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으로 압송되다
역사는 반복된다.
타이요우가 무솔의 말을 듣고는 분한 마음이 일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저놈의 말이 사실이냐? 죠유지!”
“그 단검을 관백 전하께서 하사하신 것은 모르겠지만, 잇키에서 공을 세운 것은 분명 맞습니다.”
죠유지가 밝은 얼굴로 유키나가에게 대답했다.
‘오슈라······. 닌자가 관백 전하의 목숨을 노렸다는 게 사실인가?’
“음, 네놈 말이 사실이렷다! 만약 거짓이면 그때는 더 큰 고통 속에서 죽게 될 것이다.”
“틀림없습니다. 어차피 죽은 목숨입니다.”
“좋다. 너의 목숨은 관백 전하께서 결정할 것이다. 저놈을 투옥하고 본국으로 압송하라!”
요시라에게서 받은 단검을 유심히 들여다본 유키나가가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로 들어갔다.
금으로 입힌 쿠니요시(國吉)로 단검에 타다츠구(忠次)라는 글귀가 선명했다.
무솔이 관백 히데츠구의 목숨을 구해준 대가로 그에게서 받은 증표다.
관백 히데츠구가 자기의 충신이나 특별한 경우에 하사하는 타다츠구가 적힌 쿠니요시(國吉)를 알아본 유키나가가 무솔의 목숨을 관백의 결정에 맡긴 것이다.
단검이 무솔의 목숨을 연장했다.
유키나가의 결정에 타이요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젠장, 이번에도 저놈을 죽이지 못했어. 두고 보자 내 반드시 네놈의 정체를 밝히고 말겠다.’
*
일본으로 압송된 무솔은 주라쿠성 한 구석의 깊은 감옥에 갇혔다.
바다를 건너오는 동안 늦가을의 파도가 무솔의 마음을 휘저었다.
심한 파도의 요동에 한 구석에 처박힌 무솔은 심란하고 복잡한 마음에 매일 눈물을 흘렸다.
무솔은 온전히 돌아오지 않은 기억들로 괴로웠다.
조선에서의 삶과 일본에서의 삶이 복잡하게 얽혔다.
어느 것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헷갈리기도 했다.
뭐가 그렇게 바빴는지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전장은 삶과 죽음의 연속이었다.
때로는 황량한 들판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럴수록 다짐하며 버텼다.
그런데 지금은 온몸이 포박되어 죽음의 아가리로 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한심하기도 하고 처량하기도 했다.
연서와 동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연서가 스승님을 뵈러 가자고 했을 때도 괴로웠다.
전장의 살벌함과 바쁨은 핑계였다.
스승 배달처사에 대한 기억의 파편들이 부족했다.
연서의 말대로라면 아직 동생들을 구하지 못했기에 스승을 뵐 면목도 없었다.
허무하게 일본으로 끌려갈 것을 알았다면 못이기는 척 스승을 뵈었다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심한 파도에 흔들리며 꿈인지 생시인지 수많은 기억으로 헤매었다.
지난날들의 일들이 꿈속에서, 생각 속에서 뒤죽박죽 혼란의 연속이었다.
파도가 거칠어지면 배의 흔들림처럼 여러 생각들로 혼란스러웠다.
뿔이 달린 무사를 꿈속에서 만났는지 생시에서 만났는지 혼란스러웠다.
한숨과 한탄으로 나날을 보내다 몸이 묶여 배 밑바닥에 있는 시간이 오히려 많은 생각을 할 여유 생기고 자신을 돌아볼 좋은 시간이 되었다.
배가 파도에 심하게 요동치다 고요해지면 차분히 하나하나를 정리해 보았다.
그러기를 반복하다 료우타의 삶과 무솔의 삶이 점점 뚜렷해져 갔다.
지난날 이처럼 파도가 울렁이고 몸살을 앓으며 바다를 건너갔던 기억들도 떠올랐다.
통신사를 따라 일본으로 가며 망망대해에서 헤매든 모습이 떠올랐다.
부산포에서 연서와 헤어지며 눈물을 삼켰던 모습도 아른거렸다.
대마도에 닿자 해적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찾아다닌 기억들, 일본 여러 지역을 지나며 환대와 멸시를 받았던 일들도 아련했다.
일본 어디 섬에 배가 닿았다.
섬의 동료들이 떠올랐다.
타이요우의 웃고 있는 모습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기회가 있다면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라나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혹시라도 잘못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지만, 수많은 난관을 뚫고 왔기에 그런 걱정을 접어 두었다.
“라나!”
바다를 건너는 내내 지난 일들과 문뜩문뜩 떠오르는 생각들을 맞추어 나갔다.
기억의 파편들을 짜 맞추며 몸을 추슬렀다.
*
드디어 도착한 오사카, 그리고 교토,
무솔은 지난날들의 일들이 생생해지자 더 혼란스러웠다.
일본의 닌자로 살아 온 삶과 무솔의 삶이 그를 더 혼란스럽고 고통스럽게 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어머니와 동생들을 찾아오려 했지만, 오히려 자신으로 인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또한 동생들까지 위험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지켜야 할 조선 땅을 칼을 들고 앞장섰다는 것이 또 다른 아픔이요 고통이었다.
“반드시 살아나가야 한다. 반드시!”
*
“이보시오. 내가 여기 들어 온 지 얼마나 되었소?”
무솔은 음식 그릇을 놓고 나가는 간수에게 물었다.
“한 달 되었다.”
한 달 동안 다카도라도 관백도 무솔을 찾지 않았다.
빛도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의 하루하루는 지루하다 못해 온갖 생각들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예솔이와 해솔이가 보고 싶었다.
오늘따라 따스한 햇살이 눈 부신 오후였다.
지하 깊은 곳까지 햇살 한 줄기가 비쳤다.
꿈속에서 함께 노닐던 여자아이가 다가왔다.
그녀의 손에는 들꽃이 들려 있었다.
환한 미소로 하얀 가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주려 했다.
갑자기 주변이 어두워지며, 손에 든 들꽃이 땅에 떨어지고 그녀가 그에게서 점점 멀어져 갔다.
그녀를 애타게 불렀지만, 목이 막혔는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멀어져 가던 그녀가 되돌아보았다.
촉촉이 젖은 그녀의 두 눈동자가 간절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머리를 두른 장옷의 옷깃을 여미며, 고개를 돌렸다.
“예, 예솔아.”
깜빡 잠이 든 모양이다.
무솔은 누군가를 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 그 여자아이. 그 여자아이가 내 동생이었어. 꿈속에서 봤던 그 아이! 예, 예솔이. 그래 내 동생 예솔이······.”
무솔은 꿈속에서 본 아이가 동생이라는 것을 직감하고는 꿈을 깨어 입술에서 나온 이름을 목 놓아 불렀다.
그의 얼굴에서는 굵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저놈이 미쳤나. 조용히 못 해!”
멀리 입구를 치키고 있던 간수가 무솔의 울부짖는 소리에 들고 있던 창으로 벽을 툭툭 쳤다.
예솔이와 손을 잡고 달려가는 자신을 향해 같이 가자며, 두 팔을 벌리고 따라오는 남자아이의 모습이 머리를 스쳤다.
마음은 다시 먹먹해져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쳐 심하게 몸이 흔들렸다.
눈도 얼굴도 무엇인가에 감전된 듯 떨려 왔다.
온몸의 피가 요동치듯 감정이 솟아올라 눈물이 되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주라쿠성의 천수각 입구로 들어가던 예솔의 모습이 선했다.
“그때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바보같이.”
돌아본 예솔이의 눈빛이 자꾸만 떠올라 미칠 지경이었다.
‘아직 여기에 있을까······?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꼭 데리러 가마.’
언제 이곳에서 나갈지도 모르는데 설레는 가슴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해솔이의 얼굴도 아련하게 떠올랐다.
“해솔아!”
문제는 해솔이었다. 육 년 전 고향에서 헤어진 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 당시 나이가 여덟 살이었다.
‘내가 해솔이를 알아볼 수 있을까? 예솔이는 알겠지?’
수많은 생각에 무솔은 자리에 드러누웠다가 일어나기도 하며 잠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너의 정체는 무엇이냐?”
지하 감옥에서 끌려 나온 무솔이 마당에 무릎을 꿇었다.
앞에 관백 히데츠구가 앉아 있었고 그 옆에 여인이 차를 따르고 있었다.
그녀였다.
그녀를 보자 가슴이 뜨거워졌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라나는 무솔의 눈을 의식했는지 잠시 고개를 들었다가 숙였다.
한참이나 그녀를 바라보았다.
히데츠구의 말에 정신을 차린 무솔이 그녀에게서 눈길을 돌렸다.
히데츠구가 말을 하면서도 두 사람을 유심히 관찰했다.
“저는 단지 임무에 충실했습니다. 추측만으로 절 의심하고 죽인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살고 싶은가?”
무솔은 히데츠구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오른쪽 멀찍이 앉아 있는 칸베에 부관이 보였다.
무솔은 울컥하는 감정에 눈물 한 방울이 얼굴을 타고 내렸다.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고개를 살짝 숙이자 부관도 무솔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우선 살아야 동생들을 만날 수 있다.’
정신을 차린 무솔은 다시 히데츠구를 올려다보았다.
“네, 살고 싶습니다. 억울하게 죽는다면 구천에 가서도 눈을 감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한 번 더 기회를 주십시오.”
“기회라?”
히데츠구가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으로 무솔을 넌지시 바라보고는 옆에서 차를 따르는 라나를 보며 말을 했다.
“좋다. 내가 기회를 주지. 무슨 일을 시키든지 할 수 있겠는가?”
“네,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목숨으로 답하겠습니다.”
“하하하, 목숨을 구걸하는 자가 목숨으로 답하겠다? 당돌하구나!”
히데츠구는 차를 끓이고 있는 라나를 바라보고는 무솔을 쳐다보면서 한참을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내 너에게 준 단검이 있으니, ······돌아가 명을 기다려라!”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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