죽으로 밀려들었다.
“자중하라! 내 칼에 먼저 죽을 수도 있다.”
칸베에가 아수라장이 되어 가고 있는 전장을 보며, 날카롭게 말을 던졌다.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부모님의 원수를 갚지 않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부관님께서 제 목을 원하신다면 드리겠습니다. 다만, 원수를 갚고 난 뒤입니다.”
“······.”
무솔은 뒤로 두 발짝 물러나 칸베에 부관에게 조용히 목례했다.
돌아서서 급류에 휩싸여 뒤로 밀려오는 배들로 뛰어넘기를 반복했다.
센이 그 뒤를 따랐다.
무솔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칸베에 부관의 마음이 착잡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운명은 하늘에 있는 것이리라. ······적으로 만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무솔은 밀려오는 함선들을 넘고 넘었다.
함선이 휘청하면 무솔도 휘청했다.
하지만 미치후사를 향해 나아가는 무솔을 그 무엇도 막을 수 없었다.
무솔이 올라탄 함선 바로 앞에 미치후사의 함선이 있었다.
그 너머 있는 다른 일본 함선이 미치후사의 함선을 들이박았다.
함선이 휘청하자 일본 병사들이 쓰러졌다.
급류에 실리다 보니 격군들의 힘이 미치지 못하자 함선이 급류를 따라 허우적거렸다.
미치후사가 탄 함선이 뒤틀리며 급류에 밀리다 배 옆구리가 무솔이 탄 함선에 부딪혔다.
배의 흔들림이 멈추자 무솔은 칼을 빼 들고 건너편 배로 뛰어들었다.
이미 배 위에선 지휘권이 상실된 채 병사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넘어지고 몇몇은 바다로 떨어졌다.
무솔이 미치후사 가까이 다가갔다.
“웬 놈이냐?”
애꾸눈을 한 히까루가 무솔을 막아섰다.
히까루의 말에 미치후사가 고개를 돌려 무솔을 보고는 놀란 눈을 하며 몸을 무솔에게로 돌렸다.
“네 놈이 여기까지 오다니 겁이 없구나!”
“하하하, 겁이 많았다면 왜놈 나라로 가지도 않았다. 내 동생 해솔, 아니 다테모노는 어디 있느냐?”
“네놈 목숨이나 걱정해라. 저놈을 죽여랏.”
미치후사 옆에 있던 무사들이 무솔에게 달려들었다.
“여기도 있다.”
뒤늦게 배로 건너온 센이 싸움에 뛰어들었다.
“반갑다. 조선 놈.”
“네 놈은 다카키! 오너라.”
다카키가 칼을 치들고 달려들었으나 두 수만에 가슴이 갈라졌다.
미치후사 앞에서 칼을 들고 서 있던 히까루가 다카키가 죽자 칼을 움켜잡았다.
센을 향해 달려오던 히까루를 누군가가 막아섰다.
“여기도 있다.”
종하와 연서가 배를 건너와 막아섰다.
언제 다가왔는지 조선 판옥선이 세끼부네를 위협하고 있었다.
무솔은 동료들을 둘러보고는 미치후사에게 달려갔다.
“오너라! 이곳을 내 무덤으로 생각하겠다.”
무솔의 칼이 미치후사의 머리로 향했다.
미치후사가 날렵하게 피하며 무솔의 옆구리를 공격했다.
무솔도 뒤로 반걸음 물렀다가 찔러 들어갔다.
배가 급류에 휘청거리며 돌고 있었다.
겨우 중심을 잡으며 칼을 맞대고 있던 두 사람이 배 뒤편까지 갔다.
둘은 서로 칼을 겨누며 응시했다.
무솔이 아픔을 참는지 인상을 찡그렸다가 폈다.
어제 타이요우와의 싸움에서 입은 상처로 인해 아랫배에서 고통이 밀려 올라왔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버티며 서 있는데 배가 다른 배와 충돌하며 다시 기우뚱했다.
그 순간 미치후사의 칼이 무솔이 옆구리를 지나갔다.
“윽.”
무솔의 입에서 단말마 비명이 새어 나왔다.
되돌아선 무솔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옷이 예리하게 잘려 나갔고 살갗이 살짝 보였다.
라나가 준 쇠비늘 옷이 벌어져 있었다.
많이 낡았지만, 무솔은 라나를 생각하며 여러 번을 기워 입었었다.
앞에 선 미치후사가 칼을 배 상판에 대고 무솔을 노려보고 서 있었다.
목에서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미치후사의 칼이 무솔의 옆구리를 지나는 순간 그의 칼이 미치후사의 목을 향했다.
칼을 다시 잡은 무솔이 미치후사를 향해 걸음을 떼었다.
“미치후사, 네 놈은 불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잘 가거라!”
“어?”
미치후사의 목을 향해 내리치던 칼이 누군가의 칼에 의해 튕겨 나갔다.
돌아서는 무솔을 향해 다시 공격이 이어졌다.
무솔은 겨우 칼을 받으며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무솔 앞에 아니, 미치후사의 앞에 젊은 일본 무사가 칼로 무솔을 겨누고 서 있었다.
치열하게 싸웠는지 피가 얼굴과 옷 여기저기에 묻어 있었다.
“해, 해솔아.”
“······? 나는 무적 무라카미 부대의 고라이 다테모노다. 덤벼라.”
해솔이 뒤에 있는 미치후사를 쳐다보고는 칼을 들고 무솔에게 달려들었다.
무솔은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막지 못하고 가슴이 베었다.
뒤로 밀리면서 칼을 휘두르자 해솔이가 두 걸음 뒤로 물러나 미치후사 앞에 섰다.
“후후, ···잘했다. ···다테모노. 넌 자랑···스러운 ···무라카미 용···사다. ·········저놈이 네··· 어머니를 죽게 만든··· 원···수다···.푸 아 하···!”
미치후사가 몸을 겨우 가누며 목에 피가 고여 걸걸한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했다.
그의 목소리에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어, 어머니의 원수? 놈. 반드시 죽이겠다.”
어머니를 죽인 원수라는 소리에 격앙된 해솔이 고함을 지른 후 무솔에게 달려왔다.
무솔은 배 바닥에 대고 있던 다리를 세우며 일어났다.
“해, 해솔아. 나야 나. 형, 무솔이야.”
“난 무라카미 해적의 용사다. 어머니의 원수! 너의 목을 베겠다.”
해솔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원수만이 이글거리는 눈앞에 서 있을 뿐이었다.
해솔의 칼이 바람을 갈랐다.
“다테모노, 안 돼! ······네 형이란 말이야!”
“여기가 어디지?”
무솔은 깜깜한 길을 걸었다.
주변은 온통 어둠으로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 어머니!”
저 멀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 있었다.
무솔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향해 달려갔다.
안개가 짙어지며 앞이 분간이 가지 않았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이 점점 안개에 묻혀 사라지고 있었다.
“어머니!”
무솔은 안개 속을 휘저으며 어머니를 불렀다.
가도 가도 안개 속이었다.
그 속에서 헤매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수도 없이 불렀다.
안개가 짙어지며 가슴이 답답하고 목이 말랐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있는 힘껏 아버지와 어머니를 불렀지만, 입속에서만 맴돌았다.
아무 답이 없는 안개 속에서 지쳐 홀로 우두커니 눈물을 흘렸다.
갑자기 휑하니 바람이 불더니 눈앞이 밝아지며 누군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머니······.”
“저예요. 연서. 제가 보이세요?”
“형, 정신 차리세요.”
무솔은 앞이 뿌옇게 다가오다가 점점 밝아지자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연서가 보였다.
힘겹게 고개를 돌리자 그 옆에 센이 있었고 그 뒤로 다가오고 싶지만 차마 다가오지 못하고 애타하는 하이난과 눈이 마주쳤다.
“무솔, 괜찮은가? 나 준사야.”
“오라버니.”
준사의 근심 어린 얼굴과 눈물로 범벅이 된 예솔의 얼굴도 보였다.
그리고 벽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사내가 보였다.
고개를 박고 있어서 얼굴을 알 수 없었지만, 무솔은 알 수가 있었다.
“해, 해솔아!”
무솔이 부르자 그제야 고개를 들고 무솔을 바라본 해솔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다가왔다.
해솔이는 무솔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혀, 형, 미, 미안해. 저, 정말 모르고 그랬어. 날 요, 용서해줘. 엉엉!”
해솔은 겨우 조선말로 띄엄띄엄 말하고는 방이 떠나갈 듯 울었다.
“괘, 괜찮아! 모르고 그런 거잖아!”
무솔이 상처 부위가 아픈지 약간 인상을 찌푸렸다가 폈다.
예솔이가 다가와 해솔을 감싸며 따라 울었다.
방안은 세 남매의 흐느낌으로 가득했다.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세 사람의 눈물에 어디로 갈지 몰라 헤맸다.
해솔의 칼에 쓰러진 무솔이 앞으로 쓰러지자 미치후사가 미칠 듯이 웃었다.
“자기의 형을 죽이다니. 바보 같은 놈. 하하하.”
미치후사는 겨우 몸을 난간에 지탱하며 해솔을 비웃었다.
센이 달려왔다.
이어 종하도 달려왔다.
그들은 쓰러진 무솔을 보며 해솔에게 칼을 겨누었다.
“잠깐.”
그때 누군가가 고함을 치며 배로 넘어왔다.
“다테모노, 이 사람은 네 형이야. 너는 조선인, 네 이름은 해솔이다. 정신 차려.”
준사의 말에 해솔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적이 자신을 보고 조선 이름을 말할 때는 별 미친놈을 다 보겠다는 마음이었다.
아니 어머니의 원수라는 말에 정신이 돌아 버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칼을 막지 않고 쓰러질 때도 별난 놈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쥰세이, 준사가 조선 이름을 말하자 온몸이 경직되었다.
한산섬 감옥에 있을 때 자신을 알뜰히 챙겨주던 준사가 아니던가?
해솔이 뒤를 돌아 미치후사에게 간절한 눈빛으로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미치후사는 미친놈처럼 웃기만 했다.
아련하게 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기에 당황스럽고 믿을 수 없었다.
“성주님, 제발 아니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고라이 다테모노입니다. 제발!”
“으하하하. 그래 다테모노. 넌 다테모노의 삶을 산 것이다. 푸 하하하. 조선 놈들은 어쩔 수 없다니까! 으하하하.”
해솔은 하늘을 향해 괴성을 지르고는 칼을 들고 미치후사에게 달려들었다.
해솔의 칼이 미치후사의 목을 지나갔다.
“쿵.”
미치후사의 목이 배 갑판에 떨어져 굴렀다.
해솔의 칼에 피를 하늘로 뿜으며, 미치후사의 미친 웃음소리가 허공을 맴돌았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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