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인가?
역사는 반복된다.
두륜산과 지리산에서 배달처사를 따라 수련하는 무솔, 배달처사에게 간 지도 꽤 많은 세월이 흘렀다.
이른 봄,
찬바람에 흔들리는 느티나무 가지 아래에 영후가 오늘도 하늘을 보며 서 있었다.
나무줄기에 봄기운이 드리우고 가지에 별들이 걸리어 빛나는 느티나무를 돌며, 아들을 떠 올렸다.
요즘 들어 부쩍 느티나무 아래에서 하늘을 보는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수련을 떠난 아들 걱정으로 잠을 설칠 때마다 밖으로 나와 느티나무를 돌았다.
청동거울이 주인으로 받아들인 아이. 아비가 하지 못하는 일을 어린 아들이 다가올 혹한의 시대를 헤쳐 나가야 한다.
나라의 변고에 맞서서 홀로 헤쳐 나가야 한다.
이름 없이, 알아주는 이 없이······.
아들이 하루라도 빨리 학문과 무예를 연마하기를 바랄 뿐이다.
느티나무 가지에 달이 걸려 바람에 흔들렸다.
‘지리산 어느 골짜기에 있을까?’
지난 초겨울, 아들이 집을 다녀갔다.
겨울에 수련을 함께하는 동료들과 지리산으로 간다고 했었다.
갑자기 가슴 저 아래에서 통증이 밀려왔다.
등과 옆구리에서도 스멀스멀 지렁이가 기어 올라오듯 아려왔다.
벗점골 처소가 내려다보이는 토끼봉에서 무솔 홀로 손에 든 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가 그치며 피기 시작한 안개가 스멀스멀 올라와 검을 감돌았다.
매일 스승님을 모시고 동료들과 함께 수련하였는데 오늘은 홀로 수련했다.
간혹 배달처사는 암자에 가서 백의선사와 다과를 하였다.
오늘도 새벽 비가 그치자 바로 내려갔다.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스승과 함께 있고 싶었다.
아랫마을에 심부름 간 종하와 연서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돌 사이로 졸졸 흘러내리는 샘물을 한 바가지 마시고는 배달처사가 어제 가르쳐 준 검 다루는 법을 익혔다.
백의선사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무사의 정신을 함양시켜 주었다.
또한 검을 빼 들어도 함부로 살생하면 안 된다고 하였으며, 인을 베풀라고 하였다.
두 스승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수련에 몰두했다.
자세를 낮추며, 검을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그었다.
공기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두해 전부터 본격적으로 진검을 들고 수련했다.
날이 갈수록 검을 다루는 솜씨가 일취월장했다.
지리산에 들어오고부터는 백의선사의 지도로 검과 도의 합일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한 시진을 온 정신을 집중하여 수련했다.
옷이 안개로 젖었는지 땀으로 젖은 것인지 축축해졌다.
검을 거두어들이고 바위 위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은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호흡이 진정되자 단전호흡하며 스승의 가르침을 되새겼다.
천왕봉 아래 온 산과 들에 안개가 가득하여 구름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솜털 같은 구름이 산줄기를 삼킨 모습이 남해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엔 어디까지가 구름이고 안개인지 모를 정도로 안개가 짙게 깔려 해도 보이지 않았다.
반 시진쯤 지났을까?
무엇인가 빛이 스치는 것 같은 느낌에 눈을 떴다.
저 멀리 남쪽 하늘 아래에서 다시 섬광이 스쳤다.
짙어진 구름안개 사이로 하늘에서 내려온 번개가 사방으로 미친 듯이 휘저으며, 뻗어 내렸다.
남쪽 하늘에서 많은 비를 내린 짙은 먹구름이 지리산으로 서서히 밀려왔다.
새벽 비가 그치고 안개가 자욱이 끼었지만, 정오가 가까워지면서 맑아 질려나 했던 날씨가 다시 어둑해지고 있었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집중이 되지 않아 눈을 지그시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뜨고 먹구름이 짙은 곳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무엇인가 체한 것처럼 답답함에 단전호흡을 할 수가 없었다.
다시 번개가 번쩍 스쳐 지나갔다.
비가 오거나 하면 수없이 본 장면이었지만, 오늘따라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고금도에 천둥번개와 벼락이···?’
간혹 보고 싶고,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아직 어린 무솔에겐 부모님의 정이 그리운 것이다.
오늘따라 아버지의 얼굴과 가족들 생각이 났다.
부모님께로 달려가고 싶은 생각에 머리를 흔들었다.
‘부모님과 동생들은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나도 그 자리에 함께하고 싶다.’
저 아래 단전에서부터 아련하게 아픔인지 그리움인지 모를 뜨거움이 가슴으로 타고 올라왔다.
거북마을에 왜놈들이 노략질한 정해년(1587년) 2월은 왜구들이 거금도 일대와 가리포 병영을 습격하여,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고, 가옥들이 불탔으며, 그들이 후퇴하면서 많은 조선인을 잡아갔다.
왜구들 본진인 신사부로 무리도 강진으로 가려다 비가 오는 바람에 거금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노략질했다.
그들이 관가와 마을을 불사르고 도망가 조정과 지방관아에서는 거북마을 사람들의 변고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무솔 가족의 비보가 이틀이나 늦게 지리산에 전해 졌다.
무솔은 외가의 만돌이를 보자 불안한 마음에 가슴이 떨렸다.
편지를 받아 든 손이 떨려 왔다. 편지를 읽어 내려갈 수가 없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버지, 어머니, 해솔아, 예솔아!”
땅바닥에 무너져 내린 무솔의 통곡 소리가 벗점골 골짜기 골짜기를 돌아 천왕봉을 거쳐 하늘로 퍼져나갔다.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통곡하다 지쳐 쓰러졌다.
느티나무 가지에 앉은 까마귀가 처량하게 무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둑해져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외조부 댁으로 돌아온 무솔은 정신이 나간 듯 멍하니 마당을 바라보았다.
이제 겨우 열세 살 어린 나이에 무솔이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큰 변고였다.
“아가, 잠시 이야기 좀 하자꾸나.”
방으로 외조부가 들어오셨다. 방바닥만 바라보며 멍하니 있었다.
무릎 위에 꽉 쥔 두 주먹을 가지런히 놓았다.
외조부는 손주를 위로하시고 다독여 주었다.
“네 아버지가 편지를 남겼다.”
*
왜구들이 쳐들어온 날, 무솔의 아버지를 태워 준 뱃사공이 거북마을에 왜구들이 쳐들어온 것을 알렸다.
안개가 걷히며 맑아지던 하늘이 갑자기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황급히 외조부가 사람들을 모아 거북마을로 건너갔지만, 왜구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뿐만 아니라 거북마을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등에 칼자국과 온몸이 피로 뒤덮인 아버지는 죽은 듯 나루터에 쓰러져 있었다.
주위에는 왜구들 시체도 몇 나뒹굴어 있었다.
외조부 댁으로 실려 온 아버지는 치료받고 조금 정신을 차렸지만,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었다.
무솔에게 남길 말이 있다며, 대신 편지를 써 달라며 글을 남겼다.
힘겹게 겨우겨우 편지 내용을 말한 아버지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부르시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편지에는 아버지로서 미안한 마음과 어머니와 동생들을 꼭 찾아 달라는 당부, 그리고 청동거울에 얽힌 이야기를 남겼다.
청동거울과 청동검, 그리고 청동방울의 세 가지 보물이 흩어지면 변고가 생긴다고 했다.
고려 몽고의 침입 이후 겨우 오대조 할아버지에 의해 세 개의 보물을 찾아 보관해 오고 있었다.
이제 다시 세 개의 보물이 흩어졌다.
청동거울의 주인으로 선택된 사람은 어떠한 어려움과 힘든 일이 있더라도 꼭 그 소임을 다해야 한다며, 부디 소임을 다하고 어머니와 동생들, 그리고 두 개의 보물을 찾아 와 달라고 부탁했다.
편지를 읽어 가던 눈에 눈물이 맺히더니 곧 등불에 붉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려 글씨 위에 떨어졌다.
눈앞이 흐려 왔으며, 가슴이 메어 더 이상 읽어 내려갈 수가 없었다.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온몸이 떨렸다.
더 이상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방을 뛰쳐나와 마당을 가로질러 바닷가로 내달렸다.
한참을 그렇게 정신없이 달려간 바닷가, 눈물 너머 바라본 바다 건너편에 우뚝 선 느티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들이 웃으며 재잘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 어머니······!”
깔깔깔 웃으며, 느티나무를 돌았다.
서로 손을 잡고 폴짝폴짝 뛰며, 정겹게 놀았다.
그 속에 무솔이도 함께 아버지를 바라보며, 함박웃음 지었다.
느티나무 사이사이로 봄 햇살이 온 가족을 감싸며 빛났다.
하늘을 바라보며 돌다가 보니 혼자 돌고 있었다.
놀라 부모님과 동생들을 찾았다.
느티나무 뒤에 숨었을까?
아버지를 부르며, 어머니를 부르며 쫒아갔다.
한참을 그렇게 목소리가 쉴 때까지 아버지와 어머니를 부르며, 쫒아가다 넘어졌다.
아버지 묘에 갔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우뚝 솟은 느티나무만이 무솔 곁을 지키고 있었다.
다음 날, 아버지를 배로 건너 다 준 뱃사공을 찾아갔다.
관아에서 단속이 있었는지 뱃사공은 그날에 대해 말을 하지 않으려 했다.
무솔은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하소연했다.
반 시진쯤 지날 무렵,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더니 갑자기 비가 굵어지기 시작했다.
어둠이 짙게 깔린 마당에 억수 같은 비가 내리쳤다.
이번 봄에는 남쪽 바다에 유독 굵은 비가 자주 내렸다.
“저러다 몸 상하것소잉. 깍단지게 와 그러능교.”
뱃사공의 아내가 애가 타는지 뱃사공을 타박하지만, 그는 꿈적도 하지 않고 방안에서 벽만 쳐다봤다.
무솔의 눈에는 눈물인지 빗물인지 흘러내렸다.
온몸이 비에 젖어 으스스해져 왔다.
하반신은 이미 남의 것이 된 지 오래였다.
‘이대로 포기해야 하는가?’
점점 굳어 가는 몸과 정신이 혼미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
빗줄기는 아랑곳없이 하염없이 쏟아 내렸다.
하늘이 번쩍하고 곧 벼락 치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를 비를 맞고 있었을까?
번개와 벼락 치는 소리에 언제 감았는지 모를 눈이 겨우 떠졌다가 다시 감겼다.
또다시 벼락 떨어지는 소리가 났지만, 고개를 숙인 무솔은 더 이상 움직임이 없었다.
그때 조용히 방문이 열렸다.
“도련님, 지가 졌으라. 싸게 들어오소잉.”
무솔은 고개를 숙인 채 꼼짝을 하지 않았다.
뱃사공이 밖으로 나와 주위를 살피며 무솔을 다시 불렀다.
아득히 들려 오는 소리가 빗소리인지 꿈속인지 알 수가 없었다.
뱃사공이 무솔에게로 와 일으켜서야 겨우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봤다.
그 눈에 애처로움이 가득했다.
제대로 일어나 걸을 수가 없었다.
뱃사공이 겨우 부축을 해서야 방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세 사람이 앉아 있는 방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벽 여기저기가 헐어 있었으며, 거친 장대비 소리와 매서운 바람이 문틈으로 들어왔다.
비바람에 등잔불이 심하게 흔들렸다.
“으따, 몸 상해 불 것소잉. 여그 뜨건 물 한잔 들이키소잉.”
따뜻한 물 한잔을 마시는 무솔을 보며, 뱃사공은 누가 들을까 봐 노심초사하며, 조용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뱃사공은 그날을 상상하며 현장에 있는 듯 말을 하면서 몸을 떨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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