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권. 변혁(變革)의 시대> 프롤로그 : 겨울날의 책봉식
한 권이 끝날 때, 가슴에 남는 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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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샤르의 기원은 약 50만 년 전. 이곳으로부터 4,300광년 떨어진 어느 성계에 있었다. 지금은 가볼 수도 없지만, 여전한 마음의 고향이자 아샤르의 뿌리다.
그 문명의 색채가 가장 진하게 남은 것이라면 단연 도량형이다. 테라르법이라 일컬어지는 길이의 단위를 예로 들자면, 1테라르는 아샤르 모성 지름의 10만 분의 1로 약 0.875m에 해당한다. 마찬가지로, 무게와 질량에도 그들만의 도량형이 있어 지금껏 바뀌지 않았다.
반면 달력은 가장 먼저 바뀐 것 중 하나다. 기준이 되는 환경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지만, 그래도 수십만 년에 달하는 고립문화권의 색채가 아주 진하다.
아샤르력도 1년이 365일, 달이 12개월, 한 달은 30여일이라는 것은 동일했다. 다만 그 시작은 지구의 것보다 보름이 빠르다.
아샤르의 달력은 10일이 1주에 해당한다. 한 달은 달에 맞추어 30일이며 오차는 1년에 1.15초 정도로 태양력의 27초보다 훨씬 정교하다. 이 오차는 달력의 남은 5일이자 축제로 쓰는 연휴, 즉 케르케스(大祝祭)를 정교하게 이동시키는 것으로 해결한다.
지구 문명권과 비교하자면. 마야 달력이 이와 가장 비슷한 특성이 있다.
2050년 12월 16일은, 아샤르력의 신년으로 29기(基)의 3755년의 1월 1월에 해당된다. 1만년이 1기로, 만 단위가 발생하면 적거나 발음하기 힘들기에 이리 묶어버린다.
그리고 그 전날인 2050년 12월 15일, 아샤르 달력으로 새해로 바뀌기 전 특별주의 마지막에, 지구 위성 궤도상의 베라 아샤르의 황궁에서 차비책봉식이 열렸다.
황족의 배우자가 같은 황족인 경우는 거의 없다. 그 극히 예외가 바로 아샤르 제국 제 9왕조 초대황제인 세라비 칼스 카이로, 그 정실황후인 세라비 세리사 엔야는 전대 황제의 딸이자 전 황태녀였다.
이것만으로도 그는 가족사가 독특한 황제로 역사에 남겠지만, 이제 그는 자신의 독특함에 다시금 몇 줄의 문장을 더했다.
제 2황후, 차비는 정략결혼에 가깝기에 대부분 백작가 이상의 대귀족이다. 게다가 그녀가 낳은 아이는 황제의 적자로 취급받으니, 황후보다는 처져도 여느 후궁들과는 격을 달리하는 내궁의 고위 인사다.
때문에 새롭게 황제가 등극하면,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대귀족들의 신경전도 적지 않은 편이다. 또한 황후와 차비, 둘 중에 누가 먼저 적자를 생산하느냐 역시 정치 역학과 진하게 얽혀 있다.
그러니 스스로도 배경이 없으면 상당히 고달파지는, 그런 애환의 자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번의 차비는 귀족은커녕 일반인도 아니었고, 오히려 그동안 원숭이 취급하던 지상인 출신이다.
특이함을 더 덧붙이자면, 그녀를 만나본 이들의 대부분이 놀라고 경악하는 것. 그것은 하필이면 황제의 전 약혼녀를 꽤나 연상시킨다는 점이다. 덕분에 그녀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 엄청난 물밑 논란에 휩싸였다.
“완전 다른 인물입니다. 말투도 성격도 행동도...”
만나본 이들이 알음알음 전하는 것이 있어 다소 가라앉았지만, 아직 그녀는 태풍의 핵이자 거미줄의 중심축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새 신부에게는 당장은 상관없는, 몸에 걸쳐진 무게에 비하면 가볍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죽겠어...!”
주인의 비명에 시녀장 테르네아는 달래기 바빴다.
“참으세요. 오늘 하루뿐이니까...”
새벽부터 치장을 당했고, 치렁거리는 세 겹의 드레스에 휘감긴 탓에 숨이나 제대로 쉴까 의문이다.
이래서 절하다 옆구리가 터질지도 모른다며, 황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었구나 싶다.
아사카와 루이코, 이제 황족 성으로 바뀌고 원래 성씨를 존호로 붙여 세라비 루이코 아사카와가 되는 그녀는, 만삭의 임산부처럼 호흡을 조절하기 바빴다.
친구의 한탄을 받아주며 옆에 앉은 하루가 말했다.
“뭐가 이렇게 옷이 겹칠까. 어지간한 예식이라면... 황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간소하다며...?”
시녀장이 말을 보탰다.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것이니까요.”
“의미...? 무슨 의미지?”
꽤나 시간이 걸려 겨우 말을 놓게 된 루이코의 물음에 시녀장이 말했다.
“한 사람의 짝이 된다는 것은, 타인이었던 영혼을 자신과 공유한다는 거에요. 가장 가볍게 여기지 않아야 할 가치이기 때문에, 결혼식에서의 신랑신부는 일부러 조금 무겁게 옷을 입습니다. 인생의 무게랄까요.”
문화적 차이라고 생각하지만, 자신이 평범하게 결혼했어도 웨딩드레스와 전통의상을 다 입어야 했을 거다. 그렇게 따지면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지만...
“저기, 황후마마도 그러셨어?”
“같은 정도였지만, 황후마마는 힘이 전혀 다른데요?”
불공평해...! 라고 내심 외칠 즈음...
“마마께서도 사용하시면 이 정도 무게는...”
“...그랬었어...!”
쓸 일이 전혀 없어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나도 능력자였다. 배운 대로 힘을 불어넣자, 천의 감촉만 있을 뿐 무게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고 호흡도 편해졌다.
사람을 해치는 힘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정말 편리하다!
“살 것 같아?”
머리단장을 마친 하루가 물었다. 그녀의 단장도 차비궁에서 맡았다.
“으응.”
“다행이네.”
루이코는 안도했다. 절하는 동안 힘에 겨워 헉헉대기라도 했다면, 분명 나중에 엄청 놀림 받을 거야.
“나 왔어.”
또 다른 여자가 들어왔다. 비록 활짝 웃지만, 그 등장에 순식간에 주변 공기가 단단해진 느낌이다.
“황후마마를 뵙습니다.”
허리를 숙이던 루이코는 아차 싶었다.
...이 정도로 터지진 않겠지?
“음... 아주 잘 됐네. 화장도 그렇고...”
세리사는 만족했다.
물론 루이코도 내궁에 들어온 이후 촌닭 모습은 벗었지만, 의식 일정이 잡힌 이후 며칠간 광내고 다듬은 보람은 있어 보인다.
역시 옷이 날개요 화장이 얼굴이다.
이제 때가 되었다. 루이코는 숨을 조절하며 배에 힘을 주기 바빴다. 세리사는 긴장으로 이해한 듯 했다.
“긴장하지 마. 들어가서 걸어간다. 인사한다. 책봉을 받는다. 그리고 자리에 앉는다. 끝이잖아?”
“하지만 쉽지 않을 것 같네요. 게다가 그게 끝나면 피로연에, 내궁 인사들의 인사도 다 받아야 하니...”
그녀가 상대해야 하는 인물들은 우현왕을 필두로 제후왕 중 여왕, 그리고 귀족가의 여당주 및 부인과 영애들이다. 이것만으로도 족히 2백을 헤아린다.
옆구리 터지기 전에 목이 부러질 판이다.
황후도 끄덕였다.
“하기야 나도 그랬으니...”
어느 여름날. 자신의 황태녀 책봉식.
꽤나 긴장하면서, 또한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한 사람의 얼굴을 남몰래 애타게 찾았었다.
생각해보면, 그 때는 철도 없었고 그저 그의 옆자리 하나만 원했을 뿐인데, 그 작고도 큰 소망은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반면 이 아이는 고작 반 년...
...아니야, 이 아이도 그동안 수많은 고비를 넘겨서 여기까지 왔어. 그리고 가장 어려울 때, 세상 끝에 홀로 던져진 것 같았을 때...
이 미약한 몸으로도 내 편을 들어준 그녀.
이제는 내가 편을 들어주어야 한다.
“자... 이렇게...”
마지막 마무리를 직접 해주는 것은 그런 의미이다. 알 리 없는 루이코는 밝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자, 갈까? 폐하도 꽤나 긴장하시던데...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 하면 안 돼.”
“...긴장요?”
별로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 장난꾸러기가...?
옥좌주탑에 모인 이들은 1만 단위를 헤아렸다. 베라 황궁으로 황실이 이사한 다음, 각 공중도시의 시민들도 비전투원의 경우에는 거의 다 귀환했다.
모인 이의 대부분은 왕공귀족과 조정과 군의 고위층이었지만, 신영토와 세계 각국의 인물들도 섞여 있었다.
“어마어마하네요.”
지난 번 덴노 방문이 에이어 황궁을 다시 찾은 취재진들의 공통적인 반응이었다.
25㎢가 넘는 방대한 면적에 하나같이 장대한 건물들. 금을 입히고 은을 바른 것은 아니었지만 그 장엄함은 압도적이다.
8개의 거대 공중도시와 직경 100㎞가 넘는 거대모함, 그리고 3만 척 이상의 군함을 운용하고 있는 압도적인 국력. 그 상식 외의 격을 이 황궁 하나가 증명해준다.
지구가 앞으로 1만년 더 발전했다 해도 이만큼을 자신할 수 없을, 그런 강력하고도 앞선 문명이다. 지금은 지구의 일부 지배에 만족하고 있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세계정복도 어렵지 않겠지.
그렇게 경계하는 자가 있다면, 다소 급진적이고 철없기는 했지만 개혁지지파라 할 수 있는 지구 인류도 이제는 분명히 존재한다.
물론, 아직은 경계와 질시가 훨씬 많지만 말이다.
그 모든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자, 아샤르 황제 세라비 칼스 카이는 옆자리, 정실부인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그 뜻을 아는 그녀도 조금, 마주 힘을 주었다.
아샤르에도 들러리 문화는 있고, 오늘의 들러리는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질질 끌리다시피 늘어지는 길고 하얀 베일의 끝을 붙잡은 하루는, 역시 늘어지는 친구의 치마 끝을 밟지 않으려 애를 썼다.
옷 때문이 아니더라도, 루이코는 다시금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문에서부터 옥좌 앞까지 걸어가는데 한 세월이고, 또한 숫제 숲을 이루다시피 한 사람들과 그 시선을 뚫고 한참을 가야 한다...!
아아, 몇 번이나 갔는데도, 어쩐지 또 화장실 가고 싶다...!
그래도 온 정신을 집중해서 끝까지 걸어가는데 성공했다 싶더니, 옥좌 바로 아래 계단에 도달하자 그녀는 꽤 비틀거렸다.
아무래도 너무 긴장한 탓이겠지만, 무릎이 꺾이기 직전 온힘을 들여 간신히 넘어지는 것은 피했다.
좌중이 조금 웅성거렸지만, 분명 알아채고 힘을 써 막아줬어야 할 황제는 그러지를 않았다.
오히려...
“아무래도 차비는, 한시바삐 짐에게 시집오고 싶은 모양이다.”
그는 쿡쿡 웃었다.
“괜찮아. 절은 천천히 해도 돼.”
좌중의 낮은 웃음소리가 키득키득 들리는 가운데, 루이코는 베일 안이라 얼굴이 직접 노출되지 않음이 다행으로 생각했다.
...옥좌주탑에 혹시 쥐가 쏠아놓은 구멍이라도 없나...!
하루와 테르네아의 도움을 받아가며 배운 대로 세 번.
신하이며 내궁의 일원, 그리고 당신의 여자이자 가족의 입장에서 올리는 세 번의 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꿇어앉는다.
옥좌에서 내려온 황제가 그 머리, 베일 위에 손을 얹어 축복했다.
“아샤르 황제 세라비 칼스 카이가 선언하니, 제국력 29기 3754년 케르케스(特月) 5일에, 세라비 루이코 아사카와를 차비로 책봉한다. 덕망 있고 아름다우며 만인에게 사랑받는 이가 되길 바라마지 않는다.”
이어 황후가 가족의 일원이 됨을 축하하며, 차비의 두 손을 잡아 일으켜 새로운 자리로 인도했다.
“엘라스...!”
총재를 필두로 큰 함성이 옥좌주탑을 울렸다.
무려 2천 하고도 3백년 만에, 고향으로 완전히 돌아온 그들은 비로소 마음껏 소리를 질렀다.
미래를 향한 길, 그 축제의 시작이었다.
수고하셨어요.
- 작가의말
시작은 루이코의 굴ㅋ욕ㅋ ...저런 장난꾸러기를 남편이라 모시고 살아야 하는 그녀의 앞길은 참... ㅋㅋㅋ 이 권에서 그녀는 몹시도 쓰라린 시련이 하나 예정되어 있습니다만, 또 잃은 것만큼 얻는 것도 있겠죠.
그리고... 황제의 통치는 처음부터 티격태격으로 시작합니다만... 단지 미리 말씀드려야 하는 부분은 이제부터 정치 부분이기 때문에 어떤 형식의 정치적 사상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만, 이들의 것이라고 해서 정답은 절대 아닙니다. 작가의 정치적 성향도 반드시 반영하진 않습니다. 그러니 이 점은 양지하시고...
그렇다고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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