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주 진자에몬
역사는 반복된다.
모두 나가고 다도실에 히데요시와 이에야스 둘만 아니, 얌전하게 차를 따르던 여인도 함께 앉아 있었다.
“처남, 무슨 귀한 이야기를 하시려 그러오?”
히데요시의 입에서 처남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몸서리가 쳐졌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부단히도 노력했다.
“이것을 보아주십시오.”
이에야스가 눈치를 주자 차를 따르던 여인이 농으로 가 무엇인가를 꺼내 왔다.
상자를 받은 이에야스가 여인이 밖으로 나가자 그 상자를 히데요시 앞으로 내밀었다.
황금빛이 나는 작은 상자였다.
“오! 아름다운 빛이오. 이런 상자에는 무엇이 들었을까?”
“아마도 하늘의 뜻이 들었을 것입니다.”
“하하하, 하늘의 뜻이라······.”
히데요시가 흥분한 마음을 숨기며 급히 황금상자를 열었다.
기대와는 달리 보잘것없는 물건이 들어 있었다.
가슴 저 아래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 너구리가······.’
허름하고 낡은 물건을 보자 너도 나이던 늙은 보잘 것 없는 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능글맞게 이에야스가 히데요시를 보며 웃었다.
‘웃어! ······이놈이 날 놀리려고 작정했나 보고나.’
“꺼내서 한 번 보시지요.”
히데요시의 표정을 보고 살짝 웃으며 말을 건넸다.
‘아니, 이것은······.’
뿌루퉁한 얼굴로 물건을 들어 살펴보다 뒷면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오래되고 보잘것없는 물건이라 여기고는 이에야스의 말에 그저 한 번 본 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눈빛이 닿자 맑고 깨끗해지며 얼굴이 비칠 정도였다.
볼수록 보통의 물건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건이 그럭저럭 마음에 드오···.”
‘이 세상에 없는 차 맛과 그 차 맛을 빛내줄 누군가가 함께한다면 더더욱 좋으련만.’
히데요시가 말을 하다 말고 차를 다렸던 여인을 떠올렸다.
물건보다는 다른 것에 더 관심이 가는 것 같았다.
‘음미할수록 맛에 빛이 나는구나! 요도도노의 질투를 견뎌 낼 수 있을까?’
히데요시가 배시시 웃으며 생각에 생각을 더하여 앞서가고 있었다.
히데요시가 말을 하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차를 음미하며 눈을 감자 가만히 그 모습을 보던 이에야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충분히 음미할 시간을 준 뒤 조용하면서도 간곡하게 말을 했다.
“태합 전하. 청이 하나 있습니다.”
“······.”
“이 물건은 도도 다카도라공이 고야산으로 가며 저에게 맡긴 것입니다.”
‘다카도라가······? 멍청한 놈 아냐! 나에게 맡겨야지 왜 저 너구리에게 맡겨.’
“아! 그렇소? 다카도라는 이런 보잘것없는 물건을 어디서 구했답니까?”
속마음과 달리 말했다.
‘후후후, 너의 속마음을 모를 줄 아느냐! 나 또한 이 물건을 보고 놀라 자빠질 뻔했는데······. 탐이 나지만 지금은 나의 물건이 아니다.’
“관백의 역모 사건에 연루된 일부 다이묘들을 살펴주십시오. 그들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어, 이놈 봐라! ······지금 이 물건으로 나를 구슬릴 참이군.’
“그럴 수는 없지요. 수많은 다이묘가 전쟁터로 나가 천왕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데 사사로이 이익을 취하고 자금을 빌려주고 받았다는 것은 분명한 역모 자금이외다.”
‘역시 말은 잘하는군.’
“태합 전하, 오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조선과의 전쟁에 군자금이 부족하여 빌려준 것뿐입니다. 오로지 태합 전하의 뜻에 부합하고자 그리 한 것이니 다시 한번 그들이 태합 전하께 충성할 기회를 주십시오.”
‘후후, 이제 못이기는 척해야 하나? 차 맛을 매일 느끼고 싶은데 내 입으로 말을 할 수도 없고······. 저 너구리 놈이 먼저 말을 꺼내면 얼마나 좋을까? 저렇게 눈치가 없으니 너구리란 소리를 듣지······.’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놈들이지만 너, 아니 처남의 청도 있고 하니 내 양보하겠소. 아, 그리고 특별히 이 선물에 공이 있는 다카도라에게는 지금 즉시 고야산에서 내려오라 하세요.”
황금상자에 대한 궁금증이 도진 히데요시가 이에야스도 예상 못한 다카도라를 불러올렸다.
깜짝 놀라면서도 히데요시의 마음을 간파하고는 이내 고개를 숙였다.
‘코자루! 그 아이를 원하겠지만 내가 잠시 맡았을 뿐······.’
“태합 전하의 넓은 아량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이만 일어나야겠소. 차 맛이 너무 좋아 시간을 많이 지체했소이다.”
히데요시가 밖으로 나가면서 배웅을 나온 여인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저 아이도 다카도라공이 맡긴 아이입니다.”
히데요시에게 넌지시 말을 던졌다.
‘뭐라! 그놈은 날 놔두고······. 음. 영 맘에 안 들어. 내려오지 말라고 할까?’
환속한 다카도라는 히데요시의 명으로 이요국의 사카지마 오만 석을 가증하여 7만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또한 코카와성도 다시 돌려받아 고야산으로 들어가기 전보다 더 많은 땅과 봉록을 얻은 것이다.
사람들은 히데요시의 아량이 넓다고 하였지만, 이에야스는 그 소식을 듣고 쓴웃음을 지었다.
*
무솔이 해를 넘기고 봄이 되어서야 고마마을을 나왔다.
달이 제법 서산으로 기울어서야 에도의 기루 거리로 들어섰다.
주변을 살피며 담을 넘었다.
“교토로 가시겠네요?”
“네, 너무 오랫동안 고마에 있었습니다. 레이야님은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의 물음에 그녀가 말없이 가만히 그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이런 제가 주제넘은 말을 했군요. 용서하십시오.”
“아니에요. 마음 써 주셔서 감사드려요. 저는 포주에게 묶여 어디로도 갈 수가 없는 운명입니다.”
무솔을 보며 말을 하는 레이야의 눈이 촉촉했다.
무솔과 레이야가 앞으로의 일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들어 왔다.
“지, 진에몬님!”
무솔은 어떤 상황인지 몰라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진에몬이라는 자의 얼굴이 낯익었다.
“네가 누구를 만나는가 했더니 이자더냐?”
“······.”
가끔 레이야가 기루를 비우고 어딘가를 다녀오자 수상하게 여겨 미행을 붙였었다.
놀랍게도 레이야가 고마마을을 들어갔다가 오는 것이었다.
누구를 만나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곳을 갈 때나, 다녀왔을 때 그녀의 표정이 유난히 밝아 보였다.
몇 번을 미행하여 상대를 알아보려 했지만 실패했었다.
진에몬은 에도 성주를 만나고 와서 그런지 잠이 쉬 오지 않아 방에서 나와 정원을 거닐다 기루 안 내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다 보니 레이야가 있는 건물이었다.
그녀의 불 꺼진 방을 잠시 본 뒤 뒤돌아섰다.
그때, 어디선가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 발길을 소리가 나는 쪽으로 조심스럽게 옮겼다.
“료우타라고 했소이까? 날 만난 적이 있을 것이오. 그렇지 않소?”
‘내 이름을······.’
“그, 그런가요?”
“하하하, 교토의 아이루에서 봤을 거요. 직접 이야기는 해보지 않았지만, 가끔 오미츠를 만나러 오곤 했지요!”
‘그렇구나! 아이루에서 본 적이 있었어. 그럼 이자가 아이루와 여기 기루를······.’
“이제야 생각이 납니다. 하하하, 교토와 에도를 다 관리하시느라 힘드시겠습니다.”
“거두절미하고 교토에 오시면 아이루를 한 번 찾아오시오. 내가 소개할 사람이 있소이다.”
큰 소리로 말을 하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진에몬이 문을 열고 나가자 무솔은 레이야를 쳐다보며 눈으로 물었다.
그녀는 무솔의 눈길을 잠시 피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무솔을 바라봤다.
“사실은 아이루에서 여기 오게 된 게 포주 때문이에요.”
“네?”
무슨 말인지 몰라 멀뚱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이루는 포주가 소큐를 통해 미츠나리에게 부탁해서 만들었어요. 그 대신 미츠나리가 저를 아이루의 안주인으로 넣은 것이고요.”
말을 하다 무솔의 표정을 살핀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호소인과 저의 관계를 알아차린 미츠나리가 에도를 감시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저를 포주에게 이야기해서 이곳으로 보낸 것입니다.”
레이야는 호소인과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다고 말하지 않았다.
무솔에게 말해서 득 될 게 없었다.
무솔이 호소인과 레이야와의 관계를 듣고는 놀라 어안이 벙벙했다.
교토에서 에도까지 그 호소인을 피해 온 것이 아닌가?
그런 무솔을 레이야는 숨겨 준 것이다.
“아니 그러면 호소인은 가만히 있었습니까? ······얼마 전 저를 쫓아 이곳으로 호소인이 왔을 것인데 어떻게······.”
레이야가 한숨을 쉬고는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띠며 무솔을 바라보았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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