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 1 vs 100. (3)
한 권이 끝날 때, 가슴에 남는 글이 되길 바랍니다.
Ⅲ
아, 불편하다.
바싹 붙은 엉덩이가 행여 닿지 않게 이영은 거듭 움츠렸다.
서울지하철 2호선의 객차.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여자는 다가오는 겨울에 맞추어 재킷과 스커트 세트, 조금 두터운 검정색 스타킹에 같은 색 부츠다. 또한 모자를 눌러쓰고 뿔테 안경으로 가렸다.
“...오는 동안 알아보는 이가 없어서 다행입니다.”
지금 공중도시와 지상의 연결수단은 비행정이다. 때문에 인천국제공항과 김포공항에 덧붙여, 여의도 광장을 완전히 비운 임시 이착륙장에 내려 지하철을 탔다.
그녀, 우현왕 유키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알아보는 이는 있었어. 사실은 많았지.”
“네? 알아보는 이가 있었다고요?”
...오는 동안 수없이 사람을 마주쳤는데...?
“그렇다면 난리가 났을 것 아닙니까?”
“설령 황제라도 사적인 용무로 시내에 있을 경우에는, 그걸 알아본 체 하거나 목격담을 공적으로 말하는 자체가 큰 결례야.”
“...그런 겁니까?”
“오면서 탔던 베라 지하철, 그 안의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생각했겠지. ‘이크, 우현왕이시다. 아는 체 하지 말자.’ 내지는 ‘수행원 하나 데리고 지금 어딜 가시는 걸까.’ 라고. 하지만 예의상 전부 입을 다문 거지.”
묘한 문화지만 그럴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족이라도 밖에선 편하게 다니고 싶을 거니까.
하지만 아무리 가려도 드러나는 이 미모는 눈길을 끌게 되어 있다. 게다가 그녀는 지구 전체에 얼굴이 팔려있을 테니, 아무래도 이건 위험하다.
하지만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 했다. 이영이 조심스레 물었다.
“솔직히... 이건 저 혼자 가도 되는 일 아닐까요?”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국민등록이 완전히 끝나서 신원이 전부 밝혀지기 전에는, 이 나라에 어떤 녀석들이 들어와 있을지 모르지. 그걸 대비해서 친위기사는 요소에 배치했지만...”
더불어 고성능 영파탐지기가 공항과 항구의 출입구에 배치되어 있고 궤도위성도 돌아가고 있다.
“너 말이다, 만약 지금 찾아가는 곳에 그 왕 같은 고위 간부가 둘 있으면 이길 수 있겠니?”
“무리겠죠...”
“그러니 손이 남는 내가 같이 갈 수밖에.”
며칠 동안 피땀을 흘려가며 호되게 수련을 받았지만, 힘이라는 것은 그렇게 한 번에 느는 것이 아니다.
뭐, 그동안 좋은 기술 하나는 전수받았지만...
“그리고 기회삼아 지상 구경도 하고 싶었고.”
“저는 안내원이고요?”
난 너의 충직한 따까리냐...! ...팔자 참 좋아졌네.
그렇게 한탄했지만 생각해 보면 묘하다. 언젠가 아레아를 데리고 식사 대접이나 하려고 했더니, 어느새 그 대상이 바뀌어 있다.
얼마 전, 아는 인물을 수소문했을 때 이영은 몹시 놀라고 말았다. 다른 이들은 이미 소재를 알 수 없었지만, 대신 제일 먼저 도망쳤을 거라고 여겼던 인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가디언즈 한국지부장 장헌창. 올해 33세의 그는 표면적으로는 서울 신도림 근방에서 영업하는, 나름 이름 있는 중국음식점의 주인장이다.
어째서 남아있나 의문이 들었지만, 어쨌든 현재 상층부와 연결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창구다.
식당은 제법 북적거렸다. 외계 침공에도 아직 사람들의 삶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경제계급이 도입될 거라는 공식 발표가 있었지만, 그 실체가 서민 보호에 가깝다는 법해석이 이어지자 기대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행정 공백을 막기 위해 교통과 체신, 경찰과 의료 등의 각종 공공서비스 영역은, 로사에 의한 자동화 행정이 정착되기 전까지 이직은 금지되었다. 세상은 아직 예전처럼 돌아가고 있다.
2층 창가. 줄줄이 꿴 발을 문 삼아 두터운 칸막이로 구분된 방에 앉은 이영이 주문을 물었다.
“어떤 걸로 드시겠습니까?”
“네가 골라라. 맵지 않은 것이라면 좋겠네.”
그녀가 중국 음식을 잘 알 리가 없다.
“그럼 간짜장으로... 다른 것도 드시겠어요?”
여왕이 고개를 저었다. 이영은 찾아온 종업원에게,
“혹시, 사장님 어디 가셨어요?”
“아뇨. 주방에 계실 텐데요?”
“그럼... 친구가 찾아왔다고 말씀 좀...”
“그러죠. 성함이...?”
그녀가 물러간 후 이영이 물었다.
“지구 음식을 드셔본 적이 있으십니까?”
“약간... 그리고 꽤나 독특하더군. 이 점은 우리의 호기심과 흥미를 가져오는 부분이고... 때문에 오라버니도 이 점에 주목 하시더군.”
“어떤 부분입니까?”
“식재료 자체는 아주 큰 차이는 나지 않아. 지구 원산의 식재료는 우리도 다 갖고 있어. 그 역은 성립되지 않겠지만. 그래서 일단 문화교류의 장으로, 뭔가 음식 관련의 행사를 여는 방안을 검토하고 계셔. 예를 들자면 각자의 음식을 갖고 와서 평가한다던가...”
듣고 보니 그럴 듯하다. 서로가 가져온 먹을거리를 앞에 놓고 이야기하면 꽤 분위기가 풀리기 마련이고...
“그 외에도 교류의 기회는 많이 만들 거야. 다만 자문위원회 놈들은, 아무래도 절반 이상은 쓸 만한 인재가 아니다. 문제가 될 만한 것이 없는 이런 것도 이의를 제기해버리더군. 안전문제니, 아직은 이르니 어쩌니...”
그녀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빤하게 보이는, 반대를 위한 반대가 여기서는 당연한 정치적 기술인가 보다. ...통할 상대가 아닐 텐데?”
“하하...”
하기야 기존 정치 인사들은 파벌 싸움에 아주 익숙하다. 정책을 부딪치기보다 서로에 대한 비난에 더 특화되었다 보아도 무방할 지경. 하지만 상대는 애당초 전혀 대등하지 않은 강력한 상대다.
황제의 명분은 충분하고 실행할 의지와 힘도 있다. 그저 그동안 ‘국민의 뜻을 수렴한다’ 라는 관념적인 말로만 국정을 논하며, 실제로는 잇속 차리기 바빴던 인사들에게는 천적과 같을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그런 자는 차츰 도태될 거야.”
“기대되는 일이군요, 그건.” 하고 대답할 즈음,
“어이.”
발을 걷으며 부르는 소리에 이영은 고개를 들었다. 한눈에도 장신, 그리고 익숙한 얼굴이다.
“형님...!”
그들은 스스럼없이 악수하고 포옹했다. 이영의 등을 두들기던 장헌창이 포옹을 풀며 그를 흔들었다.
“안 뒈졌네. 이 자식이...!”
말은 거칠지만 무척 반가움이 묻어난다.
이영도 반가웠다. 장헌창은 그에게 있어 은인이다.
그가 가디언즈에 처음 발을 들인 것은 6년 전, 중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였다. 과거의 일이 꿈으로 반복되다 어느덧 현실이 되었음을 깨달은 이후, 우울한 인생이었던 그는 20대 후반의 장을 만났다.
집에까지 찾아온 그는, 처음에는 ‘네게는 남과는 다른 힘이 있다.’ 라는, 이른바 도를 아십니까 분위기를 풍겼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약간의 힘과 자신의 기억이 맞물려 찾아간 이영을, 그는 받아들여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실력으로도 모리에 비견할 만한 인재다. 이영의 가디언즈 시절 스승이자 롤모델이래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어찌, 아직 계시네요.”
“도망가 봤자... 그건 됐고...”
이영의 맞은편에 앉은 그는 유키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남자의 호기심이 발동했나보다.
“너, 오키나와에서 죽은 줄 알았더니, 외계인들이랑 같이 있더라...? TV보고 깜짝 놀랐다야.”
“...그렇게 됐습니다.”
“무슨 사정인지는 몰라도... 혹시 이 아가씨...”
이영은 잠시 뭐라고 해야 할지 망설였다.
“간짜장 둘 나왔습니다.”
“어, 그래.”
발을 올리며 들어온 종업원이 내려놓은 음식 그릇에 잠시 대화가 끊겼지만,
“이 아가씨, 아샤르 인이여?”
“...네.”
“재주 좋네. 거기 몇 달 있더니... 벌써 애인이냐?”
...미치겠다. 이 여자의 위험성을 알려주고 싶다.
하지만 여왕의 기분을 긁게 되겠지.
“처음 뵙겠습니다. 이름이 뭡니까?”
난생 처음 보는 간짜장 그릇에 신기한 시선을 주던 유키나가 빙긋 웃었다.
“세라비 유키나 세이야.”
“아, 그래요. 반갑습...?!”
기겁한 장헌창이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유키나가 재빨리 말했다.
“네 목숨은 물론, 손님 가득한 가게를 부수고 싶지 않거든 부디 조용하도록...”
다시 주저앉은 장은 심하게 굳어 있었다. 이영이 온 것에 두렵고도 반가움이 앞서 나왔지만, 녀석이 데리고 온 것은 아샤르의 황족이자 여왕이다.
이것은 가디언즈에게는 엄청난 공포였다.
“...너, 진짜 배신한 거냐?”
의혹의 시선에 이영도 난감했다. 그동안 장에게 받은 것을 생각하면, 역시 함부로 대답하기 힘들었다.
“하나 묻자. 가디언즈.”
벙어리가 된 이영 대신 유키나가 낮게 말했다.
“왜 진작 도망가지 않은 거냐...?”
장은 마른 침을 삼켰다.
“...말할 이유가 있을까...?”
여왕은 매몰차게 웃었다.
“나는 현왕이다. 너, 그 말투를 신중하게 고려하고 선택해라. ...다시 묻자. 도망가지 않은 이유는?”
“...제가...”
그는 기세가 훨씬 꺾였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여기에 있고... 또...”
“...또?”
“설마 영이가... 그래도 어제까지의 동료를 팔거나 제 등을 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리 카츠. 그대는 이 자에게 신뢰받는구나.”
유키나는 이영을 바라보았다. 그는 굳은 표정이었다.
“...저도 형님을 신뢰했고... 때문에 배반했다고 말하기는 싫습니다. 사실이 그러해도... 말이죠.”
“흠...”
“하지만... 제가 괜히 배반한 것이 아니란 것을 형님이 믿어주실 것을 기대하고 있고, 또한 전하께도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뭐지?”
“개인감정은 접으시고... 폐하께서 원하시는 바를 잘 이행해주실 거라 믿기에, 제 형님에게 해는 끼치지 않으실 것을 감히 기대합니다.”
“그대...”
유키나는 조금 웃었다.
“조금은 컸구나. 아직 바보인 것은 변함없지만...”
바보라도 좋다. 장이 다치는 꼴은 보기 싫었다.
장헌창이 침을 삼키며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높으신 분이...”
“개인 볼일은 물론 아니다. 여기 있는 리는... 비록 사정이 있어 몸은 여기에 의탁했지만, 그래도 동료를 팔지는 않겠다는 것을 거듭 천명한 바다. ...때문에 우리는 리에게 가디언즈와의 접점을 요청했고, 그가 찾아낸 것이 바로 너지.”
“...저요? 절 찾으신 이유가 뭡니까?”
“리가 말한 것이 거의 없기에, 우리는 너희들에 대해 잘 모른다. 하지만 지부장이 낮은 지위는 아닐 터. 그 생각은 틀린 것이 아니겠지?”
“영이에게는 뭘 캐낼 수 없으니, 제게 캐낼 생각이라면 잘못 짚은 겁니다...”
“틀려. 리가 신뢰하고 따르는 인물이라면, 너도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건 기대하지 않아.”
이영은 잠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방금... 뭔가 낮게 평가받지는 않은 것 같은데...
“내가 여기 온 것은, 그대를 잡아서 뭔가를 캐내려는 것이 아니다. 지부장쯤 되면 상부와 기본적인 연락선은 깔아놓고 있겠지. 그런 너를 통해서 우리 황제 폐하의 뜻을 전하기 위해 왔다.”
“황제의... 뜻? 그게 무엇입니까?”
“가디언즈 전원을 사면한다.”
입을 다물지 못한 장. 여왕은 여전히 담담히,
“대신,.. 서로가 원하는 바를 확인하고 절충하는, 그런 만남의 장을 가진다는 전제 하에서의 일이야. 가능하면 총수, 아니면 전권을 대리할 수 있는 인물을 출두시켜라. 안전은 황제의 이름으로 보장하고, 설령 결렬되어도 그 뒤는 밟지 않을 것도 보장한다. 다시 말하자면, 그 동안 때리고 맞은 관계를 청산할 생각이 있다면, 이 기회에 대화의 장으로 나오라는 거다.”
“...진심입니까?”
“그래. 시한은 한 달, 접선 방식은 원하는 대로 해 주마. 다만... 그 동안에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아야 할 거다. 이후 이 가게는 물론 너에 대해서도, 황실과 정부의 명예를 걸고 감시 혹은 추적하지는 않을 거다.”
유키나는 오른손에 낀 반지를 뽑았다.
“증표 삼아 들고 가라. 나는 같은 것을 하나 더 갖고 있으니, 대답이 올 때까지는 항상 끼고 있을 것이다. 의심하거든 내 반지임을 입증하면 될 것이다.”
“...하나 물어도 될까요?”
“뭐냐.”
“이것이 진심이라는... 증거가 있습니까? 예를 들어... 총수님을 끌어내어 죽이려고 한다던가...”
“이 자리에서 너를 죽이거나 끌고 가지 않음을 그 증거로 삼으면...?”
“저 하나 죽이거나 하는 것은 일도 아닐 겁니다. 증거로는 빈약합니다.”
“리...”
유키나는 쓰게 웃었다.
“네게 한 짓을 이 자에게도 해줘야 하니?”
“안 됩니다...!”
이영은 기겁했다. 장은 나이에 맞지 않게 순진하다.
그리고 그 전에, 조금은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란 말이다, 이 망할, 하지만 조금은 처량하고 가련할 정도로 막나가는 여자야.
그는 내심 거듭 투덜댔다.
어쩐지 즐거운 그녀가 문득 정색하며,
“증거는 없다. 아니면... 나와 같이 온 리에 대한 신뢰로, 그 증거를 삼으면 안 될까?”
의외로 장헌창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그럼 믿겠습니다.”
이영은 무척 감격했다. 이 지경이 되어서도...
“형님...”
“좋아. 그럼 나가봐라.”
반지를 받아든 장이 나가자, 유키나는 앞에 놓인 그릇 두 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볼 일은 봤고, 먹자. 맛이나 보게...”
하지만 이영은 가볍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따로 나온 짜장에 면발을 조금 집어넣는다.
“저기, 그렇게 드시는 것이 아니고...”
“다른가?”
“...비벼드릴게요.”
어머니의 짜장면도 비벼드린 적은 없건만...
한 입 맛을 본 그녀는, 조금 미간을 좁히면서도 젓가락을 놓진 않았다.
“조금 짜다. 하지만 나쁘진 않군.”
“아샤르 음식은 꽤나 싱겁죠.”
입가에 너무 묻는다고 약간 불평은 했지만, 다행히 그녀는 괜찮게 먹은 듯 했다.
어색한 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칸막이를 나섰다.
화폐개혁전이니 아직 이영의 카드는 유효하다. 계산을 마치고 향한 입구에는, 불안함을 억지로 감추고 있음이 분명한 장이 서 있었다.
움츠린 그 옆을 지나가려다 잠시 멈춘 유키나가 약간 웃으며 말했다.
“잘 부탁한다. 그리고... 잘 먹었다. 맛있었어.”
그녀는 성큼 걸어 나갔다.
잠시 멍했던 장헌창은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영아... 다시 보자... 반드시.”
“네... 형님. 부디 건강하시고요.”
뻗어진 손이 살짝 맞잡아지고,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교차된 가운데 이영도 그녀의 뒤를 따라 조금 늦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따라잡았지만 굳이 돌아보지 않은 그녀. 대신 건성이지만 그를 치하했다.
“고생했다.”
“별로... 하지만, 솔직히 조금 놀랐습니다.”
“놀라다니? 뭐가?”
“어느 정도는... 협박 같은 강수는 두실 줄 알았거든요. ...죽기 싫으면 나오라든가...”
“장도 쓸데없는 협박은 통하지 않을 인물은 되었고, 그건 상호 신뢰에도 도움이 되지 않아. 다만... 나도 조금 놀랐다.”
“놀라요? 어떤 의미에서요?”
어느 새 어깨가 나란히 붙었다.
“그가 증거를 요구할 때, 뭘 제시하나 조금은 난감했거든. 그런데 혹시나 싶어 너를 내세우니 통했다는 거야. ...너, 그 자에게는 매우 신뢰받고 있었구나.”
“저도 기쁘고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린... 정말로 형제 같았죠.”
“용서해라.”
그녀는 낮게 웃었다.
“그동안 ...내가 너를 너무 낮게 평가했었나 보다.”
이영은 흠칫했다. 이 콧대 높은 여자가 무슨...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목숨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누군가를 믿고 의지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는 네 얼굴을 봐서, 자칫 조직에게 같이 의심받을 수 있는... 그런 위험한 역할을 기꺼이 맡지 않았더냐.”
“...음.”
“그러니, 너희 두 사람의 유대와 신뢰가 그리 얕은 깊이가 아님을 알 수 있고... 딱히 서로가 이득관계가 아닌 것 같음에도 타인에게 그만한 신뢰를 얻는 자는, 그만한 인격과 가치가 있다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번에는 과대평가가 아닌가 싶었지만, 그래도 이것은 많지 않았던 칭찬 중에서는 가장 기분이 좋았다.
장에게 신뢰받음에 기뻤고, 또한 의외로 이 여자가 딱딱하지만은 않음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니 전하가 좀 달리 보이네요.”
“어떤 의미냐.”
비로소 바라보는 눈동자가 굉장히 맑았다.
“폐하와 전하와의 관계도, 오누이 이상의 뭔가가 있어 보이긴 했습니다. 성향도 좀 다르고 기질 차이도 있어 보였는데... 묘하게 죽이 맞는, 깊은 신뢰 같은 것...”
“...그래.”
“그 황제 폐하께, 전하가 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신뢰받는 것은 아니겠죠. ...저도 아무래도 그동안 전하를 과소평가 했는가 봅니다.”
“네게 그런 말을 들으니... 나쁘지는 않다만...”
그녀는 피식 웃었다.
“아부처럼 들리는 것은 왜일까?”
하지만 답을 구하지는 않은, 대신 차츰 빨라지는 여왕의 걸음을 따라 붙으면서 이영이 말했다.
“그리고, 저기... 말씀드려도 되는지...”
“그 말투 좀 어떻게 할 수 없나?”
유키나의 미간이 조금 좁혀졌지만, 예전처럼 그리 날카로운 힐난은 아니었다.
“나는 미지근한 사람은 딱 질색이라고...”
“그럼 말씀드립니다. 그쪽 방향이 아닙니다.”
“아...”
그녀가 서울 시내 길을 알리는 당연히 없지만, 복잡한 성간을 넘나드는 우주함대의 지휘자가 고작 지상에서 길을 잃은 셈이다.
아마 이영의 기억 최초로 여왕은 겸연쩍게 웃었다.
“진즉에 말을 하던가...”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고...?”
아무래도 자기를 쪽팔리게 했다고 생각한 걸까. 순간 눈빛이 매섭다. 이영은 재빨리 손을 저었다.
“그런 것 아닙니다.”
“조금은 앞장서라. 날 헤매게 하지 말고.”
그 말대로 이영은 한 발 앞서 걸었다.
그나저나 그녀도 사람이다. 지상에 내려오자마자 방향감각을 잃다니. 별 것 아닌 약점이지만, 처음으로 발견한 빈틈에 묘하게 안심이 된다.
“뭘 그리 웃고 있나?”
웃는 어깨가 보였는지 그녀가 물었다.
“아닙니다.”
그는 열심히 얼버무렸지만 상대가 너무 강했다.
“왕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다니, 무엄하군.”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사실대로 말한다면 역시 기분이 나쁘겠지. 하지만 이미 위험한 그녀의 미소가 돌아왔다.
“솔직하게 대답하기 싫다? 그럼 벌칙이다.”
“...무슨 벌칙이죠?”
“내일 훈련 강도가 2배가 되는 노동과, 지금 당장 네가 공물로 바칠 수 있는 현물 중 어느 것이 좋아?”
“...현물요.”
결국 이영은 동대문의 모 쇼핑몰에 끌려갔고, 그녀가 ‘손이 비었다’ 라며 지목한 반지를 뜯기며 내심 외쳤다.
역시... 난 너의 따까리...!
무슨 여왕님이 소위 삥을 뜯는가 싶었지만, 생각해보면 이 정도로 용서받는다니 이제 원한은 없다 싶다.
또 그녀 나름대로는 관대한 용서일 거다. 화내자니 체면 문제,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자니 자칫 내가 또 기어오를까봐 그런 것이겠지.
그러나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방금 뜯어낸 싸구려 반지를 낀 손을 무슨 생각인지 몇 번 바라보는 그녀.
때문에 감히 그래서는 안 되지만, 약간이나마 우위에 선 듯 뿌듯함과 더불어, 그 때 황제가 말한 것도 다시 떠올렸다.
...오늘의 그녀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수고하셨어요.
- 작가의말
소소한 일상이 오히려 쓰기 어렵습니다. 큭.
작가의 말도 가끔씩은 쓰기 어렵습니다. 큭.
무엇보다 자료 찾을 시간도 넉넉하지 못합니다. 크윽...
그래도 가끔씩은 서비스 연참은 할게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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