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솔이 되다 1
역사는 반복된다.
“무사님! 정신이 드세요?”
저 멀리 아득한 곳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어·····.”
눈앞에 어머니가 다정한 모습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어, 어머니!’
“정신이 좀 드세요? ·····여기 물 좀 마셔 보세요.”
누군가 자기의 상체를 일으켜 찬물을 마시게 했다.
“그래, 깨어 났나 보구나!”
“네, 할아버지. 그런데 아직·····.”
“이보게 젊은이, 내가 보이는가?”
백발인 노인이 어렴풋이 보였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뜨며 주변을 둘러보자 백발노인과 어린 여인 하나가 자신을 근심 어린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눈앞에 있던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동생들도 없었다.
백발노인이 재차 묻자 젊은 사내가 그제야 고개를 힘들게 끄덕였다.
“이보게. 말을 해 보게나.”
“·····여·····.”
“아직 독 기운이 완전히 빠지지 않은 것 같구나. 수옥아, 나가서 탕을 가져오너라.”
수옥이 탕약을 가지러 간 사이 노인이 대침을 목과 어깨에 놓았다.
사내는 노인이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아니 저항할 힘조차 없었다.
탕약을 힘겹게 먹은 사내는 다시 기운을 잃었는지 자리에 누웠다.
며칠을 잠에서 헤맸다.
허허벌판을 달려 온 말이 울부짖었다.
장창을 들고 있는 무사가 눈에 불을 뿜으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데 그 불이 온몸을 태우듯 뜨거웠다.
“누구? ·····다, 당신은·····!”
며칠이 지나자 누워만 있던 사내가 움막 밖으로 나왔다.
걷는 모습이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그 사내 머리 위로 눈발이 조금씩 날렸다.
“무사님!”
어디 갔다 오는지 수옥이가 밖에서 들어오다 젊은 사내를 보고는 웃으며 다가왔다.
“오늘은 좀 어떠세요. 몸은 좋아 보입니다.”
“네, 다, 다리와 팔이 조금 부, 불편합니다.”
“많이 좋아지셨어요. 조금만 더 침과 탕약을 드시면 쾌차하실 거예요.”
“하, 할아버지는·····?”
“네, 저기 산 넘어가셨어요. 지난 진주성에서 왜놈들이랑 싸우다 다친 무사들을 치료해 달라는 처사님의 부탁으로 어제 아침 일찍 가셨는데, 큰일이네요. 눈이 내리면 오늘 오시기 힘드실 건데·····.”
“하, 할아버지의 의술이 대, 대단하신가 봅니다.”
“그럼요, 산음뿐만 아니라 조선 어디에서도 한의 유의태라고 하면 다 알아준답니다. 무사님도 거의 다 죽어 가는 것을 할아버지가 침과 탕약으로 살려내신 거예요”
사내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여러 기억이 혼재되어 어느 것이 최근이고 나중인지 헷갈렸다.
“무사님은 존함이 어떻게 되세요?”
“아, 저·····, 그게 료우타, 아니 무솔, ·····아니 잘 모르겠습니다.”
사내는 머리가 복잡한지 앞의 처녀를 마주 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음, 하나는 왜인 이름이고 하나는 우리 이름인데·····. 꿈을 꾸면서도 우리말과 왜말을 섞어서 했어요.”
하루종일 눈이 내렸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자 수옥이가 할아버지를 걱정했다.
“오늘 못 오실 것 같아요. 눈이 그쳤지만, 산길을 오시기는 힘드실 거예요. 우리 먼저 식사해요.”
나무로 만든 그릇에 보리와 밤, 그리고 여러 산나물이 비벼져 있었다.
보리쌀은 서너 숟갈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무사님이 빨리 건강이 회복되도록 식사를 제대로 해야 하는데 죄송해요. 전쟁으로 보리쌀은커녕 온 나라 사람들이 굶어 죽게 생겼어요.”
“아, 아닙니다. 마, 맛있습니다. 너무 마, 마음 쓰지 마십시오.”
“수옥아! 오라버니 왔다.”
막 식사하려고 하는데 밖에 누군가가 수옥을 불렀다.
방문을 열자 웬 사내 두 사람과 유의태가 서 있었다.
“아, 아니 할아버지! 이 눈길에 오셨어요?”
“말도 마라. 의원님께서 꼭 오늘 내로 가셔야 한다고 고집을 세우셔서 이렇게 스승님 분부로 모시고 왔다. ···그, 그런데 저자는 누구냐?”
료우타 아니 무솔을 본 사내가 경계하듯 눈초리가 치켜 올라갔다.
“허허, 많이 좋아졌나 보구나. 내가 치료하는 환자니라. 자네들은 이만 돌아가 보게. 처사께 고맙다고 전해 드리고. 참 탕약이 떨어지면 오게나. 내 미리 준비해 놓음세.”
유의태가 말을 하며 방으로 들어왔다.
사내들은 가기가 싫은지 눈치를 살피며, 무솔을 힐긋 보고는 수옥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수옥아! 너 나한테 언제 시집올래?”
밖에서 주저주저하던 사내 하나가 방 안에 있는 사내가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외쳤다.
“아니, 지석 오라버니! 무슨 말씀이세요. 전 시집 안 간다니까요. 할아버지랑 살 거예요.”
“하하하, 내숭 떠는 모습이 더 예쁘구나. 내년 봄에 꼭 데리러 오마. 이쁘게 있어. 한눈팔지 말고 알것제. 의원님 저희들 가 보겠습니다.”
“치.”
얼굴이 불그스레해진 수옥이 무솔을 힐긋 쳐다보았다.
“자네의 몸은 아직 다 낫지 않았구먼. 그래도 이만하기 천만다행이야. 봄에 올라오는 약초의 기운을 달여 먹으면 더 효과가 있을 거네. 그동안 꾸준히 몸을 움직이게.”
무솔의 손목을 잡고 진맥을 한 유의태가 장침으로 머리 뒤에 여러 번 침을 놓았다.
수옥이 가져온 말린 쑥으로 오른 팔고 다리에 뜸을 뜨며 무솔을 만났을 때 이야기를 해주었다.
*
유의태가 산음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산천재를 들러 조진사와 술을 한 잔 마셨다.
조 진사의 아버지 남명과의 추억으로 자주 산천재를 들렀다.
전쟁이 나고 한동안 발걸음을 못 하였다가 오랜만에 만나다 보니 술자리가 길어졌다.
해가 산 능선 아래로 가며 산그늘을 늘어트리자 자리에서 일어나 움막으로 향했다.
강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둘러 가다가는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질 거란 생각에 강을 건넛산 능선을 타고 자두골로 향했다.
가끔 사냥꾼들이 다니는 길이지만 전쟁 통으로 길이라고 할 수 없었다.
숲이 우거져 헤쳐 가기가 쉽지 않은 곳이었다.
산 짐승도 가끔 나타나는 곳이라 일반 사람들은 엄두도 못 내는 길이었다.
길이 흐려진 것을 유의태가 작은 길을 내고 있었다.
산음을 다녀올 때마다 산천재에서 술잔을 기울다 늦어지곤 하면 산 능선을 따라 자두골로 넘어갔었다.
오늘도 유의태는 콧노래를 부르며, 산 능선을 올랐다.
나이를 먹어서 예전 같지 않은 몸을 탓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산 능선에 오르자 어둠이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남서쪽 실개천 옆에 희미한 불빛이 살랑거렸다.
자신이 늦게 오면 늘 걱정으로 애태우는 손녀를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랜만에 남명 자손을 만나 너무 지체했어.”
슬슬 한기와 무서움이 일었다.
간혹 호랑이가 출몰하기도 하고 피난 온 무리가 지리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노략질했기에 너무 늦은 발걸음을 탓했다.
‘이제 저 골짜기만 내려가면 된다.’
한 손에 든 한약재를 들고 무서움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노래를 흥얼거리며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 오자 온몸이 쭈뼛거렸다.
평소에 들려 오던 소리가 아니었다.
온몸이 서늘한 기운으로 발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몸을 잔뜩 움츠리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으악, 호, 호랑이다.”
산비탈 중간쯤에 있는 큰 소나무 아래에 덩치가 산만 한 호랑이가 눈에 푸른 불빛을 켜고는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앞이 깜깜해지고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도망가려 했지만, 발이 땅에 박혔는지 떨어지지 않았다.
겨우 한 발짝 움직여 뒤로 물러났지만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낙담하며 고개를 처박았다.
시간이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호랑이를 보면 간이 떨어질 것 같았지만, 애써 호랑이를 찾았다.
호랑이가 소나무 아래를 향해 머리를 비비고 있었다.
곧 달려와 물어뜯을 것만 같아 사시나무 떨듯 온몸이 떨렸다.
지레 겁을 먹은 탓이리라.
여튼 피하고 보는 게 장땡이라 도망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나무를 짚고 일어났다.
그 순간 호랑이가 시퍼런 눈으로 다시 유의태를 쳐다보고는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우레와 같은 호랑이의 포효에 놀라 다시 뒤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산골짜기마다 호랑이 소리가 어둠을 타고 퍼져나갔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눈을 입술 깨물 듯 닫았다.
온몸을 떨며 죽었구나하고 생각하며 손녀를 떠올렸다.
호랑이 소리에 정신이 혼미해진 유의태가 겨우 눈을 떴다.
“여기가 이승인가 저승인가?”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보니 아무 생각도 없이 멍한 상태였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겨우 정신이 돌아온 유의태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이 깜깜한 적막 속에 잠겨 있었다.
호랑이와 눈이 마주칠까?
겁을 내면서도 살며시 고개를 들어 보니 산 능선으로 푸른빛이 느릿느릿 멀어지고 있었다.
“휴! 호랑이 밥이 되는 줄 알았네.”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는데 갑자기 호랑이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푸른 눈빛에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아 꼼짝을 못 하고 있는데, 여유롭게 꼬리를 흔들며 어둠 속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다시 언덕을 한 번 바라보고는 그제야 겨우 한숨을 내 쉬었다.
온몸에 힘이 빠져 서 있을 기력이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스르륵 주저앉았다.
우두커니 하늘을 올려다보니 까만 하늘에 별이 총총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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