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카와 고에몬
역사는 반복된다.
“쨍그랑!”
찻주전자가 발에 걸려 소리가 나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상상 속에 빠져 아무 주의도 하지 않고 여자가 누워 있는 곳으로 다가가다 장지문 앞에 놓인 찻주전자를 건드린 것이다.
살포시 잠든 요도도노가 소리에 놀라 잠을 깨고는 고개를 돌려 장지문을 바라보다 검은 그림자가 서 있는 모습을 보고는 입을 삐죽이면서도 웃는 얼굴로 말을 걸었다.
"벌써 오면 어떻게··· 흡!"
복면이 급히 요도도노의 입을 막았다.
두 사람의 눈이 희미한 달빛 아래 마주쳤다.
요도도노의 눈을 본 복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요도도노가 옆에 누워 있는 늙은 코자루를 쳐다보고는 얼른 일어나 그를 장지문 밖으로 내몰았다.
자기의 입을 막고 있는 복면의 손을 손으로 잡아 입에서 살짝 떼고는,
“아이, 자기도 참. 이렇게 막무가내로 들어오면 어떻게 해요. 그곳에서 기다려요. 잠시 후 갈 테니까.”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요부가 따로 없었다.
잠지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그녀글 꼭 안고는 입술을 덮쳤다.
“아이, 오늘따라 왜 이리 급하셔.”
여자를 멀리한 지 벌써 수년째라 정신이 아득해졌다.
성으로 들어온 목적도 잊고 여색에 눈이 멀어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찻주전자 소리에 경호 무사들이 달려와 장지문을 열었다.
요도도노가 검은 복면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본 그들이 무슨 상황인지 몰라 주춤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품에 들어 온 요도도노를 밀어내며, 잠을 자는 히데요시를 노렸다.
그때 문을 열고 들어온 경호 무사들이 무슨 상황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모습을 보고는 그녀를 그들에게 밀치고는 장지문을 박차고 나갔다.
“침입자다!”
고함에 놀란 히데요시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당황한 요도도노가 얼른 히데요시에게 다가가 무섭다며 품으로 안겼다.
장지문을 박차고 나간 복면이 또 다른 방에서 경호 무사들에게 둘러싸였다.
“네 놈은 누구냐?”
언제 다가왔는지 경호 무사 뒤에 선 히데요시가 옷도 제대로 못 추린 채 물었다.
“하하하, 난 이 세상의 밤을 지배하는 자다.”
“밤을 지배하는 자라면······, 혹, 이시카와 고에몬!”
“다 늙어 빠진 생쥐인 줄 알았더니 밤의 황제를 알아보는구나!”
“가, 감히··· 내, 내 앞에서······. 무, 무엇하느냐? 저, 저놈을 당장···.”
분노한 히데요시가 어이가 없는지 말문이 막혀 더듬거렸다.
히데요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에몬이 연막탄을 터뜨리고는 장지문을 박차고 달렸다.
뿌연 연기 뒤로 히데요시의 미친 고함이 따라왔다.
위층이 시끄러웠다.
경계를 서고 있던 병사들이 위로 우르르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일반 병사의 모습으로 변복한 무솔도 재빠르게 달려가 병사들을 뒤쫓아 따라 올라갔다.
“침입자다. 저쪽 복도로 도망간다.”
“이시카와 고에몬을 잡아라!”
검은 그림자가 장지문을 박차고 나와 복도 끝으로 달리는 것이 보였다.
‘이시카와 고에몬? 그는 은퇴하여 노후를 즐기고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그가 왜?’
병사들을 따라 달리면서 고에몬을 떠 올리고는 힐끗 방안을 살폈다.
경호 무사 십여 명이 알몸을 이불로 가린 누군가를 호위하고 있었다.
‘히데요시!’
그 옆방에 있던 시녀들은 놀랐는지 모여서 방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젠장, 눈앞에 토끼가 있는데.’
달리면서 여러 생각을 했다.
많은 경호 무사들과 병사들로 히데요시 근처에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눈앞에서 고에몬이 사라지자 경호 무사들과 병사들이 망설이고 있었다.
다가가 보니 통로 하나가 보였는데, 어두컴컴했다.
얼핏보니 비밀 통로로 아래로 바로 내려갈 수 있는 곳이었다.
경호 무사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주저하고 있었다.
‘고에몬은 어떻게 이런 비밀 통로를 알았을까?’
자신의 침투가 한심했다.
아래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이봐, 못 보던 자인데, 소속을 밝혀라.”
경호 무사가 무솔을 보고는 칼을 겨누었다.
무솔이 돌아서며 얼굴을 가렸다.
“나? 하하하. 쥐새끼를 잡으러 왔지.”
말을 함과 동시에 비밀 통로로 뛰어들었다.
“무엇하느냐? 따라가거라.”
그제야 경호 무사들이 비밀 통로로 뛰어들었다.
자발적이 아닌 대장쯤으로 보이는 자가 밀어 넣었다.
다행스럽게도 바닥에 뭔가가 있어서 사뿐히 내려앉을 수 있었다.
캄캄한 바닥을 기어 출구를 찾았다.
다행히 고에몬이 빠져나간 뒤 완전히 닫히지 않은 출구가 희미하게 보였다.
한 점 밝은 빛을 보며 달렸다.
뒤에 병사들이 비밀 통로로 내려오며 비명을 지르는 오는 소리가 들렸다.
밖으로 나온 무솔, 계속 앞으로 달렸다.
고에몬이라는 자가 담을 넘고 있는 모습이 달빛에 보였다.
비상 소리를 들은 병사들이 혼마루 정원 안으로 몰려들었다.
병사들이 몰려오는 모습에 잠시 망설이다 방향을 바꿔 건물 뒤로 돌아 다른 방향을 나가려 했지만 벌써 병사들이 사방에 경계를 서고 있었다.
가까스로 쪽문을 빠져나와 소나무 숲으로 달렸다.
미리 준비했던 찐쌀이 다 떨어져 배가 고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땅 위로 올라왔다.
‘지금쯤이면 경계가 느슨해졌으려나? 고에몬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모르겠단 말이야. 오래전에 도둑질을 그만둔 고에몬이 무엇을 더 훔치려고, 아니 내 토끼를 노린 것일까? ···아니 고에몬이 토끼를? 왜?’
무솔은 경계가 느슨해진 오시(오후12시)에, 아니 느슨할 것으로 믿고 과감하게 관목 숲에서 나와 대나무를 입에 물고 해자를 건너 오사카성에서 빠져나왔다.
한낮에 침입자가 철옹성을 빠져나가리라고 누가 알았겠는가?
여유롭게 외성 뒤 숲속으로 올라와 땅에 묻어 두었던 옷을 꺼내 갈아입었다.
길거리의 사람들이 어딘가로 몰려가고 있었다.
무슨 구경거리가 있나 보다 생각한 무솔은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
많은 사람이 아지강가로 가고 있었다.
둑 위에서 사람들이 모여 쳐다보는 곳을 보자 멀리 강둑 아래 무사와 병사들이 큰 가마솥에 물을 끓이고 있었다.
먹을 것을 준비하나보다 생각한 무솔이 돌아서려는데 가마솥에서 멀지 않은 곳에 누군가가 포박되어 있었고 그 옆에는 어린아이 하나가 울고 있었다.
‘설마?’
“이보시오. 저기 병사들이 무엇을 하는 게요?”
“그것도 모르시오. 지금 도둑놈의 죄를 물어 팽형을 집행한다오.”
“네? 팽형이라니요? 그것은 어떤 형벌입니까?”
사내는 무솔이 답답하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찼다.
“저기 솥을 끓이고 있지 않소. 저기에 넣어 죽이는 것이오.”
옆에서 듣고 있던 다른 사내가 무솔을 돌아보며 말했다.
“네?”
너무 놀라 말문이 막혔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다시 물었다.
“아니, 얼마나 큰 잘못을 했기에 사람을 끓는 솥에 집어넣는단 말이오?”
“허허, 댁은 어디에서 오셨소? 그 유명한 이시카와 고에몬이라는 자를 모르시오. 얼마 전 오사카성을 털다가 잡혔다고 하더이다.”
처음 말을 했던 사내가 무솔이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네? 이, 이시카와 고에몬이라고요?”
“아니, 왜 그렇게 놀라시오. 혹 아는 자요?”
당황하여 말이 안 나왔다.
“이 자도 수상한데.”
“아, 아닙니다. 밤의 제왕이라는 고에몬이 잡혔다고 하니 믿을 수가 없어서 그렇죠. 근데 어떡하다 잡혔을까요?”
“허허, 그야 누가 고변했다고 하더군. 그저께 군사들이 사카이에 숨어 있던 고에몬을 잡아 온 것이라오.”
‘사카이라고······. 고에몬이 잡혀서 성의 경계가 느슨해졌었어.’
더 가까이 가기 위해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밀지 마세요.”
“아, 미안합니다. 잠깐만 앞으로 갈게요.”
무슨 좋은 구경거리인지 사람들이 많아 더 이상 앞으로 갈 수가 없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그의 얼굴이 궁금해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발뒤꿈치를 들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고에몬이라는 자가 보였으나 얼굴을 숙이고 있어 알 수가 없었다.
고에몬 옆에서 울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저, 저 아이는······.”
너무 놀라 아이를 보다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고에몬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아니, 사, 사카히로님! ······사카히로님이 이, 이시카와 고에몬? 뭔가 잘못된 거야. 그럴 리가 없어. 아냐. 아니야.’
고개를 심하게 흔들었다.
작금의 상황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사카히로님이 고에몬이라니 믿을 수가 없어. ······라나님은 알고 있었을까? 뭔가 이상하긴 했지만·····, 왜 몰랐을까? 바보같이.’
병사들이 고에몬과 아이를 집어 들고는 펄펄 끓는 가마솥에 집어 던졌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탄식을 했다.
무솔도 도저히 볼 수가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살이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서도 고에몬은 병사들이 아이를 던지자 묶였던 줄을 풀고 애절하게 울부짖으며 아이를 들어 올렸다.
아이를 머리 위로 들고 울부짖는 고에몬의 모습에 찢어질 듯 아픔이 몰아쳤다.
사람들도 고에몬의 모습에 안타까운지 발을 동동 굴렀다.
참혹한 모습을 도저히 볼 수가 없어서 돌아서고 말았다.
‘사, 사카히로님! 왜? 왜 그러셨습니까?’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숙이고는 사람들을 비집고 밖으로 나왔다.
사카이로 가 오사카성으로 들어가기 위해 부탁했던 일이 생각이 났다.
그의 죽음이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분명히 누군가 고변했다고 했다. 누굴까?’
오마찌 별채 주위에 짙은 안개가 내려앉아 있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어떻게 될지를 고민하지 않고 발걸음을 내디뎌 별채로 들어갔다.
스스무와 동료들이 무솔을 보고 놀랐다.
아무도 무솔을 잡으려거나 공격하지 않았다.
사카히로의 죽음에 모두 충격과 공포로 몸에 기운이 다 빠져나간 듯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스스무님, 어떻게 된 것입니까? 고변자가 누구입니까?”
겨우 고개를 든 스스무가 무솔을 바라봤다.
슬픔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우, 우리도 믿을 수 없어서 이렇게 망연자실하고 있네. 다시 한번 더 확인을 해봐야겠지만······.”
“스스무님, 모든 섬사람을 동원해서 반드시 원수를 갚읍시다.”
“아직은 단정할 수 없어. 다시 한번 더 확인하자고.”
“두 분 다 답답하십니다. 그자가 누구입니까?”
스스무와 진치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도저히 말을 할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타이요우라고 합니다. 죽일 놈.”
“네? 타, 타이요우가요?”
카이토의 말에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옛 동료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무솔을 조선 놈이니, 동료들을 죽인 원수라느니 하면서 앞장섰던 타이요우가 자신들을 배신했다고 생각하니 분했다.
그들은 무솔의 얼굴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억울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복잡한 심경에 모두가 조용히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사카히로가 잡혀간 이후 타이요우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곧 놈의 소재지가 파악될 거다. 게닌들과 마천루를 이용해서 찾고 있네.”
무솔은 더더욱 복잡해진 상황에 대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타이요우가 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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