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장. 불편한 진실. (3)
한 권이 끝날 때, 가슴에 남는 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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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이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인가.
불에 덴 것처럼 일어나려던 그.
하지만 황제의 힘이 그 어깨를 눌렀다. 소리도 지르려 했지만 막혀버렸다.
“그놈 참... 물론 놀랄 일이긴 하다만...”
“...놀랄 일을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던 이영은 문득 생각했다.
이 인간이 엉뚱하게 움직이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것도 보통 사람은 생각하지도 못할 이유다.
“...이유가 뭡니까?”
“가디언즈 조사를 위한 거야. 짐이 직접 한다고 그랬지? 하지만 국가원수가 함부로 자리를 비우거나, 남의 나라에 대놓고 들어갈 수는 없으니...”
“몰래 나가시겠다...?”
“그래. 하지만 말했듯이 짐은 공식적으로는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마침 너는 짐과 체구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다. 얼굴은 가면을 붙일 거고 목소리도 변조할 수 있다. 좀만 꾸미면 똑같아질 거야.”
“그러면... 폐하의 대역을 하라고요?”
“맞아. 너는 현재 국내에서, 짐을 제외한 유일한 남성 능력자지. 가디언즈의 행보는 파악할 수 없지만, 아샤르 국내에 들어와 있어도 이상하지 않아. 그러니, 만약 대역을 보통 사람으로 세운다면 혹시 모를 공격에 대처할 수가 없겠지. 자타공인 최강 능력자인 황제가 사소한 공격에 허둥댄다? 단번에 들키지.”
“저라고 해서 별 힘이 있나요?”
“보통 사람 기준에서는 아니지. 너, 얼마 전에 유키나에게 비행술은 배웠다고 들었는데...”
“...그렇죠.”
그는 부유 정도만 쓸 수 있었었다. 그래서 좋은 것을 배웠다 생각했지만...
“하늘을 날 수 있고 영자력탄... 이 정도면 쉽게 의심받지 않아. 또 미리 말해둔 측근들도 도울 거니 너무 걱정 마.”
“측근이요?”
“세리사, 루이코, 그리고 총재와 우현왕이 그들이다. 총재와 우현왕은 그렇다 치고, 세리사와 루이코에게 말해 놓는 이유는 무엇인지 알겠나?”
“잘...”
황제는 남은 소주잔을 들이켰다.
“짐은 말이야, 책임져야 할 여자가 둘이라고... 거기다가 내궁 법도는 엄격해서, 짐이 아프거나 그녀들이 아프지 않는 한 동침을 빼먹을 수는 없다. 무슨 뜻인지 알겠나?”
“저기 설마... 저보고 폐하 대신, 북궁 정침뿐만 아니라 두 분 마마 침궁에까지 들어가라는 것은 아니겠죠?”
“그게 맞는데?”
...야, 이 미친놈아...!
비난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황제는 거듭 웃었다.
“국사에는 멀쩡하게 나가는 황제가 침궁은 안 찾는다? 모두의 의혹을 사기에는 충분하지.”
“저기 말이죠... 저나 그분들이 아프다고 하면요? 그리고... 이건 실례지만 한 달에 한 번... 핑계는요?”
“각자의 시녀장들은 주인의 달거리가 언제인지는 알고 있어. 게다가 꾀병을 함부로 만들만큼 궁내성 어의부는 만만하지 않다. 애당초 한 달 내내 피할 수 있을 것 같나? 다들 연기력을 기대할 정도도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진짜로 서궁... 황후궁이나 차비궁에 가야 하나요?”
황제는 웃으며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그러니 아무에게나 맡길 수는 없는 거야. 짐의 여자들에게 실수로라도 손대지 않을 녀석이 필요하거든. 그녀들에게도 생판 모르는 타인은 아니니, 거부감도 그리 없을 거고 침대 구석 정도는 그럭저럭 주겠지. 어려운 일을 시키는 처지에 바닥에 재울 수는 없잖아.”
르아냐 궁에서 루이코와 바둑승부를 하고, 또한 침대 자리를 놓고 티격태격했던 일이 떠오른다.
회상하며 웃은 황제와는 달리 이영은 한숨을 쉬었다.
“설마 이렇게 대역으로 쓰시려고, 저를 측근으로 삼으신 것은 아니겠죠?”
“혹시나 싶었지만 이럴 때도 예상하고 있었어. 너는 네 생각 이상으로 짐에게 쓸모가 많다.”
“하지만... 막상 제가 부족하면 어떻게 됩니까? 예를 들어, 누가 누군지 모른다던가...”
“그래서 너를 비서성에 넣은 것도 있어. 들락거리는 사람 얼굴을 싫어도 외워야 했으니, 이제는 짐을 만날 수 있는 인사들의 얼굴은 대충 알고 있을 거다. 미리 예습해둔 셈이 되지 않았어?”
포석 한 번 참 꼼꼼하다. 이영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너도 그 동안 짐의 옆에서 보고 배운 것 정도는 있잖아? 어떻게든 할 수 있겠지.”
“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뻔뻔하기도 하고...”
쓴 소주에 쓴 표정을 짓던 우현왕이 더욱 쓴 표정으로 말을 보탰다. 이영이 항변하려는 찰나,
“또한 뻔뻔한 만큼은 대담하니... 그 점은 기대하지.”
아, 그러셔요. 잠시 뚱했던 이영이 반문했다.
“그 조사라는 것. 전하께서 하시면 안 되나요?”
“나도 국정 참여를 한다. 폐하의 대역도 구하기 어려운 판에, 내 대역을 어디서 구해? 제이낙은 무리야.”
“음...”
“걱정마라. 며칠 동안 교습을 시켜줄 테니까.”
그녀의 웃음에서 썩은 내가 풍기는 느낌은 제발 내 착각이기를.
더욱 움츠린 그에게 황제가 물었다.
“어떠냐, 해보겠느냐?”
“거부할 수 있나요?”
황제는 짓궂게 웃었다.
“칙명이다.”
“...할 수 없지요. 대신 일이 틀어지더라도 너무 책임은 묻지 마세요. 힘들어요.”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지금 머리가 팽글팽글 도는 것은 술기운 때문만은 아니겠지.
어지러운 그를 황제가 위로했다.
“너무 우울해하지 마라. 일이 끝나면 포상 정도는 생각해줄 테니까.”
“뭐,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런데, 저... 어쩐지 꽤 중요한 인물이 된 거 같네요?”
“중요하다.”
“...어째서요? ...솔직히 말하자면 저희 집에서도 물어왔습니다. 대체 제 무엇을 보고 자리를 줬는지...”
“그 놈 참, 대체 집에서 무슨 평가를 받고 있느냐?”
“집만이 아니라 누구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폐하께는, 저 따위와는 비교도 못하는 인재가 많잖아요?”
“바로 그거야. 네 말대로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고, 또 짐에게 인재가 많기 때문이다.”
“뭔가 앵무새 같습니다...?”
“선종외시(先從隗始)의 고사는 아느냐?”
“...뭐였더라...”
“외계인 황제인 짐보다 지구 역사를 모르면 어떻게 하나. 우선 저 외(隗)부터... 라는 뜻이다.”
중국 전국시대, 연(燕)의 군주였던 소왕(昭王)이 널리 인재를 모을 방법을 묻자, 신하였던 곽외(郭隗)가 방책을 올린 고사이다.
“옛날 어느 왕이 천금을 들여 천리마를 구했으나, 3년 동안 소득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한 사람이 나섰는데, 엉뚱하게도 죽은 천리마 뼈를 오백 금에 사왔다고 합니다. 노한 왕께 그가 태연히 말하길, ‘죽은 천리마 뼈가 오백 금에 팔리면, 산 천리마는 얼마에 팔리겠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겠습니까?' 하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 말 그대로, 이후 1년도 지나지 않아 세 사람이 천리마를 팔겠노라고 왕을 찾아왔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려준 곽외는 먼저 별 볼일 없는 자신부터 중용해 달라 청했다. 그리고 이 미끼는 예상 이상 먹혀서 추연, 극신, 악의 등 뛰어난 인재가 앞 다투어 등용을 청했다고 한다.
“너 같은 놈. ...짐은 그보다는 높게 평가한다만, 그래도 보기는 그런 놈이 이만한 대우를 받고 있어. 나라 안의 인재를 끌어내는 데는 좋은 방법 아닐까?”
“...그런 겁니까?”
“인재는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다. 또한 이미 있는 인재들이 유능한 탓에, 아무래도 전반적인 능력과 의지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지상인 인재들을 신용하지 않아. 하지만 지상에도 뛰어난 자는 반드시 숨어 있어. 그런 이들을 끌어들여 기존의 우리 인재들과 융합시킨다. ...비록 당장은 나아진 생활에 우리 통치를 환영하는 자가 적지 않아도, 장차 배가 부르고 시간이 흐르면 잃어버린 나라가 생각날 거다. 그렇게 되기 전에 진심으로 협조하는 이들을 찾아야 해.”
신영토의 기존 국민들은 나름 자존심이 있다. 이 자존심을 함부로 건드린다면 한국은 구 일제, 일본은 미군정 시대를 떠올릴 것이다. 이른바 치욕의 역사 말이다.
“기존 정치에 실망한 사람들과, 재능이 있어도 돈과 권력의 장벽에 막혀 펼치지 못한 사람들... 나라를 잃은 것은 아니꼽지만 사람들을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 짐 밑에서라도 일하고 싶어 하는 그런 이들을 끌어들인다. 새로운 두 상서, 알론 테일러와 이시하라 겐지가 그런 인물이고... 그 둘도 장차 충분히 대우한다면 어떨까?”
“한 가지... 묻겠습니다.”
“뭐냐?”
“계속 의문이었는데, 폐하께서는 무척 열심이세요. 물론 뜻도 포부도 크신 것은 이제 알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따라오는 겁니까?”
“다른 사람들이라...”
“네. 폐하야 스스로의 포부로 동기부여가 된다고 하지만, 다른 아샤르인들은 그렇지 않잖아요? 여러분들끼리만 살고 통치한다면 훨씬 편할 텐데, 불평하면서도 막상 게으름을 피우는 신하들은 찾아보기 힘들잖아요?”
“흠... 재미있는 의문이네.”
“어째서 아샤르인들은 지상을 개혁한다는, 본인들에게는 몹시 피곤한 일을 즐겁게 하는 걸까요?”
“레고(LEGO) 놀이는 해봤겠지?”
“어렸을 적에는... 잠깐, 그러면 만드는 재미입니까?”
“약간은. 허나 그것만은 아니다. 알고 싶은 거야.”
황제는 미간을 좁혔다.
“궤멸전쟁으로 다시 가 볼 수 없는 우리 고향. 우리 모성(母星)의 이름을 아느냐.”
“알고 있습니다. 아샤르죠.”
국호이자 모성의 이름인 아샤르는 새벽의 대지란 뜻이다. 아스(새벽)과 야르(땅)의 결합어다.
“그 시절의 역사에서 전해진 바로는, 지구와 궁극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는 변화 과정을 밟았다고 알고 있어. 소국들의 난립, 전쟁 끝의 통합, 그리고 우주를 노리는 기술을 손에 넣고 확장과 쟁투의 시절을 거쳤지.”
아샤르 모성은 지구보다는 3할 이상 컸던 행성이지만, 그 안의 자원과 부 역시 한정적이었다. 약 60개 이상의 나라가 지금 수준, 아니 그 이상의 피 흘리는 쟁투를 거쳐 마침내 통일 아샤르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궤멸전쟁이 있었지. 거기에 하도 호되게 데여서, 우리는 우리 기술을 스스로 정체시키고 사회 구성을 단순하게 만들었다. 복잡한 쟁투는 발전을 낳지만 또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자칫 잊히기 쉬운 민초의 눈물을 만들기 때문이라 생각했던 거야.”
황제는 스스로의 잔에 술을 쳤다. 약간 눈짓하는 것 봐서 책망하는 것 같다.
다음에는 놓치지 말아야지. 하지만 이영은 이미 이야기에 빨려들고 있었다.
“하지만 내전까지 겪은 우리다. 그러니 직감하고 있는 거야. 우리는 고여버린 정체를 개선하기 위한 개혁에서, 다시금 그에 반발하고 충돌하는 전쟁, 무엇이 옳은가 결정짓기 위한 그 전쟁 이후의 소중한 평화, 다시 썩어버리는 평화를 고치기 위한 개혁이라는... 그 지긋지긋한 고리를 여전히 끊어버리지 못했다고...”
그 장대한 역사의 페이지도, 여전히 꽃향기보단 피 냄새가 더욱 물씬 풍긴다. 황제는 거듭 얼굴을 찌푸렸다.
“이렇게 된 원인은, 모성의 그 통합부터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 조금 더 기술과 자원이 여유로웠다면, 조금 더 앞선 체제가 있었다면 과연 우리 역사는 그리 피로 얼룩졌을까. 그런 후회가 많은 것이다.”
황제는 다시 술잔을 비웠다. 이번에는 이영이 재빨리 그 잔을 채웠다.
“그래서, 다른 역사를 기대하며 지상인을 만들어 내려 보냈다. 그리고 이제 지상과 다시 역사를 공유한다. 그렇다면 궁금하지 않느냐? 지구는 당시의 아샤르 모성보다 훨씬 조건이 좋아져, 상당히 완성된 기술력과 풍족한 자원을 제공받을 수 있어. 그렇다면... 아샤르 모성은 실패했지만 앞으로의 지구는 달라지지 않을까? 우리는 전쟁과 평화, 개혁에서 다시 전쟁으로 이어진 역사를, 바로 이 지구에서는 조금은 다르게 펼쳐 보일 수 있지 않을까?”
“마치 과거로의 회귀, 그리고 새로운 인생을 꿈꾸는... 그런 소설 속 이야기 같군요.”
“그래. 네 말대로 사람들은 종종 생각하곤 한다. 예전으로 돌아간다면 좀 더 다르게 살아볼 수 있을 거란 소망. 그리고 이게 국가 단위, 문명 단위로 범위가 넓어졌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황제는 힘주어 단언했다.
“기대보다 훨씬 못 미칠 가능성은 커. 아무리 기억과 지식이 있고 지나온 세월을 안다지만, 흔히 쉽게 생각하듯 그 인생이 바뀔 가능성은 낮다. 왜냐하면...”
그는 어쩐지 빈정거리는 말투였다.
“스스로가 바뀐 인간이 아니거든. 똑같은 인간이 똑같은 능력과 이상을 가지고 한 번 더 살아봤자, 뭐가 얼마나 바뀐다는 거냐. 결국은 자신과 주변에 대한 진지한 고찰도 없이, 그저 혼자만의 정의와 개인적인 욕망만 펼칠 가능성이 커. 좀 엄하게 말하자면 정신적인 자위행위랄까.”
“그건 나름... 그럴듯하네요. 물론 듣는 사람은 기분 나쁘겠지만...”
“허나, 가능성의 영역에 발을 들이 밀어보는, 꿈을 꾸는 그 자체를 뭐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 관료들도 사람들도 자신들이 열심히 하는 이유를, 본인은 딱 짚어 말할 수 없어도 그리 느끼고 있을 거다. 우리는 석기 시대에 떨어진 문명인이다. 배고프고 병든 지구 인류를 구제하고, 우리 스스로는 지난 과거에서 이루어보지 못한 유토피아를 만들어보고 싶은 그런 욕구지.”
“...약간 알겠습니다. 어떤 심정인지...”
개척 정신은 인류의 소중한 재산이다.
이영 스스로도 만약 원시인과 섞인다면, 노예로 부리면서 떵떵거리며 살거나, 아니면 그들과 섞여 자신의 지식을 풀고 사회를 개선시키는 두 가지 길이 있었을 것이다.
황제와 그 종족은 후자를 택한 셈이다.
“허나... 난관은 적지 않아. 짐은 굉장히 불편한 진실을 알고 있다. 때문에 어쩌면 실패할 길을 고집을 부려 가는 것일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불편한 진실요?”
“그래. 이제껏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을 봐라. 정치가를 손가락질하지만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가진 자를 욕하지만 스스로도 덜 가진 자에게 우월감을 가지고... 그런 사람들이 널리고 널린 것이 지금 세상이야. 때문에 그들도 변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 어떻게 하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뭔가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어.”
“하지만... 실제로 바뀐 건 없었죠.”
“그건 다른 이유가 아냐. 설령 시대의 흐름이 바뀌어도, 막상 그 흐름에서 자기 자신은 비껴가길 바란다. 개혁? 다 좋은데 하필 내 때에, 내가 사는 세상에? 변혁?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하니 듣기에는 좋지만, 왜 내가 고생하고 또한 손해를 봐야 하지? 그런 거지.”
이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갑자기 부모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어리석지만 또 어리석기에 인간다운 그런 욕망은, 짐이 가고자 하는 이 길에 촘촘히 깔린, 밟을지 피해야 할지 매번 재어야 하는 불편한 진실이자, 사실은 당연한 거다. 왜냐면 사람은 자기 생각보다는 훨씬 보수적이라, 문제를 깨달았을 때에는 대체로 일이 너무 늦어 있거든. 허나...”
그는 자조하듯 쿡쿡 웃었다.
“짐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선물을 해주고 싶다. 약간이나마 미래에 가능성을 던지고 싶어. 경쟁사회에 지친 이들에게 악수를 할 수 있는 마당을, 이제 우리의 기술과 체제로 열어주고 싶다. 지구 인류 시작 이래로, 이 인류는 기아와 질병과의 전쟁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는 벗어났다. 이게 커.”
“확실히... 아샤르의 등장으로 불안감도 커졌지만, 여러분의 기술력은 기대를 많이 받고 있죠.”
“하지만 그것에 그치진 않을 거다. 인류가 불을 발견하고 동력을 만들고 우주를 넘어 보았듯, 우리의 존재는 이런 삶과 방식도 존재한다는, 그들에게 일종의 발전의 계기가 될 거야.”
“그럼 아샤르가 얻는 것은, 그냥 개척자의 역할로 인한... 만족? 그 정도입니까?”
“아니다. 애당초 우리가 왜 인공지능에 통치의 상당 부분을 맡겼느냐면, 우리도 우리 스스로를 잘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한계를 보았기 때문이야. 때문에 짐은 다시금 가능성을 찾아보고 싶은 것이다.”
궤멸전쟁으로 그들은 성장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난 내전은 결국 변한 것이 없다는 것만 가르쳐줄 뿐...
“물론... 지금의 짐은 침략자이자, 생소한 체제를 강요하는 독재자일 뿐이겠지. 그러나 그들에게 평화와 안정을 준다면, 그리고 경쟁 없이 안주했던 아샤르에도 다른 생각과 입장을 가진 이들과의 경쟁을 던져준다면, 미래는 조금 다른 진행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것 때문에 폐하는 엄청 고생하실 겁니다. 지금도 다들 딴죽만 걸잖아요? 화도 안 나십니까?”
“당연히 화가 나지. 짐도 대드는 녀석을 윽박지르고 싶고, 이제껏 자기 배 불리는데 치중했던 녀석들이 순진한 국민을 감언이설로 속이고 다시 들어와, 저번의 성은희처럼, 지금껏 짓밟았던 이를 또다시 짓밟으려 드는 무리들을 응징하고 싶다. 하지만 이미 말했지? 증오와 복수는 군주가 택해서는 안 되는 길이야.”
“하지만... 그러다가는 자칫 호구 취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도 세계 단위로...”
“알아... 그러니 짐이 너무 우습게 보이지는 않도록 유키나가 부러 악역을 맡는 것이고, 또한 짐도 밝혀놓은 대원칙이 있다. 분명한 선과 순리에는 소속과 종족, 과거를 따지지 않을 것이지만, 분명한 악과 부조리와는 손잡을 일은 없을 것이다.”
황제는 고개를 조금 꼬며 웃었다.
“...그나저나 호구라... 재미있는 말이긴 하지만 약간은 호구가 되어도 돼. 그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더 클 것 같다면, 군주에겐 밟아볼 만한 길일 것이다. 루이코도 짐이 바보 같다고 했지만... 너도 그리 생각하냐?”
“확실히...” 라며 그는 웃었다.
“바보 같네요.”
“흠...?”
“하지만... 약아빠진 사람들보다는 좀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타인을 해치고 올라서는 자를 똑똑하다 말하기 쉽거든요. 그런 의미에서는 차라리 바보도 괜찮습니다.”
“루이코과 비슷한 말을 하는군. 하지만 바보에게 바보 취급이라... 짐도 격이 참 떨어졌다.”
이영은 유키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제가 바보 같습니까?”
조금 웃는 그녀는 술기운인지 뺨이 살짝 붉다.
“약아빠진 쪽은 우리들로 족해. 넌 바보로 살아.”
“...하, 뭘 어떻게 해야 바보 취급을 면하는 건지...”
황제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젓가락을 들었다.
“그건 됐고, 아무튼 며칠 좀 바쁠 거다. 그러니 오늘은 즐겁게 마시도록 하자고.”
“그 참... 제 팔자도 기구하다 해야 하나요, 복을 받았다고 해야 하나요. 뭐, 잠시라도 그 자리에 앉아 보는 경험... 이건 결코 아무나 할 수 없겠지만...”
“너무 기대하진 마.”
황제는 약을 삼킨 듯 떨떠름한 표정으로,
“다들 부러워하는 황제의 삶이지만 결코 녹록치 않을 테니. 상류사회의 꿀맛을 보고 싶다면 잠시 봐 두도록 해. 하지만 오늘은 서민의 돼지갈비에 빠져볼까...”
“네, 그러면... 엇?”
누나랑 먹으려고 제법 구워 쌓아놓았었는데, ...없다?
이영의 어이없는 눈짓에, 나무젓가락을 조금 빨고 있던 여왕이 딴청을 부렸다.
“뭘 봐...?”
“...어쩐지 말씀이 없다 했더니...”
이 여자, 안 그래 보이는데 제법 식탐이 있다.
“술은 쓰지만 지구 음식도 괜찮군. ...탄내는 꽤나 나지만... 뭐하니? ...설마 내가 구울까?”
“...잠시 기다리세요.”
서로 소주잔을 든 두 사람을 위해 고기를 구우면서 이영은 잠시 생각했다.
이런 엉뚱한 사람들 보았나. 별 짓을 다한다 싶고 어이는 없지만... 또한 묘하게 재미있다.
이들도 완벽한 존재는 아니지만, 가끔은 기행도 저지르지만, 작은 부분이 딱딱하지 않은 만큼 스스로의 큰 틀은 확고하다. 또한...
아버지는 물론, 드러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허무한 욕심들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인간은 입으로는 깨인 인간이라 자부하고 싶어 하면서도, 오히려 스스로의 생각보다 훨씬 변화를 싫어한다. 아무리 옳은 것도 배척하려는 시류 역시 어느 시대에나 있다.
하지만 전혀 두려움을 갖지 않는 그들을 보자면 다시 사는 인생, 다시 쌓아가는 문명이라는 그 창조의 즐거움이란 어떤 것일까.
역시 기대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황제 노릇이라니. 살다보니 별 일이 다 있다.
...딱히 바라지는 않았지만, 이들을 만난 이후 나의 인생은 너무나 다채롭다.
축복이라면 축복이겠지...?
고기에 잽싸게 가위질을 하며 그는 내심 실소했다.
수고하셨어요.
- 작가의말
네. 변혁을 바라는 마음과 반대로 또 현실의 정체를 원하는... 진화를 원하지만 사실 바뀌지는 않는 그 바탕에는 모든 흐름에서 ‘나 자신’ 은 잃기 싫어하는, 변혁과 변질의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람의 마음은 상당히 불편한 진실일 겁니다. 약스포(강스포려나)지만... 이것이 나중에는 큰 문제로 다가오게 될 겁니다.
그리고... 황제 뿐만 아니라 아샤르 국민들이 지금의 시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째서 황제의 깃발 아래서 뭔가 해보려고 하는가... 에 대한 배경은 원시사회에 떨어진 문명인의 비유로 들 수 있겠죠.
약간 뭐랄까, 회귀물을 까는 문장도 들어 있습니다만 문맥에 맞추는 것이고, 실제로도 상당수의 회귀물은 왕창 억울하거나 실패한 인생들이 돌아가 성공한 내용인데 글쎄요... 스스로가 별로 바뀌지 않고도 단지 지식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그렇게 바뀔까는 개인으로는 의문이고, 더불어 그렇게 악을 응징한다는 이유로 역사를 바꿈으로 인해 억울하게 다칠 수 있는 자기가 보지 못하는 어떤 인생들이나, 복수나 성공의 말미에 결국은 개인적인 것만 잔뜩 들어있을 수 있는 또다른 부조리에 대해서는 별로 진지한 고찰은 찾아보기 힘들었어요.
황제는 이 점도 걱정합니다. 다시 만든 지구, 다시 바꿔보고 싶은 역사...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고... 하지만 가능성의 영역에 발을 들이밀죠. 그러나... 바로 오늘의 대화를 황제는 먼 미래에 곱씹게 됩니다... 하지만, 아직은 꽤나 먼 미래의 이야기...
다음 장 ‘많이 아픈 찔러보기’ 편에서는 경사와 비극이 같이 있습니다. 세리사와 유키나와 루이코는 많이 웃고, 그리고 많이 울겠지요. (여주는 굴려야 맛이라고는 해도... 그냥 작가가 못되먹어서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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