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권. 구궁(九宮)의 황녀> 에필로그 : 천년의 정원
한 권이 끝날 때, 가슴에 남는 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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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코는 둥글고 낮은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밤을 꼴딱 새운 탓에 졸기 시작하던 하루를 눕혀놓고, 자신도 지친 심신을 달래려 바깥 공기를 쐬고 있다.
풀밭 주변의 반딧불이 화려하지만 진짜는 아니다. 저녁 어스름에 뭉쳐지는 이 빛의 무리는, 르아냐 전체에 들어찬 나노머신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영상이다. 저들 말로는 란포르라 불리며, 서로 연계하여 허공에 영상을 출력하며 갖은 탐지를 행하는 그런 것이다.
언제 어디서든지 팔찌와 연계하여 선명한 영상을 불러낼 수 있고, 르아냐의 외벽에 전개되었던 자연 풍경도 이렇게 연출해 낸 것이다.
자연스럽지만 자연의 것은 아닌, 하지만 또 어떤 자연보다 아름다운 광경에 그녀는 잠시 황홀감에 빠졌다.
아아, 이제는 비로소 평화롭다.
...지금쯤 그 두 사람은 뭐하고 있을까. 자신도 모르게 조금 웃음이 나온다.
사실은, 사실은 저 둘은 서로를 아주 아끼고 사랑했구나. 또 그렇기에 오랜 시간 멀어질 수밖에 없었구나. 상대가 원하는 것이 미움과 증오라고 생각했기에, 애써 마음을 속여 가며 상대에게 맞춰준 것일 뿐이었던가.
물론 그들도 의심은 했겠지. 지쳤기도 했겠지. 하지만 확인할 용기는 어느 쪽도 없었을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서로를 영원히 잃을, 그 부담은 몹시 무거웠겠지.
뭐, 외계인들도 별 거 없네. 은근히 바보야.
루이코는 내심 웃었고 또 뿌듯해졌다. 어쩌면 나, 뚜쟁이의 소질이 있을지도.
하지만 다른 생각이 미치자 다시 우울해졌다.
저들의 나라가 새로이 열린다는 것은 곧 지구 침공이다. ...계약이고 뭐고 다 날아가 버렸으니 내 고향은...
하지만 나는 그저 너무 무력하다. 겨우 얻은 약간의 힘은 그야말로 약간 뿐. 이걸로 대체 뭘 하겠어...
“뭐하냐? 그리도 멍하게.”
퍼뜩 고개를 들어보니 가벼운 차림의 그가 있다.
“그냥... 생각 좀... 몸은 어때? 괜찮아?”
그는 여전히 장난기 넘치는 웃음으로 으쓱했다.
“제길. 네 덕에 칼침을 맞았어. 물어줄 처지냐.”
“당신의 그 허세와 헛바람을 빼려면, 아무래도 몇 군데는 더 맞아야 할 거 같은데...?”
“...사양합니다.”
어깨를 떠는 그에게 루이코가 물었다.
“황태녀는...?”
“재워놓고 나왔다.”
“으흥...? 재워놓고...?”
루이코의 묘한 시선에, 그는 있지도 않은 벌레를 쫓듯 손을 흔들며,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것 아니다. 이 몸으로는 당분간 아무 짓도 못해.”
“팔다리가 다 부러져도 할 건 다 하는 게 남자인데.”
드디어 이 녀석을 놀리고 이길 기회다. 마음껏 써먹지 않으면. 예상대로 그도 꽤나 부끄러워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남자에 대해서 잘 아는 거지?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으신가요?”
“윽.”
또 당한 건가. 그녀는 황급히,
“그런 몸으로 돌아 다녀도 괜찮아?”
“널 보러 일부러 온 거야. 다시 돌아가서 누울 거야.”
“날...? 왜? 일을 망친 것에 대해 추궁하러 온 거야?”
흘기는 눈매에 그는 다시 손사래를 쳤다.
“설마. 일단 함부로 이용한 사과는 해야지. ...미안하다.”
조금 고개를 숙인 그는 겸연쩍게 웃었다.
“네게 부탁도 하나 있고...”
“부탁이라면 이제 좀 그만... 당신에게 계속 엮이다가는 제 명에 못 죽을 거 같아...”
“들어보지도 않고 거절이냐?”
“...뭔데?”
그는 등을 꼿꼿이 펴고,
“지구로 돌아가더라도, 앞으로도 네가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그리 부탁하러 왔어.”
루이코는 조금 흠칫했다. 사실은 너무 놀랐다.
“뭐야? ...설마 임자가 있는 몸으로 새삼 유혹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거 아냐. 뭐, 생각 있으면 받아는 주겠다만...”
왠지 음흉한 웃음의 그에게 루이코는 손사래를 치며,
“됐고... 진짜 이유는 뭐야?”
“네가 필요해서야.”
“뭐?”
이 무슨 뚱딴지일까. 그녀는 갸웃거리며,
“하지만 당신 같은 사람이, 하필 나같이 머리 평범한 이를 대체 왜...”
“누가 네 머리가 필요하다고 했냐.”
조금 울컥했다. 반면 그는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이번에 나는... 너도 같이 시험했어.”
“시험? 왜? 어째서 나를?”
“네 용기나 강단은 지구에서 잘 보았어. 그리고 르아냐에선 네 생각과 의지를 시험했지. 만약, 네가 협박이든 뭐든 간에, 내게 빌붙어 권력을 탐하거나 아양을 떨었다면 가차 없이 내쳤을 거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너는 충분한 가치가 있어.”
“...왜 시험했느냐, 그 이유는 아니네..”
“그게... 만약 원래 의도대로 세리사가 황제가 되면, 나는 그 녀석 남편은 될 수 없잖아. 그럴 경우 내 옆자리는 비게 되니까...”
그답지 않게 망설이던 그는 이윽고 토해내듯,
“이를테면, 내가 왜 굳이 널 데리고 쇼핑까지 나갔을까...요?”
루이코는 황망한 가운데 물었다.
“...설마, 뭔가 데이트 건수라고 생각했던 거야?””
“...한번은 다시 걸어보고 싶었어. 그녀의 모습을 한 너와, 대낮의 밝은 거리를 한번은 말이야...”
꿈꾸듯 고개를 든 그가 말했다.
“아마도 나는... 보고 싶었던 거야. 그렇게 수줍어하고 말수가 적던 그녀가, 아미에가 웃고 화내고... 그렇게 풍부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보고 싶어서였겠지.”
“난 그 사람이 아냐.”
“알아. 하지만 보고 싶었다는 거야.”
루이코는 생각했다.
그 때의 나도 이 녀석과 쇼핑카트를 몰면서 같은 생각을 했었지. 아키라... 너와 이렇게 걷는 것도 괜찮았을 거야... 라고. 이 녀석도 같은 것이었을까.
생각하면 기묘하다. 아키라를 죽이고 그 몸에서 나온 이 녀석과, 그의 그녀의 얼굴을 하고 있는 나는...
대체 무슨 인연일까.
“...그래서, 그게 당신 옆자리와 무슨 상관이야?”
“이미 지나간 이야기이긴 하지만, 세리사를 제위에 올린 후 네가 싫지 않다면... 진지하게 도전할 생각이었어. 왕비 자리는 비어 있으니까.”
“우와, 뻔뻔해...!”
루이코는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질하며,
“이리도 실컷 골려먹고 놀려먹고 괴롭힌 주제에...!”
“손가락질은 우리에게도 실례라고 하지 않았나? ...아무튼 그럴 생각이었는데, 막상 고려하고 있는 여자가 베개머리 송사나 생각하고 있다면 피곤하니까...”
“그래서, 내가 괜찮은 신붓감인지 알아보려고?”
“그런 셈이지. 그리고 결과는 합격, 아니... 솔직히 그 이상이다.”
살짝 뛰는 심장. 이건 무슨 조화일까.
“호오, 당신, 지금의 이 발언... 내게 약점이 잡히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어?”
“무슨 약점씩이나... 좋으면 만나고 싫으면 헤어지는 거지. 연애에 무슨 환상을 갖고 계시나. 말 몇 마디에 약점이 잡히게...”
“됐고... 하지만 어쩌나. 나는 생각이 없는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잘 모르겠다. 루이코는 순간 자신이 의심스러웠다.
그래도 이 녀석과 같이 있으면서 싫었던 것만은 아냐. ...생각해보면 이 녀석에서 정조의 위협을 당할 때, 내가 왜 그 비싼 속옷을 입고 갔을까...?
...아니, 생각하지 말자.
하지만 생각 외로 그는 별로 실망하지도 않고,
“아니면 됐어. 사실 당분간, 나는 세리사에게 신경 쓰기도 바빠.”
“잘해. 2천년어치 이자는 싸지 않을 테니. 그리고, 내 빚도 아직 못 갚았지? 이번 건도 포함해서 받을 거야.”
“흥. 나도 떨어질 데까지 떨어졌네. 갖은 곳에 빚을 지고 다녔어.”
그는 입맛을 다시며,
“약속은 지키지. 앞으로 지구침공을 하더라도... 네 고향만큼은 최후의 최후까지는 공격하지 않으마. 어때?”
루이코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에...? 진짜? 하지만... 이건 전쟁이잖아?”
“그 정도는 황제가 할 수 있는 일이야. 그리고, 테스트에 합격했으면 합당한 보상은 있어야지.”
“...고맙긴 하지만... 아직 대답은 하지 않았어. 왜 하필 나야? 왜 내가 당신 옆에 있어야 해?”
“인재가 필요하니까.”
“내가 무슨 인재야?”
“충분히 인재지. 앞으로 지구에서 살아갈 우리는, 되도록 많은 인재를 모을 거다. 우리가 수천 년을 기다려서 찾고 얻으려 하는... 융합과 공존을 통한... 또 다른 가치 기준을 위해서. 그리고 넌 그 첫 시작이야.”
“하지만... 난 전혀 대단하지 않은 걸. 훨씬 똑똑하고 대단한 사람들이 많을 텐데...”
“그렇지 않아. 너는 스스로가 보통 사람이라 생각할지 몰라도, 사실 보통 사람이 보여주기 힘든 것이 많아. 용기, 강단, 의지, 그리고 뭐... 운이긴 했지만 어느 정도 통찰력도 있고. ...많이 배우고 똑똑한 놈이라면 내 주변엔 차고 넘쳐. 하지만 내가 필요한 것은... 지구인의 마음을 대변할 이의 존재야.”
“...내가 그런 사람이고, 그러니 스카웃한다는 거야?”
“그래. 그래서 나는 네 인간성도 같이 시험했던 거다. 용기나 강단은 천성으로 여길 수도 있어. 하지만 사람의 의지나 생각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니... 그러니 충분하다 생각하고 부탁한다는 거다.”
루이코는 굉장히 망설였다.
그가 자신을 높게 평가하는 것은 기분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 아니, 생각보다 꽤 좋다.
하지만... 나는 잘할 수 있을까?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는 내 고향만큼은 지켜주겠다고 했지만, 그래도 거기에 안주하면 안 될 것 같다.
비록 죽게 되는 한 명의 목숨에 비난을 받더라도, 내 힘을 보태어 백 명의 목숨을 구하는 것도 분명 필요한 일일 거야.
이 녀석의 옆에서라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라.
깊이 고민하는 루이코에에게 그가 덧붙였다.
“계약금이 필요하다면 듬뿍 주지. 원한다면 르아냐 정도는 가져도 좋아.”
“...에? 이걸 가져가라고? 계약금 치고는 통이 너무 큰 것 아냐?”
“하지만 이제는 쓸 일이 없잖아. 반면 네게는 제법 대단한 부동산일텐데...”
“그래도 당신들에게는 소중한 장소잖아. 천년을 넘어 2천 년을 이어온, 그런 추억의 정원이잖아.”
“응? 어떻게 알았냐?”
갸웃거리는 그를 본 루이코도 의아해했다.
“무슨? 뭘 알아?”
“르아냐는 ‘천년의 정원’ 이라는 뜻이야. 사람이나 사물에 붙는 고유명사는, 깊은 뜻을 위해서 우리도 사전을 찾아야 하는 고어(古語)로 붙이지. ”
“아하... 그래서 번역이 되지 않았던 거구나.”
“그래. 참고로 사람의 이름도 마찬가지야. 황족이라면 더더욱 그렇게 붙이지.”
“당신들 이름도?”
“맞아. 부모가 지은 이름, 그리고 그에 이어지는 문장이 되도록 황제가 존호를 지어주는 거지. 유키나의 경우 이름은 밤하늘이란 뜻에, 존호인 세이야는 혜성이란 뜻이야.”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혜성... 이란 문장이 되겠네.”
쾌활한 그녀에게 어울린다. 납득한 루이코가 물었다.
“그럼 황태녀... 아니, 이제 당신 부인은?”
“세리사는 카나리아나 잉꼬 정도, 그런 작은 새를 뜻해. 존호인 엔야는 사랑스러운 아이란 뜻이야. 즉, 작은 새처럼 사랑스럽다... 그런 뜻이지.”
“그럼 당신은?”
“듣고 웃을 것 같은데...”
짐짓 입을 다물려 했지만 루이코가 재촉했다.
“다른 사람은 실컷 이야기해놓고 자기는 쏙 빼놓기?”
그는 할 수 없다는 듯 뒤통수를 긁었다.
“칼스는 세계, 온 세상이라는 뜻이 있어. 존호인 카이는... 고치다, 바꾸다, 치유하다 라는 뜻이 있어.”
“세상을 바꾸다... 치유하다. ...흉악한 파괴자랑 너무 안 어울리는데?”
루이코는 꽤 빈정대었지만 내심 묘한 생각이 들었다.
이 녀석의 속은 음흉하고 장난도 많이 치지만, 그래도 어린 날의 약속, 어렸기에 모른다고 팽개칠 수 있었던 약속도 수천 년에 걸쳐서 지키려고 갖은 애를 써왔다.
...그렇게 고지식할 정도로 약속을 지키려는 이 사람이, 생각만큼 아주 나쁜 사람일수는 없겠지.
이 녀석은, 장차 지구를 침공할 거대 국가의 황제가 된다. 존재만으로도 싫어도 세상을 바꿔버릴 거야. 그리고 이 녀석은 앞으로의 세상을 어떻게 할 생각일까.
한 여자에 대한 약속을 지키려 노력하는 것과, 나라를 바꾸고 미래를 간섭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러니 확인해보고 싶다. 강대한 힘과 권력을 가진 이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할 것인지.
“그럼 스카웃 제안에 답을 하기 전에, 하나 말해줬으면 해.”
“뭔데?”
“당신은 앞으로 지구로 내려가서, 당신 나라를 위해 수많은 피를 흘리게 될 거야. 파괴하고 빼앗게 되겠지. 그렇게 해서라도 나라를 다시 세우고 지구에 자리를 잡게 되면, 당신은 어떤 세상을 만들어보고 싶어?”
“흠... 당장 답변하려니 쉽게 나올 것 같지 않은데...”
“생각할 시간을 주면 미사여구나 만들어 내겠지. 기름칠을 한 거짓말에 속고 싶지는 않아.”
“내가 왜 네게 답을 해줘야 하는 거지?”
“나조차 설득하지 못한다면, 당신의 꿈과 이상과 행동은 처음부터 실패할 테니까.”
“뭐... 좋아. 그렇다면...”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우리는 압도적인 국력과 전력, 문물이 있어. 그리고 이것으로 지구를 침공해 우리의 영토를 얻어낼 거다. 하지만 그 이후 나는, 우리가 가진 것을 우리만을 위해 쓰진 않을 거다. 기꺼이 나누고 베풀고, 그것으로 보다 많은 이가 풍요로운 세상을 노릴 거다. ...배고픈 가정, 아파도 치료받을 수 없는 아이와 노인, 가난하고 배우지 못해 바라던 꿈을 접는 젊은이들은... 내 치세에선 빠르게 줄어들고 또 사라질 거다.”
그는 가볍게 심호흡을 한 후,
“그리고, 하루의 일을 끝나고 모여 앉는, 행복한 가족의 식탁을 세상에 많이 만들고 싶어.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과거와 미래를 이야기하고 칭찬과 격려와 충고를 하는 그런 자리를 내 나라 전체, 궁극적으로 세계 수준으로 넓혀볼 거야.”
“하나만... 하나만 더 말해봐.”
루이코는 급히 재촉했다.
이 녀석의 말에 녹아버리지 않도록... 꿈만 같은 세상이지만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그런 이야기에 벌써부터 홀리지 않도록... 조금만 더 구체적으로...
“욕심이 많네...”
그는 쓰게 웃고서,
“그럼 마지막으로, 모든 이를 만족시키는 정책도, 모두가 행복한 세상도 불가능해. 대신,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겠어. 그런 사람들은 행복할 권리가 있어. 그런 그들이, 그들처럼 살아오지 않은 사람들에게 당하는 세상은 만들지 않겠어. ...부족할까?”
루이코는 절로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 녀석이 말하는 것은 절대 쉽지 않다. 사람의 욕심은 무한하고 전쟁과 다툼은 어디서든 일어나고, 시기와 질투는 사람의 천성과도 같다.
하지만, 그래도 묘하게 붕 뜨게 되는 이 기분은 무엇일까. 녀석의 말이 너무 번드르르한데. 오히려 믿고 싶어지는 기분이 드는 것은 어째서일까.
분명 이 녀석은 위험한 녀석이긴 하지만, 그래도 한 번 맺은 약속은 지키려고 노력하고 실제로 지켜왔어.
그렇다면, 지금부터 나와 하게 될 약속이 있다면 역시 지킬 거야. 이 사람이라면 그런 세상을 만들어줄지도 몰라. 설령 만들지 못하더라도, 이제껏 이렇게라도 말해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어. 있더라도 힘이 없었지.
그는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거대한 권력자가 될 거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이 오랜 세월을 아프게 살아오면서도 그 마음씨를 잃지 않았던 한 여자가 있을 거야.
그러니 내가 굳이 필요하지 않을지도 몰라. 이 녀석이 진심으로 날 원한다고 생각하기에는, 사실 나는 모자란 점이 너무 많은 걸. ...아직은 좀 어리고 생각도 엷고.
그러니, 이제는 내가 지켜보겠다고 부탁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뚜렷하게 세상에 대한 불만은 없었다. 변하지 않는 일상에 대해 약간의 일탈을 꾀했지만, 무언가 대단한 사람처럼 나설 필요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세상이 바뀌게 된다면, 가능한 한 자세히 보고 싶고... 또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
아키라... 네 안에서 살았던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직 나는 완전하게는 알 수 없어. 하지만, 물론 그는 너와 자신이 별개의 사람이라 말했지만,
그래도 나는 믿고 싶어.
그의 영혼을 나누어 만든 것이 너라면, 반대로 너의 그 마음씨도 그에게 조금이라도 전해져, 앞으로의 세상에 도움이 되기를... 이젠 진심으로 바래.
“알았어. 당신 밑에 들어가겠어.”
“응? 받아들이는 거냐?”
즐거운 표정의 그. 하지만 루이코는 인생에서 가장 엄숙히 선언했다.
“그래. 마음에 안 들면 실컷 잔소리를 해 줄 거야. 싫어하거나 귀찮아할지도 모르지만, 당신이 말을 꺼낸 이상 나 스스로 그만두기 전까지는 평생 고용해.”
일단 이 녀석은 왕, 아니 이제부터 지고무상인 황제시다. 당연히 부자일 테니 연봉은 넉넉하게 줄까.
대학 졸업 전에 취직 확정...!
아, 계산적이야. 나...
“평생 고용이라면 다른 방법도 있는데...”
루이코는 혀를 내밀었다.
“이제 당신은 임자가 있는 몸이야. 게다가 후궁이니 뭐니 해도, 결국은 첩이잖아. 내가 그렇게 되어 봐. 우리 어머니는 기절해버리실 걸?”
그리고 당신은 분개한 내 아버지에게 맞게 될지도...
하지만 그는 뚜렷이 실소하며,
“첩은 무슨. 차비 정도라면 황후와 거의 동급에, 그 소생도 엄연한 적자야. 즉, 우리들의 아이는 곧 내 후계자라고.”
“하지만 황태녀, 아니 황후가 있잖아?”
신체 건강한 그녀를 두고 왜 아이 이야기나 하는 걸까. 루이코는 의문스러웠다.
“뭐, 그건 그렇고...”
어째선지 그는 재빨리 화제를 바꾸어,
“마음이 바뀌면 말해. 진지하게 생각할 테니까.”
“아마 그럴 일 없을 거네요. 당신이나 황태녀는 그 모습 그대로 오래 살겠지만, 나는 20년만 지나도 40살이야. 아무리 당신이라도 할머니가 된 내게 퍽이나...”
“참... 모르겠지만...”
그는 조금 의기양양,
“너, 이제부터 죽을 때까지 안 늙어. 수명도 조금은 더 늘어났을 거고.”
깜짝 놀란 루이코가 급히 물었다.
“무슨 소리야? 안 늙어? 수명...?”
“영자력 전수는 그냥 가르쳐주는 것과 달라. 내가 뭐랬어? 영자력은 생명력, 그리고 영혼의 힘이다. 이걸 떼어내어서 타인에게 준다. 그게 무슨 의미일까?”
“생명... 그럼 설마?”
커졌던 눈이 이제는 빠질 것 같다. 그는 끄덕였다.
“맞아. 내 수명을 희생하면서 힘을 나누는 거야. 지난 번 처치로 내 수명이 20년 정도 깎였고, 그만큼의 분량은 네게로 가.”
루이코는 그제야 이해했다. 그래서 세리사와 유키나가 그렇게 싫어했던 거다.
그의 수천 년 수명에 비하면 아주 적지만, 20년의 시간은 지금껏 자신이 살아왔던 딱 그 시간이다. 결코 가벼운 무게가 아닐 텐데...
모르는 사이 그의 목숨을 받았다. 거듭 몸을 떠는 그녀에게 그가 다시 말했다.
“황족과 마찬가지로, 지구인 유전자에도 노화 방지 처치는 되어 있어. 그냥은 열리지 않지만, 강력한 영자력은 그걸 열어버려. 너도 이제 사실상 안 늙어.”
“...어째서 내게, 어째서 이렇게까지 한 거야?”
“세상일은 모르니까. 최악의 경우, 나와 세리사가 공멸해서 너희들만 지구로 갈 상황이 있을 수도 있고. 그리고 너, 하늘 정도는 날아보고 싶어 했고...”
“이렇게 하면 당신에게 호의를 품을 거라 생각했어?”
기가 찬 표정으로 루이코가 물었지만,
“그냥 빚 조금 받았다고 생각하면 되지. 다만...”
그는 뒤통수를 조금 긁으며,
“...너는 죽은 아키라 몫까지 살아야 해. 20년뿐만 아니라 조금 더 주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지구인의 몸에는 그게 한계였지.”
“...아키라...”
잃어버린 친구의 이름을 자신도 모르게 부른 그녀. 조금은 측은하게 바라보던 그는 두 손을 움켜쥐며,
“...또한 아무리 세리사가 있다고 해도 그녀, 아미에를 완전히 지울 수는 없잖아. 내 인생의 한 부분인 사람이잖아. 그래서 최소한 닮은 너라도... 조금이라도 지금 그대로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 그런 거였어. 불사는 힘들어도, 내가 불로는 줄 수 있으니까...”
“하아... 당신, 정말 복잡하게 살아.”
하지만 루이코는 조금 마음이 푸근해졌다. 젊은 그대로 오래 산다는 것도 솔직히 기쁘지만, 안심되는 것은 그 이유가 아니다.
이 녀석... 굉장히 복잡하고 머리 아픈 녀석이지만, 이렇게나 많은 생각을 하고 있구나. 사소한 부분까지 모두 신경 쓰면서, 괴로움이나 수고를 기꺼이 감수하고 심지어는 목숨까지 걸고 있구나.
세상에 널려빠진, 입만 살고 배에는 기름이 낀, 선거철에만 허리를 굽히는 아저씨들보다는 훨씬 나을지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진 마라. ...아무튼 네가 허락했으니 나도 쉽게 놓아주진 않을 거다. 내가 세상을 어떻게 바꿀지 잘 지켜보라고. 그걸 위해 몇 가지 특권은 주지. ...오래도록 지켜보며, 잔소리도 잘 해봐라.”
“알았어.”
끄덕인 루이코에게 그는 만족감으로,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그리고 나중에 어느 정도 일이 정리되면...”
무슨 말을 더 하려는 걸까. 묘하게 가슴이 뛰지만...
“삿포로, 라멘 거리에 다 같이, 아키라와 하루와 언젠가 갔던 것처럼... 한 번 더 먹으러 가자.”
입맛을 다시는 그를 보며, 갑자기 향수를 가장한 식욕을 느낀 루이코가 소리쳤다.
“그럼 오타루에서 초밥도...! 당신이 사는 거야.”
“덤터기 한번 거하구나. ...알았어.”
쓰게 웃은 그는 손을 흔들며 돌아섰다.
혼자 남은 그녀는 다시금 감상에 빠졌다.
더욱 깊어진 밤과 어둠.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빛 나는, 하늘과 지상에 온통 펼쳐진 별무리.
부디 이 아름다움만이 앞으로의 미래이기를...
루이코는 봄바람에 더욱 몸을 맡겼다.
절로 낮은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수고하셨어요.
- 작가의말
2권. 구궁(九宮)의 황녀 편이 종료되었습니다. 괜찮게 보셨는지요? 라는 생각이 지금 물씬 드는 군요. 2권은 1권보다 준비기간도 짧고, 교정이나 구성도 조금 공이 덜 간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만(도중 한번 굉장히 아프기도 했고 ㅜㅜ) 그래도 역시 낳아놓은 자식인지라 미워도 할 수 없군요.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리면서, 살짝만 쉬다가 제 3권, 가칭 ‘홍염의 연회’ 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마음에 드셨다면, 다음 이야기에 힘이 될 수 있도록 선작이나 추천, 적극적인 홍보도 덤으로 부탁드립니다. 서재의 명예의 전당은 항상 남아 있답니다. ^^ㅋ
참. 아직 3권이 남았지만 간단한 작가 후기나 등장인물 설정시 이야기를 후기로 붙일 겁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이해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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