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명호(韓命昊)
역사는 반복된다.
무솔과 연서가 걸어가는 뒤로 어머니와 동생들 이름이 적힌 헝겊조각이 바람에 날렸다.
무솔은 종하형님이 연서를 좋아 하고 있는 것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연서는 종하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연서와 무솔이 함께 있는 것을 볼 때마다 종하는 가슴이 아팠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종하는 그들 주위를 맴돌 뿐이었다.
오랜 기다림의 기쁨일까? 이제 곧 무솔은 떠날 것이다.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 아니 늦은 저녁 별들이 가득한 밤하늘을 바라고 있는데 배달처사가 다가왔다.
“무솔아!”
“네. 스승님.”
“저 밤하늘을 바라보거라. 별들이 무수히 많구나!”
“네, 별들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습니다. 다만, 내일 떠나는 제 마음이 별들을 바라보면 심하게 흔들립니다.”
“너의 마음이 복잡하겠지. 하지만 무솔아! 저 별들도 각자의 위치에서 자기의 주어진 역할을 위해 저렇게 반짝이고 있는 거란다. 너 또한 삶의 목적이 있을 것이다. 너는 분명히 선택되어 태어난 아이다. 결코 쉽게 죽거나 별 볼일 없이 죽어 갈 수 없는 운명이다. 꼭 명심하고 명심하여 너의 주어진 삶에서 항상 최선을 다하기 바란다. 그러다 보면 분명 너의 앞길이 훤하게 밝아질 것이다. 몸 상하지 않도록 하거라.”
“스승님의 말씀 꼭 명심하겠습니다.”
“스승님께서 환난이 남쪽에서 온다고 했느니라. 작금의 상황 또한 그것을 말해 주고 있다! 네가 지금 그 한 복판으로 가려 하니 이 또한 하늘의 뜻이라 믿는다. 항상 부드러움과 너그러움, 그리고 따뜻함으로 세상을 바라보거라! 그러면 하늘이 너의 앞길을 열어 줄 것이다.”
배달처사는 가련한 듯 무솔을 바라보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지리산 산골짜기에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잠을 설친 무솔이 배달처사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스승님, 어머니와 동생들을 찾으러 이제 떠납니다. 그동안 돌봐 주시고 수련을 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꼭 어머니와 동생들을 찾아서 함께 돌아와 스승님을 뵙겠습니다. 그동안 만수무강하십시오.”
“그래, 오늘이 마지막으로 널 보는 것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너는 하늘이 선택한 아이다. 시련과 좌절로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실망하거나 주저앉지 말고 다시 일어나 당당하게 길을 가야 한다. 항상 조심하고 작은 일보다 큰일에 집중하거라.”
“네, 스승님. 그럼 이만···.”
무솔은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하고 눈물을 훔치며, 스승님께 큰절을 올리고 마당으로 나왔다.
함께 수학하고 있는 동료 십여 명이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무솔아! 이거 받아.”
종하가 무솔에게 태극문양이 있는 작은 장식용 매듭인 홍조수아를 건네주었다.
주위 동료들도 자신들의 칼에 묶인 홍조수아를 들어 보였다.
무솔도 장식물을 대나무칼에 매달았다.
종하 형과 인사를 나누고 다른 동료들과도 작별을 고했다.
“종하 형, 그리고 만복이, 이재, 기철 모두 건강하길 바래.”
무솔은 동료들 이름 하나하나를 부르며 작별을 고했다.
숙소와 마당을 둘러봐도 연서가 보이지 않았다.
한 번 보고 가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무솔은 벗잠골을 내려와 동래로 향했다.
오시쯤 진주에 도착하여 주막에 들어가 국밥 한 그릇을 시켰다.
“여기 한 그릇 더 주세요.”
어디서 나타났는지 연서가 무솔 옆에 턱 걸치고 앉으면서 국밥 한 그릇을 시켰다.
깜짝 놀라 어안이 벙벙하여 연서를 쳐다보았다.
“헤헤. 오라버니랑 부산포까지 갈려고 왔지롱!”
연서가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스승님께 혼나면 어쩌려고······.”
“뭐, 한두 번도 아니고, 혼나 봐야 수련밖에 더 하겠수. 호호호.”
연서가 능청스럽게 말하는 모습을 보며 무솔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따라 웃었다.
통신사 일행이 4월 초삼일에 동래에 도착했다.
통신사의 숙소를 동래성에 두었고 일본으로 가는 데 필요한 물품이나 식품들을 챙기느라 며칠간 부산했다.
그달 말에 모두 모여 해신제를 지낸 다음 날 출발 예정이었다.
무솔은 통신사에 어떻게 합류할까를 계속 고민하며 동래성 근처를 맴돌았다.
뾰족한 방법 없이 날짜만 흘러갔다.
성안에서 해신제가 있었지만, 병사들이 둘러싸고 있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마음이 급해진 무솔은 동래 관아 정문 앞을 왔다 갔다 했다.
더 이상 이렇게 있다가는 아버지의 원수는커녕 일본에도 못 갈까 봐 마음이 답답해지고 안절부절못했다.
무엇인가 결심을 한 듯 눈을 부릅뜨고 관아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정문을 지키던 병사가 못 들어가게 막았다.
무솔은 사정이 있어서 그러니 들어가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병사는 무솔의 딱한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돌아서는 척하다가 병사를 피해 관아 안으로 내달렸다.
놀란 수문장과 병사들이 뒤 쫓아 왔다.
“저놈 잡아라!”
순식간에 관아 안이 시끄러워졌다.
고함에 안에 있던 병사들이 달려 나와 무솔을 막아섰다.
무솔은 그들을 피해 재빨리 오른쪽으로 돌아 담을 하나 뛰어넘어 갔다.
무솔을 쫓던 병사들이 적이 놀라며, 수문장의 지시에 문을 찾아 뛰어갔다.
담장을 넘은 무솔이 안뜰로 달려갔다.
그때 뜰을 산책하고 있던 김 성일과 맞닥뜨렸다.
“왠 놈이냐?”
벼락같은 김 성일의 고함에 무솔은 그의 기에 눌려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그 자리에 꼼짝 못 하고 서 있었다.
병사들이 문으로 들어와 무솔을 붙잡았다.
정신을 차리고는 통신사의 정사와 부사를 불렀다.
병사들이 무솔을 밖으로 끌고 나가려 했다. 발악하며 소리쳤다.
“웬 놈인데 이렇게 소란이냐?”
“통신사를···.”
“닥치라 이놈!”
무솔이 말을 하려 하자 수문장이 아무 일도 아니라며 무솔을 끌고 나가려 했다.
다시 한번 무솔은 김 성일을 향해 정사와 부사를 만나게 해달라고 소리쳤다.
김 성일이 수문장에게 웬 놈이냐고 다시 물었다.
“예, 부사님! 웬 녀석이 일본에 꼭 가야 하니 부사님을 만나게 해 달라며, 막무가내로 들어왔습니다. 당장 쫓아내겠습니다.”
무솔을 끌고 나가려던 수문장이 김 성일의 물음에 돌아서서 대답했다.
수문장 근처로 온 김 성일은 무솔을 유심히 바라보고는 물었다.
“네가 누구인데 일본에 꼭 가야 한다는 것이냐?”
“혹, 부사 어른이신지요? 저는 전라도 고금도에 사는 성은 한(韓)가이고 이름은 명(命)자 호(昊)자를 쓰는 한 명호라고 합니다. 다들 무솔이라고 합니다요. 정해년 왜놈이 쳐들어왔을 때 아버지는 왜놈들과 싸우다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두 동생은 붙잡혀 갔습니다. 저승에서 눈을 못 감고 계시는 아버지를 위해 일본에 가서 꼭 어머니와 두 동생을 찾아 오려고 합니다. 제발 저를 꼭 데려가 주십시오.”
병사들을 뿌리치고 김 성일 앞으로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그런 무솔을 병사들이 잡으려 하자 김 성일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무솔의 대범함과 그 사정이 딱하고 안타까웠다.
“정해 년이라? 지난번 포로 송환할 때 없었느냐?”
“네, 없었습니다. 잡혀 온 살동이라는 사내에게 물었는데 아마도 고금도에서 잡혀간 사람들은 일본 깊숙이 숨겼을 거라 했습니다.”
한참 안타까운 시선으로 무솔을 바라보던 김 성일은,
“이번 통신사는 왜놈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아주 중요한 임무로 가는 것이다. 너의 사정은 딱하나 일일이 개인의 사정을 봐줄 수 없다. 그만 돌아가거라.”
냉정하게 말을 하고는 돌아섰다.
“부사어른!”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큰 소리로 부사를 부른 뒤 강단지게 말을 했다.
“부사께서는 아버지가 왜놈들의 손에 죽었는데 그 원수를 갚지 않고 그냥 살 수 있습니까? 어머니와 동생들이 붙잡혀 갔는데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그냥 살아갈 수 있습니까? 만약 이번 통신사를 따라갈 수 없다면 이 자리에서 죽어 버리겠습니다.”
또박또박 고함을 치던 무솔은 갑자기 수문장에게 달려들어 그가 차고 있던 칼집에서 칼을 뽑아 목에 갔다 대었다.
“허허, 그놈 참!”
*
한 여인이 앞에 앉아 자기를 보고 있는 아이들에게 군밤을 까주고 있었다.
“맛있니? 아이쿠! 서두르지 말고, 목 막힐라, 물 좀 마셔 가며 천천히 먹어.”
곱게 빚은 쪽머리에 옥비녀가 꽂혀 있었다.
아이들은 서로 많이 먹으려고 다투었다.
“애들아,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나눠 먹어야지.”
어머니와 아이들은 함박 웃으며, 깔깔대었다.
예솔이, 해솔이, 그리고 자신이 어디 있을까 찾아보는데 두 아이만 있었다.
아무리 찾아도 자신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보이지 않아. 저들은 내 어머니와 동생들인데, 어? 저 아기는 누구지?’
아장아장 걷는 아이가 어머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너무 낯설어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불이 타올랐다.
사방에서 붉은 연기와 불꽃이 온몸을 휘감았다.
“부, 불이야. ·····어머니!”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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