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수인가 악수인가
역사는 반복된다.
“후후, 미츠나리. 너의 목표가 무엇인지 알기에 내 말을 안 들어 줄 수 없을 것이다.”
무솔은 방에 홀로 누워 조금 전의 일을 생각했다.
온몸이 긴장했었는지 노곤해졌다.
누군가 방으로 다가오는 느낌에 잠시 긴장했다가 살기가 없자 도로 눈을 감았다.
“형, 저 센입니다.”
“어? 센! 어서 들어와.”
올빼미섬으로 피해 있던 센이 찾아오자 반갑게 맞았다.
“그동안 일은 들었어. 세상사 모든 게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니 마음을 접어야겠지.”
“······.”
센의 눈치를 살피던 무솔이 조금 전의 어른스러움은 어디로 갔는지 분노가 섞인 말이 나왔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강제로······.”
올빼미섬이 몰살당한 후 다카도라가 센과 유키를 강제로 이혼시켰다.
특히 히데츠구가 역모죄로 죽자 철저하게 섬과 관계된 모든 것들을 지워나갔다.
“센, 너의 마음이 한결같다면 분명 좋은 방도가 있을 거야. 너무 낙담하지 말고 내일을 향해 달려가자.”
“고마워, 형.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 옷이었어. ······이제는 괜찮아.”
센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둘은 그동안 있었던 일들과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일들에 대해 새벽닭이 울 때까지 논의했다.
*
히데요시가 이에야스의 저택을 다시 찾아왔다.
더위를 피해 나들이 삼아 놀러 왔다는 핑계를 댔다.
“공무에 바쁘실 텐데, 태합 전하께서 이 누추한 곳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이런 내 마음을 말할 수도 없고······.’
“부교가 저택이 완공되었다고 하기에 한 번 구경삼아 와 봤습니다.”
‘훗, 태합께서 내 핑계를 대시다니······. 직접 속내를 드러내기가 민망한 게지.’
“네, 제가 지나는 길에 예전에 마셨든 차가 그립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결례되었다면 저를 나무라 주십시오.”
“부교께서······. 아닙니다. 잘 오셨습니다. 그러잖아도 차를 아주 맛있게 끓이고 있었습니다.”
다도실로 들어간 히데요시는 예전의 여인이 차를 가지고 들어오자 환하게 웃었다.
그녀가 차를 끓여 히데요시와 이에야스, 그리고 미츠나리의 잔에 따랐다.
“음, 역시 오늘도 맛이 일품이오.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봄날 꽃길을 걷는 기분이구려!”
“시인과 같은 멋진 표현이십니다. 태합 전하.”
‘이에야스도 저런 아첨을 할 줄 아는군!’
“부교, 그렇지 않소?”
“네? 아. 저 같은 자는 따라갈 수 없는 정말 대단한 품평이십니다.”
세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멋쩍게 웃었다.
세 번이나 끓인 차가 비워졌지만, 히데요시는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계속 뜸을 들였다.
“공! 이 차 맛을 모두에게 알려주고 싶소이다 만······.”
‘쩝!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시는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다카도라공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그것은 염려 마세요. 내 이미 말을 해 두었소이다.”
‘쥐새끼가 여우보다 빠르군. 강제로 빼앗은 거겠지.’
“무엇을 생각하시오. 공?”
“아, 아닙니다. 이 좋은 차 맛을 매일 맛볼 수 없다는 생각에 잠시 정신을 빼앗겼나 봅니다.”
“하하하!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요? 자주 놀러 오시오. 그런데, 공. 공이 지금 먹는 것은 무엇이오?”
“아, 이것 말씀입니까?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얼마 전에 명국의 사신 심유경이 주고 간 것입니다. 제가 머리가 아파서 몇 개 얻고는 그 처방 법을 배워서 먹고 있습니다.”
히데요시가 심유경이라는 말에 잔뜩 인상을 쓰며 지난날을 떠올렸다.
심유경이 명의 사자로 일본국의 강화 회담을 위해 나고야성으로 들어왔다.
함께 음식과 술을 마시고 있는데 심유경이 무엇인가를 꺼내 음미하며 먹었다.
“심공! 공이 먹는 것이 무엇이오?”
히데요시가 궁금해 물었다.
“이것은 루손 지방에서 만들어지는 것으로 머리가 아프고 골치가 아플 때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아픈 것이 싹 달아납니다. 태합 전하께서도 드셔 보시겠습니까?”
의심이 많은 히데요시가 심유경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이에야스공! 공도 요즘 에도성 건축 문제로 머리가 아프다고 하셨지요. 심공이 먹는 것을 한 번 먹어 보시지요?”
‘어라? 독이 들었을까 봐. 저런 겁쟁이.’
“아, 네. 태합 전하의 심려에 감사드립니다.”
이에야스는 심유경이 주는 약을 받아 환처럼 생긴 약 두 개를 잠시 망설이다 히데요시를 힐끔 쳐다보고는 입 안에 넣었다.
“조금씩 녹이며 드십시오. 그러면 약효가 더 좋습니다.”
이에야스는 얼마 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약간 몽롱한 기분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상좌에 앉은 히데요시가 그런 이에야스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나도 먹어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오?”
“저 아이가 만드는 방법을 익혔습니다.”
대지진으로 그리고 홍수로 민심이 흉흉한데다가 그 원흉을 쓸데없는 전쟁을 일으킨 자신에게 돌리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전전긍긍하던 히데요시가 심유경의 환을 보고는 구미가 당겼다.
히데요시는 만족한 듯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카도라공과 상의하여 곧 차를 보내드리겠습니다.”
히데요시가 다도실을 나가며 여인을 한 번 보고는 웃었다.
여인은 자신을 보고 웃는 히데요시를 보고는 오싹한 기분에 질겁했다.
두 번째 보는 것이지만, 온몸이 움츠러드는 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앞날을 생각하니 더 오싹해져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입술을 깨물며 아버지와 섬사람들을 떠올렸다.
무솔이 다다미가 삼십여 장이나 되는 대저택의 거실에 부복하고 있었다.
이 각(30분)이 지나자 장지문이 열리며 살이 쪄 잘 움직이지 못하는 이에야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느릿하게 들어와 상좌에 앉았다.
“올빼미섬의 료우타라고 합니다.”
“자네가 올빼미섬의 두령직을 이어받았다고 했나?”
‘역시,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네. 그렇습니다만 잠시 맡았을 뿐입니다. 오늘은 다른 일로 찾아뵈었습니다.”
이에야스가 옆에 앉아 있는 한조를 쳐다보았다.
아이루에서 연락이 와 포주 진에몬을 만났다.
진에몬이 한조를 만나게 해주었다.
무솔은 한조의 말을 조용히 들었다.
“좋습니다만······, 에도 성주님을 한 번 만나게 해 주십시오.”
“당돌한 놈이구나! 내가 누군지는 알고 찾아왔겠지?”
“물론입니다.”
“그래, 할 말이 있다고?”
무솔은 미츠나리에게 말한 내용들을 이에야스에게는 약간은 다르게 말했다.
“······닌자들 간의 싸움과 여러 사람의 죽음, 모른다고 하시진 않겠지요.”
이에야스는 무솔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듣고 있었다.
‘역시 너구리라는 말이 맞았어. 만만히 볼 인물이 아니다.’
“조선에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
이에야스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내려왔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라나님를 저에게 돌려주십시오. 제가 다카도라공에게 잠시 의탁을 시켰는데 일이 이렇게 된 것입니다.”
“하하하, 라나를 사랑하는가?”
무솔은 이에야스의 기습 질문에 당황했다.
이내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미 다카도라공과 이야기는 끝났네. 태합께서 기다리는 물건이라 내 줄 수가 없어.”
태합이라는 말에 놀란 무솔이 고개를 들어 이에야스를 쳐다봤다.
“라나님은 물건이 아니지 않습니까? 당사자의 의견도 듣지 않고 마음대로 할 수는 없습니다.”
“어허! 여기가 어디라고 큰 소리를.”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한조가 무솔을 나무랐다.
“이것을 보십시오.”
무솔이 무엇인가를 품에서 꺼냈다.
깜짝 놀란 한조가 무솔에게 달려들다가 품에서 나온 것이 천이라는 것을 알고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천속에서 꺼낸 종이를 펼친 이에야스가 묘한 얼굴로 무솔을 쳐다보았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느냐?”
“물론입니다. 부교 미츠나리도 이 글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황당한 표정으로 무솔을 쳐다본 이에야스,
‘당돌한 줄만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 무서운 놈이로다.’
“됐다. 그럼 본인이 널 따라가지 않겠다고 하면 포기하겠느냐?”
“당연히 절 따라갈 것입니다.”
“좋다. 이자를 라나에게 인도하라.”
이에야스가 장지문을 나가는 무솔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보통 인물이 아니다. 담력과 배짱, 사람들을 가지고 노는 머리······, 사람을 끄는 힘이 있어. 거기다가 사랑하는 마음도. 음······, 살려 두면 위험한 자다.”
*
“라나님, 왜 절 따라 나가지 않겠다는 것입니까?”
무솔은 라나가 답답한 듯이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손을 잡았다.
“료우타님, 아니 무솔님. 이미 저는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오라버니의 원수를 갚을 것입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그것은 함께 해 나가면 되지 않습니까? 앞으로 미츠나리도 타이요우와 우리들의 일에 관여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요. 타이요우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 근원을 뿌리 뽑고 싶습니다.”
“아! 라나님, 왜 제 마음을 몰라주십니까? 저는 어떻게 하라고 이러십니까? 제발, 이에야스도 라나님이 마음만 있다면 같이 내 보내 준다고 했습니다.”
“무솔님, 그만 하세요. 무솔님도 작은 원수보다 큰 원수를 갚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선이 누구 때문에 저렇게 되었습니까? 제가 그동안 입은 은혜들을 갚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는 부끄러운 여자입니다. 무솔님, 제발!”
무솔이 이에야스의 저택을 어깨가 축 처져서 힘없이 걸어 나왔다.
“형! 어떻게 되었어요?”
밖에서 센이 무솔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솔은 고개만 저을 뿐 말없이 길을 걸어 내려갔다.
며칠 후 라나가 후시미성 천수각으로 들어갔다.
후시미성 혼마루의 안주인인 요도도노가 그녀를 맞았지만, 그 얼굴빛은 차가웠다.
기분이 좋아진 히데요시가 조카 사건 등으로 소원해진 다카도라를 달래기 위해 환속한 그에게 이요국 뿐만 아니라 니혼마루라는 군함을 선물로 하사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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