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장. 인연을 맺는 여로(旅路). (1)
한 권이 끝날 때, 가슴에 남는 글이 되길 바랍니다.
Ⅰ
‘이런 미친...’
칼스는 내심 몹시 투덜거렸다.
기껏 구해줬더니 죽으려 간단다.
“...너, 뭔가 할 줄 알거나 다룰 줄 아는 게 있어?”
차가운 말투에 다소 주눅 든 답이 돌아왔다.
“그냥... 농사 정도만... 괭이질이나 그런 것.”
“싸움과 농사가 같다고 생각해?”
“다들 그 정도밖에 몰라. 그런데도 전쟁에 나가.”
그건 그렇다. 칼스는 조금 납득했다.
이곳 사람들은 어린아이라도 힘든 농사일에 당연하게 내몰린다. 투박하지만 또 순박한 인상의 췐은, 제법 덩치는 있고 소매 사이로 드러난 손과 발은 거칠다.
그러니 무기 잡을 힘은 있겠지만...
“너, 몇 살이야?”
“열여덟.”
물론 이곳에서는 장정이다. 하지만 징집을 피하려는 이도 널리고 널린 판에, 아직은 어린 티가 팍팍 나는 주제에 제 발로 찾아가겠다...?
“너희들은 전쟁을 피해온 거잖아. 굳이 전장에 나가려는 이유가 뭐야? 혹시 멋진 장군이나, 아니면 군중의 창녀에게 마음이라도 쏠린 거야?”
“그런 거 아냐... 그저...”
모닥불에 삭정이를 더 집어넣은 췐이 탄식했다.
“출세... 하고 싶어서.”
“뭐야, 결국은 애송이의 영웅 놀이였나.”
“그런 거 아냐.”
췐은 배를 쓰다듬었다.
“프람은 그 무예가 있으니까, 남에게 괴롭힘 같은 건 당하지 않을 거잖아.”
“어느 정도는...”
황제와 부모를 제외하고는 자신에게 말을 낮춘 이조차도 없었다. 그는 항상 어디서나 존중받았다.
물론 흔히들 생각하듯 마냥 곱게만 자라지도 않았다. 이 점은 사춘기를 갓 벗어난, 또한 격렬한 사춘기를 겪지도 않은 그에게는 자부심이다.
“왜, 어딘가에 널 괴롭히는 녀석이 있어서, 그게 더러워서 출세하겠다... 그런 거야?”
“이상하네, 프람은... 여기 사람이 아니야?”
칼스는 조금 뜨끔했다.
“어떻게 알았지?”
“당연한 것을 묻고 있으니까.”
의문이 가시지 않은 칼스는 다음 말을 기다렸다. 췐은 웅크린 샹을 곁눈질했다.
“우린 한나라 출신이야. 그런데 고향땅은 전쟁으로 빼앗겼고, 그래서 조나라로 흘러 들어왔어. ...우리가 가진 것이 뭐가 있을까?”
“...없겠지.”
“그러면 답은 나와 있어. 전쟁이 끝나도 고향이 진나라 땅으로 남으면 우리는 돌아가지 못하고, 조나라 땅이 되어도 승리한 사람들에게 보상으로 내려져. 우리가 갈 곳은 어디에도 없어.”
췐은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가진 것도, 호적도 없는 우리가 그래도 살려면 노비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잖아. 그러면 평범한 농사꾼으로도 평생 돌아가지 못해. 그리고... 나는 몰라도 샹은 잘못하면 주인이 손을 대거나, 실컷 부려먹고 나이가 들면 어딘가로 팔려갈지도 모른다고... 이건 모두가 아는 건데, 프람은 모르고 있으니 그렇게 생각한 거야.”
조세와 노역을 부과하기 위해 나라는 백성에게 호적을 부여한다. 딱히 성심껏 보호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사유재산을 가질 수 있고 그나마 고용도 용이하다.
하지만 호적이 없는 자는 부민(浮民)이다. 난세에는 흔하지만 그 삶은 비참하다.
이들의 기반은 어디까지나 땅이다. 그것이 없다면 본인의 노동력을 파는 수밖에 없다. 이런 아이들이라면 선택은 더욱 한정되어 최악의 경우 노비가 된다.
“작년과 재작년, 상당으로 피신한 우리는 품을 팔며 살았어. 하지만 거기도 이제 전쟁터이고... 아마 그 친척 어른이라면 1년이나 2년 정도는 샹을 맡아줄 거야. 아버지와 무척 친하고 없는 도움이라도 받았다고 하니까. 그러니 거기에 샹을 데려다놓고 나는 무언가를 이루어야지. 백장(百長) 정도를 할 수 있으면, 앞으로 살 길이 조금은 열릴 것이고... 그런 거야.”
“그러니까 그 살 길 찾겠다고 죽을지도 모르는, 아니 죽을 것이 확실한 전장에 굳이 뛰어들겠다...?”
어이없이 웃으면서도 칼스는 내심 동정심을 느꼈다.
대충 상황은 이해했고, 또한 듣던 것보다도 이들의 삶은 훨씬 고달팠다.
췐이 다소 힘 빠진 목소리로,
“...나간다고 다 죽는 것도 아니잖아...?”
“넌 죽는다. 힘이나 실력이 딸려서가 아니라, 이야기를 해 보니 알겠는데, 너... 사람을 죽여본 적이 있어?”
“...없어.”
“나도 처음이었다.”
췐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째서? 죽은 도둑들은 상처가 하나씩밖에 없었어. 그 말은 두 번 베지 않았다는 거잖아. ...굉장히 익숙한 솜씨라고 생각했고...”
“사실이야. 그리고 나도 느낀 바가 없진 않지...”
처음으로 사람을 베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마음이 무겁다는 사실은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가 악당이지만, 그래도 사람인 것은 변함없다.
찌른 상대가 축 늘어질 때 그 무게는 검 끝에 그대로 느껴지고,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신음은 귀청을 불편하게 한다.
무엇보다 마음이 꾸준하게 묻는다.
...과연 너는 이들을 죽여야 했나.
“나 정도의 무예를 가져도 살인은 쉬운 것이 아니야. 그런데 농사꾼에다가, 아마도 너는 살아남기 좋은 거친 성격도 아니야. 짐꾼으로 뒤에서나 논다면 모를까, 보통은 첫 싸움에서 죽거나 운이 좋아도 병신이다.”
“그렇겠지만... 그래도 친척 어른에게 우리 둘을 모두 돌봐달라는 건 무리야. 샹은 집안일도 도울 수 있고...”
“그 친척이라는 사람을 본 적 있나?”
“어릴 때 딱 한 번. ...사실은 잘 몰라. 최근에 소문을 들어서 이제야 찾아가는 길이야.”
“...뭘 믿고 찾아가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할 수 없잖아. 샹은 전쟁터에 갈 수 없으니.”
“하나 있겠지. 이건 여기서 다니다가 들은 바지만...”
인간의 욕망은 무서워서, 살벌한 전장에도 유녀(遊女)는 있다. 공성전이라면 성 안에 머무르지만, 야전이라 해도 이동하는 군대 뒤를 따라다니며 군이 얻은 전리품을 노리는 집단도 있다고 들었다. 물론 주 고객은 지휘관들이지만 그래도 몸을 파는 직업인 것은 변함없다.
이 아이 정도라면 이 종족에서는 꽤 상위권일 것이다. 허름한 옷차림에 손발이 거칠지만, 이 정도면 어느 유곽에 가도 그 처녀는 높은 값을 받을 것이다.
물론 그건 이미 인생의 바닥이다. 췐 역시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는 할 수 없잖아.”
“네가 죽고 홀로 버려지는 것보다는 나을 수도 있어.”
“안 돼. ...우리 엄마는 옛날에 돌아가셨어. 아버지와 내가, 부족하나마 열심히 샹을 돌봐왔어. 그런데... 비녀도 모자라서 잘못하면 몸을 망칠... 그런 신세를 만들 수는 없잖아.”
칼스는 문득, 지금 구중궁궐에서 자라고 있을 한 소녀를 떠올렸다.
세라비 세리사 엔야. 황제의 유일한 핏줄이며 황녀라는 지고의 신분이다. 하지만 그녀도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었다.
지금의 황제는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고 인품도 훌륭했다. 칼스도 자주 만났고 도움이 되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어떨 때는 진짜 아버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황제의 따뜻함은 친딸에게만은 예외였다. 황녀의 성장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고 꽤나 냉대했다. 덕분에 사람들의 입방아에 조금씩 오르고 있다.
세리사의 옆에는 쿄우카라는, 죽은 황후가 사가(私家)에서 직접 데리고 온 시녀가 보모시녀 및 시녀장으로 붙어 있다. 하지만 그녀를 제외한 대부분의 시녀들은, 고작 아홉 살 난 황녀에게 시쳇말로 학을 떼고 있었다.
난폭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매사 뚱하고 뭇 사람과도 전혀 어울리려 하지 않는다. 아직 어려도 외모만이라면 근 백년간 황족 중에서도 특출하다고 말하지만, 또 외모와는 반대로 굉장히 음침하다고 한다.
친구라도 많으면 또 모르지만, 한 살 아래인 우현왕녀 유키나가 있을 뿐. 그것이 그녀의 세계의 전부다.
하지만 칼스는, 그래도 자신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부왕과 황제는 호형호제하며 실제로 같은 세대의 황족들은 다들 그렇게 한다.
유키나만 하더라도, 혈연관계는 없다시피 하지만 그를 꼬박꼬박 오라비로 대우한다. 언젠가는 세리사도 그렇게 될 테니, 때로는 오라비의 권위로 누르고 때로는 손윗사람으로 달래면, 조금 못돼먹은 아이라 해도 자신이 하기에 따라 좋은 황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소문만 믿을 것은 못된다. 마냥 까칠하기만 한 아이라면, 저 유키나가 붙어 있을 이유가 없다.
유키나의 이야기로도 그 아이는 상처 많고 가련한 그런 아이다. 어머니는 없고 아버지는 방치하며 주변엔 아랫사람인 시녀뿐. 사랑으로 보듬어줄 사람도, 따끔하게 야단쳐줄 사람도 없다.
그런 아이에게 모든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을 타고난 자신이 함부로 비난할 처지가 아니다.
칼스는 다시 샹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제법 예쁜 얼굴에는 이미 고생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어미를 잃은 소녀는, 감히 어리광을 부릴 틈도 떼를 쓸 여건도 없었을 것이다.
췐이 죽는다면 그녀는 홀로 남겨진다. 앞으로의 인생도 절대 순탄치 않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세상의 풍파에 돌고 돌다 객사할 수도 있다.
“하아...”
칼스는 떫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 목숨이니 말리지 않겠다만, 너무 바보 같군.”
“...프람은 이상하네. 보통은 그러려니 한다고.”
“기껏 구해줬던 녀석이 하필 바보라서 그런다. 바보는 죽어야 고칠 터인데, 바보를 고치도록 그냥 내버려 둘걸 그랬지.”
칼스는 자신도 모르게 그를 설득하고 있었다. 하지만,
“프람이 그렇게 말해도 이미 결심했어.”
췐은 오른손으로 주먹을 꾹 쥐어 보인다.
“적병에게 죽은 우리 아버지도... 언젠가 말한 적이 있어. 농사를 지어봤자 반은 조세로 빼앗기고, 지주에게 주고 나면 남은 것이 없어. 그러니 그냥 어떻게든 병사로나마 출세했더라면, 그런 다음에 우리를 낳았더라면 이런 고생은 하지 않을 텐데... 라고.”
그는 거듭 샹을 눈짓했다.
“나는 샹이 빤한 인생을 살기를 원하지 않아. 나 역시 그저 농사꾼으로 하루를 연명하면서 끊임없이 당하고 억울해하는, 그런 인생은 살고 싶지 않아. 싸움 방법은 배워나가면 돼. 죽지 않고자 하면 어떤 수는 있겠지.”
“다시 말하지만 어리석은 생각이다. 제대로 무술이나 배우고 나가면 모를까...”
“그럼...”
췐 소년이 문득 눈을 빛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프람은 강하잖아. ...당장 써먹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좀 알려주지 않을래?”
“...뭐?”
“은혜는 잊지 않을게. ...살아남는다면 말이지만...”
칼스는 어이가 없었다. 목숨을 구해준 것도 모자라서 스승 노릇까지 하란 말인가. 무슨 염치야.
물론 자신이 조금이나마 가르쳐준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우주함대라는 거대한 전력을 가진 아샤르에도 개인 검술은 있고, 황실에서 전승되는 검술은 아주 강력하다.
황족은 검술로 일대일의 싸움을 할 경우는 거의 없다. 그들의 문화에서 싸움에서 무기를 든다는 것은 상대를 죽이겠다는 의사 표시이다. 하지만 황족끼리 그렇게 살벌하게 싸울 일 자체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그에 비하면, 일 대 다수의 상황은 그나마 벌어질 수 있다. 검술도 그에 특화되어 있기에, 어찌 보면 이 곳의 전쟁에 맞는 가장 훌륭한 무술일 수도 있다. 단 몇 수만 제대로 가르쳐도 꽤 유효하게 쓰일 것이다.
하지만 칼스도 검술을 마스터했다고 자평할 수 없는 처지였고, 또 누군가를 가르쳐본 적도 없다.
...무엇보다, 대체 왜 이 녀석을 가르쳐야 하나?
“거절한다. 하루 이틀 배워서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네게 맞지 않아.”
기술적인 면도 있지만 힘의 크기는 중요하다. 일족 최강의 생쥐라도 일족 최약의 코끼리에게 밟혀 죽는다.
그들의 검술 역시 그 힘에 맞추어 짜여있다. 덕분에 일반인들은 흉내도 낼 수 없는 기술도 많다.
“그리고... 구해줘 먹여줘 지켜줘. 그것도 모자라 사부 노릇이라... 이래서는 오히려 내가 빚을 진 것 같잖아?”
“염치없는 부탁인 것은 알지만...”
물론 췐도 간절할 것이다. 다른 것도 아닌 목숨에 관련된 일이며 자기 혼자만의 목숨도 아니다. 조금이라도 확률을 높여두고 싶은 것은 당연한 욕망이겠지.
하지만 칼스는 거듭 도리질했다.
“...어설프게 배운 놈이 가장 빨리 죽어. 하나를 지긋이 파고들지는 못할망정, 조금 배워서 전장에서 써먹겠다는 그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
“안 되는 거야...?”
“당연하지...!”
그리 외치긴 했지만 역시 찝찝했다. 조금 가르쳐줘도 손해는 아니고.
하지만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물어보자. 하필 내게 힘을 원하는 이유가 뭐냐?”
“무슨 뜻이야?”
“너는 지금은 그저 먹고 살 수 있는 기반을 만들겠다고 말하지만, 사람의 욕심이란 건 끝이 없거든. 즉...!”
칼스는 검지를 뻗었다.
“어찌어찌 하다보면 자꾸 위를 노리게 되고, 결국은 너 때문에 죽어날 인간도 생긴다는 거다. 전장에 나가서 공을 세운다. 그것은 타인을 죽이고 올라선다는 것과 같은 거야. 너는 네가 살고자 타인을 죽이겠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거야.”
“하지만 다른 나라 사람이잖아. 적병이라고...”
“적이라도 과연 너와 다를까? 그저 농사만 짓고 싶은 사람인데 억지로 끌려나온 사람일 확률이 높잖아? 그런 이를 밟아가면서도 아무 생각도 없는, 제대로 되지 않은 인간이 출세를 하면 여러 사람 피곤해져.”
칼스는 2년 후에 성인이 되고 왕세자로 책봉될 것이다. 장차 현왕이 되면 그 위에 있는 사람은 황제뿐이다. 하지만 소양이 부족한 자를 남의 위에 올릴 정도로 아샤르의 시스템은 만만치 않다.
황실의 교육도 그에 따라 무척 엄격하다. 남의 위에 서는 자가 갖추어야 할 소양은 넓고 깊다. 말이 많지 않은 부왕조차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무척 심도 있게 아들을 가르쳤다. 그는 나이에 비해 무척 많이 생각하고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췐은 그냥 농민이다. 전쟁이 아니었으면, 씨는 언제 뿌리고 수확은 언제 거두며 올해는 비가 잘 내릴지, 그런 정도밖에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칼스의 예상대로 췐은 즉답을 하지 못했다.
“...그것까진 생각해보지 않았어. 다만... ”
차츰 목소리가 낮아졌다.
“남을 짓밟고 올라서겠다거나, 나중에 높아져도 못되게 굴 거라는 생각은... 지금은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그럴 위인도 못 되고...”
“출세라는 것은 그런 위인이 된다는 거다. 네가 싫어도 그렇게 된다는 거야.”
그게 사실이라고 칼스는 생각했다.
이곳의 위정자들 역시 자신처럼 혈통만으로 그 자리를 차지한다. 하지만 지금껏 자신이 해온 노력이나 받은 교육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쉽게 이어받아 남의 머리를 짓밟는다.
조금이라도 백성을 생각한다면, 적어도 남의 땅을 빼앗기 전에 자기 백성이 잘 사는 고민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런 인간을 찾아보기 힘들다.
“내가 이런 질문을 한 것은... 검술 정도라면 내가 가르쳐줄 수는 있어. 그러나 그 힘을 바탕으로 타인을 치고 빼앗고 그저 개인의 영달만을 꾀할 생각이라면...”
칼스는 자신의 칼집을 툭툭 쳤다.
“차라리 널 이 자리에서 베어버리는 쪽이, 다른 이들의 미래를 위한 길이겠지.”
“프람...?”
갑자기 몸을 움츠리는 췐은 물론이고, 그저 가끔씩 칼스와 췐을 번갈아 바라보며 대화에는 일절 끼어들지 않던 샹도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듣지 않았다면 모를까, 들은 이상 더 말해야 할 거다. 너는 군에 가겠다고 말했다. 그건 내가 간섭할 수 없지. 하지만 내 솜씨를 본 너는, 내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힘을 가르쳐주길 원했어. 왜 그랬을까?”
칼스는 거듭 차게 웃었다.
“그건 네가 단순히 죽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짓밟고 올라설 수 있는 힘을 원한 것을 아닐까. 그래서 그 힘을 보자마자 탐을 낸 것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의심하고 있어. ...그러니, 오늘 밤이 지날 ·때까지 내게 내놓을 대답을 생각해 봐. 단지 출세나 개인적인 욕망 때문에 그랬다면, 내게 배우지 않아도 너는 다른 놈에게라도 달려갈 거다. 그건 두고 볼 수 없지.”
그는 칼을 반쯤 빼내었다.
“만약 제대로 된 답변을 내놓지 못한다면... 아무리 한 번 구해준 목숨이지만, 장차 네 출세에 희생될 사람을 위해서 베어버릴 테다. 네 동생은 어디 유곽에나 던져버리고... 그게 싫다면 같이 베어주지.”
췐 소년이 몇 번이고 뒤척이는 소리를 들으면서 칼스는 내심 키득거렸다.
물론 진짜로 벨 생각은 아니다. 하지만 녀석은 엄청 두려워하며 고민하고 있겠지.
살기 위해서라면 또 모르지. 잠자는 내게 달려들어 목이라도 졸라댈지.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기대된다. 즉시 때려눕히고 한바탕 욕을 퍼부어, 전장에 나가는 것 자체를 포기시킬 셈이다.
...저 녀석은 표정부터가 싸움에 어울리지 않는다.
물론 동기는 이해할 수 있다. 녀석은 척 보아도 연약한 동생을 매우 아낀다. 장차 분명히 닥쳐올 불행을 배제하고 평범한 인생 이상을 보내게 해주고 싶겠지.
그러나 그 과정은 너무나 험난할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8년 전. 겨우 다섯 살에 불과한 자신에게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병상의 황후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홀로 남게 된 갓난아기를 부탁했었다. 그리고 자신은 승낙했다.
어린 날의 치기라고 보기에도 지나치게 어릴 때였다. 그럼에도 덥석 받아들인 이유를 지금에 와서야 생각해보면, 그 아름다웠던 황후는 자신에게 있어 우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우는 것이 싫다는 생각에, 깊은 고민 없이 받아들인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었다.
그러니 나는, 오직 그녀의 딸을 위해서 살다가 죽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힘을 키우고 많이 알아갈 것이다.
어렵고 힘든 길이 될 수도 있지만, 내가 수많은 생명 중에서 왕가의 아이로 태어나고 스스로도 모자라지 않다 생각하는 이 재능을 타고난 것은 어쩌면 이를 위한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 각오는 지금도 깊다.
자신만한 힘을 갖춘 이도 각오가 그러한데, 아무 힘도 없는 저 멍청이는 털레털레 전장에 나갈 생각이라니.
어차피 하룻밤 정도로는 제대로 된 답이 나올 리도 없다. 겁이나 적당히 줘서 쫓아 보내자.
이슬이 짙은 이른 아침부터 칼스는 칼을 뽑아들었다. 서로에게 다행스럽게도 그는 목을 조르러 오진 않았다.
“자, 대답을 들어볼까.”
불안한 눈빛, 하지만 그 일각에는 약간의 단호함이 엿보인 췐이 더듬더듬 말했다.
“나는 말을 잘 하지 못해... 그래서 잘 전달하진 못하겠지만...”
“말을 못하는 것은 모르겠지만, 일단 서두가 길다.”
“...그럼, 솔직히 프람의 솜씨가 탐난 것은 사실이야. 이건 변명할 수 없겠지. 하지만 그냥 출세가 하고 싶어서 그랬던 건 아니라고 생각해.”
“그게 끝이냐?”
췐은 고개를 세차게 흔든다.
“밤새 생각했어. 그리고 생각하건데, 이건 항상 생각했던 거였어. 나는 너무나 무력해. 이것으로는 나 자신도... 그리고 샹도 지키지 못해.”
그의 손이 꾸욱 쥐어진다.
“나는 내 힘이 닿는 이를 지키고 싶었어. 내가 힘이 있었다면... 적에게 고향을 잃을 때 우리 아버지도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몰라... 도적에게서 샹이나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도 있었을 거야. ...프람은 누군가를 잃어본 적이 있을까? 무언가를 잃는다면 내 이 마음을 알까?”
어떻게 겁을 줄까만 생각하던 칼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반대로 조금 뜨끔했다.
그 말대로 무엇인가를 잃어본 적은 없다. 그는 항상 가지는 쪽이었다.
“무언가를 지키고 싶은데 그러지 못한다면, 그건 죽는 것보다 못하다고 생각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어. 그래서... 마침 프람 같이 강한 사람이 있으니 달라붙어서라도 힘을 갖고 싶었어. 그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는 몰라도...”
“...마음에 들지 않지. 말했지만 생각 없는 녀석이 힘을 갖추면 다른 이가 불행하니까.”
“역시 그렇구나... 마음에 들지 않는 구나...”
췐은 간절함을 눈빛에 담는다.
“그럼 어차피 어제 죽었던 목숨, 프람이 살려줬으니 내 목숨은 네 거야. 나는 죽여. 하지만... 샹은 죄가 없으니까 부디 살려줘.”
“흠...”
칼스는 검을 한번 휘둘렀다.
“아니, 그냥 둘 다 죽일래.”
“...어째서?”
당혹한 목소리에도 칼스는 잔혹히 웃었다.
“네가 죽고 나면 저 계집애도 빤한 운명. 깔끔하게 함께 죽여주는 것도 자비 아닐까?”
그는 성큼 한 발을 내밀었다.
“안심해라. 계집애 먼저 죽이고 널 죽여줄게. 너 먼저 죽으면, 남은 계집애가 내 노리개가 될지 알게 뭐람. 먼저 계집애가 죽는 쪽이 고통이 덜할 터이니... ”
“안 돼!”
기겁해서 달려드는 그를 손으로 후려쳐서 쓰러뜨리고, 와들와들 떠는 소녀에게 다가간다.
하지만 쓰러진 췐이 그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샹, 도망가...!”
오라비의 처절한 절규. 하지만 소녀는 잇소리가 날 정도로 떨면서도 세차게 고개를 젓는다.
“어서!”
안타까운 권유와 말없지만 단호한 거부가 교차했다. 칼스는 다리를 들어 췐을 걷어찼지만, 나뒹군 그는 다시 일어나 다리를 붙들었다.
“그럼 너부터 죽어.”
칼스는 췐에게로 검의 방향을 바꾸었다. 내려쳐지는 검에 췐이 눈을 감고 샹도 비로소 달려왔다. 엎드린 오빠의 등을 그녀가 재빨리 덮었고, 그 와중에서도 두 사람은 서로를 보호했다.
하지만 피는 튀지 않았다. 사시나무처럼 떨던 두 남녀의 귀에 들린 것은 칼스의 낮은 웃음소리였다.
“알았다.”
이어 들린 말은 너무나 놀랍다.
“가르쳐 주마. 최소한 어디 가서 찍 소리도 못하고 죽지 않을, 그 정도로는 내가 만들어 주지.”
“...프람?”
“연습하려면 우선 칼부터 하나 사야겠군.”
아무래도 제대로 코가 꿰인 것 같군. 에라.
실눈을 뜬 췐이 비로소 물었다.
“...어째서...?”
“시험은 해야지. 만약 힘을 얻을 생각으로 말로만 지키네 마네 운운한다면, 이 경우 도망가거나 목숨이나 구걸했겠지? 하지만... 이 와중에도 서로를 위하는 것을 보면, 그 의지만은 제법 확고하다 할 수 있겠지.”
“...프람...”
살아난 것에 안도하며, 또한 아직까지 와들와들 떠는 샹의 등을 쓰다듬으며 췐은 눈을 감았다. 어느덧 한 줄기 눈물이 배어나온다.
칼스는 실소했다. 졸지에 나보다도 나이가 많은 제자를 맞아들이다니.
하지만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힘을 갈구하는, 그런 같은 꿈을 가진 소년이기도 하다.
지킬 것이 있는 자는 강해진다. 앞으로 가르칠 보람은 있을 것인가.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도움을 준다는 묘한 이 상황. 칼스는 스스로도 이상한, 하지만 내심 즐거운 기분을 만끽하고 있었다.
“내 수업은 엄하다. 각오하도록.”
수고하셨어요.
- 작가의말
본편 스토리 들어오니까 속이 시원함. 장황한 설명은 체질이 아니에요. 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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