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장. 잃은 것과 얻은 것. (3)
한 권이 끝날 때, 가슴에 남는 글이 되길 바랍니다.
Ⅲ
직경 23테라프의 평범한 공중도시 세이크는 비교적 외곽에 있어, 남으로 500테라프만 가면 이후 지구에서 그린란드라 불리는 땅이 있다.
그 곳의 한 구역에 엄중하게 격리된 3만 지상인들이 수용되어 있다. 거대한 빈 공간에 상자형의 간이공간을 여러 개 설치하고, 수도와 광열을 연결하여 만든 간단한 인공주택이다.
하지만 풀을 엮은 움집이나 흙집이 고작이었던 사람들에게는, 사는 집에서 직접 물이 나오고 먹고 입는 것이 해결된 그것으로 이미 천국이다.
세리사가 나타나자 상당한 탄식이 들렸다.
입고 있는 옷도 수행한 사람들도 범상치 않은, 그리고 무엇보다 세상 사람이 아닌 듯 아름다운 아가씨. 그 모든 것이 그녀의 드높은 신분을 알려준다.
마치 여신(女神)을 맞이하듯, 어떤 이들은 제풀에 미리 엎드리기조차 했다.
넓은 공터에 마련된 의자에 황태녀가 앉았다. 대표로 뽑힌 다섯 명 뒤로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매우 불안한 표정으로 꿇어앉았다. 지상군의 알로프들이 다수 파견되어 그들을 둘러쌌다.
간단한 예법은 익힌 모양인지, 대부분 나이든 노인인 대표들이 복례로 엎드렸다. 세리사도 고개를 숙여 가볍게 인사를 했다.
그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세월과 고생이 새겨낸 주름이 가득한 백발노인이 물었다.
“...저기, 어떻게 불러야 할지...?”
“아리칸이면 됩니다.”
통역기가 있어도 그들에게는 생소한 단어였다.
“그럼 아리칸... 저희들의 입장은...”
“전하는?”
“무례하게!”
몇몇 관료가 엄포를 놓자 세리사가 만류했다.
“이들에게 우리 예법을 강요하지 말아요.”
“하오나...”
“공포와 억압으로 누른 사람들에게 진실한 답변이나 마음은 나오지 않아요. ...말씀하시죠.”
말이 끊긴 노인은, 겁을 먹었음에도 이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요청은 예상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 가능하면 여기서 오래 살며 주민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리사는 난색을 표했다.
“우리들 입장에선, 질병과 죽음에서 구해준 것으로 족하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주민이 된다는 것은... 너무 과한 요구 아닌가요...”
“하지만 저희 부족은 가난합니다. 매일 사냥을 하고 농사를 짓지만, 입에 먹을 것을 넣기도 힘이 드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염치없는 것은 알지만, 저희들도 최대한 복종하겠으니 받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건... 여러분들 공통의 의지라는 것은 확실합니까?”
“네...”
세리사는 갈등했다.
그들의 소망이 다소 뻔뻔한 것이긴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의도치 않은 일이지만 시작은 자기들이 한 것이니 책임은 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을 받아들인다는 게 쉽지 않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지금은 먹을 것 같은 사소한 요구뿐이지만, 장차 아샤르에 대해 알아 가면 갈수록 동등한 권리를 요구할지 모른다.
대부분이 성인 이상이므로 교육의 효과도 장담할 수 없다. 무엇보다 이방인, 아니 원숭이 취급인 그들은 어떤 대우를 받을까. 사서 갈등을 만드는 것 아닐까?
고민에 빠진 그녀가 한동안 답이 없자, 다섯 노인들이 아예 땅에 머리를 쿵쿵 박는다.
이 아가씨는 인정이 많을 것 같고, 아무리 봐도 매우 높은 사람이다. 간절히 애원하면 통할지도 모른다.
“제발...!!”
“받아주세요!!”
수천 명이 일제히 머리를 조아린 가운데 다섯 노인들의 뒤, 가장 앞줄에 앉아 있던 젊은 여자가 외쳤다.
“이 아이를... 좀 봐주세요.”
고생이 덕지덕지 붙은 그녀는 품 안의 아이를 두 팔로 내밀었다. 지상인의 아이지만 자신들과 다르지 않다.
생후 반년이 되었을까 말까한... 그리고 새근새근 자고 있는 귀여운 아이다.
“이 아이는... 원래 죽는다고 했었어요. 제가 못 먹어 젖도 나오지 않고, 아이도 병에 걸려서 죽는다고 했어요... 그런데 여기서 약을 먹고, 저도 먹을 수 있어서 젖도 나오고... 그래서 살았습니다. 얼마나 다행인지...!”
그녀는 소리가 날 정도로 바닥에 이마를 세게 찧었다. 품에 안은 아이가 깨어나 조금 놀라 울기 시작했다.
“저는 이 아이가, 제 자식이 다시 굶주리거나 아파서 ...그렇게 되는 것이 ...싫어요 ...살려주세요...!! 버리지 말아 줘요...!!”
이어 사람들의 하소연이 쏟아졌다. 통역기가 미처 번역을 다 하지 못할 정도였지만 내용은 같을 것이다.
굶주리기 싫고 아프기 싫고, 돌아가 봤자 지배자에 짓밟히기 일쑤인, 그런 고향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곳 사람들처럼 살아보고 싶다.
...그야말로 사람답게...
“조용히!”
따라온 관료가 소리쳤지만, 어쩐지 항의하는 듯 흐느낌과 탄식이 이어졌다.
세리사는 눈을 감았다.
군주란, 항상 이런 괴로움을 안고 세상을 다스리는 것인가. 생애 처음 본, 나를 향한 수많은 이들의 눈물과 애원을 어찌 대해야 하는가.
어떤 이는 인의와 인애도 좋지만 냉정하라고 이야기한다. 또 어떤 이는 법과 규칙에는 차가운 머리가 있어야 하지만, 그래도 심장도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그 어느 것을 선택하든 반발이 있고, 그에 따른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 군주라고, 아버지와 칼스는 그렇게 이야기했었다.
칼스... 그가 있었다면 좀 더 바른, 내가 생각할 수 없는 좋은 대처법을 가르쳐주었을까. 아니면 그도 이번엔 난감하여 머리를 긁고 있었을까.
하지만 그는 나를 버리고 우주로 떠났다. 사랑하는 사람도 생겼으니 아마 다시 찾지 않을 것이다.
고통의 향연 같은 뭇 울부짖음에 가슴이 시리고, 떠나간 그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이 마음을 양분했다.
그가 그립고, 또 이 사람들의 눈물도 참기 힘들다.
순간 세리사는 결심했다. 누가 뭐래도 나만은 이 사람들의 편을 들어주어야지.
혹자는 또 인정 따위로 일을 처리하지 말라고 하겠지만, 그래도 통치의 바탕은 인정과 인덕이 아니면 안 된다는 아버지의 말은, 이제부터 내 삶의 영원한 지침이다. 그리고...
지금도 눈물로 하소연하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진, 아직 젖먹이에 불과한 저 아이가 자꾸만 눈에 밟힌다.
지상인의 아이지만 무척이나 귀여운 아이다.
...아아. 아이인가...
나는 내가 배 아파 낳은 아이를 평생 가져보지 못하겠지만, 대신 내 백성을 아이로 삼으면 돼. 칼스를 가질 수 없다면, 모든 이를 내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면 돼.
그렇게 생각하며 나아가다 보면, 앞으로의 고통도 조금은 줄어들지 모른다.
그리고... 아버지는 철없는 원망을 받아가며 날 지켜줬고, 어머니는 목숨을 바쳐 나를 세상에 낳아주었어.
...그런 내가, 어떻게 이 아이를 외면해...!
가느다란 한줄기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단지 이 사람들이 불쌍해서 뿐만이 아니었다.
이제 자신에게 유일하게 남은 길, 군주의 길을 조금이나마 깨닫고, 앞으로 그 길을 홀로 밟아가야 하는 자신에 대한 비탄의 눈물이기도 했다.
“전하...?
이를 발견한 관료들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고, 고개를 든 지상인들이 한 가닥 희망을 건 기대의 시선을 보내자, 눈물을 훔친 세리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황께 말씀드리죠. 결론이 어떻게 날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다지 힘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녀는 지금까지 한 번도 지어보지 못한 통치자의, 황태녀의 위엄 있는 표정을 떠올렸다.
“저는 끝까지... 여러분들의 편이 되어드릴게요.”
돌아온 딸에게, 무거운 탄식으로 아버지가 물었다.
“그들이 그렇게 불쌍하냐...?”
세리사는 아픈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불쌍해요. 그리고 무엇보다 저는,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그들의 외침이... 너무 마음이 아파요...”
“항상 말하지만 넌 착한 아이다... 지나칠 정도로...”
그것이 딸의 심성에 대한 칭찬인지, 아니면 통치자의 덕목인 엄격함과 냉철함이 결여된 것에 대한 비난인지, 부황의 표정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이건 네 정치적 약점이 될 거야. 칼스나 유키나가 도와준다고 해도 쉽진 않을 정도겠지.”
세리사는 마음이 아팠다. 칼스는 더 이상 아니겠지.
아니다. 그는 공과 사는 구분할 것이다. 무심히 대하면 굳이 적대하진 않겠지.
“하지만 아바마마의 치세와 마찬가지로, 저 역시 인정과 덕으로 다스리고 싶습니다. 냉혹한 결정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때에도 정말 신중히 생각할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들의 요구를 거부하거나 심지어 죽인다는 것은...”
“알았다.”
황제는 나지막이 웃었다.
“우리 딸... 많이 자랐구나... 많은 것을 생각하고 또 고민하고 있어. ...이 건은 애비가 알아서 하마.”
황제는 문득 죽은 아내를 생각했다.
네가 살아있었더라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우리들의 딸은, 정말이지 우리들을 많이 닮아버렸다.
괴롭고 아픈 미래조차 이리 받아들이려 한다.
이윽고 병상의 손이 힘차게 쥐어지며, 그는 스스로를 설득하듯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후 열린 국정회의에서, 이 건에 대한 황제의 방안에 대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 폭발은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
“세상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황제의 안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달 궤도에 공중도시 하나를 신설하여, 지상인들을 수용하고 목성 궤도로 이동시킨다. 후손을 예상해서 약 15만 명을 수용하는 그런 도시 정도는, 로사의 지휘 하에 자동장비를 동원하면 20일 정도면 만들 수 있다.
그리고 향후 30년. 그동안 제국의 법과 사회제도를 적용하고 충분한 교육을 시키며, 유전자 개조를 통해 태어나는 아이들을 아샤르인의 유전형질로 교체한다.
그들은 서로 닮은 인종이니, 태아단계에서 미리 손을 보고 성장과 건강을 체크하면 후세는 문제가 없다. 이후 마땅한 시간이 지나면, 그것을 다시 강하시켜 9번째 신도시로 편입한다.
“이게 말이 됩니까? 고작 지상인들의 요구에, 황태녀 전하는 물론 폐하께서도 굴복하시는 겁니까?”
황제는 이미 찌푸렸다.
“굴복이라니. 수용이다. 그들도 넓게 보면 짐의 백성이야. 성왕(星王)이라는 이름은 그냥 있느냐?”
“하지만 30년은 짧습니다. 지금의 아기가 성년이 될 정도, 고작 그 시간으로 태생이 바뀐다고 보십니까?”
“그렇습니다. 게다가 시민요? 그렇다면 장차, 의회 참정권과 관료임용권까지 요구할 겁니다.”
여러 관료의 거센 반발에도 황제는 꿈쩍하지 않았다.
“짐이 칙명으로 포고하면 따르지 않을 것인가?”
“폐하!”
아나이트 원수가 항의했다.
“향후 그들이 지상인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고 제국 우주함대에까지 들어온다면, 폐하는 출신도 저런 자들에게 가장 강대한 무력을 양보하시는 겁니다. 이 위험을 어찌하실 겁니까?”
그의 얼굴이 분노로 얼룩져 붉어지고 있었다.
“우리의 군함 그 모두가, 음성과 간단한 조작만으로도 행성을 태울 수 있는 화력을 발휘합니다. 그런 무력을 독점하지 않는다면 제국의 미래는 어떻게 합니까? 소신이 목을 걸고 감히 진언 드리옵니다. 폐하께서는 지금, 굉장히 어리석은 실책을 범하시는 겁니다.”
“원수...!”
황제는 보기 드물게 격한 노기를 보였다.
“그대가 감히 짐을 모욕하는가?”
“저는 폐하의 신하입니다. 주제넘으나 군주의 실책을 간언드릴 의무가 있습니다.”
“그만 됐네.”
한 풀 가라앉은 황제가 달래듯이 말했다.
“그대들의 우국충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이것이 나쁜 전례가 될 수도 있겠지. 허나 울부짖는 손에 침을 뱉어버린다면, 매달리는 눈물을 외면한다면... 이 별의 정점에 선 우리들과 그 자부심은 무엇이 되나. ...무엇보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차별과 편견, 그리고 오만이다. 그것으로 벌어진 궤멸전쟁, 그 아픈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짐은 지금이야말로 저들에게 포용과 관용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병상의, 그리고 화면 속의 황제.
하지만 이 순간, 그 위엄은 세상을 뒤덮을 만 했다.
“칙명으로 선포하니, 이후 이 일에 대해 논의하고 이의를 다는 것을 엄금한다. 어기는 자는 반역과 동등하게 처벌할 것이며, 이는 모든 이에 해당할 것이다.”
세리사는 눈을 감았다.
아버지. 저는 사랑받지 못했다는 것만으로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 마음을 바꾸었어요.
저 칼스조차 당신에게 고개를 숙이는 진짜 힘이 어디에 있었는지, 저도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네요.
북궁으로 돌아온 세리사는 아버지의 침상 앞에 엎드렸다. 시녀들은 놀라 뒤집어졌지만 황제는 웃고 말았다.
“녀석... 그렇게 좋으냐...?”
“네.”
고개를 든 세리사도 웃고 있었다.
이것으로 되었다. 지상인들도 무척 좋아하고 있겠지. 그 아기도 다시는 굶주림과 질병을 겪지 않을 것이다.
“감사드려요.”
“무슨. 애비도 그렇게 생각했기에 결정한 것이야.”
말은 그렇게 하지만, 대다수 반대자들을 황권(皇勸)으로 밀어붙인다는 것은 적지 않은 부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황은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세리사는 일어나서 다가가, 태어나 처음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고 그 뺨에 입을 맞추었다.
황제는 조금 놀랐지만, 이내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같이 쓰다듬었다.
세리사도 눈을 감았다.
아버지를 오래도록 원망했지만, 5년 전 화해하고도 어쩔 수 없이 거리는 두었었지만, 오늘 비로소 이 혈육 됨을 알았고 또한 자랑스럽다.
“거듭 감사해요.”
“나도 고맙구나. 네가 착하고 마음이 넓은 군주가 될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놓인다.”
“...앞으로도 더 노력할게요.”
그렇게 그들은 서로에게 밀착해, 이제껏 한 번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애정을 마음껏 표출했다.
마음의 한쪽 구석이 녹는 것을 느끼면서, 세리사는 아직도 얼어붙은 마음 한 구석을 떠올렸다.
그것을 녹일 온기는 영원토록 얻을 수 없겠지...
하지만 그들의 훈훈한 분위기와는 달리, 다른 한쪽에서는 노호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조명이 억제된 방은 분노와 실망과 황당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황제께서 제정신이 아닙니다. 듣자하니 아리칸도 지상인들과 접촉 후에 아예 마음이 기울었어요. 인정만으로 국가를 위험에 빠트린다는 게 말이 됩니까?!”
“저번 건도 그렇고 이번 건도 그렇고, 지상인들을 아예 동족 취급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건 불가침원칙을 뿌리부터 뒤흔드는 겁니다. 아무리 황제라도 시조의 유훈이 있는데, 이걸 이리 처리하다니요?!”
“거부하면 반역이라니. 다른 문제도 아니고, 지상인들과 관련된 문제에 황권을 이렇게 쓰시다니요.”
이후 모든 목소리는 차단당했다. 황제의 의지의 증거로, 하급관료 및 군부와 국민의 몇 명이 반대 입장을 여전히 공개적으로 늘어놓다 경찰에 잡혀 들어갔다.
황제가 더 이상의 논의를 칙명으로 막은 상태에서는, 이런 행위는 이미 반역이었다. 결국 총재가 황제에게 싹싹 빌어 방면하는 형식은 취했었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반역중이군요. 우리는 여전히 반대이고, 이 일을 논의하고 있으니.”
다수가 흠칫하는 가운데 분노가 다시금 튀어나왔다.
“황제가 실정을 저지르거나 국가의 안전을 위협하면, 반역할 수 있는 권리가 국민에게도 있는 겁니다!”
“반역?! 거부하는 자들이 반역이라면 우리도 하죠. 이대로 가다가는, 다음번에는 지상인에게 고개를 숙이라 할 겁니다. 30만년 아샤르 역사에, 이렇게 굴욕을 사서 겪은 경우가 있습니까? 제국군은요? 우주함대는요?”
“그렇습니다. 병상에서 썩어버렸는지 갑자기 노망난 황제. 미숙하고 심약한 주제에 권력 맛은 알아서 낄 데 안 낄 데 다 끼어드는 애송이 아리칸...! 더 이상 놓아두었다가는 나라를 어떻게 말아먹을지 모릅니다.”
“황실을 바꾸는 한이 있더라도, 대대로 이어져온 원칙과 국민의 권리는 지켜야 합니다. 황권으로 입이 막힌 상황에서, 남은 수단은 실력행사뿐 아닙니까?”
그렇게 며칠에 걸친 갑론을박이 오고 간, 오랜 토의 끝에 그들은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이미 말로 저지할 단계는 지났다. 아무리 황제라도 국민이 반대하고, 다시 그 국민의 절반이 소속된 조직이 거부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태업, 혹은 그것을 넘어서는 무력행사라면?
애당초 황제가 잘못한 거다. 민의를 무시한 지도자는 신민 위에 설 자격이 없다.
마침 국민 불만 역시 유래가 없을 정도로 두드러진다. 황명이니 감히 크게 떠드는 자가 없지만, 수용도시인 세이크에서의 타 도시로의 이주 신청이 폭증했다.
군 내부도 크게 술렁이고 있다. 그러니 기회를 잡는다면 최소한의 유혈로 끝날 수도 있다.
다만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것은 걸리는 문제가 크게 있었다. 후계 문제였다.
황제가 갈리는 것은 몰라도, 기나긴 역사를 가진 황실의 존폐까지 함부로 거론하기에는 심적 부담이 컸다.
누군가는 코에카의 뒤를 이어야 한다. 그래야 사적인 욕심이 아닌 대의로 무력을 행사한다는, 그들의 명분에도 맞는 것이고...
“그렇지만 좌현왕 토오르도, 우현왕 로페르도 사실상 황제 편이고, 대신 추대한다 해도 거부할 것이 눈에 보이는데... 다음 황제 후보에 누구를 넣어야 합니까?”
“그 건에 대해서는 적임자가 있을 것이네.”
몇 명의 웅성거림이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했다.
“누굽니까?”
“좌현왕세자 칼스. 자질만 따지면 황제도 능가하고 두 현왕을 앞서는 힘도 있네. 아직 젊기도 하니, 명분에 맞춰 제위를 준다면 아예 생각이 없지는 않겠지.”
“...불가능할걸요? 그와 황제는 친분이 깊습니다. 부자처럼 지내온 관계인데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게다가 토오르와의 관계는 어떻게 됩니까? 아버지를 신하로 두는 꼴이 됩니다.”
뚜렷한 회의감에도 목소리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건 문제가 안 되네. 황제와 아리칸을 퇴위시키고 좌현왕가로 잇게 한 다음, 기회를 봐서 새로 등극한 좌현왕이 아들에게 양위하면 돼.”
“그게 쉬울까요?”
“한 번 떠보겠다. 조만간...”
역사를 바꾸고 세상을 뒤흔들 모의가 시작되었다.
노성과 증오와 편견과 함께.
수고하셨어요.
- 작가의말
네. 그 어머니의 품에 안긴 아기는... 그리고 황제의 파격적인 결정에 초강경수가 등장하죠. 1부에 나왔던 내용을 가지고 되밟아가는 것이 2부 내용이기 때문에, 후에 이 내전을 지칭하는 이름을 기억하신다면 주동자도 아실 수 있을 겁니다.
다음 장 ‘빛을 향한 어둠의 선언’ 편을 지나가면 에필로그없이 2권으로 넘어갑니다. 중의적 의미를 지닌 소제목인데, 누구 누구의 선언일까요. 내일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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