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장. 새벽 어스름, 어두운 창을 열며 빛을 기다리다. (1)
한 권이 끝날 때, 가슴에 남는 글이 되길 바랍니다.
Ⅰ
6월에 접어들어 전사자들의 애도 기간이 끝났다.
복귀한 칼스군 통합회의를 열어, 최고사령관 칭호와 삼대장군은 자신이 당분간 유지하되, 대신 우현왕 세라비 유키나 세이야를 삼군부사령장관 겸 제 3함대 사령관으로 임명, 실전부대의 지휘를 맡기기로 했다.
이어 군령본부총장 대리로는 자신의 참모장을 역임한 케네리스 아시야 정제독을, 통합지원본부장 대리로 내전의 보급 책임자였던 엘리후 로이아드 정제독을 임명했다.
한때 8개 정규 함대 4만 8천여 척, 700만 병력을 자랑했던 우주함대는 내전기간 동안 무려 4할 이상의 피해를 입었다.
이에 전군을 5개함대로 재편성해 제 1함대는 비로르 메이사이, 쿠라프 제세르, 도트로이 미세나, 베타 칸타이를 각각의 사령관으로 보임했다.
바쁜 와중에도 그는, 때때로 역대 모든 황족이 모여 있는 황실 묘지를 찾아가 시간을 보내곤 했다.
공중도시라 면적이 제한된 아샤르에선 죽은 이를 화장하여 보석으로 만든다. 그의 가족들도 그러했다.
아미에는 같이 안치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대외적으로 배신자일 뿐이었다. 대신 칼스는 공언대로 그 기록 일체를 그의 힘으로 봉인했고, 또한 그녀의 보석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걸었다. 이것으로 그녀는 항상 그의 심장 가까이에 있을 것이다.
한편 세리사는 다시 국정으로 돌아왔지만, 황제의 쇠약이 차츰 눈에 보여 신하들이 걱정하고 있었다. 게다가 어째선지 황태녀도 눈에 띄게 의욕이 감소했다.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총재의 보고에 황제는 얼굴을 찌푸렸다.
평소에는 올해의 토픽 감이었을 집단 난투극이, 밤사이 몇 건이나 보고되어 있었다.
“이유는... 아니, 묻지 않아도 알겠네.”
“네... 책임론이죠. 우울함을 달래기 위해 한 잔 한 것은 좋았지만, 싸움에도 좋은 기폭제가 된 셈입니다.”
젊은 층의 대대적인 감소로 사회는 상당히 활력을 잃었다. 우울함에 지나치게 조용해지는가 하면, 술을 마셔도 대화를 해도 풀리지 않는 분노에 금방 시끄러워졌다. 각 영역에서 정신적 이유로 사퇴와 휴직원이 줄을 이었다.
오랫동안 큰 변화 없이 살아온, 하지만 전례 없는 충격에 사회 전체에 깔려버린 매너리즘. 이것이 현재의 분위기다.
“가라앉은 분위기의 빠른 해소를 위해서도, 뭔가 경사가 하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경사라... 나올 만한 게 있나?”
“...없겠지요.”
하지만 황태녀를 한번 흘깃 쳐다본 총재에게 황제가 말했다.
“일단 폭력 사태에 대해서는 막아야 해. 예의 포고를 한 번 더 내리자.”
내전 종료 후 정부에서는 다양한 포고가 쏟아졌다. 이미 대부분의 주모자가 사망했지만, 정부와 사회 영역에 남아 있을지 모르는 동조자를 색출하기 위해 일단 강도 높은 물밑 조사가 이루어졌다.
다만 실제로 형사적인 처벌을 받은 이는 거의 없었고, 반대로 칙명으로 남아 있는 반란자들의 가족들에 대한 보호는 엄중하게 이루어졌다.
과거 현왕궁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사례도 있었기에, 이 문제에 대해서는 황제도 엄하게 대했다.
“그들도 짐의 신민이고 자식이다. 의견이 달랐다고 해서 원한에 근거한 폭거로 대응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는 이가 없기를 바란다.”
그래도 마음속의 원한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내심 반발하는 사람도 꽤나 있다. 사람의 마음은 복잡하다.
“포고만으로 끝나면 좋겠습니다. 외람되오나...”
총재는 황제의 눈치를 심히 살폈다.
“황실 무용론도 아주 조금이지만 나와서... 물론 불경죄로 처벌할 수는 없지만요...”
아무리 황제라도 그런 말만으로는 처벌할 수 없다.
“그건 각오했어. ...전쟁을 막지 못한, 아니 오히려 빌미를 준 황제이니 그건 당연하겠지.”
“하지만 이것이 장기화되어, 나중에 황태녀 전하의 치세까지 이어지면...”
세리사도 이 전쟁의 책임론에서 빗겨갈 수 없다. 아무래도 권력 약화는 필연이다.
“황실에서 대국민 사과 및 호소라도 해야 하나...”
제왕무치(帝王無恥)는 기본이다. 황제라도 실정을 행할 수 있지만,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면 다른 정책으로 무마하거나 인선을 새롭게 하는 것이 경우다.
“...페하의 책임만은 아닙니다만, 책임자는 책임을 지라고 있는 자리죠.”
총재가 부정하지 않자 세리사는 급히 끼어들었다.
“...차라리 제가 하겠습니다.”
횡제가 만류했다.
“안 된다. 이미 한 번 무릎을 꿇은 너다. ...그 꼴을 또 당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느니.”
“...저는 불효자로 남고 싶진 않습니다.”
이미 불효라면 아버지 모르게 수차례 저질렀지만...
“딸아이를 수렁에 밀어 넣는 아버지로도 남고 싶지 않다. ...설령 그렇게 되어도 수치라 생각하지 않아.”
“제가 하게 되어도 수치라 생각하지 않아요.”
“서로 수치가 아니라면 괜찮지 않으냐.”
“그래도...!”
아옹다옹 부녀를 지긋이 살피던 총재는, 스스로도 적지 않는 나이임에도 문득 장난스런 웃음을 지었다.
“두 분의 상호 배려에 감복하면서, 소신이 제안을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엇인고?”
“결코 황족을 비하하거나 국민을 기만하자는 것이 아님을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슬픔이 있다면 기쁨이 있어야 함은 또 당연하지요. 그러니... 혹시 황족 중에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주실 분은 없습니까? ...예를 들어 일종의 축하할 거리... 연애사나 결혼 같은 것 말이지요.”
황제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확실히 기만일세.”
딸은 금기의 사랑을 하고, 피가 섞이지 않은 아들은 사랑에 지쳤다. 유키나가 있지만 아직 어리다.
그는 돌려 말했다.
“게다가 각자 좋아하는 사람도 없는데...”
다들 얼굴값을 못하는군. 미간을 좁히는 총재에게 황제가 다시 말했다.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을 찾고 사랑할 권리가 있잖은가. ...짐에게 강요 같은 짓을 시키진 말게.”
“무엇보다...”
세리사도 끼어들었다.
“...이렇게 나라가 엉망인데, 연애할 틈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사람들이 화낼 거에요.”
“...너무 비관적으로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총재가 물러간 후 황제가 은근히 물었다.
“...말은 그렇게 했다만, 너... 앞으로 어쩔 작정이냐? ...칼스 말이다.”
한참 입을 다물던 딸이 겨우 물었다.
“...아바마마는... 제가 그와 엮이는 것에 대해 어찌 생각하세요?”
진작 물어야 했을 질문이지만 경황이 없어 하지 못했다. 아무리 그녀라도 전쟁 통이니 한가롭게 상열지사를 이야기할 수 없었다.
“...잘 모르겠다. 하지만 말이다... 심정적으로는 네 편을 들어주어야 하겠지만, 지금 녀석도 자기 가계에서는 혼자야. 그걸 포기하라 할 수는 없지 않느냐.”
“...네.”
“물론 너희 둘 사이에 아이가 많이 나온다면 상관없지만, 그렇게 되면 네가 출산 부담이 너무 커. 아니면 유키나에게 아이를 하나 달라고 해야 한다.”
“...그렇겠지요...”
그녀는 가슴이 먹먹했다. 가계를 이을 황족이 더 있었던 내전 전이라면 모를까, 이제 자신이 생각했던 방법도 쓸 수 없다. 아버지가 다시 물었다.
“말이 나온 김에 나도 물어보는 거다. ...너, 다른 이와 연분을 맺을 수 있겠느냐?”
“...힘들 것 같아요.”
“아직 그에 대한 마음이 변함이 없어서겠지.”
틀려요. 그녀는 순간 외치고 싶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을 떠나, 성행위 자체가 불가능한 그녀는 대안이 전혀 없다.
세상 어느 남자가, 사랑을 나누지 못하는 여자를 평생의 반려로 삼을까.
후계가 없는 황제가 무슨 미래가 있을까.
그리고... 미련한 이 마음은 그대로다.
“그렇다고 결혼은 하지 않을 생각이냐? 여제의 경우에는 빨리 하는 것이 상책이니라. 남자는 낳아줄 배가 많지만 너는 너 혼자이지 않느냐.”
남자에게 계승 우선권이 주어진 결정적인 이유가 이것이다.
대답없는 딸에게 아버지가 은근히 물었다.
“...만약 아비가 허락한다면... 제위를 포기하는 대신 그를 노려보련?”
뜻밖의 말에 그녀는 흠칫했다.
“아바마마... 그건...”
“남의 불행이니 함부로 논해서는 아니겠지만, 그는 다시 혼자야. ...파고들 틈은 있지 않겠니. ...물론 녀석도 상심이 크니 당장은 조심해야겠지만...”
세리사는 반쯤 눈을 감았다.
초조한 마음이 앞서 그를 섣불리 건드린 결과는 치명적이다.
역시 나는 아직 너무 어렸다. 아버지가 말하는 기회도 이제는 없다.
“...제게 제위를 물려주고 싶으셨잖아요. 어째서?”
“그건 그렇지만...”
아버지는 무척이나 아프게 웃었다.
“아비는 네 행복이 우선이야. 외로이 불행한 황제가 되느니, 행복한 아내가 되는 게 나을 수도 있어.”
“...아바마마...”
“어미 없이 외롭게 자라게 만들고, 본의 아니게 냉대하고, 이제 겨우 숨통이 트일 찰나에 전후 수습까지... 딸아이에게 못할 일만 실컷 시킨 못난 아비니, 네 행복에 걸림돌이 되고 싶지 않단다. ...아깝지만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원한다면 한번 노려 보거라. 아마도 손주 녀석 얼굴은 볼 수 없겠지만... 활짝 웃는 네 손을 건네주는 일 정도는 해보고 싶으니...”
아버지의 큰 결심에 그녀는 감사했다.
그리고 그 열배의 절망을 다시 느꼈다. 더욱 큰 실망을 더해야 할 시기가 온 것일까...
듣다 못한 그녀는 서러운 눈물을 터트렸다.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자신을 생각해준다. 그런데도... 나는 이제껏 마땅한 효도도 채 하지 못했어.
이런 처지에 어떻게 아버지를 끝까지 속여...!
“죄송... 죄송해요...!”
“괜찮다니까, 네가 행복하면...”
“그게 아니에요...!”
애지중지하는 딸아이가 갑자기 일어나 부복하자 놀란 부황이 물었다.
“대체 왜 그러느냐... 갑자기?”
“...저는 그럴 수도 없어요.”
“어떤 일이 있어도 아비는 네 편이다. 말해 보거라.”
그 말이 너무나도 고마워, 그녀는 결국 털어놓고 말았다.
자신은 불임이며, 그 어떤 이와도 사랑을 나눌 수 없음을 말이다.
“...세상에...!”
황제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놀란 딸이 급히 일어나 부축하려했지만 손짓에 제지당했다. 신음성이 울렸다.
“...그 오랜 세월동안... 그리 고민하며 숨겨왔었냐...”
세리사는 두 손을 모으고 처분을 기다렸다. 이미 발밑에는 몇 방울의 눈물이 떨어졌다.
“헛고생을 하게 해드려... 너무 죄송해요...”
“...아니, 아니다...”
깊은 한숨이 정침을 휘감았다.
“혹시 다른 이가 알고 있느냐?”
“...유키나가 알고 있고... 또...”
“또...?”
“칼스도 얼마 전에 알았어요. 그 외에는 없습니다.”
황제는 다시 타는 듯 뜨거운 이마를 짚었다.
“칼스도 알고 있단 말이지. 그렇다면 나는 놈에게, 제위와 불임의 딸을 같이 받아달라고 해야 할 판이구나. 일단 이 사실이 알려지면 네 계승권도 위험한데...”
그녀의 불임은 명백히 왕조 교체의 사유가 된다.
그저 송구한 딸에게 황제는 억지 웃음을 보였다.
“...잠시 생각하자꾸나. 일단 물러가거라... 하지만, 너무 슬퍼하지는 말거라. 애비도 열심히 생각할 테니...”
세리사가 비틀거리며 물러가자 황제는 다시금 머리를 감쌌다. 근 반년 고민하느라 부쩍 쇠약해졌지만, 이것은 그 어느 것과도 비견할 수 없을 충격이었다.
아내는 지상인임을 죽을 때까지 숨겼고, 그 일은 황제의 마음속 큰 걸림돌이었다. 그도 모자라서 이제는 유일한 핏줄, 딸아이까지 불구가 되었다.
하지만 딸을 원망할 수도 없다. 그동안 얼마나 가슴 태우며 부끄러워했을까. 그리 잘해주지도 못한 딸이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럴 수 없다.
깊은 고뇌에 빠진 황제는, 자리에 누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오래도록 침묵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칼스는 대경실색했다.
눈 앞에 선 이는 북궁 시녀장이인 토오네로, 80세에 가깝지만 아들처럼 키워온 황제보다 조금은 더 정정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세월의 주름살이 깊은 시름에 더욱 두드러져보였다.
“...말씀대로입니다. 급히 찾으시니 입궁을...”
“...알겠습니다.”
그가 접한 소식은 황제어환이었다.
어제 밤까지는 괜찮았다지만 급격히 나빠졌다고 하며, 이는 어느 정도는 예상된 수순이긴 했다.
그들은 육체노화가 늦은 편이며 오래도록 정정하지만, 죽음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는 갑자기 나빠진다.
그렇다면 이는 곧...
한달음에 내달린 그가 정침에 도착하자, 세리사는 이미 들어가 있었고 유키나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도 당황했는지, 치마에는 몇 번이나 손으로 움켜쥔 흔적이 남아 있었다. 칼스조차 안절부절, 황제가 부를 때까지 몇 번이고 복도를 거닐어야 했다.
마침내 허락이 떨어지고 들어간 정침. 이미 수많은 의료장비들이 붙은 황제는 더욱 안색이 파리했다.
머리맡을 지키던 세리사가 두 사람이 들어오자 일어섰다. 끊임없이 울었는지 눈이 빨갰다.
“폐하...”
칼스가 조심스레 입을 열자, 감긴 황제의 눈이 열리더니 조금 웃었다.
“왔느냐...”
“어찌 이러다가...”
하지만 칼스도 이미 이해가 갔다.
그는 30년간 병상에 있었고, 말년에는 나라를 좀먹은 내전이 일어났다. 그는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그것이 치세의 안정을 보장해주지는 못했다.
또한 아직 칼스는 몰랐지만, 이 며칠 동안 황제는 밤잠을 못 이루며 고민했다. 충격과 아픔은 극심한 부담을 주었을 것이다.
“...짐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황제의 말은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복이 많았어. 좋은 아우들에, 그들이 낳은 아이들이 참으로 많은 셈이었지. 하지만 박복한 셈이야. 아우들과 아이들이 연달아 죽고, 이 나라는 혼돈의 도가니다...”
이어 그는 세리사를 보며 말했다.
“용서해라. 많이 사랑해주지 못했고, 그저 이리 짐만 던져주었구나.”
세리사는 대답 대신 그저 울면서 고개를 저었다.
“유키나. 너를 천애고아로 만든 것이 짐의 잘못이다. 네가 제일 어린데, 참으로 못할 짓을 했구나.”
유키나도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황제가 씁쓸히 말했다.
“...이제 유조(遺詔)를 남기지 않을 수가 없다. 때문에... 앞으로 나라를 이끌어야 할 너희 셋에게 이야기를 조금 듣고, 또한 할 말을 해야 한다.”
아직 약간의 힘은 남아 있는 그 말투는 꽤 또렷했다.
“세리사에게는 이미 이야기했고... 칼스만 남고 잠시 나가거라. 다시 부르마.”
후계자를 떠받칠 신하들에게 고명을 남겨 힘을 실어준다. 그에게도 아마 그럴 것이다.
그녀들이 나가자 황제는 목소리를 조금 더 낮추었다.
“...세리사는 아직 미약하다. 그에 비해서 너는 강력한 권신. 세리사가 아니더라도 제법 경계를 받겠지. ...각오하느냐?”
“그 이상의 것도 각오하고 있습니다.”
“저 아이가 불임인 거... 알고 있다고 했지?”
“네...”
칼스는 순순히 끄덕였다. 황제는 거듭 아픈 웃음으로,
“...그럼 말하마. 짐이 네게 제위를 물려주면, 저 아이도 받아줄 수 있겠느냐?”
“...그게 무슨...!”
젊은 왕의 몸이 조금 튀었지만 황제는 담담했다.
“할 수 없잖느냐. 후계를 가지지 못하는 황제가 무슨 의미가 있다고. 부모 된 입장에서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잖느냐. 세리사도 후궁 정도로는 질투하지 않을 거다. 애당초 불임이니 질투할 처지가 아니잖느냐.”
졸지에 종마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칼스는 쓴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아직 마음에 남아 있는 아미에는 어떻게 되는가. 자신의 마음인가, 황실과 국가인가.
아직은 답이 없다. 그는 평소 생각하던 입장밖에 내놓을 수가 없었다.
“...저는 황후마마의 고명, 그리고... 지금껏 폐하께 받은 은혜 모두를 배신할 수 없습니다. ...거절하지요.”
“...세리사가 제위를 잇지 않겠다고 한다면?”
아직도냐...!
칼스는 기가 막혔다.
“...그게 그리 간단히 내팽개칠 자리였습니까?”
“하지만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야.”
“이해는 합니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따님은 나약한 점도 있지만 강한 점도 있습니다. 그 어떤 상처라도 치유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물론 흉터는 지겠지만, 그것으로 얻게 되는 것도 있고요. 언젠가는 일어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럼 후계는 어떻게 하느냐. 불임의 황제가 대안이 있을 리가 없지 않느냐.”
“저는 세리사가 좋은 황제가 되길 바랍니다. 그 다음은 양자를 들이든 어떻게든 되겠지요. 설령 제 아이가 다음 제위에 오른다 해도, 저만은 결코 그 자리에 앉을 수 없습니다. ...그 자리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따님의 자리입니다.”
“짐도 혈육에게 자리를 주고 싶어. 하지만 어쩔 수가 없지 않으냐. 그렇다면 딸아이의 행복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니 네게 부탁하는 것이야.”
칼스는 내심 의아했다.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면, 황제도 딸에게 미리 떠보았을 것이다. 모욕당한,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그녀가, 내 아내가 되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을 리가 없는데?
설마 아직도 미련이 남은 건가.
...만약 그렇다면 더더욱 받을 수 없다.
“세월이 지나면 따님의 고집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일 터.”
“저는 변하지 않을 겁니다.”
그의 고집은 흔들림이 없었다. 낮은 한숨을 쉰 황제가 다시 은근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하나 약조를 받자. 반드시 지켜야 한다.”
“말씀하십시오.”
“조정에 내릴 것과는 별개로, 세리사에게 유조 하나를 따로 내렸다. 네게 제위를 이으라는 강요도, 세리사를 받아달라는 부탁도 아니다. 다만 황제의 마지막 칙명이자 부모의 유언이라 생각하고, 부디 지켜주기 바란다.”
“어떤 내용인지... 미리 알 수 없을까요?”
“안 된다. 허나 너도 짐이 왜 이런 명령을 내렸는지, 장차 알 수 있을 것이야. 그러니 반드시... 알겠지?”
이 간곡함은 거부할 수 없다. 칼스는 끄덕였다.
“네. 반드시 지키고, 어기지 않겠습니다.”
“반드시 그래야한다.”
드물게도 그를 못 미더워하는 황제였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황제는 비로소 안심한 듯 웃었다.
“고맙다. 그만 물러가고, 다시 세리사를 들라고 해라.”
“네. 그리고, 아무쪼록 따님의 마음을 돌릴 수 있도록... 또한 마음을 굳게 하시길 바랍니다. 이 병환은 일시적일 것일 테니...”
“생각해 주는 것은 고맙다만... 글쎄다.”
황제의 약한 웃음을 뒤로 하고 칼스는 정침을 나섰다.
간신히 눈물자국을 지운 그녀들을 다시 들여보내고 칼스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이리 다짐까지...
하지만 이미 약속했다. 설령 무리가 되더라도 받아들일 것이다. 그는 몇 번이고 다짐했고 또한 먹먹했다.
그에게 누구보다 큰 영향력을 준 또 한 명의 아버지, 황제의 죽음이 코앞에 다가와 있다. 그가 남겨두고 갈 빛과 어둠의 깊이는 이제 알 수 없다.
또한, 황제의 입을 통해 간접적이긴 하지만, 어쩌면 아직 세리사에겐 미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한 이 순간, 설령 그렇다면 어떻게 해도 벗어던질 수 없는 굴레의 무게에, 그는 한탄했고 또한 그녀가 안타까웠다.
정말 미련이 남았다면, 그 모욕으로도 안 될 정도라면 무슨 생각으로 지금 본심에도 없는 소리를 늘어놓는지.
차마 물어볼 수 없지만 묻고 탓하고 싶었다.
미련한 미련을 가진 이 바보야.
나도 너만큼 바보이니 탓할 수 없지만... 너는 정말 바보다.
아프고 눈물이 날 정도로 바보다...
수고하셨어요.
- 작가의말
길었던 2부도 이제 이 장과 에필로그로 끝나갑니다. 골치를 썩는 황제의 유지의 숨겨진 뜻은 다음 장에... 토요일날 에필로그 및 후기까지 마감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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