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진주성
역사는 반복된다.
무솔은 아픈 몸으로 다시 일어났다.
진주성의 상황이 악화일로에 접어들자 다시 칼을 들었다.
연서가 강가에서 주운 칼을 돌려주었다.
종하와 연서를 따라 전투가 가장 치열한 동문으로 나아가 싸웠다.
성 내 가옥들이 불타올랐으며, 여기저기 늘린 시체들이 산더미를 이루었다.
동료들의 시신을 옮길 여유조차 없었다.
꾀죄죄한 몰골로 성벽에 기대 쉬고 있는 병사들, 다시 적들의 공격이 시작되자 지친 몸을 일으키며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백성들도 분주했다.
돌을 실어 나르고, 기름을 끓이고, 잠시 교전이 멈추면 주먹밥들을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들의 몰골도 말이 아니었다.
무솔과 동료들도 있는 힘을 다해 싸웠다.
동분서주했다.
낮에는 동문으로 달려가 화살을 날렸으며, 잠시 적의 공격이 소강상태가 되면 쪽잠을 자다, 다시 편전을 들었다.
손가락이 피멍이 들도록 쏘고 또 쏘았다.
적들이 물러가고 어두운 밤이 되면, 성곽에 올라 특수부대의 침입을 감시했다.
지난밤에 내린 장대비로 성벽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성벽을 보수할 여유도 없이 적들은 총공격을 해왔다.
사실상 진주성을 진두지휘하던 황 진의 죽음으로 급격히 전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막아내고 또 막아내기를 여러 날, 버티고 버텼지만, 더 이상의 행운은 따르지 않았다.
무솔과 옛 동료들의 편전이 수도 없이 일본군을 향해 날아갔지만, 귀갑차를 동원하여 동문으로 밀고 들어오는 적들은 동료의 시체를 밟고 무너진 성벽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칼을 뽑아 든 무솔은 달려오는 왜놈들과 장수의 목을 무수히 베었지만, 끝이 보이지 않았다.
옆구리가 욱신거렸지만, 돌아볼 틈이 없었다.
다 아물지 못한 상처 부위에서 피가 흘러내려, 바지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팔에 힘이 부쳤다.
주변을 돌아보자 종하와 연서, 그리고 다른 동료들도 악을 쓰며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웃옷을 찢어 칼을 든 손을 묶고는 밀려드는 적들을 베어 나갔지만 역부족이었다.
사방이 왜놈들이었다.
아군들은 점점 밀리며 내성으로 밀렸다.
얼마 후 서북쪽 성이 함락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종하 형님, 이곳은 틀렸습니다. 후일을 도모해 주십시오.”
“무슨 소리냐! 사나이가 한 번 죽지 두 번 죽겠느냐?”
“형님, 여기서 모두 죽으면 전라도와 이 순신 장군은 누가 지켜드립니까? 적들은 이곳이 함락되면 이 순신 장군을 노릴 것입니다. 연서야, 어서 형님과 동료들을 데리고 여기를 빠져나가.”
“무솔 오라버니, 함께 가요. 다시는 헤어지기 싫단 말이야.”
“나는 남아서 저들의 정보를 알아내마.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난 닌자이기도 하니까.”
연서가 무솔의 말에 일그러진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종하가 무솔과 연서를 한 번 쳐다보고는 동료들을 다독여 뒤로 빠지기 시작했다.
종하가 가지 않으려는 연서의 팔을 잡고는 무솔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서야, 꼭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여기는 내게 맡기고 어서 피해.”
종하에게 고개를 끄덕인 무솔이 연서에게 말을 하고는 외성을 향해 달려갔다.
무솔의 단호한 의지에 연서는 종하를 따라 가면서도 고개를 돌려 계속 무솔을 바라봤다.
“꼭 살아야 해. 죽으면 나한테 혼날 거야.”
연서의 목소리가 그림자를 따라왔다.
옆구리에서 심하게 고통이 밀려 와 손으로 눌렀다.
뜨끈하면서도 끈적끈적한 무엇인가가 느껴져 손을 보니 붉은 피였다.
아래를 보니 피가 흥건하게 옷을 적시고 있었다.
찌푸린 얼굴을 들어 동문을 바라보았다.
왜놈들이 물밀듯이 밀려들어 왔다.
조선 군사들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더 이상 싸운다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무솔은 어딘가로 달려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본 무사들은 닥치는 대로 백성들을 죽였다.
온 사방에서 비명이 난무했다.
무자비한 칼끝에 수천, 수만의 병사들과 백성들이 쓰러졌다.
몸이 치를 떨었지만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차마 볼 수 없는 광경에 무솔은 달려가 죽이고 싶었지만 한두 명 죽인들 무슨 유익이 있으랴!
“아니!”
장수들이 촉석루 앞에서 북쪽을 향해 절을 하더니 하나둘 남강으로 뛰어내렸다.
걸음을 멈추고 장수들의 죽음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성벽 위 장수를 보자 눈이 마주쳤다.
‘저, 저분은 연서에게 쫓겨 숨어들었던 곳에 있었던 장수다!’
잠시 머뭇거리는 순간 장수가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는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젠장!”
차마 더 보지 못하고 무솔이 이를 깨물며 건물 어딘가로 달려갔다.
*
“여기 감옥에 잡혀 있던 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촉석루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던 일본 장수들은 병사들에게 끌려 온 자를 내려다보았다.
“무엇이냐? 그냥 죽여 버리면 그만이지 술맛 떨어지게 하느냐?”
“이, 이자가 자신은 일본 특수부대 출신으로 포로로 잡혀 있었다고 해서······.”
병사는 가토 기요마사의 서설에 질려 모깃소리만 한 목소리로 변명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끌고 나가 참하라.”
‘저, 저놈은······.’
촉석루 아래에 서 있던 타이요우가 깜짝 놀랐다.
“장군,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지난 나고야성에서 검술시범을 보였던 코카와성의 료우타라고 합니다.”
아무 관심이 없다는 듯 촉석루의 장군들이 술을 주고받다가 나고야성의 료우타라는 소리에 겨우 돌아보았다.
“뭐라! ······이리 가까이 끌고 오라.”
무솔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유키나가가 돌아보며 명했다.
병사가 무솔을 가까이 끌고 오자 그제야 알아본 고니시 유키나가가 제정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니, 너는 도도 다카도라 성주의 무사가 아닌가? 그런데 네가 왜 진주성에 포로로 잡혀 있었던 게냐?”
유키나가의 말에 제정들도 같은 생각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무솔을 쳐다보았다.
“지난해 가을 무렵, 이 순신을 암살하라는 명으로 적중에 잠입했다가 조선 무사들에게 붙잡혔습니다. 저기 타이요우에게 물어보시면 잘 알 것입니다.”
타이요우가 무솔을 노려보고 있다가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당황하며, 유키나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저자의 말이 사실이냐?”
타이요우가 무솔 앞으로 다가가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아닙니다. 저자는 조선인으로 이 순신을 암살하러 왔다가 배신해서 우리 모두가 몰살당할 뻔했습니다.’
무솔이 타이요우를 노려보았다.
타이요우가 무솔과 눈이 마주치자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려 촉석루를 올려다보았다.
“네, 맞습니다. 이자는 저희 사람으로 함께 이 순신 암살 작전에 투입되었다가 실종되었습니다.”
말을 마친 타이요우는 주먹을 쥐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마음을 꾹 참았다.
“그래, 그럼 풀어 주어라. 그동안 고생이 많았겠구나. 술을 한 병 내려주어라.”
무솔은 촉석루 아래 마당에 차려진 술상 앞에 앉았다.
“료우타님, 살아계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섬의 동료들이 반갑게 무솔을 맞아 주었다.
타이요우는 죽지 않고 살아 온 무솔이 짜증이 났지만, 무솔과 눈이 마주치자 마지못해 반겨주었다.
‘혹 지난 침투 때······?’
타이요우가 동료들과 회포를 풀고 있는 무솔의 모습을 보다 혹시 하는 생각을 하며 무솔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미 가짜 상투를 버리고 부스스한 몰골의 무솔이었다.
타이요우의 의심의 눈길에 무솔은 모른 척하며 동료들과 옛일을 이야기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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