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장. 인연을 맺는 여로(旅路). (3)
한 권이 끝날 때, 가슴에 남는 글이 되길 바랍니다.
Ⅲ
창저우시는 후에 무술의 본고장으로 여겨져, 하늘을 날아가던 기러기가 눈 깜짝할 사이에 털이 뽑힌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는가하면, 이곳을 지나가던 표사(鏢士)들도 깃발을 내리고 조용히 지나간다는 이야기가 있다.
수호지에 등장하는 임충(林冲)이 이곳으로 유배 왔다고 하여, 이후 중국 무술의 많은 유파가 이곳을 기원으로 삼는다.
물론 전부 믿을 것은 못 된다. 동네 약장수도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편작(編鵲)이나 화타(華陀)다. 심하면 황제(黃帝)까지 올라간다.
하지만 지금의 상촌은 그저 평범한 곳에 불과했다. 그러나 호젓한 산중에도 호랑이가 한 마리쯤은 있는 법. 이런 시골에도 부자는 있었다.
마(馬)씨 성을 가진 그의 본명은 모르지만, 그 재력과 세력과 덩치로 사람들은 마다드(馬大)라고 불렀다.
원래 그는 행상 출신이었으나, 차츰 재력을 늘리고 투기와 말장사로 성공했다. 그 역시 원래는 성이 없는 천민이었지만, 마을에 정착한 후는 말장사를 한 경력을 살려 마씨 성을 스스로 붙여 만든 셈이다.
마을의 초입에서 한 농부를 붙잡아 길을 물은 후, 내친 김에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칼스는 괜히 걱정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뭐, 잘 보여서 그 밑에 들어가면 문제가 없겠네. 아예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그래. 생각 이상 성공한 사람인 것 같아.”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고 이는 모든 시대에 통용된다. 거지에게는 동전을 던져줘도 자기 집 노비는 걷어차는 경우가 많다. 전자는 칭송을 듣지만 후자는 항의도 할 수 없다. 기대는 아직 금물이다.
저택은 제법 크고 지붕에는 무려 기와가 씌워져 있다. 흙을 바른 토담과 풀을 엮은 이엉을 덮은 집이 고작인 이 마을에서 홀로 존재감 있는 넓은 집이다. 대문도 꽤 커서 세 사람이 어깨를 맞대고 지나갈 수 있을 정도다.
한참 문을 두들기자 문지기로 보이는, 왼쪽 턱에 검은 한 가닥 털이 삐쭉한 사마귀가 돋은 중년 남자가 문틈 사이로 빼곡 고개를 내밀었다.
“거지새끼들 줄 밥은 없어.”
문지기 경력이 좀 있는지, 그 짧은 사이 딱 한번 훑어보고 문을 쾅 닫으려는 것을 칼스가 칼집을 밀어 넣어 막아버렸다. 나무문이 우직 소리를 냈다.
짜증이 섞인 화를 내는 문지기. 그 면전에 주인을 만나고 싶다 말한 한 칼스는 췐을 슬쩍 곁눈질했다.
별로 기대하지 않은 편이 좋겠는걸.
“누구라고 할까... 가 아니고...”
문지기는 두 눈을 껌벅거렸다. 칼스도 두 눈을 껌벅거리며 생각하다가 아차 싶었다.
이건 그냥 썩은 정도가 아니라 매우 썩은 거다.
칼스는 포전 한 닢을 들어 보였다. 손바닥을 뻗어 받은 문지기는 밝아진 얼굴로 이내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췐은 불안이 더해진 표정이었다. 그도 느낀 바가 있다. 문지가가 출입에 돈을 받을 정도라면, 그 주인의 격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췐은 의아함도 느꼈다. 프람이 그렇게 따뜻한 이가 아닌 것을 안다. 거만하고 욕심 많은 문지기의 목을 베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의외로 순순히 거금을 내놓는다.
포전에 따라 다르지만 큰 포전 한 닢의 가치는 작지 않아, 제대로 된 여관에서 열흘 정도를 머무를 수 있다. 하지만 췐이 보기에는 프람은 물 쓰듯이 돈을 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주머니도 엄청 두둑했지.
반면 칼스는 예정 외의 지출에 입맛을 다셨다. 그는 부유했지만, 그게 부모의 돈이라는 것 역시 잘 알고 있다. 황족이라고 해서 금칠을 하고 살진 않았었고...
그가 여비로 가져온 것은 사금(砂金)으로, 이미 이 마다드인지 뭔지 하는 사람의 자산에 필적할 것이다. 그러니 이 정도는 푼돈에 불과하고, 또 췐과 샹을 어딘가에 정착시키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거기까지 선심을 쓸 이유는 없었다.
여기까지 데려오고 보호한 것만으로도, 이미 넘칠 정도로 충분하다.
“오래 걸리는군...”
발끝에 걸린 돌멩이를 툭툭 차내던 칼스가 슬슬 짜증이 돋을 무렵, 드디어 예의 문지기가 고개를 내민다.
“들어와.”
몇 개의 작은 문을 지나 대청으로 들어서니, 꽤나 비대한 중년의 사내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더워지는 날씨에 저항하려는 듯 들린 부채가 바쁘게 움직였다.
“안녕하세요...”
췐이 알은 체를 어렵게 했다. 어렸을 적 본 기억과 지금의 그는 조금 달라진 듯 하다. 덕분에 더 불안했다.
“아, 그래.”
모른 척 하지 않는 것은 다행이지만, 역시 사내는 반기는 눈치는 아니었다. 칼스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여기는 그저 처참한 인간. 아니면 뒷목에 말뚝을 꽂은 인간, 딱 두 부류만 있는 거냐.
사정 이야기를 들은 마(馬)는 꽤나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다... 그러다가 2년이 3년이 되면...”
“그 전에 돌아올 겁니다.”
“전장은 위험하단다.”
당연한 소리지만 말뜻은 단박에 드러난다. 췐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군식구를 안기 싫다는 것이지.
못해도 마을 땅의 3할을 갖고 있고 이런 집에 살지만, 그 정도 출혈도 감수하기 싫다는 것이다.
실망감이 만면에 드러난 췐에게 마가 말했다.
“그러지 말고, 적당한 곳을 알아봐줄 터이니 그곳에 가는 것은 어때? 전쟁이 잦으니 요즘 군마(軍馬)나 양초(糧草)를 취급하는 곳은 바빠. 거기서 일하면서...”
그의 시선이, 군식구가 될지 모르는 췐과 칼스에 이어 마침내 샹을 향했다. 그녀는 마주잡은 손으로 불안감을 그대로 드러내며 발끝을 꼼지락거리고 있다.
문득 마가 피식 웃으면서 다시 말했다.
“...뭐, 정 어쩔 수 없다면 받아주겠다만...”
“그래도 되겠습니까?”
“네 아비에게는 빚도 조금은 졌었고...”
금방 화색이 된 췐이었지만, 칼스는 마의 눈에 띄지 않도록 칼집으로 그의 다리를 툭툭 치며 눈짓을 했다. 하지만 이 멍청이가 알아들을 리가 없겠지.
“됐수다.”
칼스가 내뱉듯이 말했다. 췐은 눈을 크게 떴고 샹은 고개를 들었다.
“굳이 댁의 신세를 질 이유는 없는 것 같으니, 우리는 갑니다. 안녕히들 계쇼.”
“프람...?”
칼스는 다시 눈짓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자, 멍청아.”
“그래도...”
“에잇. 가자니까...!”
손을 뻗은 칼스는 갑자기 샹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졸지에 손을 잡힌 그녀는 당혹스런 표정으로 꽤 힘을 주어 버텼지만, 역시 소용이 없어 질질 끌려 나가다시피 했다.
경악한 췐이 그를 불렀지만, 할 수 없이 마에게 인사를 하고 뒤를 따랐다. 마는 남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대체 왜 그래?”
“생각이 없는 건지, 아님 눈치가 없는 건지.”
샹을 번쩍 들어 말 위에 앉힌 칼스가 말했다.
“조금 걷자.”
마을 입구에 달하도록 말이 없는 프람은, 대신 췐의 의문과 항의를 압도하는 기세를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다.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췐은 말없이 뒤를 따랐다.
“너는 뭔가 눈치를 채지 못했어?”
뜬금없는 칼스의 말에 췐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이야...?”
“딱 보아도 녀석은 좋은 사람이 아냐. 그리고 처음에는 귀찮아하는 것이 눈에 보였어. 그런데 갑자기 왜 태도를 바꾸었을까? 과연 모르겠어?”
“모르겠어...”
칼스는 역시 의아한 샹을 바라보았다. 눈을 마주친 그녀는 시선을 살짝 피했다.
“샹을 보았기 때문이야. 얘는 꽤나 예쁘장하거든.”
프람의 입에서 나온 동생의 칭찬은 기분 나쁜 것이 아니지만, 여전히 췐은 감을 잡지 못했다.
“이 경우, 전쟁터에서 네가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 저 녀석이 원하는 바일 거다.”
“잠시만... 그럼...?”
췐은 비로소 양미간을 심하게 좁힌다. 칼스가 불편한 듯 세차게 혀를 찼다.
“탐을 내는 것이 눈에 보였단 말이지. 알겠어?”
“말도 안 돼...!”
췐은 길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고 샹은 두 손으로 입을 가려버렸다. 칼스는 혀를 찼다.
“잘해도 첩실, 보통은 부려먹다가 유곽행이다. 네가 돌아올 때까지 무사하리라는 보장도 없고, 돌아오지 않는대도 명분은 많아. 갈 데 없는 홀몸을 마음씨 좋은 주인이 거둬주는 것, 그것도 아니면 염치없는 군식구를 은근히 핍박해서 쫓아내는 거지. 그런 거 아닌가?”
“그 사람이 우리에게 이러면 안 돼...!”
췐은 주먹으로 땅을 쳤다.
“행상으로 다닐 때, 소금 장수를 하던 그 사람이 힘들어할 때, 아버지가 푼돈이지만 도움을 주었다고 들었어. 그 뿐인 줄 알아? 마을에서 소금을 사도록 주선해주고... 농번기에는 품도 팔도록 도와주었어. 그런데...!”
“은혜를 쉽게 잊고 원한을 깊이 기억하는 것이 소인배의 전형이지.”
아쉽게도 자신의 나라에도 그런 이는 있으니, 여기라면 말할 것도 없겠지.
그나저나 어떻게 한다. 믿었던 구석이 사라져 절망에 빠지다 못해, 아예 동굴을 파고 들어간 듯 어두운 두 남매를 보자니 칼스는 한심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기대가 어긋날 경우도 당연히 생각해야 할 것 아닌가.
이럴 경우, 칼스는 잠시 여정을 희생하고 열흘 정도를 더 가르칠 생각이었다. 그 정도 배운다면 어디 가서 호위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으니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겠지. 그런 다음 여비를 조금 주어 보내면 그만이다.
일단 이 마을은 벗어나자. 칼스는 여전히 주저앉은 췐을 재촉해 일으키고는, 샹이 탄 말고삐를 잡고 마을의 경계를 이루는 언덕으로 서둘러 향했다.
적당한 곳을 찾아서 당분간 머무르며 췐을 가르쳐야 한다. 때문에 옆 마을에서 열흘어치의 식량을 산 후 오늘 노숙할 적당한 숲을 찾는다.
푸른빛이 바람 따라 파도처럼 일렁이는 밭 사이로 난 공로(公路)를 따라, 힘없이 걸어가는 췐의 등에 대고 칼스가 위로했다.
“좋은 경험 했다고 생각해.”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아마 자신을 가르친 생존술 스승은 이런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그들의 관점에서는, 이렇게 대어놓고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경우는 잘 없다. 아샤르는 소수민족이고, 두 집만 건너면 서로 아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사는 곳도 공중도시들로 한정되어 있으니,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행위는 사실상 자살행위다.
예의 도적들이라든지 지금의 경우를 보면, 역시 아샤르가 편견을 갖고 환멸을 느낄만하다.
하지만 칼스는 내심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장차 현왕이 된다. 지상인이라도 함부로 무시하는 버릇을 들인다면, 그것이 자신의 국민으로 확대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동물을 학대하는 자는 장차 사람도 쉽게 학대할 수 있다. 잔혹한 무관심은 거친 입보다도 위험하다.
그보다도, 슬슬 어떻게 마무리를 지을까 싶다.
황제는 칼스의 지상행을 허락하면서 두 가지 조건을 걸었었다. 우선 그들의 역사를 함부로 바꾸지 않도록, 또한 죄 없는 이는 해치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 당부를 따르고 또한 스스로를 망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되도록 이제 사람과 얽히는 것은 피하고 싶다는 것은 칼스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이 남매와의 인연도 앞으로 열흘이면 끝난다. 그 뒤로는 행운이나 빌어 주어야지.
정처 없는 여정이지만 이별의 때는 멀지 않았다. 서로가 그렇게 느끼고, 날이 갈수록 췐은 어두운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싹수가 그저 엉망은 아니니까...”
모처럼의 위로에 비로소 췐이 고개를 들었다. 아직 완전히 풀린 마음은 아닌 듯 어둠이 남아 있지만...
“정말...?”
“아, 소질은 있어. 너는 강해진다.”
그건 빈 말만은 아니었다.
지난 엿새간 췐이 배운 동작만으로도, 그냥 칼만 잡아본 사람 하나나 둘 정도는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실전에 이르면 벌벌 떨면서 칼을 놓고 도망갈지는 모르지만, 그것까진 자신이 알 바 아니다.
“그리고 너무 절망하지 마. 해서는 안 되잖아?”
칼스는 말 위의 샹을 힐끗 눈짓했다.
그녀는 오라비만큼 절망하진 않았다. 아마 그녀는 타인을 책임져본 적도 없고 또한 오라비를 신뢰하고 있을 것이다. 무책임할지도 모르지만 속은 좀 더 편하겠지.
너는 혼자가 아니다. 뜻을 알아들은 췐은 비로소 조금 웃었다. 태양에 그슬린 얼굴이 하얀 이를 드러내니 한밤중에 달이 뜬 것 같다.
오늘은 좀 살살 다뤄줄까. 내심 생각하는 칼스의 귀에 진동음이 들렸다. 아직 췐은 느끼지 못하겠지만 예민한 흑마도 칼스와 마찬가지로 귀를 쫑긋한다.
지진이 아니다. 다수의 사람이 이동하는 소리다.
이곳은 한단 방향으로 향하는 공로다. 행상이나 수레도 몇 번 스쳐지나갔지만 이렇게 많은 이가 접근한다는 것은... 그리고 그 속도는 제법 빠르다.
그 감각을 증명하듯 동쪽으로 뻗은 뒤, 길 저 너머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잠시 멈춰서 바라보니, 흙먼지는 점점 더 가까워져 마치 폭풍처럼 거세진다.
군대다. 전방에는 말을 탄 십 수 명이 있고 글자가 적힌 깃발을 든 병사도 보인다. 못해도 수백 명이다.
무지렁이 농민인 췐과 샹은 물론이고, 칼스도 여기서는 문맹이다. 그러니 뭐라 적혔는지 알 수는 없지만, 붉은 바탕의 깃발로 봐서는 조나라의 군대다. 오행(五行)에 의거한 조의 국색(國色)이다.
군대가 지나가니 길을 막을 수도 없다. 공로이긴 하니 그리 좁은 것도 아니지만, 선두의 기병들도 전방의 세 남녀를 보고 조금 속도를 줄였다.
가장 앞의 말에 올라탄 남자는 스물 남짓이다. 그렇지만 어딘가의 귀족 출신인 듯 얼굴이 멀끔하고, 이제 자리를 잡아가는 수염이 턱 주변을 감싸고 있다.
뒤이은 기병들은 칼스 일행, 특히 말 위에 여자가 올라타 있으니 잠시 눈길을 주며 지나갔다.
“이려...!”
기병 중 하나가 행군 대열을 앞질러 달려가더니, 이내 전방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전군, 정지!”
발을 두 번 구른 군대는 일제히 멈춘다. 저들 역시 농민 징집병인 듯, 무장은 과 하나에 변변한 갑옷을 입은 이는 드물다. 하지만 질서가 있는 것이 그냥 농민 찌꺼기는 아닌 모양이다.
이어 말을 탄 세 사람이 다가왔다. 그 중에는 방금 지나간, 지휘관으로 보였던 자도 포함되어 있다.
“그대들. 어디로 가는 길인가?”
나이와는 맞지 않게 조금은 고풍스러운 말투. 젊은 지휘관이 말을 건넴에 칼스는 대답할까 망설였다. 하지만 췐이 먼저 앞서 말했다.
“한단...으로 갑니다.”
사실은 아니었지만 방향이 그쪽이니 무난하다 싶은 답변이다. 딱히 의심할 생각은 아닌지 재차 묻지는 않는 지휘관. 대신 묘한 표정을 짓더니 이어 샹, 정확히는 그녀가 타고 있는 말을 바라본다.
“좋은 말이군...”
칼스는 알지 못했지만, 그가 오르도스에서 잡은 말은 이후 명마로 이름나게 된 말들의 머나먼 선조 격이다. 아할 테케(Akhal-Teke)라고 불리게 되는 투르크메니스탄 원산으로, 황금색 털을 가져 아름다운데다 속도가 준수하다. 특히 지구력에서 정평이 나 있다.
피와 같은 땀을 흘린다고 해서 한혈마(汗血馬)라고도 불리곤 하지만, 이는 피부의 성분이 땀에 섞이는 것으로 피는 아니다. 칼스의 것은 흑마로 돌연변이긴 했지만, 그 체격과 털의 윤기는 한눈에도 보통은 아니다.
“자네 이름은?”
췐의 이름을 들은 지휘관. 성도 없는 천민들이 이런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훔친 것은 아닌가 싶었는지 몇 번이고 그들을 훑어본다.
둘은 순박해 보이는 농민이지만 칼스는 체구도 제법 있고, 무엇보다 칼도 차고 있다. 눈길은 갈 것이다.
큰 의심은 하지 않는 듯 지휘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지금 전장으로 간다. ...농민이 갖고 있기에는 지나치게 좋은 말이고... 무척 좋은 군마(軍馬)가 되겠지. 내게 팔지 않겠는가?”
췐은 심하게 망설였다. 칼스의 것이라 그런 것이 아니라, 군대의 요구를 거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반면, 그런 것 따윈 알바 없는 칼스는 내심 울컥했다. 무슨 권리로 내놔라 마라일까.
그 불편한 표정에 지휘관은 거듭 말했다.
“값은 좋게 쳐주겠네. 내가 타려는 것도 아니고, 훌륭한 장군께 드릴 선물이 될 것 같아서...”
“이 말은 내가 잡은 말이고, 돈이라면 나도 굳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오. 그냥 가던 길이나 가시지?”
심통이 난 것이 몸으로 드러나, 팔짱을 끼고 얼굴을 찌푸리는 그를 본 기병 하나가 마주 눈매를 좁혔다.
“어허, 값을 쳐준다고 하지 않는가?!”
“어허, 싫다고 하지 않는가...?”
일부러 말투를 흉내 내어 비꼬는 칼스를 췐과 샹이 기겁하여 바라본다. 프람이 강하긴 해도 상대는 수백의 군대. 게다가 상대는 사족이다. 함부로 거스르면...
“그냥 뺏죠. 어디서 훔친 것인지 알 수도 없으니...”
기병 하나가 지휘관을 부추겼지만 그는 ‘아닐세’ 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지휘관이 모욕당했다고 생각하는지, 기병은 모(矛)의 끝을 칼스에게 향했다.
“어디서 굴러먹던 놈인지는 몰라도...”
그는 모를 들어 칼스의 머리를 툭툭 쳤다. 아니, 치려고 하는 순간 그 자루는 칼스의 손에 잡혔다. 이어 잡아당긴 손에 순식간에 기병의 몸이 하늘로 날았다.
“우왁!!”
비명을 지르며 날아간 기병은 밀의 바다에 풀썩 빠진다. 사람을 하나 들어 우습게 날려버리는, 그 힘에 많은 이가 경악했지만 이어 상당한 무기가 그를 향했다.
대경실색한 췐이 외쳤다.
“프람...!”
“샹을 데리고 물러서.”
칼스는 빼앗은 모를 움켜쥐고 등 뒤로 돌리며 자세를 잡았다. 전혀 위축되지 않은 그 등에 왠지 모를 압도감을 느낀 췐은 급히 말고삐를 잡고 밀밭으로 들어갔다.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사실은 두려움 때문인 샹의 두 손이 말갈기를 움켜잡았다.
한편, 홀몸으로 삼백인대(三百人隊)를 상대로 감히 싸움을 거는 이 젊은이. 어이가 없다는 듯 몇 사람이 웃었다.
그 중 덩치가 제법 좋고 피부가 거무튀튀한 보병 하나가 크게 소리쳤다.
“꼬마야, 제정신이냐?”
“싸움을 입으로 할 거냐?”
냉랭한 말에 웃음을 거둔 몇 명의 보병이 과를 앞으로 내밀며 전진해 왔다.
물론 칼스에게 이깟 상대는 전혀 문제가 아니지만, 손이 닿지 않는 사이 췐과 샹이 위험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런 곳에서 비상식의 힘을 드러낼 수도 없다.
그러니 어디까지나 사람이 납득할 정도의 힘만 써야 한다. 꽤나 고달픈 일이 될 것이기에, 칼스는 자신의 몸과 무기로 군대를 차단했다.
한 자루의 과가 날아오지만 칼스의 모가 그것을 쳐내고, 끝의 탄력을 이용해 휘두른 반대쪽 자루가 사내의 명치를 찔렀다. 비명을 지르며 넘어진 병졸의 꼴에 성질이 난 듯 몇 배의 과가 이어 날아왔지만, 칼스는 풍차처럼 무기를 휘둘러 모든 공격궤도를 막아내고 이어 깔끔한 반격을 행했다. 그렇게 세 명이 더 쓰러졌다.
그들에게 다행이라면, 칼스는 진짜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던 탓에 그의 모는 여전히 그 날을 반대로 향하고 있다. 아니었다면 벌써 몇 명이 죽었을 것이다.
화난 기병 하나가 말을 몰아왔다. 허리를 숙이면서 훑어 내듯이 검을 휘두르지만, 칼스는 몸을 한 바퀴 돌려 피해낸 다음 자루로 말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앞다리를 꿇은 말이 쓰러지는 바람에, 관성을 잔뜩 받은 기병은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역시 무성한 밀밭 속으로 사라졌다.
“그만...!”
지휘관이 엄하게 소리쳤다.
사실 말리기는 진작 말리고 싶었지만, 소년의 품세와 배짱을 보아하니 그냥 근거 없는 배짱이 아닌 듯 했다. 근거 없는 판단이었지만 의외로 적중하는 바람에 그도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칼스와 무기를 섞던 병사들이 일제히 물러났다. 소년의 무예가 예사롭지 않음을 뒤늦게 깨달은 상당수가 웅성거리고 있었다. 지휘관이 낮게 말했다.
“무예가 아주 출중하군.”
“칭찬은 됐소. 그저 가던 길이나 가주면 고맙겠고...”
칼스는 모의 끝을 정면으로 향했다.
“싫다면 이번엔 당신 목이 날아간다.”
무례에 화가 난 몇몇 기병이 고함을 질렀지만, 잠시나마 크게 웃은 지휘관이 말을 이었다.
“그 참. 솜씨만큼 배짱이 좋구나.”
“그러니까 칭찬은 됐소. ...이제 어쩔 거요?”
“말에 대한 이야기는 취소하지. 그 분께 말이 없는 것도 아니고... 드리면 좋겠다 싶어 제의는 했지만, 싫다는 것을 어찌 하겠나. 부하들의 무례는 내 사과하지.”
지휘관은 놀랍게도 손을 맞잡고 고개를 숙였다.
“평범한 농민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지만, 어쩌면 자네에게는 어울릴지도 모르지. 자네 이름은?”
태도로 보아 의외로 말이 통하는 녀석일지도 모르지만, 칼스는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고 대답했다.
“프람. ...당신은?”
“좋은 이름이군. 솜씨와 어울려.”
청년은 하얀 이를 드러냈다.
“내 이름은... 이목(李牧). 삼백인장이다.”
수고하셨어요.
- 작가의말
이목... 조나라 최후의 명장이 등장하시는군요.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이야기에 밝으시거나, 하라 야스히사의 만화 ‘킹덤’을 보신 분이라면 이제부터 나오는 인물은 어느 정도 아실 겁니다. 물론 만화의 이미지와는 크게 다릅니다만, 대충 어떤 배경을 가진 인물인지 정도는... 아니면 초록이 검색을 좀 하셔야 할지도 :D
다만 모르셔도 상관없습니다.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누가 무슨 업적을 세우고 삽질을 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인간 군상이 있는지를 중점으로 파고들 예정이니까요. 뭐, 사전지식이 있으시면 훨씬 읽기 편하시긴 할 거에요. 부가 설명은 앞으로 되도록 충실히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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