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데요시의 허왕된 꿈
역사는 반복된다.
무솔이 라나를 만나기 위해 후시미성으로 들어갔다.
양 부하가 기다리고 있다가 아무도 모르게 뒷방으로 안내했다.
언제 왔는지 라나가 미리 와 있었다.
두 사람은 너무 오랜만에 만나 어색했지만 서로 부둥켜안았다.
지난날 일본을 떠나기 전 함께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라나도 같은 생각인지 얼굴이 살짝 홍조가 되었다.
한참을 서로 부둥켜안고 있다가 떨어졌다.
무솔은 눈물을 흘리는 라나의 얼굴을 보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양 부하란 아이는 어떤 아이입니까?”
“저도 잘은 모릅니다. 다만, 이번 전쟁 때 조선에서 잡혀 왔는데 귀엽고 똘똘해서 그런지 태합이 곁에 두고 아낀다고 합니다. 태합이 찾는 환의 재료를 저 아이가 구해주고 있어요.”
조선에서 잡혀 온 아이 중 귀엽고 똘똘한 아이들을 선발해 후시미성으로 보냈다.
후시미성에서 조선의 아이들은 시동이 되었는데 인물도 훤하고 똘똘한 양 부하가 히데요시의 눈에 들어 그의 시동이 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 갑자기 침묵이 찾아왔다.
무솔은 겸연쩍은지 창밖을 내다보았다.
성이 건축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런지 정원의 모든 것이 깨끗하고 단정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무솔님, 죄송해요. 저 때문에 그 물건을 잃어버렸잖아요. 절 원망해도 미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눈길로 정원을 둘러보다 그녀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아. 아닙니다. 그 당시 절 살려 주셨습니다. 그 이야기는 이미 끝난 이야기입니다.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그리고······. 제 운명입니다. 청동거울의 주인, 아니 청동거울을 지켜야 하는 것이 저의 일입니다.”
“네? ······네.”
그녀가 수줍게 대답하고는 청동거울에 관해 이야기했다.
일본 병사들이 정유년 조선으로 재출병 후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몰살시켰다는 승전보가 도착한 날, 히데요시가 무엇이 그리 좋은지 술을 한잔하고는 서재에 앉아 있었다.
라나가 조용히 들어가 차를 올리자, 차 맛을 보며 연신 웃었다.
“너는 내가 왜 기뻐하는지 아느냐?”
“모, 모릅니다.”
히데요시의 갑작스런 물음에 라나가 머뭇거렸다.
“저기 안에 있는 상자를 가져오너라.”
라나가 히데요시가 가리키는 곳에 가 문을 열자, 황금으로 치장된 상자가 보였다.
조심스럽게 상자를 들고 히데요시 앞에 놓았다.
지난날 이에야스의 저택에서 자신이 이에야스의 명으로 히데요시에게 건네준 상자였다.
“너는 이곳에 무엇이 들었는지 보고 싶으냐?”
“······.”
라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동안 겪어 본 히데요시는 가만히 있는 것이 최선이었다.
“후후후, 네가 알 리가 없지. 아마 이 땅에 이 물건의 내막에 대해 아는 자가 몇 이겠는가? 혹 간토의 너구리가? 그렇지 그 너구리 같은 놈은 조금은 알고 있을 수도 있어. 그런데 왜 내게 바쳤을···, 뭐 내 손에 들어 온 이상······. 푸하하.”
히데요시가 혼잣말하다 깔깔대며 황금 상자를 열었다.
손을 넣어 무엇인가를 꺼냈다.
“어?”
‘저, 저것은···.’
라나의 입가로 비음이 새어 나왔다.
“왜? 이 물건에 대해 아느냐?”
“아, 아닙니다. 너무 아름다워서 그만.”
“그렇지, 네가 이 귀한 물건을 알 리가 없지.”
무솔의 청동거울이었다.
어떻게 저 물건이 히데요시에게 가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히 무솔의 품에서 나온 청동거울이었다.
‘할아버지가···, 진작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라나가 지난날을 생각하며 청동거울의 소재를 몰라본 자신을 탓했다.
혼자 중얼거리던 히데요시가 라나가 반응이 없자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무엇을 그렇게 넋을 놓고 생각하는 게냐?”
잠시 무솔을 생각하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히데요시를 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곧 조선이 정복될 것이다. 이 얼마나 기분 좋은 소식이냐. 이 물건이 내 품으로 들어와 좋은 일만 생기는구나. 곧, 명나라도 무너질 것이다. 모두 다 내 것이 될 것이다. 푸 하하하.”
히데요시는 라나가 앞에 있어도 혼자 떠들며 웃어댔다.
한참을 웃던 히데요시가 웃음을 뚝 끊으며 라나를 쳐다보았다.
“이런 기분 좋은 날, 안 먹을 수 없지. 그 약 하나 다오.”
라나가 가져다준 환을 들고는 웃었다.
먹은 뒤 조금 지나면 기분이 좋아지고 머리의 지근거림도 가시며 공중에 붕 뜬 것처럼 황홀했다.
라나는 그런 히데요시를 보며 서재를 물러 나왔다.
“이게 라나님이 히데요시에게 만들어서 주고 있다는 그 환입니까?”
“네. 요즘은 자주 찾아요. 조선의 일이 잘 안되는지 간혹 미친 사람 같다가도 이것을 먹으면 혼자 무엇이 좋은지 실실 웃으며, 잠들고는 했어요.”
“요즘엔 의심 없이 찾겠는데요?”
“네, 처음에는 심유경 아니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권하는 것이라 의심이 많은 히데요시가 절 데리고 와서도 다른 사람에게 먹게 했어요. 어느 날 기분이 좋은지 환을 가져오라고 하더니, 복용하고는 기분이 좋다며 저에게 상을 내렸어요. 그 뒤로 기분이 좋거나 할 때 가끔 찾았어요. 그런데 요즘엔 매일 먹고 있어요. 일본 수군이 이 순신에게 대패하고 육군이 명나라에게 밀리면서 남해안으로 내려와 성을 쌓고 웅거하고 있다는 소식에 이성을 잃고는 칼을 들고 설치는 바람에 모두 혼줄이 났었죠. 그날 이후 머리가 더 아픈지 환을 찾는 횟수가 늘더니 요즘은 매일 찾아요.”
라나를 가만히 보았다.
오늘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생각에 무솔의 마음이 아팠다.
슬픈 그녀의 눈빛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품에서 무엇인가를 조용히 꺼냈다.
“이, 이것은······.”
라나가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지난날 무솔이 글로벌호에 쓰러져 섬에 왔을 때 그의 품에 있던 옥가락지였다.
무솔이 두 팔로 라나의 고개를 들어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도 무솔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라나의 손을 잡고는 옥가락지를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그리고는 옥비녀를 그녀의 손에 올려놓은 뒤 두 손으로 꼭 쥐었다.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무솔을 바라보는 라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무솔은 가만히 라나를 안았다.
아침 햇살이 비칠 즈음 여장을 푼 여각으로 돌아온 무솔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죽기 전 써 준 편지에 옥가락지와 옥비녀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
한참을 뒤척였다.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면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라나와의 인연도 이것으로 끝나게 되는 것이다.
왜 어머니의 물건을 그녀에게 주었을까?
이것저것 생각하다 깜박 잠이 들었다.
지난밤 라나와의 마지막 밤을 지새우느라 피곤했는지 해가 중천을 한참 지나서야 이불에서 나왔다.
“무솔님, 어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오래 주무십니까?”
하이난이 깨어난 무솔에게 물을 가져다주면서 물었다.
무솔은 그녀의 눈을 살며시 피하며 물을 마셨다.
그녀의 눈빛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 무솔을 노려보았다.
무솔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훅 달아오르자 그녀가 못 본 듯 고개를 돌렸다.
“어, 시원하다. 하이난님, 고맙소. 이제 이곳 생활도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정다운 곳, 그리운 곳을 둘러보고 오세요.”
히데요시가 봄놀이를 나갔다.
이에야스를 비롯하여 많은 조정 대신들과 영주들을 이끌고 화려한 차림으로 보란 듯이 행차했다.
조선을 재침했지만, 이 순신에게 일본 수군이 대패하고 육군마저 명나라 군에게 밀리자 일본 조정이 어수선했다.
그런 분위기를 감지한 히데요시가 건재함을 과시하고 별것 아니라는 의미에서 강행한 꽃 놀이었다.
수많은 구경꾼이 언덕과 나무 위에서 히데요시를 비롯한 고관들을 구경했다.
구경 나온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자 기분이 좋아진 히데요시가 앞장서서 대 다이묘와 고관대작들을 이끌고 꽃길을 걸었다.
기세 좋게 꽃구경하며 걷던 히데요시가 기우뚱 쓰러질 뻔했다.
옆에 있던 아내 기타노만도코로에 의해 겨우 몸을 지탱하여 근처 바위에 앉아 쉬었다.
“날도 좋은데 잠시 이곳을 감상하다 갑시다.”
히데요시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능글맞게 말하고는 주변을 둘러 보았다.
‘어떤 놈이 본 건 아니겠지.’
동행 한 관료들이나 다이묘들, 시녀들은 알지 못했다.
뒤에 조금 처져 걷고 있던 이에야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
무솔도 히데요시가 꽃놀이 가는 것을 알고는 멀리서 지켜보았다.
멀리 행렬이 가는 것을 보고는 바로 뒤돌아 후시미성으로 숨어들었다.
히데요시가 없는 후시미성은 조용했다.
많은 저택의 주인들도 히데요시를 따라 꽃놀이를 가, 경계가 그만큼 허술해져 있었다.
처마 아래로 그림자를 숨기며 천수각으로 숨어들었다.
노부나가를 따라 히데요시도 주로 생활을 천수각에서 보냈다.
혹 모를 적이나 내부의 반란을 의식한 습관이 혼마루 어전이 아니라 천수각에 머물게 했다.
라나가 일러준 서재로 가 황금 상자를 찾았다.
농에서 황금 상자를 꺼낸 무솔의 가슴이 요동치듯 뛰었다.
떨리는 손으로 겨우 상자를 연 무솔의 두 눈이 커졌다.
텅 빈 상자가 무솔의 눈 가득 들어 왔다.
작은 황금 상자 어디에도 청동거울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라나님이 말한 상자가 맞는데······.’
무솔은 청동거울이 없자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한동안 멍하니 상자 안을 보다 다시 황금 상자를 농 안에 밀어 넣고는 다른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재와 주변의 방들을 뒤졌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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