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섬 어린 포로
역사는 반복된다.
어란진에 머물고 있던 조선 수군 앞에 일본 수군 배 몇 척이 나타났다가 퇴각했다.
조선 수군을 염탐하면서 대비 태세를 확인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일본 육군과 함께 남원성을 점령한 수군은 이 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에 남해로 내려왔다.
칠천량 전투로 승기를 잡은 일본 수군은 보잘것없는 조선 수군의 규모에도 불구하고 이 순신이 무서워 감히 바로 공격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이 순신을 제거하기 위해 닌자들과 날쌘 기마 무사들을 보냈지만 둘 다 실패했다.
닌자들은 무솔 일행으로 인해, 기마 무사들은 종하와 연서의 조선 무사들로 인해 이 순신에게로 가지 못하고 되돌아갔다.
일본 수군은 함선을 타고 서쪽으로 오면서 이 순신의 수군을 탐색하기 위해 육지가 아닌 바다로 탐방선을 계속 띄웠다.
어란진 앞 바다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무솔은 일본 수군과 닌자들의 동향을 살피며, 센과 하이난을 시켜 전라도 남해안에 소문을 퍼뜨렸다.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의 정확한 전력을 알고자 했지만 쉽지 않았다.
닌자들과 정탐꾼들의 정보가 달랐다.
닌자들은 적의 배가 몇 척 되지 않는다고 하고, 정탐꾼들은 충청도에서 보내온 배들과 함께 수십 척은 된다고 보고했다.
일본 수군이 정보의 혼란 속에 시간을 보낼 때 이 순신은 조금씩 전력을 회복해 나가고 있었다.
칠천량 패전으로 사기가 죽은 병사들의 몸과 정신을 추슬렀으며, 협선을 모으고 고깃배를 전선으로 위장할 시간을 벌었다.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을 시험하기 위해 소규모의 전선으로 충돌을 일으켰다.
팽팽한 긴장감으로 전력을 쏟아붓지 않으며, 적절한 공격 시점을 잡기 위해 고심했다.
눈앞에 보이는 조선 수군은 보잘것없어 보였지만, 그 상대가 이 순신이었기에 쉽게 공격하지 못하고 탐색에 탐색을 거듭하고 있었다.
“준사를 만나야겠다.”
“네? 준사라고요?”
“아! 쥰세이를 조선에서는 준사라고 해.”
“그래요? 근데 쥰세이가 간자일 수도 있어요. 고변하면 끝이에요. 끝.”
“어쩔 수 없지. 그때는 조선 병사가 되는 거지. 뭐.”
“······.”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이난이 무솔을 빤히 쳐다보았다.
무솔은 자ㅅ;의 얼굴에 뭐가 묻었나? 라고 생각하다 그제야 자신이 말을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솔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되돌아 센을 쳐다보았다.
“미, 미안. 내가 그만.”
“아냐. 형. 나도 조선 병사가 되고 싶어. 형이 가는 길이라면 언제나 함께 할 거야.”
“저 또한 센과 마찬가지예요.”
센이 뚱하고 있다가 무솔을 보며 환하게 웃어 보이자 긴장하고 있던 하이난도 그런 센을 보고는 따라 웃었다.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에 눈물이 핑 돌았다.
“센, 하이난님. 고맙습니다. 저 때문에 어려운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하루라도 빨리 전쟁이 끝나야 두 나라 백성들이 편할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두 사람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센과 하이난도 무솔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준사를 만나러 가기 위해 차비하자 센은 무솔이 걱정되었는지 말렸다.
하지만 결심을 굳힌 듯 일본 수군에 대한 감시를 부탁하고는 어둠 속으로 달려갔다.
“센, 여기에 남아 수군의 움직임을 살펴줘.”
*
벽파진 근처 조선 수군의 동향을 살폈다.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과의 결전을 앞두고 어란진에서 벽파진으로 진을 물리고 결전 준비에 들어가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조선 수군의 진지로 잠입하기 위해 해안가를 따라 그림자를 숨기며 접근했다.
문득 닌자 교육을 받던 섬에서의 일이 생각이 났다.
사카야마와 라나, 그리고 마모루 촌장과 다른 동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보고 싶다·····.’
잠시 옛 생각을 하다 조금씩 앞으로 가고 있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놀란 무솔이 땅바닥에 엎드려 앞을 살폈다.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불규칙하게 들렸다.
해안가 어둠 속에서 거뭇한 그림자가 보였다가 사라졌다가 하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발걸음 소리가 일정치가 않아.’
엎드려 있는 바로 아래로 누군가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지나갔다.
‘탈영병?’
달빛에 반사된 바닷물에 반짝이는 탈영병의 모습이 어슴푸레 보였다.
‘저건 장수 같은데. ······탈영이라. 조선 수군의 사기가 말이 아니겠지. 배 열두 척으로 일본 수군을 상대한다는 것은 아무리 장군이라도 무리일 것이다. 장수들마저 탈영하는데 일반 병사들은 오죽할까?’
탈영병의 그림자를 눈으로 쫓다가 이 순신의 마음은 어떨까? 란 생각에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지며 아려왔다.
탈영병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다시 앞으로 나갔다.
굴강에 조선 판옥선들이 있었고 병사들이 선상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 모습이 달빛에 어렴풋이 보였다.
파도에 배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렸다.
판옥선 달그림자를 이용해 배 아래를 지나 진중 깊숙이 들어갔다.
결전이 다가와서 그런지 진중은 음산할 정도로 고요했다.
병사 하나가 건물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밤이 늦었는데 어디를 싸돌아다니느냐?”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며 말하자 병사가 놀라 고개를 약간 숙이고 되돌아서며 대답했다.
“아, 네. 급한 볼일 때문에 나왔다가 제 막사가 어딘지 몰라 헤매고······. 쥰세이, 아니 준사!”
혹 들킬까? 고개를 숙였지만 목소리가 낯설지 않아 살짝 눈을 치켜든 병사가 놀란 모습으로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무솔은 미리 준비한 조선 병사의 옷을 입고 준사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누, 누구냐?”
“나, 료우타!”
료우타란 소리에 멈칫한 준사가 다가와 얼굴을 확인하고는 주변을 둘러보며 팔을 잡아 이끌고 어두운 나무 그림자 아래로 들어갔다.
다시 주변을 살펴본 준사가 무솔을 데리고 으슥한 곳으로 갔다.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눈 둘은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 서로 어둠 속에서 상대의 잘 보이지 않는 얼굴을 보고 있었다.
“어떻게 여기에 온 거야?”
“이야기하면 길고, 일본 수군 약 오백여 척의 배들이 곧 들이닥칠 거야.”
“우리도 알고 있어. 그래서 준비를 하는 중이야.”
“열두 척으로는 막아서기 힘들 텐데, ······장군은 좋은 계책이 있기는 해?”
말을 하고도 멋쩍었는지 머리를 긁적거렸다.
“글쎄, 나도 불안하기는 한데, 그것은 통제사께서 생각이 있으시겠지. 그건 그렇고. 료우타, 지난번 왜 그냥 가버렸어. 이별주를 하기로 하고선 말이야.”
“그때? 네가 날 고변할까 봐 무서워서.”
“목숨을 여러 번 빚진 내가······. 설마!”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며 조용히 웃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웃음이 뚝 잘리며 무솔이 준사를 바라봤다.
“궁금한 게 있다. 쥰세이, 아니 준사. 한산섬에서 감옥에 갇혀 있던 어린 일본 병사 기억해? 장군이 글을 읽어 주었던 것 같은데.”
“어? 네가 그걸 어떻게······.”
“그럴 일이 있어.”
준사는 무솔의 눈을 한참 쳐다보다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군. 맞아. 통제사께서 어린 나이에 전쟁에 참여한 그 아이가 불쌍하다고 하셔서, ······시간 나실 때마다 글을 읽어 주셨지. 나도 포로가 되어 있었는데 통제사가 날 좋게 보고 풀어 주었어. 장군은 포로들에게도 인간적으로 대해 주셨어.”
“역시 장군은 뭐가 달라도 다르시구나.”
“그럼, 장군을 따르는 병사 치고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 정말 믿고 따를 수밖에 없는 분이시지. 물론 군율에 대해서는 엄격하시지만······. 내가 잡히고 얼마 후 섬사람이 찾아왔었어. 그 이후 내가 간자가 된 거고······. 그때 통제사가 풀어 주긴 했지만 나는 닌자였으니까.”
‘준사가 간자가 맞는구나!’
“그래? 섬사람이라면······. 아하. 후후. 그런데 어쩌다가······?”
“다른 조선 사람들은 날 왜구라며 상대도 해주지 않고 멀리했지만, 통제사는 날 그냥 사람으로 대해 주었거든. 그래서 조선인, 물론 그렇다고 진짜 조선인이 되지는 않겠지만, 준사의 삶을 살기로 한 거야. 아, 참. 뭘 물어봤더라?”
“어린 포로······.”
“아니, 갑자기 그 어린 포로가 왜 궁금한 거지?”
“사실은 그 아이가 내 동생 같아.”
준사는 놀라, 말을 못 하고 입을 한 손으로 가린 채 어둠 속에서 무솔을 쳐다보며 그때 그 아이를 떠 올렸다.
“준사!”
“어? 어. 그게······, 칠천량 전투 때, 허겁지겁 대패해 통제영으로 도망해 온 배 설 장군이 한산 통제영에 불을 질렀어. 그때 통제영에 있었는데, 그 아이를 감옥에서 빼돌려 숲에 숨어 있게 했으니 아마도 지금쯤······, 일본군 병영에 있지 않을까?”
“뭐? 뭐라고······?”
무솔은 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꼈다.
“네 동생인 게 확실한 거야?”
“이름이 타테모노라고 했어.”
“마, 맞아. 그 아이의 이름이 타테모노였어. 이상한 것은 처음에는 조선말을 잘 못 했는데 조금 지나니 곧잘 하더라고.”
“그 아이의 조선 이름은 해솔이야.”
“뭐! 뭐라고 해솔. 그 아인 분명한 일본 아이 같았는데······, 설마······! 료우타 너, 조선인? 그렇구나. 타이요우의 말이 사실이었어.”
“맞아, 내 이름은 무솔이야.”
“무, 무솔이라고!”
타이요우가 료우타가 조선인이라고 했지만, 의심보다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은인으로 모른 척해 왔었다.
무솔 형제의 기구한 운명에 마음이 아팠다.
그때 그 아이를 자신이 함께 데리고 오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고 미안했다.
“어딘가에 분명히 살아 있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준사가 낙담하고 있는 무솔을 달랬다.
두 사람은 하늘이 어스름 밝아오자 헤어졌다.
준사를 만나 많은 정보를 주고받았다.
그가 간자라고 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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