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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왕k님의 서재입니다.

리어스(Re 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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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왕k
작품등록일 :
2014.01.14 00:13
최근연재일 :
2021.06.12 14:54
연재수 :
380 회
조회수 :
573,710
추천수 :
9,808
글자수 :
3,615,518

작성
14.02.05 15:18
조회
2,412
추천
50
글자
72쪽

Ⓡ 7장. 듣고 싶지 않았던 말.

한 권이 끝날 때, 가슴에 남는 글이 되길 바랍니다.




DUMMY





한동안 그저 걸었다.


아직도 맺힌 눈물을 닦으며, 여전히 느껴지는 그와 그 사악함의 감촉을 떼어내려는 듯 루이코는 몸을 떨었다.


지금 이 혐오감은 그를 향한 것만은 아니다. 아무리 협박당했다지만 결국 나도 타락한 거다. 집에 돌아가고 싶은 욕심에 타인을 해치는 계획에 동조한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 알 수 없는 눈물이 배어나왔다.


뛰어볼까. 숨이 턱에 닿도록 뛰고 나면 이 아픔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을까. 달리다가 정말로 숨이 끊어지면 이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에 루이코가 조용한 복도를 달려 나가려는 찰나, 부드럽지만 강한 힘으로 누군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놀라고 분노해 자신도 모르게 뿌리치려 했지만, 돌아본 루이코의 눈이 이내 커졌다.


“당신은...?!”


세리사가 쉿,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댄다. 루이코는 고개를 절로 떨어뜨렸다.


지금은 그녀를 볼 면목이 없다. 바로 얼마 전, 그녀의 자리와 입장을 갈아엎을 계획에 동조하고 나오지 않았던가. 다시 한 번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소용없다.


“왜 울어...?”


하필이면 가장 들키지 말아야 할 사람에게 들킨 것은 아닐까. 루이코는 급히 얼버무렸다.


“그냥, 우울해서요...”


루이코는 모른다. 세리사는 진작부터 루이코가 그의 방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영자력 전수는 시간이 제법 걸릴 텐데, 나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서로 헤어지고 뒤쫓듯이 루이코가 그에게로 갔다.


무슨 일일까, 생각을 거듭하던 도중 굉장히 불안한 상상에 도달해버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이쪽으로 오던 차, 루이코가 울면서 지나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었다.


칼스는 루이코에게는 친절했는데 왜 울린 걸까. 설마 뭔가 몹쓸 짓이라도 한 걸까...? 하지만 모습을 보아하니 그런 것 같진 않다. 무슨 일일까.


한숨을 조금 쉰 황태녀가 루이코의 손을 끌었다


“내 방으로 가자. 이야기를 듣게.”


“네...? 하지만...”


“괜찮아.”


어제 도망치듯 빠져나온 곳에 돌아온 루이코는 몸 둘 바를 찾지 못했다. 그만큼 화를 내고 돌아섰는데...


하지만 세리사는 그녀를 앉히고 자신도 마주 앉았다.


“자, 울지 말고. 어렵고 불편하고... 슬픈 점이 뭐야?”


루이코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제게... 물어주시는 이유가 뭐에요?”


“오늘부터 영자력 수련인데 너무 빨리 왔고... 그리고 그의 방에서 나왔어. 그리고 울고 있었고. 이유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차라리 그녀에게 모든 것을 밝히고 용서를 빌까. 하지만 믿어줄 수 있을까. 용서받을 수 있을까.


그러나, 이후 루이코가 세리사의 편을 든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계약 파기라 판단한 그가 잔혹하게 대할 가능성은 절대 낮지 않다. ...입을 다물어야 한다.


“죄송합니다. 그냥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집 생각이 나서요.”


“...그래? 역시 여긴 너무 불편하겠지...”


황태녀는 문득 조금 고개 숙이며,


“...어제는 미안했어. 너무 우리 생각만 한 것 같아.”


루이코는 의아했다. 어제 일을 황태녀가 책잡는다면 앞으로의 생활이 순탄치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녀 쪽에서 용서를 구하다니...?


“아닙니다, 저야말로... 사실 그렇게 화낼 처지가 아닌데, 그냥 너무 갑작스러워서...”


도착 이틀만이었으니 너무 빠르긴 했다. 협상이나 제안이라는 것은 상대가 받아들일 여지가 있을 때 하는 것이다.


황태녀는 거듭 겸연쩍게,


“갑작스럽긴 했지만, 역시 영자력 전수로 그가 다치는 것은 피하고 싶었거든. 그리고, 우리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앞섰고... 그건 너희들도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거든.”


세리사는 계속 루이코의 눈치를 살피며,


“비록 앞으로 피가 흘러도, 그건 너희들의 죄는 아니니까. ...하지만 네가 그렇게 화낼 줄 알았다면 하지 않았을 거야. ...정말 미안해...”


그녀는 순진하게도 오히려 다시 사과했다. 하지만 그 사과는 루이코의 마음을 더더욱 아프게 했다.


조만간 닥쳐올 암흑의 미래를 황태녀가 상상이라도 할 수 있을까. 그 구린 녀석에 제대로 대항이라도 할 수 있을까. 아냐, 구리기로는 이제 나도 그에 못지않고...


“아닙니다. 저도... 며칠 집에 못가는 것도 이리 괴로운데, 여러분들은 더할 거라는 생각을 하니까, 조금은 이해했어요. ...물론 여전히 받아들이긴 힘들지만.”


세리사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그래. 이해줬다니 정말 다행이야.”


“그런데... 그가 다치다뇨?”


“그게... 타인에게 우리 힘을 가르친다는 것은 분명 무리수인데도, 그는 강행하고 있어. 이건 이상하거든.”


그녀는 거듭 갸웃거리며,


“스스로를 지킬 힘이 필요하다면 가르치면 되는 것을, 굳이 힘을 잘라내서 네게 옮긴다. 그렇게 스스로를 깎아내는 짓을 하다니...”


“그게 그렇게 부담이 되나요?”


루이코는 의아했다. 그는 매우 강한 사람이고 별 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하지만 유키나도 격렬히 반발했고, 이렇게 사이가 나쁜 세리사도 싫어한다. 이유가 뭘까.


“상당히. 상세하게는 말해줄 수 없지만...”


“하지만... 어제 물었던 거지만, 그에게 손해가 가는 일은... 외람되지만 전하께는 이득이 아닌가요?”


“그런 이득은 필요 없어.”


황태녀는 잘라 말했다.


“무고한 너희를 위한 일이잖아. 아무리 사이가 나빠도 그런 걸 약점 삼아서 이용하고 싶지는 않아.”


바로 그런 더러운 짓을 그가 하고 있음을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리고 그에 비하면 그녀는 100배쯤은 바르고 선량한 사람이라고... 비로소 느낀다.


“아무리 사이가 나빠도 우린 동족이야. 그가 다치는 것은 원하지 않고... 물론 지금도 서로 긁어대는 사이지만, 그래도 예전에는 좋은 추억이 많았으니까...”


급격히 궁금증이 일어난다. 시커먼 꼬리를 숨기고 있는 저 악마를 그녀가 왜 사랑했을까. 지금 그와 사이가 나쁜 것도 어쩌면 그의 구린 점을 발견해서였을까.


하지만 그랬다면 지금처럼 좋게 생각해줄 이유가 없다.


“좋은 추억이라... 그도 전하께 잘했던, 그런 착했던 시절이 있었나 봐요?”


대답대신 황태녀는 풋 웃었다. 루이코가 보기에도 굉장히 화사한 미모다. 이 미소를 위해서라도 그는 그녀를 울려서는 안 되었을 것 같다.


잠시 넋을 잃고 그 표정을 바라보다 아차 싶었다. 유키나가 당부한 말이 있지 않은가. 그녀 앞에서 그의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아, 저... 죄송합니다.”


“괜찮아. ...그런데 왜 미안하다는 거지?”


세리사는 정말 모르는 표정이다. 그럼... 두 왕이 거짓말이라도 한 걸까.


“그건... 함부로 두 분 이야기, 그것도 지난 일에 끼어드는 거 같아서요. 죄송해요. 더 안 물을게요.”


“...잘못하면 내가 속상할까봐 그런 거지? 아무래도 싸우고 있는 대상이니까.”


정곡을 찔러 루이코는 당황했지만, 오히려 황태녀는 지금껏 보지 못했을 정도로 소리 내어 즐겁게 웃었다.


“아하, 설마 칼스나 유키나가 뭔가 말했던 건 아냐? 내 앞에서 함부로 칼스 이야기를 하다가는 화를 돋울지도 모른다고.”


“어떻게 아셨어요?”


루이코는 자신도 모르게 대답하다 입을 가려버렸다.


“하기야...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지만...”


세리사의 밝았던 표정은 조금 어두워졌다.


“아마 그들이 그리 말했던 건, 내 앞에서 네가 자칫 잘못 입을 놀렸다가는 미움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일 거야.”


“솔직히 저도 굉장히 걱정했거든요. 하지만 생각 이상 잘해주셔서... 조금 놀랐어요.”


“그래? 하지만 내가 사람의 외모나, 아니면 과거 일 때문에 괴롭힐 거라 생각해?”


“아닙니다. 그런 분이 아니실 거라는 거, 진즉에 알고 있었어요. 저도 들었어요. 아주 예전에 많은 사람들을 구하셨다고요. 그것도 지구인들을...”


“그 이야기는 하지 말아줘...”


굉장히 아픈 표정으로 황태녀가 손을 쥐어왔다.


“...아무튼 여기서는 편하게 지내. 르아냐에 외부인이 온 것은 처음. 그러니 어떻게 해줘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렵고 불편한 점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하고... 그리고 혹시 그가 뭔가 괴롭힌다면 역시 언제든지 말해줘. 내가 힘닿는 한 막아줄 테니까. ...알았지?”


“...네.”


루이코는 내심 기뻤다.


말이란 그 내용보다도 누가 하는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루이코를 친구라고 말해주었던 그의 말은 지금 생각하면 굉장한 위선이지만, 그녀의 지금 발언은 아마도 진심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루이코는 절망하고 말았다. 어제는 너무 실망한 나머지, 그녀도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해 버렸다. 그녀를 끌어내릴 음모에 간단히 가담한 건 그 선입견도 분명 있을 것이다.


지금 와서 도와달라고 하기에는 늦어버렸다. 입이 찢어져도 이제는 말할 단계가 아니다. 1시간만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그의 방에 뛰어 들어가기 전에 그녀를 만나서 고충을 토로할 수 있었다면 이런 결과는 나오지 않았을 텐데...!


순수하게 도움을 요청하고, 같이 머리를 마주 대어 고민 정도는 할 수 있었을 텐데...!


짙은 후회가 온몸을 휩싸는 그 어두운 표정에, 세리사는 여전히 속도 모르고 말한다.


“그렇게 집에 가지 못할까봐 걱정 돼?”


“네? 아, 네...”


“하지만 칼스라면 어떤 복안이 반드시 있겠지. 그는 뱉은 말은 반드시 지켜왔어. 할 수 없다면 못한다고 분명히 이야기했을 거야.”


단호한 표정에 루이코는 의구심이 들었다. 이 여자, 어째서 이토록 신뢰하는 걸까.


“저는 솔직히... 좀 믿기 힘드네요.”


“이상하네... 너는 그래도 그와는 말도 트잖아? 그만하면 꽤 친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와 다투는 나보다도 그를 못 믿어?”


“저는 아직 그를 잘 알지 못하니까요.”


“그런가? 하기야 나도 처음에는 그랬으니까. ...짓궂고, 장난 좋아하고, 별로 배려해주지도 않고... 일단 첫 만남부터 최악이었으니까.”


루이코도 끄덕였다. 120%쯤은 동감이다. 그리고, 이 상황에 와서도 남의 과거에 궁금증이 들기 시작하는 자신을 채찍질했다.


정신 차려, 너는 지금 일생일대의 위기라고.


하지만 정보라는 차원에서는 들어두는 것이 좋을지도. 많이 알면 알수록, 자신의 정조는 물론 신변을 지켜낼 수 있을지 모르니.


“어떻게 만나셨어요? 참, 묻지 않는다고 했는데...!”


루이코의 섣부른 질문에 그녀는 조금 고개를 꼬며 배시시 웃는다. 미워하고 차갑게 대하는 저 사람과도, 어쩌면 즐거운 추억 하나나 둘 정도는 있었을까.


“왜? 듣고 싶어?”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래요. 전하께서 그 사람을 좋아하던 시절이 있으셨다고 들었어요...”


“그랬지. 그 때의 그는 내게 매우 잘했으니까.”


세리사의 표정은 달콤함과 씁쓸함이 같이 묻어 있다. 루이코가 다시 물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를 보면 도저히 뭐랄까... 연관이 되지 않잖아요. 장난이나 치고, 항상 속도 모르게 음흉하게 웃고... 당최 좋은 점이 없는데...”


“...그가 너를 그렇게 대해...?”


“심해요... 견디기 힘들 정도로.”


투덜거리던 루이코는 놀라고 말았다. 세리사의 표정에서 옅게나마 분명히 있었던 달콤함은 사라지고, 방금 부모의 초상을 당한 것처럼 슬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그는 너를 그렇게 대하고 있구나.”


“저기... 제가 뭔가 잘못 말했나요?”


“아니, 괜찮아.”


세리사는 다시 웃었지만 뭔가 억지스럽다. 루이코는 그렇게 느꼈다. 역시 내가 무언가 잘못 말한 건가?


잠시의 침묵 끝에 세리사는 털어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각도 없었어. 내 어머니가 날 낳고 돌아가시기 직전에 그가 그의 어머니, 전대 좌현왕비와 함께 날 보러 온 적이 있었다고...”


그녀는 태어나서 한 달 만에 어머니를 잃었다.


“그때 내 어머니가 그에게 부탁을 하셨다고 해. 눈도 제대로 못 뜬 아기였던 나를 잘 부탁한다고. ...오빠니까 잘 지켜주라고...”


“그래서요...?”


“그가 대답했다고 해. 나보다 고작 네 살 많을 뿐인, 아직 어린 아이인데도 ‘지켜주겠습니다. 평생을, 그리고 목숨을 걸어서.’ 라고... 그렇게 자신 있게 말했대.”


어쩐지 어색하면서도 진지했을 그 당시의 분위기가 느껴져, 루이코도 내심 조금 웃고 말았다.


그 녀석, 어릴 때부터 잘난 척의 떡잎이 있었구나. 꼬맹이 주제에 평생 운운 하다니.


“나는 유키나와는 달랐어. 황녀궁 안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그를 본 적은 없었어. 하지만 즐겁게 기대했지. 내게는 날 지켜주겠다던 사람이 있어.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즐겁게 상상하며 기다렸어. 어떤 사람일까, 분명 자상하고 배려 깊은... 멋진 사람일거야. 물론 두려움도 컸지만 기대감도 분명히 있었어. 하지만...”


그녀는 조금 분한 듯 가볍게 몸을 떨며,


“그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어. 처음 만난 순간부터 놀림이나 받고, 줄곧 아이 취급이나 당하고...”


“알만 해요.”


차츰 그녀와는 동지의식이 생기고 있다.


여자들의 대화에서 최고의 윤활유는, 술이나 차가 아니라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다. 남의 이야기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건 실망, 혹은 싫어할 이유가 되지 않나요?”


“하지만 그는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줬어.”


세리사는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살아가는 목표도, 누군가의 윗자리의 무게도. 그리고... 타인에 대한 배려와 생명에 대한 존중도 말이지. 그 뿐일까. 위험을 무릅쓰고 내 목숨까지 한번 구해주었고. ...그 시절의 그는 내 우상이었고 지침이었지.”


믿을 수 없어...! 루이코는 소리칠 뻔 했다.


타고난 악당은 없다고들 해도, 그 예외가 가까운 곳에 있잖아. 지금의 어딜 봐서 그 녀석이 우상에 지침일까.


“그 때부터 나는 그가 좋아졌고, 오래 사랑했어. 하지만 아직 어린아이일 뿐인 나에 비해, 그는 훨씬 빨리 어른이 되겠지. 따라잡으려면, 그의 눈에 들려면... 그래서 죽도록 노력했지만 그는 알아주지도 않고 결국 아미에에게 갔어. 참, 아미에는 칼스의 약혼녀 이름이야.”


“알아요. 들었으니까. 그러면... 굉장히 속상하셨겠네요. 그럼 그것 때문에 그가 미워지셨나요? 지금처럼 사이가 안 좋아진 계기였다던가...”


세리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야. 그가 누굴 택하든 그의 마음은 그의 것이니까. 이건 또 다른 사정이 있지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다만, 그와는 앞으로 나아질 기미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불편해하거나 의아해하지 않았으면 해. 그리고 이것에 대해서는 더는 묻기 없기. 알았지?”


“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너무 시간을 끌었다. 그래도, 그녀가 생각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자 마음은 상당히 편해졌다.


하지만 순간 루이코는 양심이라 부를 수 있는, 마음의 한 구석이 심하게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앞으로 그녀는 나를 원망하게 되겠지. 죽을 정도로 미워할지 몰라. 난 너무나 못할 짓을 하고 말았어.


하지만 루이코는 결심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칼스의 말에 따르지만, 만약 세리사가 정말 곤경에 처한다면... 지금부터라도 그녀를 도울 방법을 생각해야 할 거다.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조금은 진정되었어요...”


루이코는 꾸벅 인사를 하며 일어섰다.


“이젠 하루에게 돌아가 봐야 해요. 그리고...”


이런 말을 하고 싶은 자신이 너무나 싫다. 하지만...


“염치없지만, 다시 상담하러 와도 될까요?”


“환영할게. 그리고... 오늘 나눈 이야기는 그에게는 비밀로 해줘.”


황태녀는 순진하게도 잔잔한 웃음을 입가에 흘리며 ‘잘 가’ 라며 손을 흔든다.


방을 나온 루이코는 무거운 기분으로 복도를 걸었다.


나는 이 웃음을 받아들일 면목이 없어. 하지만 다시 그녀에게 갈 수 있는 기회는 남겨두고 싶어.


지금의 내 고민과 고통을 그녀가 조금이라도 용서하고 이해해 준다면, 그때에는 엎드려 자비를 구걸해야 한다 해도 기꺼이 할 수 밖에. ...그리고...


이제 한동안 또 다시, 극악무도한 저 녀석의 기분이나 맞춰야 할 거야. 잠시라도 믿었던 탓에 자신의 운명은 더럽게도 꼬여버렸다.


하지만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세리사는 루이코의 앞에서 그에 대한 악평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듣지 않는다고 해서 남의 이야기를 나쁘게 하는 것은 잘못된 행위지만, 그만큼 서로 긁어대는 사이라면 조금쯤은 해도 무방할 텐데 그러지 않는다. 오히려 대화 군데군데에서 다크 초콜릿처럼 씁쓸함과 달콤함이 함께 묻어났다.


밉지만 옛정이라도 남아 있다는 걸까. 그럴지도 모르지. 가슴에 함부로 손을 대 뺨을 쳐서 쫓아 보낸 첫사랑의 그 소년도, 우연히 길거리에서라도 다시 만난다면 조금은 기쁠 거야.


잘 지내냐고 인사하고, 술 한 잔 가볍게 먹으면서 그때는 그랬다고 웃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지도. 물론 술김에 새삼 싸울 수도 있지만 인생은 모르잖아. 정말 모르는 일이잖아. 영원한 사랑이 없는 만큼, 증오나 미움도 어쩌면 희석될 수 있잖아.


하지만, 행복했던 시절조차 타인에 대한 혐오로 바꿀 정도로 인간의 감정은 잔인하다. 이걸 생각하면... 비록 그 녀석이 원망스럽고 밉지만, 아직까지 모든 것을 단정 지으면 안 된다.


녀석의 죄는 미워해도, 사람 자체를 미워하면 나까지 추해져. 난 그렇게 살지 않아.


남은 시간은 조금 있을 테니까 잘 관찰하자. 어쩌면 나와 황태녀를 모두 구할 수 있는, 무언가의 길이 보일지도 모르니까.








오후는 좀 쉬고 싶다. 루이코는 그리 생각했지만, 그 녀석은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르아냐 구석, 작은 정자로 끌고 온 그는 유들유들 웃으며,


“지금부터 영자력 전수를 할 거야. 아침에 빼먹었으니까. 불만은 없겠지?”


“...지금에 와서는 내가 싸울 일도 없을 텐데...”


“해 둬. 아니면 너와 내가 지금부터 보낼 시간에 대한 설명이 안 돼. 우리가 정분이 났다 주장하려면 시간은 좀 끌어야 할 거고, 무엇보다 배우러 나간 네가 전혀 변화가 없다면 세리사가 의심할 테니.”


“...알았어.”


전수라 해도 복잡하지 않다. 그저 풀밭에 누운 자신에게, 심폐소생을 하듯 빛을 두른 손으로 머리와 배를 누르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는 깊은 한숨을 뱉은 후,


“...뛰쳐나간 후 갈 곳이, 겨우 세리사의 옆이었냐.”


그야말로 인간 레이더니 부정할 수가 없다.


“...별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고?”


“그래도 조심해. 세리사도 눈치가 있어. 쓸데없는 소리로 일을 망치면 에노모토도 집에 못 돌아간다고.”


걱정해주는 척 하지 말라고. 당신은 내가 잘못되면 하루에게라도 손을 뻗을 사람이야. ...둘까보냐...!


“그리고 당분간은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을 줄여. 아침에 불러낼 테니 자기 직전에 들어간다고 생각해.”


“그만큼이나? 하루 온종일?”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며칠 고생해.”


불만을 말해도 소용없다. 그리 말하듯 그는 웃었다.


이어진 수련이라 해도 별 것 없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눈에 띄게 할 수 있는 것이 늘어난다. 염동력이 그 시작이었다.


“이미지를 확실하게 떠올리고, 머릿속으로 뭉친다는 느낌을 계속 유지해. 그리고 시선으로 보낸다. 힘은 이미 있어. 반드시 할 수 있어.”


꿈쩍도 하지 않는 공을 향해 루이코가 몇 번이고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가 이리저리 지적해가면서 가르친다.


“의심은 버린다. 걸을 때 의식하지 않고 걷듯 무심하게, 당연하게 한다는 생각으로 가.”


몇 번의 실패가 거듭되고 비로소 공이 움찔거리자, 깜짝 놀라 집중력을 흐트러트리는 즉시 질타가 이어진다.


“집중해. 남편의 불륜을 미행하는 부인처럼.”


비유 하고는...! 오히려 흐트러지겠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차츰 떠오르는 공. 눈으로 보기에도 믿기지 않는다 생각하는 순간 다시 공이 떨어진다. 어쩐지 한심한 시선의 그가 말했다.


“의심하지 말했지? 놀라지도 마.”


“어째서 이걸 보고 놀라지 말라는 거야? 나는 보통 사람인데... 솔직히 방금 기절할 뻔 했어.”


“영자력은 생명 에너지. 동시에 영혼 에너지야. 너의 의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같은 힘이라도 효과가 달라. 마음을 굳게 먹으라고.”


그렇게 이어진 수련. 그리고 그 때 숲을 달리면서 느꼈던 것처럼, 인간을 초월하는 힘을 배우며 느껴진 즐거움은 가끔 루이코를 당황하게 했다.


나도 이제 초능력자다. 평범하게 살았던 나에게 강한 힘이 주어진다. 어쩐지 들뜨는 마음이지만, ...안 돼...!


그녀는 문득 불안해졌다. 앞으로 그에게 배워갈수록,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늘어날수록 나는 나로 남을 수 있을까. 스스로의 노력으로 얻은 힘이 아님에도, 힘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깔보거나,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되진 않을까.


그렇게 차츰 힘에 도취되어, 나 스스로를 다른 이들에게서 단절시키지 않을까.


힘을 얻었다는 즐거움과, 그 힘으로 인해 변해간다는 두려움이 몇 번이고 교차된 루이코. 하지만 그는 그저 열정을 드러냈다.


“자, 다시 해 보자.”


그 후로 며칠 동안 변화는 없다. 다만 바빠진다는 핑계로 칼스는 당분간 식사 참가도 막아버렸다. 이후 모든 식사는 배달로 바뀌었다.


“정말 괜찮은 거지. 이렇게 그 녀석과 계속 있어도...”


갑자기 얼굴도 보기 힘든 탓에 하루가 물어왔지만,


“정말 괜찮아.”


하루를 속이는 데 높은 연기력이 필요하지 않았겠지만, 루이코는 혹시 의심을 살까봐 진땀을 빼곤 했다. 그녀에겐 다행히도, 모처럼 재구축한 신뢰를 잃을까 두려웠는지, 하루는 집요할 정도로는 캐어묻지 못했다.


어려운 이론 같은 것은 그가 가르치지 않지만, 모르는 것이 나올 때마다 질문과 대답이 이어지는 수업 같은 분위기가 며칠 동안 계속된다.


이제 생각만 해도 공을 띄우고, 빠르진 않지만 이리저리 움직일 정도도 되었다. 장차 아침 자명종 정도는 쉽게 끄게 되겠지.


이어 영자력탄과 몸을 감싸는 방어막까지 진행되어, 손을 대지 않고 꽤 큰 돌도 부수고 그가 날린 돌멩이를 막을 수 있게 되었다. 힘도 속도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난다.


“슬슬 때가 되었어.”


수련 시작부터 일주일 째, 마침내 그가 말했다.


“네가 마음의 준비를 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지?”


그의 얼굴은 이미 악마의 완전체로 진화했다.


“밤이 깊어지면 혼자 산책한다, 그리 말해두고 내 방으로 와. 물론 깨끗이 씻고.”


루이코는 낮게 신음했다. 바야흐로 정조의 위기. 이제 나는 녀석의 하렘, 그 1번 타자가 된다.


야한 옷을 입고 물담배를 피우면서 뭇 여자들 속에 섞인 꼴을 생각하니, 춥지도 않은데 새삼 오한이 들었다.


“그럼 잊지 마라.”


그는 즐거운 듯 가버렸다. 루이코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철제 정조대를 몇 겹 껴입어도 이 녀석의 힘 앞에서는 전혀 무력하겠지. 그냥 땀을 실컷 흘린 다음 목욕도 하지 말고 꾀죄죄한 모습으로 있어볼까. 아니면 생리중이라고 거짓말이라도 해 볼까. 별별 생각이 다 뇌리에 스치는 가운데, 루이코는 급격히 우울해지는 마음을 다잡으며 방으로 돌아왔다.


이제부터 벌어질 일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될까. 아니면 생각하긴 싫지만 이 불운의 종착점이 될까.


지구 달력으로 계산해보니 오늘은 5월 3일이다. 원래대로라면 한참 골든 위크(Golden Week)에 신이 나 있었을 거다. 하루랑 쇼핑도 가고 아키라랑 바이크도 타고 밀린 만화책도 실컷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런데...!


지금은 여기서 엉뚱한 협박이나 받고 남의 세력다툼에 끼어들고 고향의 안전을 위협당하고 어떻게든 정조를 지켜보려 고군분투하고 있다. ...아휴, 내 인생아...


이렇게 빠르게 운명의 날이 올 줄이야. 게다가 오늘 밤으로 효과가 없다면, 상상하기 싫지만 동거를 요구할 수도 있다. 눈칫밥도 이런 눈칫밥이 또 있을까.


갖은 불안 속에서도 루이코는 의아했다. 시키는 대로 박박 씻고 진지하게 속옷을 골랐다. ...어째서?


최후의 순간에는 핀잔을 듣고 싶지 않은 걸까. 아니면 그와 마주하면서 진짜로 얼굴에 넘어가기라도 한 걸까. ...말도 안 돼.


시간이 되었다. 그 누구의 눈에 띄지 않음에 감사하면서, 그녀는 그의 방으로 조심스레 향했다.




늦은 밤, 뜻밖의 열기가 피어올랐다. 칼스는 난감한 표정으로,


“루이코 너, 정말 처음 맞아? 이건 너무 대담한데...”


“후우... 당신이 서툰 거겠지. 왜 이래? 경험자라면서.”


“오호. 그렇다면 이건 어떠냐...?!”


“아아, 그렇다면...!”


루이코는 손에 쥔 바둑알을 딱 하고 내려놓았다. 어느새 승부욕에 불타고 있다.


내게 흑을 준 것을 후회하게 될 거야. 직접 둬 본적은 그다지 없지만 우리 아빠는 급수가 좀 있었다고. 옆에서 지켜본 경험도 무시하지 못할 걸.


그의 방에는 바둑판도 있었다. 그도 바둑은 나름 두었다고 했는데, 바둑판이 빽빽하도록 열을 올리다가 결과를 보니 루이코의 한 집 반승이었다. 단은커녕 제대로 된 급수도 없는데 이길 줄은 생각도 못했다.


루이코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처음으로 이 녀석에게 이겼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신경을 딴 데 쓰고 있다.


이 시간에 여자랑 한 방에 있는데 긴장도 안 되는 걸까. 덮치는 대신 뜬금없이 바둑 제안을 할 때부터, 그는 어쩐지 매사에 건성이다.


1분 1초라도 더 늦추고 싶다. 그녀가 물었다.


“복수전은 받아줄게. 어때?”


“됐어. 이미 자정이 넘었다. 그리고 지금쯤... 세리사는 끓어오르고 있겠지.”


“하지만 지금껏 황태녀는 가만히 있잖아? 그 잘난 계획도 보기 좋게 실패하는 거 아냐?”


“흥. 절대 실패하지 않아. 왜냐하면...”


그는 기분 나쁜 웃음을 만면에 흘린다.


“세리사는 내게서 절대 들으면 안 되는 한 가지 말과, 그 앞에서 내가 절대 하면 안 되는 한 가지 행동이 있어. 이 두 가지가 합쳐지면 죽기보다 더 괴로울 터. 그 중 행동에 해당되는 부분이 지금 하고 있는 이거야.”


“...당신이랑 나랑 같이 있는...?”


“맞아. 고로 지금 세리사는 속이 뒤집어질 거야. 듣지 말아야 할 말까지 덧붙여주면, 반드시 힘으로라도 저항한다. 이건 내 모가지를 걸고 장담할 수 있어.”


“뭔가 쌍욕이라도 하는 걸까? 그리고... 문득 생각났는데 우현왕, 유키나는 왜 빼놓았지?”


“응? 무슨 말이야?”


그는 모르는 척 고개를 꼬았지만 루이코가 추궁했다.


“생각해보니 이상해. 당신은 그 여왕을 모든 일에서 제 3자처럼 취급하고 있잖아. 그녀는 이 모든 일에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아.”


유키나는 칼스와도 세리사와도 두루 친밀하다. 그녀는 중립이라고 몇 번이나 들었지만, 장차 루이코가 새언니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도 아무 감흥도 없을 것이다, 그리 기대하는 이유가 있나...?


하지만 그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아무래도 대답해 줄 생각이 없나보다.


“됐어. 그보다도 밤이 깊었다.”


올 것이 왔나. 루이코는 마음의 방어 준비를 하면서 긴장된 몸을 움츠렸지만, 바둑판을 치운 그는 방석을 한번 접더니 베개 삼아 그대로 누워버렸다.


“침대 줄게. 올라가서 자.”


“...무슨 말이야...?”


“오늘은 안 건드릴 거다.”


뜻밖의 말에 루이코는 망설였고 또 의아했다.


인격이 바닥인 이 녀석에게 지금 장소는 아주 잘 어울리지만, 또 따로 사람이 누울 곳은 없지만 엄연히 주인이 있는데 덥석 침대를 차지하려니 좀 그렇다.


대체 무슨 속셈일까. 환심을 사려는 행동도 아닐 것이다. 이미 공모 단계에서 내 신뢰를 잃었으니.


“...수상해... 무슨 선심이야?”


“감사는 못할망정 의심이냐.”


“하지만 말이랑 다르지 않아? 또 무슨 꿍꿍이야?”


“하려면 모든 상황을 종료시키고 느긋하게 하지. 지금처럼 밖의 동향에 신경 쓰면서 널 껴안고 더듬기에는 정신이 사나워. 만의 하나지만, 혹시라도 갑자기 덮쳐올 때를 대비해야지?”


한참 열중할 때 등짝에 칼이 꽂히는 것은 싫다. 그에겐 그 생각뿐인 모양이다. ‘네가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려 줄게.’ 같은 빈말이라도 해줄 생각은 없는 거지.


“안심이 좀 되냐?”


그 말대로 루이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언제든지 습격당할 수 있다는 말에 살짝 소룸이 돋았다.


“저기, 황태녀는... 지금 어디에 있어?”


“힘을 숨기고 있어. 아무리 나라도 정말 근접하기 전까지는 몰라. 하지만 공격으로 힘을 개방하면 당장 들키지. 걱정말고 침대로 올라가.”


“그럼 당신이 올라가. 내가 바닥에서...”


“양보해준다니까.”


“이제 와서 신사인 척 하는 거야? 그렇다고 악당의 꼬리표가 떨어질 줄 알아?”


“하는 척이 아니라 충분히 신사지. 여기까지 왔으면 동의고 뭐고 넌 내 손 안에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게 침대를 주는 자체가 이미 신사지.”


“...동의가 없이 힘으로 하면 그거... 능욕인건 알지?”


“네 말대로 나는 악당 아니었나? 살인과 협박과 납치도 했는데 그 정도야... 마음 바뀌기 전에 올라가.”


할 수 없이 꾸물꾸물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가고 이불을 덮는다. 그러나 원래는 그의 자리이며, 또한 남자의 잠자리임에도 묘한 향취가 감돈다. 그러고 보면 이 녀석, 굉장히 깔끔하고 땀 냄새도 없었다.


눈을 감아보았지만 잠이 올 턱이 없다. 잠드는 순간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마음만 먹었으면 진즉에 당했을 거다. 그렇다면...


“...올라와.”


루이코의 말에 그가 누운 채로 고개를 꼬았다.


“뭐야? 새삼 마음이 동하기라도 한 거야?”


“오해는 하지 말고. 경우가 아니라서 그러는 거니까. 또, 당신이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마찬가지 아냐?”


이미 재미있다는 듯 입 꼬리를 말아 올린 그는, 별로 망설이지도 않고 뛰어오르듯이 침상에 들어온다. 푹신한 침대가 파도처럼 출렁이자 루이코가 경고했다.


“딱 절반, 그 이상은 안 돼.”


흥 하고 웃은 그는 옆으로 누운 채 등만 보이고 있다.


이윽고 조명이 낮아지고, 발코니로 이어진 큰 창문으로 옅은 달빛이 사방을 감쌌다.


서로의 가벼운 숨소리가 공기를 울리는 가운데 약 10여분. 하지만 루이코는 잠들지 못했다.


이대로 굳어서 죽을 듯 어색한 이 분위기로 아침이 올 때까지 버텨야 하나. 가만히 숨죽이며 천정만 바라보고 있자니, 긴장과 어색함에 좀이 쑤실 지경이었다.


정말 조용히 뒤척였지만 그의 등이 물어왔다.


“잠이 안 와?”


“좀 생각하고 있었어. 황태녀는 그래도 내겐 잘해주었는데... 꼭 그 사람을 함정에 빠트려야 했을까...”


코웃음을 친 그가 갑자기 이쪽으로 돌아누웠다. 깜짝 놀란 루이코가 움츠리자 옅은 실소가 귓전에 흘렀다.


“뭘 그리 심각해. 이미 저질러 놓고.”


“당신이 이렇게 만들었잖아. 게다가 나는... 아무 죄도 없는 황태녀에게 못할 짓을 하고 있다고.”


“죄가 왜 없냐.”


웃음을 거둔 그는 어느덧 굉장히 못마땅하게,


“...그래도 황태녀라고 떠받들어 주었더니, 느닷없이 제위 포기 따위를 하는 바람에 나와 유키나 모두 긴 세월 고생이었어. 아무리 설득하고 도와주겠다고 해도, 자기 의무를 팽개치고 스스로 썩고 있다고. 덩달아 같이 썩어야 하는 우리는 무슨 죄냐? 그러니 이번에 확실하게 처리할 거다.”


“그래도 사람을 함정에 빠트리는 건... 역시 더러워...”


“그 더러운 일을 하는 내게 조만간 안길 너잖아? 각오 정도는 슬슬 해 둔줄 알았더니, 아직 덜 되었나?”


“좋아서 승낙한 거 아니야...!”


“대체 내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거야? 이 정도 조건이면 보통 이렇게 까다롭게 굴지 않는다고.”


“당신은 크게 문제 삼을 부분이 많잖아. 특히 성격.”


“내가 뭐 어때서?”


진지하게 되묻는다. ...진짜 모르고 있나...?


“경박부조(輕薄浮佻) 그 자체. 음흉하고 잔인무도에 타인도 전혀 배려하지 않아.”


“역시 문학부. 어려운 단어가 술술 나오지만, 이미 나는 어른이야. 고치긴 힘들겠고 고칠 필요도 못 느껴.”


“그래서야 다들 떨어져 나가.”


“상관없어. 이 정도 얼굴이라면, 성격 정도는 참고 살아줄 여자가 없진 않겠지.”


순간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욕망이 불끈 솟구쳤지만, 베게에 반쯤 얼굴을 묻고 키득대는, 그 웃음기 넘치는 눈매는 아주 단정하고 곱다.


...자신감이 넘칠 만하긴 하지만 역시 얄밉다.


“각설하고, 생각은 좀 해 봤어? 세리사와 싸움이 벌어지면 네 안전조치는 어떻게 할 건지?”


느닷없는 질문에 루이코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거 아니었어?”


“오만 쓸데없는 걱정은 다 해놓고, 막상 자기 신변은 걱정도 안 한 거냐. 설마 다른 모든 부분은 불신해도, 이 부분에서는 나를 믿었다는 이야기야?”


루이코는 자책했다. 내가 왜 그랬지? 설마하니 지구에서 칼까지 맞아가며 자신을 구해준 것 때문에, 이번에도 목숨 정도는 어떻게 해 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솔직히 지금도 반신반의하고 있다. 말은 그럴듯하게 해놓고 손을 대지 않은 것을 보면...


“그럼 어떻게 해?”


“유키나에게 붙어 있어. 이미 그렇게 이야기해뒀어.”


루이코는 더 이해할 수 없었다. 이야기? 그렇다면?


“혹시 우현왕도 이 계획에 참가한 거야?”


아뿔싸. 그 어색한 웃음을 나름의 의미로 해석한 루이코가 다시 질문했다.


“그녀는 중립이라며...?”


“싸움의 여파에서 너희들 목숨 정도를 건져주는 정도다. 중립에서 어긋나는 것은 아니지.”


“하지만 내가 봐도 그 두 사람은 친자매처럼 친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언니를 함정에 빠뜨리는 짓에 가담했단 말이야?”


“이대로는 유키나도 고향에 못 돌아가. 그만하면 이유는 충분하잖아. 승계 문제에서는 내 편이기도 했고, 세리사의 뒤치다꺼리에 이제는 질렸을 수도 있고.”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또한 이걸로 확정이다. 우현왕도 이 음모에 가담한 것이다...?!


“정말 이해가 안 가. 그녀가 가담하다니...”


“내가 전에 말했지? 10년 친구도 1년만 연락이 없으면 소원해지기 마련이고, 격렬한 사랑을 나눈 연인도 사소한 말다툼 한 번에 헤어지는 게 세상일이라고. 아무리 친해봤자 내심은 틈이 생길수도 있는 거지.”


“그럼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던 건데... 이렇게 더러운 수를 쓸 만큼 당신은 황태녀를 배제하고 싶어?”


“그렇다고 말했을 텐데...?”


“아냐, 역시 이상해. ...당신, 솔직하게 말해줘. 나중에 로사로도 검색할 테니.”


점점 떫어지는 표정에 주의하며 루이코가 물었다.


“황제가 후궁을 두려면 까다로운 조건이 있는 거야? 숫자에 제한이 있다던가... 아니면 황후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던가. 그런 제약이 심해?”


“...법적으로는 황후 1인에 차비(次妃)가 하나. 후궁으로 여섯 명까진 들일 수 있고, 남의 아내거나 너무 어리거나 하는 경우가 아니면 큰 제약이 없어. 황후 얼굴을 보아서 보통은 그렇게까지는 들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막을 힘은 정실부인도 없어.”


“그럼 당신도 그렇게 하면 되잖아. 그래도 일국의 군주인데 여자·문제 하나를 관철시키지 못한단 말이야? 지금도 황태녀는 당신을 넘어설 생각을 못하는데, 당신이 황제가 된 이후에도 껄끄러워 할 정도의 영향력이 그녀에게 있단 말이야? 이거 정말 이상해.”


루이코는 그에게 시선을 똑바로 주었다. 진실을 말하지 않는 자는 시선을 피하기 쉽다.


하지만 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것만으로는 진실 여부를 파악하긴 글렀다.


“이걸 설명하려면 밤이 샐 것 같으니... 안 하련다.”


수상함은 더해진다. 지금껏 그는 아무리 긴 설명도 루이코가 물으면 해 주었다. 이해하지 못하면 반복해서 설명해 주었는데, 별로 길 것 같지도 않을 이번 설명은 그저 회피하다니?


뭔가 있다... 분명히 있어.


“그럼 하나 더...”


“왜 질문이 많아? 잠이나 자 둬.”


그는 조금 짜증이었지만 루이코도 같이 투덜댄다.


“이 상황에 당신은 잠이 와?”


“어쩌라고? 또 뭘 묻고 싶은 거야?”


“당신은 황태녀를 어떻게 생각해?”


“그건 또 무슨 엉뚱한 질문이냐.”


“하지만 당신도 그녀에게 잘해준 시절이 있었다며. 아무리 상대가 받들어야 할 프린세스라 해도, 어느 정도는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었을 테니까 그런 거 아냐?”


“그냥 지위 때문에 대접한 거야. 뭘 그리...”


“거짓말.”


루이코는 딱 잘라 끊어버린다.


“그녀가 당신을 언급하는 말투 속에서는 그런 걸 느끼지 못했어. 그녀도 어지간히 눈치가 없지 않은 이상, 지위 때문에 잘해준 것과 본심으로 잘해준 것 정도는 당연히 구분했을 거잖아. 그리고 당신이 한 약속이라는 것도, 그 목숨을 구해주었다는 것도 들었어. 그러니 진심이었던 시절이 있었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제길. 그냥 확 덮쳐버릴까 보다.”


그가 벌떡 일어났다. 깜짝 놀라 루이코도 같이 일어나자, 언제부턴가 서로의 거리는 생각보다 가깝다.


하지만 그는 이내 혀를 차며 도로 누워 등을 돌려버렸다. 물론 루이코는 눕지 못했다.


덮친다 덮친다 해놓고도 결국? 그럼 혹시 이 녀석... 지금껏 말만 번지르르 하게 늘어놓은 것 아냐?


갑자기 루이코는 며칠간 생각했던, 자신의 뇌리를 괴롭혔던 작은 가시를 드디어 발견하고 뽑아냈다.


소중히 여겨야 할 많은 것을 그가 가르쳐 주었다. 세리사는 분명 말했다. 그럼 한때는 그도 착하고 순수하고 뭇 사람의 모범이 될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권력의 더러운 속성은 그런 사람조차 이리 바꾸는 것일까.


하지만 그는 내 목숨을 구했고 이제껏 나를 돌봐주었다. 아키라의 생명을 빌미로 협박했지만, 그것이 우리의 생명을 구하려던 의도였음은 나중에는 알았다.


솔직하지 못한 점에 불만은 남았지만, 그래도 그는 몇몇 오해와 비난을 기꺼이 감수했다. 또한 적조차도 더는 함부로 죽이지 않고 모든 사태를 종결시킨 것. 혹에 불과한 우리들을 돌봐주고, 불안감을 덜어주려고 많은 말을 해주었고 희망을 주려 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후 얄팍하게나마 그에 대한 신뢰의 바탕이 되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갑자기 변했지?


이번 계획은 그가 보여 온 태도와는 완전히 달랐다. 공포와 불안을 폭증시키고 비관적인 미래를 말했다. 덕분에 최단시간에 굴복해버린 자신은 완전히 얼어버려, 그의 말에 거짓이나 기만이 섞여있을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또한 줄곧 행동조차 묶인 탓에, 세리사나 유키나를 만나 교차검증을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만약 그가 뭔가 날 속이고 있다면, 이렇게 말을 잘 하는 녀석이 이리 대답이 부실할 리 없다.


혹시 뭔가를 꾸미고 있고 그걸 위해서 악당인 척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럴 정도로 그 꿍꿍이가 중요한 걸까.


수상한 것은 다 물어봐야지. 결심한대로, 이 녀석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리고 나중에 혹시라도 세리사에게 말해줄 수 있다면 그녀가 방법을 찾아낼지 모르니까.


마침 정조도 지킨 것 같고.


한동안 침묵하던 그가 마침내 재촉했다.


“이제 그만 좀 자라. 아침에 할 일이 많다고.”


“...하지만 진짜 잠이 안 오는 걸.”


“다 큰 여자가 잠투정은...”


누우라는 듯 손을 까닥거린 그는, 결국 억지로 누운 그녀의 발치 이불을 잡아 던지듯이 덮어버렸다.


이어 가벼운 콧노래가 들린다.


“...자장가는 뭐야. 내가 어린애야?”


가벼운 항의에도 그는, 푹신함과 탄력이 공존하는 침대를 규칙적으로 두들긴다. 여전히 콧노래가 이어지는 가운데 루이코는 생각했다.


이 녀석의 목소리. 울림만은 항상 좋았지.


그리고 비로소 기억나는, 고향의 어머니가 불러준 자장가. 그 품의 심장소리와 온몸으로 느꼈던 따뜻함. 사춘기 이후로는 이런 저런 반항만 했지만, 어느새 잊고 살았던 포근한 기억 속에 비로소 깨달은 부모의 사랑.


왜 이 녀석의 콧노래와 손짓에 떠올리는 걸까.


아련하게 덮쳐오는 가슴 한 구석의 고통에 눈물이 글썽였지만, 절대 잠들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의식이 조금 흐려지면서 루이코는 선잠에 빠져들었다.








제법 강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시끄럽다 생각한 순간, 루이코는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화들짝 깨고 말았다. 어느새 잠이 들었던 건가.


그리고 옆자리에는 이 녀석이 있다...!!


벌떡 일어나자 이미 그도 일어나 있다. 팔찌를 보니 이미 한밤중. 2시를 조금 넘어 있다.


“왔군.”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 하지만 표정에는 묘한 쓴 맛이 묻은 그가 중얼거렸다.


루이코는 움찔했다. 올 것이 왔나. 하지만, 황태녀라면 문 정도는 쉽게 부수겠지. 그럼 누구...?


의문에 답하듯 그는 팔찌를 만져 화면을 송출했다. 바깥이 비춰지자 루이코는 기절초풍하고 말았다.


하루다. 격렬하게 문짝을 두들기면서 뭔가 소리치더니 어설픈 발차기로 문을 걷어차다 나뒹군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어깨로 밀고 손으로 두들기고, 그렇게 모든 수단으로 문을 열려고 노력한다.


자신도, 그의 팔찌도 꺼져 있으니 연락도 안 되고, 눈치가 없는 하루라도 무슨 일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겠지. 참고 참다 결국 여기까지 왔나...?


완전 방음인 방이지만, 문으로 전해지는 충격은 공기를 타고 강하게 전달된다. 그가 다시 팔찌를 만지자 밖의 소리도 똑똑히 들린다.


“나와, 이 자식아! 안에서 무슨 짓을 하는 거야...!”


그 밖에도, 평소에는 그녀가 알 거라고 생각도 못한 갖은 욕설이 그 소심한 입에서 튀어나온다.


루이코는 가슴이 찡해왔다. 하루는 이렇게 미친 듯이 나를 찾고 있구나. 소중한 내 친구...


“예상보다 훨씬 과격한 걸.”


그가 낮게 웃었다. 황당하기도 하고 어이없어하기도 하면서, 또한 즐거운 그 표정에 루이코가 물었다.


“황태녀가 쳐들어올 거라고 하지 않았어?”


“그러는 너야말로, 에노모토가 그저 방에서 떨고만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는 여전히 불규칙적으로 쿵쾅거리는 문을 향해,


“기특하긴 하지만 칭찬은 못해주겠군. 다치기나 할 뿐인데... 어이, 루이코.”


찡한 마음에 가슴을 누르던 그녀가 흠칫 놀라며,


“왜?”


“벗어.”


유들유들한 얼굴에서 무서운 소리가 튀어나온다. 루이코는 남은 잠도 다 달아나버렸다.


“버, 버, 벗어? ...무슨 소리야?”


“상황을 만들려면 어쩔 수 없잖아. 전부 다 벗으라고는 하지 않아. 속옷 정도만 입고,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이불로 가리고 있으라고.”


한눈에 보아도 알 수 있도록 꾸미고 있으라는 거겠지. 하지만 이 녀석 앞에서는...


“이불 뒤집어쓰고 벗으면 되잖아.”


망설이는 루이코를 재촉한 그는, 스스로도 웃옷의 단추를 몇 개 풀어 급하게 입은 듯 모양새를 만든다.


할 수 없이 루이코도 이불 안에서 재빨리 옷을 벗어 다리 사이로 감춘 후, 이불로 몸을 말아 보이지 않게 한다. 다행히 그는 문만 주시하고 있다.


다른 이유로라도 죽어도 보일 수 없다. 하루에게 들키는 것도 문제지만, 지금 입고 있는 걸 보면 이 녀석이 엄청나게 웃을 거야.


지금의 속옷은 서울에서 산 엄청 고급품. 당연히 그도 알고 있는 것이다. 아끼고 아끼다 하필 지금 입고 왔다고, 정말 음흉하게 웃을 거야. ...그건 죽어도 싫다.


“최대한 몸 둘 바를 모르는 연기를 하고 있으라고.”


그것이라면 걱정 없다. 이미 이 차림만으로도 몸 둘 바를 모르겠으니까.


팔찌를 조작하자마자 문이 열리고, 잔뜩 땀에 젖은 하루가 구르다시피 들어온다. 그의 방은 처음인지라 꽤 두리번거렸지만, 이윽고 몸에 만 이불 위로 맨 어깨가 그대로 드러난 루이코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루이코짱...!”


하지만 그가 손을 가볍게 휘두르자, 달려들던 하루가 일순간 뒤로 날아갔다. 몸이 허공에 뜬 그녀가 비명을 지르고 루이코도 짧은 비명을 질러버렸다.


복도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아마 힘을 조절한 듯 소리는 나지 않는다. 하루는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포기하지 않고 다시 방으로 뛰어들얶다.


하지만 재빨리 입구를 막아선 그의 가슴팍에, 오히려 머리를 부딪치고 짧은 비명으로 다시금 나뒹굴었다.


그는 짜증을 섞어 물었다.


“뭐냐, 이 오밤중에.”


아픈 코를 매만지던 하루가 격하게 소리쳤다.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어째서 루이코짱이...! 설마!”


그는 잔뜩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설마가 사실이든 아니든, 아무리 종족이 달라도 왕의 침실이다. 이 시간에 난입하는 것은 말이 안 되지? 대체 여긴 어떻게 안 거냐?”


“루이코가 안 돌아오잖아...! 길을 잃은 것도 아닐 텐데 당신밖에 없잖아? 그래서 여왕에게 물어봤지...!”


“그 녀석... 쓸데없는 짓을 하다니. 나중에 궁둥짝을 때려줘야겠군. 아무튼 못 들어온다. 그리 알아.”


알 수 없는 박력과 압박감에 하루는 질린 듯 그를 바라보다, 말다툼 대신 그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재차 그의 팔이 입구를 막았다.


밀치고 들어가려 했지만 강인한 팔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녀는 분노로 점철된 비명 같은 고함을 질렀다.


“비켜!!”


“...누구에게 명령이야, 감히?”


그의 목소리도 높아진다.


“돌아가라. 문을 다시 두들기거나 계속 알짱거린다면, 한동안 나오지 않도록 네 방문에 못질을 할 테니까.”


하루의 화난 어조가 애처롭게 변했다.


“...당신, 대체 루이코짱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네가 생각하는 그대로.”


그가 악랄하게 웃자, 하루의 동공이 커지며 주먹이 쥐어진 어깨가 심하게 떨렸다.


“루이코짱이랑 말하게 해 줘...!”


“싫은데?”


그는 더 말하기 싫다는 듯 손을 내젓고 등을 돌렸다. 하지만 하루가 다시금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자 그의 손가락이 가볍게 뻗어지더니, 이마에 닿는 순간 그녀는 굳어버렸다.


달려오는 기세를 이기지 못해 쓰러지려는 찰나, 그 팔이 하루를 쓰러지지 않도록 잡았다,


“몇 시간은 못 움직일 거다. ...엔시아.”


어둠속의 복도에 론비샤 하나가 나타났다. 그를 수행했던 전속 시녀다. 무언가 언질을 받았는지, 그녀의 직무로는 하루를 저지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방에 데려다 눕히고 문을 걸어 잠가라. 아침이 올 때까지는 풀어주지 마.”


말조차 못하고 굳어버린 하루를 그대로 안아든 엔시아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동안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숨죽이며 바라보던 루이코였지만, 이미 던져놓은 옷가지를 주워 입고 이불 밖으로 뛰쳐나왔다.


입구를 막아선 그가 물었다.


“어딜 가?”


“당연하잖아? 하루짱에게 갈 거야...!”


“가서 뭐라고 이야기할 거냐. 나랑 뒹굴지 않았다고 변명이나 할 참이야?”


“...그건!”


“정신 차려. 네가 할 일은, 세리사가 도전해올 때까지 나와 같이 있는 거야.”


“하지만... 하루짱... 너무 가여워...!”


하루가 루이코에게 화내고 소리쳤다면 그나마 나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심으로 걱정하고 두려워한 나머지, 이 밉고도 두려운 남자에게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이 마음을 어찌 저버릴쏘냐...!


하지만 매정하게도 그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네가 가봤자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고, 오해를 풀 일이 있다면 모든 일을 마무리 짓고 난 후의 일이야. 이제 남은 잠이나 자 둬.”


“이 상황에서 잠이 와?”


루이코는 몸을 흔들어 어깨의 손길을 뿌리쳤다. 하지만 그는 그저 웃으며,


“다시 재워줄까? 아주 잘 자던데?”


“필요 없어...!”


그 목소리와 토닥거림에 잠들어버린 건 사실이다. 자신의 한심함을 내심 한탄하던 그녀에게 그가 말했다.


“그럼 바둑이나 한 판 더 두지.”


“...당신이랑 시시덕거릴 기분이 아냐.”


비록 뚜렷한 폭력을 쓴 것은 아니지만, 하필이면 친구에게 강제를 가한 것은 몹시 기분이 나빴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단단히 삐치셨군. 마음대로 해. 나랑 같이 있기 싫다면 나는 나가 있지. 다만 그러면 네가 위험하지...?”


이 녀석과 같이 있는 것도 싫지만 혼자 남겨지는 것도 두렵다. 그러다 황태녀라도 들이닥치면...


흠칫한 루이코의 표정을 살피며 너는 별 수 없다, 그리 말하듯 웃으며 그가 말했다.


“들어가서 잠을 자든지, 깨어있든 마음대로 해. 대신 밖으로 나가는 것은 허락하지 않아. 그리 알도록.”


결국 침대로 돌아와 버렸지만, 루이코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와는 전혀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도 별로 상관없는지 그대로 누워서 말이 없었다.


생애에서 가장 긴 밤이다. 어둠 속에서 더 짙은 어둠을 느끼며, 옆자리에서 낮게 들려오는 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루이코는 밤을 꼬박 새웠다.




밤을 꼬박 새우는 사람은 루이코만은 아니었다. 세리사는 연달아 거친 숨을 토해냈다.


당신은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안겨 주는 거지? 내가 알아온 당신은, 묵은 원한에 새로운 증오를 덧댈 사람은 결코 아니잖아. 그런데도 지금, 그 아이를 데리고 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야...!


항상 최소한의 만남만 가지고, 있는 듯 없는 듯 서로 시간을 보내다가 그들은 떠났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라, 그는 전례 없이 나를 도발하고 있다.


루이코에 대한 말을 미리 하지 않아 나를 기절초풍하게 만들고, 따지러 갔더니 남자에 굶주린 막 되먹은 여자로 취급하고...


그동안 아무리 서로 기피하고 증오해도,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었는데...!


무엇보다... 그가 평소처럼, 예전처럼 장난치고 놀리는 여자라니. ...이런 건 그 때의, 한때 좋았던 시절의 내게도 하지 않던 일이었다.


르아냐에 이방인이 들어온다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던 일. 하지만 잔뜩 고생하고 모든 것이 낯설 아이들이 가련하기도 했다.


그런데 나타난 아이는 하필이면 아미에를 닮아 있고...! 그리고 그가 생각 이상으로 친밀하게 대하고, 말까지 트고 있다는 것을 알고, 차츰 불안해지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작은 우려는 부지불식 엄청난 현실이 되었다.


영자력 전수를 구실로 일주일을 데리고 다니더니, 이번엔 숫제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이 밤이 되도록 그대로 있다. ...설마하니 진짜로...?!


옆에 켜놓은 화면. 그 안의 어두운 복도에는 쩌렁쩌렁 고함이 울린다.


“이봐요! 다들 듣고 있어?!”


끌리다시피 들려가면서도 하루는 계속 소리쳤다.


“당신들은 이걸 보고만 있는 거야?! 우리 같은 사람들은 짓밟혀도 된다는 거야? 이 망할 여자들아...?!”


면전에서 질책하는 듯 세리사는 눈을 감아버렸다.


...내가... 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유키나도 이번엔 역시 이상하다.


그녀가 칼스에게 순종적이라고 해도, 친분에서는 자신이 뒤쳐질 리가 없다. 오히려 같은 여자이기에 더 통하는 부분도 많다.


하지만 이 일이 내겐 어떤 의미인지, 익히 알고 있을 유키나도 자신의 방에서 통신을 끊고 꼼짝도 하지 않는다. 저 지구인 아이들을 도우려 하지도 않는다.


왜 그러는 거니. 하다못해 네 손을 잡고 있다면, 이 괴로운 밤도 조금은 쉬이 견딜 수 있을 텐데.


그리고 칼스... 당신은 절대 이러면 안 돼. 당신이 내게 한 짓을 생각하면 이럴 수는 없어. 나는 당신의 명예를 위해 입을 다물었고...


하지만 지금 이 짓은 뭐야...!


아무리 생지옥이라지만 르아냐는 유일한 내 영역. 모든 추억과 괴로움을 묻고 살아온 이 곳을, 이제 당신의 욕망으로 더럽힐 생각이야? 굶주린 짐승의 밥그릇조차 걷어차고 그 앞에서 태연히 식사를 할 참이야?


...정녕 타락해버린 걸까?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이?


아아. 루이코랬나. 그 아이는 지금 어떤 마음일까. 아미에가 그랬듯 사랑에 만족해하고 있을까.


...아니야. 설마 그 때의 그 눈물은...?!


“...엔시아.”


하루를 데려가던 론비샤가 멈추었다.


“...그 아이를 내게 데려와.”


엔시아는 망설이지 않았다. 비록 그동안 칼스의 명령을 받았다지만, 황태녀는 이곳 모든 것의 주인이다.


들려온 하루의 몸, 그 마비를 세리사가 풀어준 직후,


“...도와줘요...”


하루의 첫 말은 뜻밖에도 원망이 아닌 애걸이다. 그녀는 황태녀의 치맛단을 붙들고 늘어졌다.


“...내 친구를 구해줘요. ...당신은 할 수 있잖아요?”


황태녀는 씁쓸히 웃었다.


“...그 아이가 자의로 갔을 수도 있잖아...?”


“아뇨...!”


가냘픈 고개가 격렬히 저어졌다.


“루이코는 제게 비밀 같은 건 없을 거에요...! 그렇게 약속했는걸...! 절 버리고 혼자서 행복하지도 않을 거에요. 그 애는 그런 아이라고요...! 그러니, 그러니 분명히 강제로 끌려간 거에요...!”


흠칫하는 세리사에게 다시금 매달리며 하루는 울었다.


“...제발, 제발 부탁이니까... 도와... 줘요...!”


“...잠시만... 생각하게 해줘...”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가까운 의자에 앉은 세리사. 하지만 하루의 걱정과는 달리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섰다.


“...가자.”


위험한 일이다. 아무리 서로를 힘으로 칠 수는 없어도, 나는 그 앞에서는 너무 무력하다. 하지만...


이 아이의 말대로라면, 루이코 그 아이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인간의 도리이고, 내 양심의 지침이며 무엇보다 아직은 남은... 그를 향한 내 신뢰를 배신하지 않기 위함이다.


그러니 이제 부딪히고, 아직은 믿어보는 거다.


어째선지 너무나도 변해버린, 하지만 그의 마음 속 남아있을... 그 시절의 그를.








루이코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몸은 피곤했지만 정신은 이상할 정도로 또렷하다. 밤새 공포를 달래며 추억을 정리하는 사형수의 기분이 이럴까.


옆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던 녀석이 드디어 움직이고, “자냐?”라며 물어오는 소리에 일부러 뜸을 들인다.


“깨어 있는 거 알고 있어.”


헛웃음이 귓가를 스치더니 그가 일어난다.


“슬슬 준비하자. 집 주인이 이리로 오고 있어. 게다가 꽤 날카롭단 말이지, 이 기운은...”


뭉갤 때가 아니다. 루이코는 화들짝 이불을 걷었다.


“그럼...?! 내가 여기에 있다가는...!”


“있어줘야 효과가 크지. 그대로 있어.”


말이 끝나자마자 신호음이 방을 울린다. 3번째에 이르러서야 그가 대답했지만, 한다는 소리가 가관이다.


“신문은 사절입니다. 종교도 믿지 않으니, 개를 풀어놓기 전에 당장 꺼지쇼.”


“...나야. 문 열어”


문 건너편의 황태녀. 너무 차분해서 오히려 무서웠다.


그녀의 팔찌는 모든 문을 열 수 있지만, 그럼에도 기다리는 것은 최소한의 예절일까. 아니면 그녀 스스로도 차마 확인하기 망설여지는 걸까.


그는 손을 뻗어 루이코를 이불 밑으로 밀어 넣었다. 모두의 얼굴을 보느니 차라리 이게 낫다며 루이코도 따랐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침대 밖으로 나온 그가 말했다.


“돌아가.”


“열어...!”


“싫은데...?!”


한참을 대치했지만, 더는 못 참겠는지 삐익 소리가 들리면서 문이 열린다. 그녀가 강제로 연 것이다.


“뭐하는 짓이야?!”


그가 소리쳤지만 들어온 세리사는 여전히 차분했다. 걸음걸이는 절도 있고 서두르지 않는다. 하지만 왼손이 가볍게 쥐어져 있는 것을 칼스는 놓치지 않았다.


황태녀는 입술을 물며 물었다.


“그 아이... 어디 있어?”


“몰라서 묻는 거냐? 게다가 이게 무슨 짓이야.”


얼굴을 찌푸린 그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복도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세리사의 뒤를 따라와 지금껏 기회를 엿보았을 하루가 구르듯이 달려 들어왔다.


그가 손을 뻗어 제지하려 했지만, 세리사의 손이 약간 더 빨라 그 손을 막았다. 그 틈을 탄 하루는 그녀답지 않은 민첩함으로 침상으로 뛰어들었다.


“루이코짱...!!”


간절하게 찾는 그녀의 부름에 어찌 대답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녀의 이름을 짧게나마 부르며 루이코도 이불을 걷고 고개를 빼어낸다.


거칠게 이불을 걷어버린 하루는, 예상과는 달리 알몸이나 속옷 바람이 아닌 그녀의 운동복 차림에 일견 안도하면서도, 혹시 무슨 이상이 있나 황급히 루이코를 훑어본다.


“난 괜찮아...”


하지만 아무리 옷을 입고 있어도 그의 침상 위다. 솟아오른 수치심에 루이코는 몸을 웅크렸다. 하루가 그를 돌아보며 빽 소리를 질렀다.


“짐승...!!”


그는 침대로 다가서려 했지만, 다시 세리사가 앞을 가로막았다. 그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


“당신이야말로 뭐하는 짓이야? 당신 때문에 집에도 못 가는 아이들인데, 지켜주지는 못할지언정 함부로 손을 대? 여기가 무슨 창관이야?”


이미 그녀의 표정에는 짙은 분노가 흐른다.


“우리 셋 역시 서로의 처지에 나름의 책임이 있어. 때문에 지난 세월, 서로를 건드리지 않고 살아왔지. 하지만 지켜야 할 법칙, 영역이 없진 않잖아? 아무리 지상인이라도 하필 르아냐에서 부당한 억압을 받는다면, 주인인 내가 막을 의무가 있는 거 아냐?!”


논리 정연한 질책에 루이코는 내심 마음으로 갈채를 보냈다. 하지만 오히려 그가 버럭 화를 냈다.


“그래서 어쩌라고?!!”


느닷없는 고함소리에 깜짝 놀라 흠칫한 그녀에게 그는 더더욱 소리 높여,


“그러면 내가 여자랑 한 번 자려면, 이제 우주공간에라도 나가야 한단 말이야?”


뻗어진 손가락이 그녀를, 심장을 후벼 팠다.


“네 눈치 덕에 여기도 그리 편히 지낼 장소는 아니지만, 그래도 내겐 수십 년에 몇 달 정도인 그런 휴식이야. 그런데 작은 재미 하나도 못 보게 한다? 남은 실컷 고생하고 이제 좀 쉬려는데, 그 동안 평온히 부른 배나 두들기던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아니면...”


문득 잔혹한 웃음이 만면에 흐른다.


“기왕 벌어진 판이니 오래 굶은 너도 끼워달라는 거야? 하지만 아쉽게도 내 거시기는 하나뿐이니, 원한다면 나가서 차례나 기다리시지.”


상상하기 힘든 폭언에 세리사는 부르르 떨었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울컥 솟는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그럼 강제로 문은 왜 따고 들어와? 아무리 주인은 너라도, 내게 주어진 영역도 내가 차지할 수 없다면 그 무슨 횡포냐. ...아 참, 그렇지. 네가 내 방문을 딴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 한 번 해봤으니 두 번째는 쉽다 이거야?”


이미 꺾인 기세. 세리사가 중얼거리듯,


“...그건 미안해. 하지만 이건 역시 아니야...”


“어이, 루이코. 말해봐라.”


그는 루이코를 돌아보며,


“내가 널 끌고 왔냐, 아니면 네 발로 왔냐?”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질린 표정의 루이코는 한동안 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해야 한다. 아니면...


“...제가... 직접...”


“루이코짱?”


경악한 하루의 시선을 피해 이불에 고개를 묻어버린 루이코. 반면 칼스는 의기양양 웃었다.


“그렇다잖아.”


“...표정은 전혀 아닌데도?”


“그럼 뭐라고 생각해? 아무리 상호 신뢰를 잃은 지 오래 됐다지만, 아주 대놓고 사람을 쓰레기로 만드네?! 설마하니 이 내가, 고작 지상인 여자를 상대로 더러운 수라도 썼다는 거냐?! 앙?!”


긍정하는 순간 그 분노를 제대로 돋우고, 부정한다면 그대로 물러나야 한다. 입술을 깨문 그녀에게 그는 재차 소리쳤다.


“설령 내가 조금 일탈을 저질렀대도 네가 지랄할 일은 아니지. 너는 고작 열흘도 만나지 않은 타인을 위해, 지난 세월 몇 번이고 네게 희생했던 나를 이리 또 핍박하고 모욕하겠다는 거냐? 네가 내 엄마냐? 아내라도 되냐? 황제가 아닌 넌, 아직은 내 주군조차도 아니다.”


“당신...”


잔뜩 질린 그녀에게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 그래도 여기 주인은 너라 이거지? 그래, 그건 맞지. 그럼 할 수 없지.”


그는 성큼 루이코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가자, 루이코,”


얼어붙은 분위기에 질렸었던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어, 어디로...?”


“사람 둘 정도야 어디에든 못 있을까.”


하지만 하루가 두 팔을 벌리며 침상에서 내려섰다.


“안 돼...! 절대 못가!”


“...죽고 싶냐?! 누굴 막아?”


연기든 진실이든, 그는 잔뜩 화가 나 있다. 이번에는 루이코도 뛰어 일어났다.


“그만...!”


이건 생각보다 너무 달아오른다. 하루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막아설 줄은 몰랐다. 두 사람 다 진정시키지 않으면...


하지만 앞으로 나선 것이 화근이다. 거리가 가까워진 그는 냉큼 루이코의 손목을 낚아채고 끌어당겼다. 그녀의 몸이 휘청했지만, 그는 이번엔 하루의 이마에 손을 뻗었다.


“두 번의 무례는 용납 못해. 다시 방에 처넣기 전에, 아니... 죽이기 전에 주제 모르는 짓은 삼가라.”


하루는 그저 이를 갈았다. 죽음 이전에, 이번에도 마비를 당한다면 정말 중요할 때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하루를 제압한 그는 이미 굳은 세리사를 바라보며,


“난 떠날 거다. 이렇게 부당하게 간섭받으면서까지 여기 있을 이유가 없어. 그리고... 이토록 푸대접을 받을 바에는 다시는 오지 않을 테니, 영원히 보지 말자. ...알았어? 망할 것 같으니...!”


“그런...!”


얼음장 같은 통첩에 그녀는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억울하고 분한 표정이 만연했다.


“이러면 내가 무슨 죽을죄라도 진 것 같잖아? 내가 그렇게 잘못했어? 당신 잘못까지 내 책임으로 다 덮어씌우고, 이렇게 얼굴까지 보지 않을 생각이야?”


“이미 결심했어. 꼴 보기 싫은 더러운 자식은 사라져 드릴 테니, 넌 음악 틀어놓고 춤이나 추시지.”


“그럼 유키나는? 그 앤 단독으로는 여기 오지 못하잖아. 앞으로 그 애 얼굴도 못 봐야 한단 말이야?”


“그 애 걱정은 참 빨리도 하신다...?”


그는 풋 웃으며 증오의 시선을 쏘아 보냈다.


“애당초 상황을 이리 만든 게 누군데? 네가 제위 따위 싫다고 징징거리지 않았다면, 나와 유키나가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겠냐?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면, 너도 처신을 잘 했어야 할 것 아니냐?”


“그건 당신이 부정을 저지르고...!”


“참았어야지. 눈감았어야지. 그래도 네가 황태녀라고, 난 지금껏 뒤치다꺼리를 도맡고 많은 것을 양보했어. 그 희생을 생각했다면, 설령 내가 루이코를 강제로 범하고 죽였어도 내 방문만은 따지 말아야지. 이 방은 비록 작아도, 곧 내 왕궁이다. ...이게 얼마나 무례인지 잘 알 테니, 새삼 사죄해도 소용없다고.”


“...정말 이대로 끝낼 거야?”


되묻는 표정은 처절하도록 슬펐지만,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물론. 이제는 나도 한계다. 여기 있을 이유가 없어졌으니, 앞으로 다시 올 이유도 없잖아? ...비키기나 해.”


“...너무해...!”


이제 알았다. 세리사는 깊이 탄식했다. 이런 사태를 굳이 만들어낸 그 저의를 말이다.


...다시는 보지 말자. 다시는 오지 않겠다.


그는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거다. 그리고 그것으로...


이 얇고도 차가운 관계나마 이젠 완전히 깨진다. 뱉은 말은 꼭 지켜온 그는 다시는 르아냐에 오지 않는다.


그러면 나는... 여기서 그저 외롭게 썩어가는 거야...?!


당장 죽기라도 할 듯 창백한 세리사. 루이코도 순간 깨달았다.


이것이, 이것이 그녀가 절대로 듣고 싶어 하지 않았던 말이었구나.


유키나를 다시 보지 못한다는 것도, 억지로 매도당해서 분노와 실망감을 안은 채 평생 이곳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도 엄청난 고통일 것이다.


다만 이해하기 힘든 것이 남았다. 개인적인 연애사까지 세리사가 굳이 간섭해야 할 이유가 없음에도, 그녀는 정말로 그가 그녀 앞에서 여자를 당당히 끌어들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게 그렇게 참기 힘든 일이었을까? 미워한다면서, 증오한다면서...?


이제 그를 막으려면, 그녀가 자존심을 모두 꺾고 빌든지, 아니면 힘으로 저지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감히 덤비지 못한다는 것을 그가 더 잘 알고 있다. 그 증거로 그는, 루이코의 팔을 잡고 온몸으로 험악한 기운을 뿜어내며 스스럼없이 세리사의 옆을 지나갔다.


루이코는 세리사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흘낏 보게 된 그 얼굴은, 아마 일생동안 보아온 그 어떤 사람이 지은 표정보다도 참혹하고 또한 깊은 슬픔에 빠져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이가 악물려진 일그러진 입가이다.


“...기다려.”


하지만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 세리사는 홱 돌아섰다.


“기다리라고 했어...!”


루이코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힘'이 뿜어진다.


영자력은 강대한 힘. 아무리 그들이라도 그것을 저장할 수는 없다. 비록 생체병기라도 생명체의 내구성으로는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영자력으로 발동시킨 힘은 끊임없이 밖으로 분출해야 하며, 이는 바람과 발광(發光)의 형식으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 밝다고 할 수 없지만, 그 대신 무척 응축된 것처럼 그녀의 전신이 진한 질감의 빛으로 감싸인다.


그는 루이코의 손을 잡은 채 비웃었다.


“뭐냐, 설마 싸울 생각이냐? 네 주제에?”


“시끄러워...!!”


부모를 놓친 인파속 아이처럼 그녀는 울부짖었다.


“살아온 터전을 짓밟히고, 이리 매도당하고, 세상과의 인연 그 자체를 끊어버리고도... 당신은 무책임하게 도망가겠다고?!”


“그래서, 그게 나와 싸울 이유다?!”


“...그래! 이 모욕을 그냥 넘긴다면 살아도 산 게 아니겠지...! ...따라 나와..!”


이를 간 그녀는 팔찌를 입에 대었다.


“르아냐, 낮으로 시간 조정. ...대 충격 방어 작동.”


말이 끝나자마자 세상이 밝아진다. 아직 새벽도 오지 않았겠지만 인공천체의 내부에는 태양이 표현된다. 갑자기 밝아진 탓에 루이코도 하루도 눈을 감았지만, 이내 다시 눈을 뜬 그녀들은 두려움 속에서도 경탄했다.


태양빛을 받은 그녀는 정녕 눈부셨지만, 또한 마치 덧없이 뛰어들 부나방처럼 처절했다.


그녀가 발코니의 열린 창밖으로 나가버리자, 어깨를 한번 으쓱한 그는 이어 루이코에게 시선을 준다. 성공이라 말하고 싶은 거겠지.


하지만 스쳐지나간 그. 살짝 속삭여진 뜻밖의 말에 루이코의 동공이 커졌다.


“...유키나에게 붙어 있어. 절대로 떨어지지 마.”


어느 사이 뒤를 돌아보니 기척도 없이 우현왕이 와 있다. 칼스가 낮게 말했다.


“...부탁한다.”


항상 옅은 웃음이나마 잃지 않았던 유키나는 어쩐지 굳어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조용히 끄덕였다.


“다녀오마.”


그도 힘을 드러내면서 발코니로 날듯이 뛰어나갔다. 여왕이 권하듯 손을 뻗었다.


“자, 두 사람. 일단 피하자.”


“어디로요?”


“르아냐 지하에 방공호가 있어. 우주항 직통의 통로도 있고. 만약 여기가 파괴될 경우 우리도 위험한데, 평범한 너희들을 그냥 둘 수는 없잖아.”


비록 그와 한 패로 그녀를 취급하고 지금의 손길에도 움찔하긴 했지만, 하루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서려 했다. 하지만 루이코는 잠시 망설였다.


이 싸움의 결과는 모른다. 그리고 자신은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겠지. 하지만 세리사가 패배의 나락으로 떨어진다면 그녀에게 용서를 빌지 않으면 안 된다.


설령 공갈과 협박에 이용당했을지언정, 그에게 협조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나 스스로도 옳다고 확신하고 내린 결정은 아니지만, 초래한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니 위험해도 이 자리를 벗어나면 안 된다. 최악의 경우 황태녀가 죽기라도 한다면, 말하지 못한 죄에 대한 죄책감은 평생 자신을 괴롭히겠지.


그러니, 그 어떤 결과라도 사죄하지 않으면 안 돼.


“전 못 가요. 여기서 지켜보겠습니다.”


“루이코짱...?!”


하루가 당혹감을 드러냈지만,


“저는 여기서 지켜볼 의무가 있어요.”


별로 놀라지도 않은 여왕이 옅게 웃었다.


“죄책감이라면 가질 필요 없어. 나도 알고 있었으니.”


역시...! 하지만 어째서? 루이코가 급히 물었다.


“어째서... 혹시 우현왕께서도 황태녀를 밀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래서 참여하신 거에요? 아무리 그래도... 이러면 황태녀가 너무 불쌍하잖아요?”


“아니. 그렇지 않아. 오히려...”


유키나는 아랫입술을 지긋하게 깨문다.


“두 분 모두를 위해서야.”


내막은 있겠지만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재차 물으려는 루이코에게 유키나가 찡긋했다.


“알았어. 정 가기 싫다면... 내가 보호할 테니까 여기 있어도 좋아.”


그녀의 차분한 표정에 루이코는 깨달았다. 지금껏 이어지는 이상하고 아귀가 맞지 않는 모든 일의 열쇠를, 어쩌면 이 여왕이 쥐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녀가 이토록 침착한 것을 보면 생각보다는 심각한 상황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럼 조금은 안심해도 될까. 보호해준다고도 했고...


루이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마음이 급했다.


“그럼 먼저 가볼게요.”


그녀는 발코니로 향했다. 여긴 2층이지만, 며칠간의 배움으로도 부드러운 풀밭에 별 무리 없이 착지했다.


하루도 여왕을 눈짓했다. 끄덕인 유키나가 이내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발코니로 날아갔다.


루이코는 앞선 이들을 금방 발견했다. 르아냐 본궁이 있는 섬을 건너, 저 멀리 호수를 넘어간 숲을 낀 풀밭에 이미 두 사람이 거리를 두고 서 있다.


아직 루이코는 하늘을 날지 못하고, 또한 이 넓이를 점프할만한 도약력도 없다. 할 수 없이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유일한 다리를 찾아 달리기 시작하자, 어느 사이에 몸이 허공으로 들린다. 하루를 끼고 날아온 유키나의 짓이다.


“꽉 잡아.”


말이 들리기가 무섭게, 엄청난 바람과 함께 순식간에 맑고 깊은 수면이 눈 아래로 빠르게 지나간다. 채 당혹스러운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이미 건너편에 도달해 있다. 아직 상당한 거리가 있지만 대화 정도는 들을 수 있다.


대치중인 두 남녀는 잠시 그녀들을 곁눈질했지만, 곧 관심을 끊었다.


세리사는 허공에 오른손을 비스듬히 뻗었다. 순간 길고도 붉게 빛나는 빛이 손 주변에 나타나고, 예리하면서도 곧고 긴 장검이 곧 쥐어졌다.


그는 양미간을 심하게 좁혔다.


“...무기까지 꺼내드는 거냐...?!”


하지만 그도 곧 같은 방식으로 장검을 손에 쥔다. 칼스의 것이 조금 더 길었지만 모양은 비슷했다.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의 칼이 가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은색 칼날이 봄날을 표현한 태양빛에 비춰져 곡선의 무지개를 은은하게 그리는 가운데, 세리사는 아프고도 쓰디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결국 우리들, 여기까지 왔구나...”


“말은 똑바로 해. 네가 만든 사태야.”


그의 냉랭한 기운은 맹렬한 블리자드에 못지않다.


“그냥 주먹다짐도 아니고 무기라... 먼저 꺼낸 건 너니까 일단 받아는 준다만, ...의미는 알지?”


“...당신 손에 죽어도 할 말이 없다는 거잖아...?”


“잘 알고 있으니 안심이다.”


천년에 다시 천년을 변함없이 이어온 아름다운 정원에서, 세상 누구보다 아름답고 강력한 그들의 싸움은,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달으며 시작되었다.




수고하셨어요.


작가의말

<< 다음화 예고>>

 

 세상 그 누구보다 강하고 아름다운 그들에게 있었던, 약하고 추했던 과거가 차츰 드러난다. 해야만 했던 말과, 차마 하지 못한 말, 알아야 했던 것과 모르길 바랬던 것으로 인한 싸움도  드디어 종막을 맞이하는데...

 

 제 8장. ‘세상의 끝에서 진심을 외치다’ 편을 기대해주세요. 두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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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부터 독감으로 개고생해서... 업뎃이 매우 늦었습니다. ㅡㅜ

비몽사몽간에 급히 교정한거라 잘 보았다 하긴 힘들어서 약간은 차후 수정 들어갈지도 모르지만,  다음 장과 에필로그로  2권은 종료될 예정입니다.

다들 건강 조심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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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 2장. 인간의 땅. (1) +6 14.09.14 1,621 32 17쪽
185 Ⓡ 1장. 1 vs 100. (3) +12 14.09.13 2,176 85 20쪽
184 Ⓡ 1장. 1 vs 100. (2) +12 14.09.11 1,594 23 18쪽
183 Ⓡ 1장. 1 vs 100. (1) +8 14.09.09 1,691 26 23쪽
182 Ⓡ <9권. 변혁(變革)의 시대> 프롤로그 : 겨울날의 책봉식 +4 14.09.07 1,722 30 11쪽
181 가족의 만찬 편 후기 +6 14.09.07 1,329 29 3쪽
180 Ⓡ <8권. 가족(家族)의 만찬> 에필로그 : 새로운 끈 +6 14.09.06 2,540 102 20쪽
179 Ⓡ 8장. 가지 않았기에 걸어야 할 길. (3) +10 14.09.05 1,754 26 19쪽
178 Ⓡ 8장. 가지 않았기에 걸어야 할 길. (2) +10 14.09.04 1,694 30 18쪽
177 Ⓡ 8장. 가지 않았기에 걸어야 할 길. (1) +8 14.09.03 1,653 29 11쪽
176 Ⓡ 7장. 실타래를 풀다. (3) +8 14.09.02 1,625 25 16쪽
175 Ⓡ 7장. 실타래를 풀다. (2) +6 14.09.01 1,563 24 19쪽
174 Ⓡ 7장. 실타래를 풀다. (1) +4 14.08.31 1,961 32 17쪽
173 Ⓡ 6장. 북한침공전Ⅲ : 벗어버린 껍질의 가능성. (3) +10 14.08.30 1,683 32 21쪽
172 Ⓡ 6장. 북한침공전Ⅲ : 벗어버린 껍질의 가능성. (2) +10 14.08.28 1,813 28 18쪽
171 Ⓡ 6장. 북한침공전Ⅲ : 벗어버린 껍질의 가능성. (1) +14 14.08.26 1,839 26 17쪽
170 Ⓡ 5장. 북한침공전Ⅱ : 은혜와 원한. (3) +8 14.08.25 1,825 40 20쪽
169 Ⓡ 5장. 북한침공전Ⅱ : 은혜와 원한. (2) +8 14.08.24 1,558 24 20쪽
168 Ⓡ 5장. 북한침공전Ⅱ : 은혜와 원한. (1) +12 14.08.24 1,821 36 16쪽
167 Ⓡ 4장. 북한침공전Ⅰ: 용의자 Y의 헌신. (3) +12 14.08.23 1,478 35 20쪽
166 Ⓡ 4장. 북한침공전Ⅰ: 용의자 Y의 헌신. (2) +6 14.08.22 1,897 32 14쪽
165 Ⓡ 4장. 북한침공전Ⅰ: 용의자 Y의 헌신. (1) +6 14.08.21 1,945 34 16쪽
164 Ⓡ 3장. 비상식 VS 몰상식 (3) +8 14.08.20 1,615 26 18쪽
163 Ⓡ 3장. 비상식 VS 몰상식 (2) +8 14.08.19 1,798 33 16쪽
162 Ⓡ 3장. 비상식 VS 몰상식 (1) +6 14.08.18 1,601 31 17쪽
161 Ⓡ 2장. 독특한 침략자. (3) +8 14.08.17 1,394 25 17쪽
160 Ⓡ 2장. 독특한 침략자. (2) +6 14.08.16 1,656 29 13쪽
159 Ⓡ 2장. 독특한 침략자. (1) +8 14.08.15 1,608 34 15쪽
158 Ⓡ 1장. 걸음을 내딛다. (3) +8 14.08.14 1,480 28 17쪽
157 Ⓡ 1장. 걸음을 내딛다. (2) +6 14.08.13 1,690 32 17쪽
156 Ⓡ 1장. 걸음을 내딛다. (1) +6 14.08.12 1,697 39 16쪽
155 Ⓡ <8권. 가족(家族)의 만찬> 프롤로그 : 라멘집의 이남이녀(二男二女) +10 14.08.10 2,067 22 8쪽
154 ------- 3부. 미래에의 지표 편에 앞서서... ------- +8 14.08.09 1,605 20 2쪽
153 2부 아샤르 연대기 후기 및 제목변경 설문. +6 14.08.09 1,298 18 4쪽
152 Ⓡ <7권. 배덕(背德)의 창공 後> 에필로그 : 너를 위한 기다림 (2부 完) +4 14.08.09 1,451 36 6쪽
151 Ⓡ 16장. 새벽 어스름, 어두운 창을 열며 빛을 기다리다. (3) +6 14.08.09 1,584 34 17쪽
150 Ⓡ 16장. 새벽 어스름, 어두운 창을 열며 빛을 기다리다. (2) +8 14.08.08 1,750 27 22쪽
149 Ⓡ 16장. 새벽 어스름, 어두운 창을 열며 빛을 기다리다. (1) +8 14.08.07 2,011 28 20쪽
148 Ⓡ 15장. 천국과 지옥의 경계. (3) +8 14.08.06 1,459 24 20쪽
147 Ⓡ 15장. 천국과 지옥의 경계. (2) +8 14.08.05 1,145 25 24쪽
146 Ⓡ 15장. 천국과 지옥의 경계. (1) +6 14.08.04 1,469 34 18쪽
145 Ⓡ 14장. 진정한 승리. (3) +12 14.08.02 1,428 29 24쪽
144 Ⓡ 14장. 진정한 승리. (2) +10 14.07.31 1,400 33 25쪽
143 Ⓡ 14장. 진정한 승리. (1) +6 14.07.29 1,306 21 19쪽
142 Ⓡ 13장. 끊어진 실. (3) +4 14.07.26 1,191 26 18쪽
141 Ⓡ 13장. 끊어진 실. (2) +8 14.07.24 1,554 33 18쪽
140 Ⓡ 13장. 끊어진 실. (1) +8 14.07.22 1,535 27 17쪽
139 Ⓡ 12장. 대전(大戰) : 모함(母艦) 대 모함. (3) +6 14.07.19 1,534 31 20쪽
138 Ⓡ 12장. 대전(大戰) : 모함(母艦) 대 모함. (2) +8 14.07.17 1,609 31 18쪽
137 Ⓡ 12장. 대전(大戰) : 모함(母艦) 대 모함. (1) +6 14.07.15 1,344 22 18쪽
136 Ⓡ 11장. 연전(連戰) : 욜스 전투. (3) +10 14.07.12 1,781 27 21쪽
135 Ⓡ 11장. 연전(連戰) : 욜스 전투. (2) +10 14.07.10 1,631 32 18쪽
134 Ⓡ 11장. 연전(連戰) : 욜스 전투. (1) +6 14.07.08 1,501 32 15쪽
133 Ⓡ 10장. 초전(初戰) : 비로스 731 전투. (3) +8 14.07.07 1,832 29 24쪽
132 Ⓡ 10장. 초전(初戰) : 비로스 731 전투. (2) +8 14.07.06 1,742 27 18쪽
131 Ⓡ 10장. 초전(初戰) : 비로스 731 전투. (1) +4 14.07.05 1,783 30 17쪽
130 Ⓡ 9장. 검(劍)을 손에 쥐고. (3) +8 14.07.04 974 26 20쪽
129 Ⓡ 9장. 검(劍)을 손에 쥐고. (2) +8 14.06.30 1,414 27 17쪽
128 Ⓡ <7권. 배덕(背德)의 창공 後> 9장. 검(劍)을 손에 쥐고. (1) +6 14.06.29 1,310 32 18쪽
127 <7권. 배덕(背德)의 창공 後> - 시작합니다. 그 전에 설문. +16 14.06.29 1,441 23 3쪽
126 Ⓡ 8장. 빛을 향한 어둠의 선언. (3) +6 14.06.28 1,696 31 18쪽
125 Ⓡ 8장. 빛을 향한 어둠의 선언. (2) +10 14.06.27 1,914 27 29쪽
124 Ⓡ 8장. 빛을 향한 어둠의 선언. (1) +6 14.06.26 1,737 86 25쪽
123 Ⓡ 7장. 잃은 것과 얻은 것. (3) +8 14.06.25 1,867 29 19쪽
122 Ⓡ 7장. 잃은 것과 얻은 것. (2) +6 14.06.24 1,271 24 22쪽
121 Ⓡ 7장. 잃은 것과 얻은 것. (1) +6 14.06.23 1,501 24 15쪽
120 Ⓡ 6장. 벌어진 간극. (3) +8 14.06.22 1,678 30 21쪽
119 Ⓡ 6장. 벌어진 간극. (2) +8 14.06.21 1,449 38 21쪽
118 Ⓡ 6장. 벌어진 간극. (1) +4 14.06.20 1,667 28 19쪽
117 Ⓡ 5장. 보다 중요한 것. (3) +10 14.06.19 1,965 30 23쪽
116 Ⓡ 5장. 보다 중요한 것. (2) +8 14.06.18 1,800 29 18쪽
115 Ⓡ 5장. 보다 중요한 것. (1) +8 14.06.17 1,590 28 15쪽
114 Ⓡ 4장. 분열의 조짐. (3) +2 14.06.16 1,983 35 16쪽
113 Ⓡ 4장. 분열의 조짐. (2) +6 14.06.15 1,367 32 18쪽
112 Ⓡ 4장. 분열의 조짐. (1) +8 14.06.14 1,418 29 20쪽
111 Ⓡ 3장. 엇갈린 인연. (3) +6 14.06.13 1,590 28 18쪽
110 Ⓡ 3장. 엇갈린 인연. (2) +8 14.06.12 1,665 23 17쪽
109 Ⓡ 3장. 엇갈린 인연. (1) +6 14.06.11 1,718 27 18쪽
108 Ⓡ 2장. 추억의 계단. (3) +4 14.06.10 1,607 33 16쪽
107 Ⓡ 2장. 추억의 계단. (2) +2 14.06.09 1,475 28 17쪽
106 Ⓡ 2장. 추억의 계단. (1) +2 14.06.08 1,529 28 16쪽
105 Ⓡ 1장. 여름날의 책봉식. (3) +6 14.06.06 1,442 22 16쪽
104 Ⓡ 1장. 여름날의 책봉식. (2) +2 14.06.05 1,990 36 16쪽
103 Ⓡ 1장. 여름날의 책봉식. (1) +2 14.06.04 2,557 93 17쪽
102 Ⓡ <6권. 배덕(背德)의 창공 前> 프롤로그 : 암흑의 우주, 빛의 창(槍) +2 14.06.02 1,921 36 5쪽
101 Ⓡ <5권. 인연(因緣)의 대지> 에필로그 : 정원, 세 번째 만남 +6 14.05.31 1,703 32 8쪽
100 Ⓡ 8장. 내가 감히 그대를... (3) +2 14.05.31 1,740 31 14쪽
99 Ⓡ 8장. 내가 감히 그대를... (2) +4 14.05.30 1,580 31 22쪽
98 Ⓡ 8장. 내가 감히 그대를... (1) +10 14.05.29 1,613 30 19쪽
97 Ⓡ 7장. 상처가 준 상처. (3) +4 14.05.28 1,623 29 24쪽
96 Ⓡ 7장. 상처가 준 상처. (2) +6 14.05.27 1,522 33 24쪽
95 Ⓡ 7장. 상처가 준 상처. (1) +2 14.05.26 1,630 44 20쪽
94 Ⓡ 6장. 지켜야 하는 것, 지키고 싶은 것. (3) +2 14.05.24 1,792 27 23쪽
93 Ⓡ 6장. 지켜야 하는 것, 지키고 싶은 것. (2) +2 14.05.23 1,511 35 23쪽
92 Ⓡ 6장. 지켜야 하는 것, 지키고 싶은 것. (1) +2 14.05.22 1,571 33 18쪽
91 Ⓡ 5장. 날 수 없는 작은 새. (3) +2 14.05.21 1,595 37 22쪽
90 Ⓡ 5장. 날 수 없는 작은 새. (2) +2 14.05.20 1,445 27 18쪽
89 Ⓡ 5장. 날 수 없는 작은 새. (1) +2 14.05.19 1,709 31 16쪽
88 Ⓡ 4장. 인연의 대지. (3) +2 14.05.17 1,535 29 15쪽
87 Ⓡ 4장. 인연의 대지. (2) +2 14.05.16 1,387 30 20쪽
86 Ⓡ 4장. 인연의 대지. (1) +2 14.05.15 1,343 33 13쪽
85 Ⓡ 3장. 황야, 두 번째 만남. (3) +4 14.05.14 1,631 41 14쪽
84 Ⓡ 3장. 황야, 두 번째 만남. (2) +2 14.05.13 1,529 31 19쪽
83 Ⓡ 3장. 황야, 두 번째 만남. (1) +2 14.05.12 1,632 34 17쪽
82 Ⓡ 2장. 그것이 알고 싶다. (3) +2 14.05.09 1,337 32 22쪽
81 Ⓡ 2장. 그것이 알고 싶다. (2) +5 14.05.08 2,247 33 19쪽
80 Ⓡ 2장. 그것이 알고 싶다. (1) +4 14.05.07 1,462 41 21쪽
79 Ⓡ 1장. 상처입은 고양이. (3) +2 14.05.06 1,558 36 21쪽
78 Ⓡ 1장. 상처입은 고양이. (2) +2 14.05.05 1,724 39 17쪽
77 Ⓡ 1장. 상처입은 고양이. (1) +2 14.05.04 1,728 34 18쪽
76 Ⓡ <5권. 인연(因緣)의 대지> 프롤로그 : 인연, 첫 번째 만남 +2 14.05.03 1,607 41 12쪽
75 Ⓡ <4권. 전장(戰場)의 소년> 에필로그 : 너에게로 가는 길 +6 14.04.29 1,929 42 24쪽
74 Ⓡ 8장. 사람의 길, 왕의 길. (3) +4 14.04.28 1,453 32 25쪽
73 Ⓡ 8장. 사람의 길, 왕의 길. (2) +2 14.04.27 1,547 28 22쪽
72 Ⓡ 8장. 사람의 길, 왕의 길. (1) +4 14.04.26 1,576 37 19쪽
71 Ⓡ 7장. 갈라진 길 : 장평대전(長平大戰). (3) +4 14.04.25 1,559 27 23쪽
70 Ⓡ 7장. 갈라진 길 : 장평대전(長平大戰). (2) +4 14.04.24 1,326 34 21쪽
69 Ⓡ 7장. 갈라진 길 : 장평대전(長平大戰). (1) +4 14.04.23 1,547 32 23쪽
68 Ⓡ 6장. 불어오는 바람. (3) +4 14.04.22 1,706 30 21쪽
67 Ⓡ 6장. 불어오는 바람. (2) +4 14.04.21 1,419 32 21쪽
66 Ⓡ 6장. 불어오는 바람. (1) +4 14.04.20 1,406 37 21쪽
65 Ⓡ 5장. 장막 속에서. (3) +4 14.04.19 1,526 33 21쪽
64 Ⓡ 5장. 장막 속에서. (2) +2 14.04.18 1,569 35 19쪽
63 Ⓡ 5장. 장막 속에서. (1) +6 14.04.17 1,725 41 21쪽
62 Ⓡ 4장. 같은 길을 가다. (3) +6 14.04.16 2,010 44 21쪽
61 Ⓡ 4장. 같은 길을 가다. (2) +6 14.04.15 2,324 44 20쪽
60 Ⓡ 4장. 같은 길을 가다. (1) +4 14.04.14 1,667 43 21쪽
59 Ⓡ 3장. 인연을 맺는 여로(旅路). (3) +2 14.04.13 1,831 36 21쪽
58 Ⓡ 3장. 인연을 맺는 여로(旅路). (2) +2 14.04.12 1,957 33 18쪽
57 Ⓡ 3장. 인연을 맺는 여로(旅路). (1) +2 14.04.11 2,405 38 23쪽
56 Ⓡ 2장. 탄생과 죽음. (3) +4 14.04.10 1,500 41 13쪽
55 Ⓡ 2장. 탄생과 죽음. (2) +4 14.04.09 1,828 39 16쪽
54 Ⓡ 2장. 탄생과 죽음. (1) +4 14.04.08 2,016 70 13쪽
53 Ⓡ 1장. 하늘과 바람이 만난 곳. (3) +2 14.04.07 2,199 50 18쪽
52 Ⓡ 1장. 하늘과 바람이 만난 곳. (2) +2 14.04.06 2,013 36 15쪽
51 Ⓡ 1장. 하늘과 바람이 만난 곳. (1) +2 14.04.05 2,313 40 17쪽
50 Ⓡ <4권. 전장(戰場)의 소년> 프롤로그 : 심야(深夜)의 자객 +8 14.04.03 2,206 37 12쪽
49 ------- 2부 아샤르 연대기 시작합니다. ------- +6 14.04.03 1,779 38 2쪽
48 1부 종료 및 후기. +4 14.04.01 2,537 97 3쪽
47 Ⓡ <3권. 홍염(紅炎)의 연회> 에필로그 : 내 사랑스런 세상 (1부完) +10 14.03.31 2,352 44 14쪽
46 Ⓡ 8장. 대타협. (3) +8 14.03.29 2,001 48 14쪽
45 Ⓡ 8장. 대타협. (2) +8 14.03.28 2,131 38 25쪽
44 Ⓡ 8장. 대타협. (1) +4 14.03.27 2,146 42 22쪽
43 Ⓡ 7장. 이 마음이 너에게 닿기를... (3) +7 14.03.26 2,054 36 23쪽
42 Ⓡ 7장. 이 마음이 너에게 닿기를... (2) +4 14.03.25 2,074 47 18쪽
41 Ⓡ 7장. 이 마음이 너에게 닿기를... (1) +4 14.03.24 2,343 56 21쪽
40 Ⓡ 6장. 지옥을 만드는 것. (3) +10 14.03.22 2,298 46 26쪽
39 Ⓡ 6장. 지옥을 만드는 것. (2) +11 14.03.21 2,517 106 18쪽
38 Ⓡ 6장. 지옥을 만드는 것. (1) +11 14.03.20 2,141 43 20쪽
37 Ⓡ 5장. 푸른 바다, 붉은 하늘. (3) +12 14.03.19 2,775 55 27쪽
36 Ⓡ 5장. 푸른 바다, 붉은 하늘. (2) +4 14.03.18 3,156 88 19쪽
35 Ⓡ 5장. 푸른 바다, 붉은 하늘. (1) +6 14.03.17 2,598 45 20쪽
34 Ⓡ 4장. 증오와 편견 : 오퍼레이션 트리아이나. (3) +4 14.03.15 2,372 42 19쪽
33 Ⓡ 4장. 증오와 편견 : 오퍼레이션 트리아이나. (2) +4 14.03.14 2,576 54 21쪽
32 Ⓡ 4장. 증오와 편견 : 오퍼레이션 트리아이나. (1) +7 14.03.13 2,389 48 19쪽
31 Ⓡ 3장. 각자의 전장. (3) +8 14.03.12 2,170 48 23쪽
30 Ⓡ 3장. 각자의 전장. (2) +2 14.03.11 2,313 50 21쪽
29 Ⓡ 3장. 각자의 전장. (1) +5 14.03.10 2,197 44 19쪽
28 Ⓡ 2장. 최강 대 최강 : 일본해구 전투. (3) +4 14.03.09 2,234 49 16쪽
27 Ⓡ 2장. 최강 대 최강 : 일본해구 전투. (2) +6 14.03.08 3,001 50 20쪽
26 Ⓡ 2장. 최강 대 최강 : 일본해구 전투. (1) +4 14.03.05 2,700 53 17쪽
25 Ⓡ 1장. 전야제(前夜祭). (3) +6 14.03.01 2,502 100 15쪽
24 Ⓡ 1장. 전야제(前夜祭). (2) +4 14.02.26 2,120 46 19쪽
23 Ⓡ 1장. 전야제(前夜祭). (1) 14.02.22 2,281 37 14쪽
22 Ⓡ <3권. 홍염(紅炎)의 연회> 프롤로그 : 미지의 전장으로 +4 14.02.19 2,096 41 9쪽
21 2권까지 쓰고 후기. +10 14.02.08 2,156 44 13쪽
20 Ⓡ <2권. 구궁(九宮)의 황녀> 에필로그 : 천년의 정원 +6 14.02.08 2,333 47 22쪽
19 Ⓡ 8장. 세상의 끝에서 진심을 외치다. +12 14.02.08 2,041 54 66쪽
» Ⓡ 7장. 듣고 싶지 않았던 말. +4 14.02.05 2,413 50 72쪽
17 Ⓡ 6장. 부당거래(不當去來). +8 14.01.29 2,182 48 59쪽
16 Ⓡ 5장. 투쟁남녀(鬪爭男女). +2 14.01.25 2,531 47 43쪽
15 Ⓡ 4장. 부유하는 마음. +10 14.01.21 2,446 44 45쪽
14 Ⓡ 3장. 내일의 날씨는 태풍. +9 14.01.19 3,014 47 53쪽
13 Ⓡ 2장. 진짜 악마는 꼬리가 없다. +19 14.01.18 3,209 123 49쪽
12 Ⓡ 1장. 여우 집에 간 두루미. +8 14.01.18 3,650 107 38쪽
11 Ⓡ <2권. 구궁(九宮)의 황녀> 프롤로그 : 우주 저 너머에서 +4 14.01.18 2,911 52 3쪽
10 Ⓡ <1권. 일상(日常)의 파괴> 에필로그 : 가장 좋아하는 나 +14 14.01.14 3,090 64 9쪽
9 Ⓡ 8장. 나의 이름은... +10 14.01.14 3,020 67 36쪽
8 Ⓡ 7장. 생(生)과 사(死). +4 14.01.14 3,317 105 44쪽
7 Ⓡ 6장. 지키는 이들의 싸움 +7 14.01.14 3,382 55 33쪽
6 Ⓡ 5장. 불편한 동행. +10 14.01.14 3,483 59 37쪽
5 Ⓡ 4장. 나는 왕이로소이다. +6 14.01.14 3,845 70 45쪽
4 Ⓡ 3장. 미지와의 조우. +7 14.01.14 4,648 64 40쪽
3 Ⓡ 2장. 북해도의 봄. +11 14.01.14 9,760 95 48쪽
2 Ⓡ 1장. 무너지는 세상. +30 14.01.14 16,562 179 23쪽
1 Ⓡ<1권. 일상(日常)의 파괴> 프롤로그 : 어느 연설 +33 14.01.14 24,070 245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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