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장. 엇갈린 인연. (1)
한 권이 끝날 때, 가슴에 남는 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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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냐.”
침묵을 깨며 칼스가 물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유키나가 분별이 없진 않을 것이며, 또한 두 사람과 두루 친하고 이제껏 입을 다물었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점이다.
“...오라버니의 생각을 먼저 듣고 싶어요.”
“...글쎄...”
잠시 곁눈질한 바, 세리사는 무릎을 모아 앉은 채로 두 발끝만 만지작거린다. 고개를 푹 숙인 탓에 표정은 살필 수 없었지만, 사실 뻔하다.
“이 이야기를 한답시고 나를 멀리 보낸 거였나. 멀쩡한 사슴만 괜히 죽인 꼴이 되었잖아.”
“...확인이 필요했으니까요. 우리끼리만 같은 자리에서 보기가 쉽지 않잖아요. 마침 기회다 싶어 물어본 거죠. ...그래서, 오라버니 생각은요?”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솔직히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고...”
“왜 말이 안 돼요?”
칼스는 의아했다. 이 꼬마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지만 막내의 입에서 나온 말은 놀라웠다.
“저는 말이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언니보다는 오라버니가 제위에 더 합당하다고 생각해왔죠.”
사람이 있을 리는 없지만 누군가가 들을 듯, 부지불식 주변을 돌아본 칼스는 미간을 좁혔다.
“너, 이거 엄청난 불경이라는 것 알고 있니? 게다가, 하필 다음 황제를 앞에 두고 이런 말을 해?”
준엄한 꾸짖음에도 그녀는 당돌했다.
“언니가 모자란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라피스나 쟈카가 나중에 어떻게 성장할지 모르지만, 오라버니는 현 세대에서 가장 유능한 황족이고 유일한 성인 남자에요. 좀 더 유능한 인물이 제위에 오르는 게 나라에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유키나는 회상하듯 조금 웃었다.
“오라버니는 어느 누구보다 꿈이 크죠.”
“...난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 아냐.”
“전 그보다는 높게 평가한답니다. 물론 오라버니도 남들이 모르는 허술한 면이 많지만, 그건 사람이니까 당연한 거고... 누구나 그 정도는 되죠.”
오늘은 유키나도 이상하다. 칼스는 머리가 멍해졌다.
“그러니 답은 간단하잖아요? 오라버니가 황제가 되어서 언니를 받아주면 되는 거고...”
“그러니까, 그래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고...!”
“언니, ...싫어해요?”
대뜸 노골적인 질문을 던져온다. 매우 직설적인 성격이긴 하지만 이 녀석, 오늘 왜 이런가.
당사자 앞이다. 칼스는 신중히 대답을 골랐다.
“...너만큼은 예뻐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야.”
“...정말 그런가요?”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거냐? 세리사, 너도 좀 말을 해 봐. 대체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한 거냐.”
“그건...”
유키나가 대신 대답하려는 것을 손을 들어 제지했다.
“말해 봐.”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침묵 속이다. 유키나가 나섰다.
“오라버니, 제가 말씀드릴게요.”
“...들어나 보자.”
“저는 비밀을 지킬 거에요. 하지만 저도 눈치를 챘는데... 부모님들이나 다른 이들 중에서도 또 모르죠.”
생각만 해도 아찔한 칼스가 다소 힘없이 되물었다.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오라버니가 받아주면 저도 도울 거고, 그러면 어떻게든 감당이 될 것 같으니...”
“그럴 이유가 없잖니. 각자의 가계도 있고...”
“그런 것은 어떻게든 돼요.”
“속편한 소리 하고 있다. 부모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내 눈에는 벌써 다들 뒷목을 잡는 꼴이 보이거든? 세리사는 물론 내가 당할 곤욕은 생각하는 거냐?”
“예로부터 말하길, 약간의 방해나 걸림돌이 있는 사랑이 가치가 있는 법이랍니다.”
“물론 그 출처는 어떤 바보 왕녀겠지?”
“바보는 누굴까요? 지존의 지위와 엄청난 미녀를 동시에 얻는 기회를 걷어차는데요?”
“틀려. 찬탈의 악명과 배덕(背德)의 오명을 동시에 쓰지 않으려는 현명함이지.”
시선으로 오기가 오갔고 칼스가 내뱉듯이 말했다.
“사실은 말이다, 내가 왜 이 놀음을 해 줘야하는지 그동안 계속 의문이었고... 단지 이 녀석이 모처럼 즐거워하기에 장단을 맞춰준 정도인데. 네게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니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다. ...세리사 너, 유키나에게 대체 어디까지 이야기한 거야?”
엄중한 추궁에 그녀의 고개가 하향곡선을 그렸다.
“절대 말하지 않기로 했을 텐데. 이거 계약 파기야...!”
거듭된 답답함에 절로 큰 소리가 나왔다. 유키나가 눈매를 조금 찌푸렸다.
“윽박지르지 말아요. 오라버니답지 않게...”
“넌 좀 빠지고...!”
하지만, 옥신각신하는 틈을 뚫고 모기소리가 울렸다.
“...전부...”
“전부...?!”
세리사는는 더듬거리며 변명했다.
“할 수 없었어. 유키나도 너무 눈치가 좋고... 그리고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유키나잖아...”
“내 참...!”
칼스는 걱정과 짜증이 함께 밀려왔다.
궁중은 벽에도 귀가 있고, 소문이란 것은 비밀스러울수록 빨리 퍼진다. 그리고 사정 따윈 전혀 없다.
하지만 유키나가 떫은 얼굴로 말했다.
“그냥 받아들이면 될 것이지 왜 이렇게...”
“쉽게 말하네. 유키나 너, 자금 큰 착각을 하나 하고 있는데, 그리고 아마 세리사도 같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만약 내가 세리사를 동생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않는, 아니지, 그냥 싫다면 어떻게 할 거냐?”
“네...?”
당혹한 목소리가 돌아옴에, 슬슬 주도권을 잡았다 생각한 칼스는 더욱 밀어붙였다.
“이 문제는 대전제가 있어. 내가 내 의지를 다 죽이고 희생해야 한다는 거다. 왜 내가 이 녀석을 받아주고 사랑해야 하지?”
“오라버니도 마음이 있었기에 계약 같은 걸 한 건 아닌가요?”
“틀려. 달라붙은 애를 떨어뜨릴 방법은 없고, 안 해주면 죽을 기센데 방법이 없잖아? 세리사는 내가 자신을 죽자고 거부할지도 모른다는 예상은 하나도 하지 않은 모양인데, 대체 그 자신감은 어디서 나온 거지?”
“그건 오라버니 책임도 커요. 왜 애당초 확실하게 거부하지 못했어요? 성장하라고 그러고, 계약도 맺고... 뭐하는 짓이었어요?”
“나라고 경험이 있었나? 나도 겨우 그런 식으로밖에 대처하지 못한 것에 지금은 후회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상처를 주었어야 옳았어?”
“그러면 지금 이렇게 질질 끌다가... 나중에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못했어. 사춘기 꼬마의 생각에 장단을 맞춰준 것뿐이야. 어린 마음의 착각 따윈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그렇게 생각한 내가 이상한 거냐? 아니면 그냥 당신이 날 사랑하면 끝이라는 세리사가 이상한 거냐.”
유키나가 듣기에도 칼스의 말 쪽이 정론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런 말을 한 것은, 이미 심정적으로 세리사에게 기울었기 때문이다.
칼스의 능력을 인정하는 유키나의 경우, 정책적인 면에서 칼스와 세리사가 부딪힌다면 칼스의 편을 들 확률이 높았다.
반대로 남녀의 문제라면, 어릴 적부터 자매처럼 자란 세리사의 편을 들 확률이 높은 것이다.
“나는 용납 못한다고, 거부한다고 몇 번이고 말했다. 세리사는 내게 노력하라 했지만, 막상 자신이 포기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아.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이제는 생각해 줄때도 되지 않았어? 너희 둘 다 말이다.”
두 여자의 침묵에, 칼스는 준비했던 결정타를 날렸다.
“그리고 결정적인 문제. 이걸 들으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걸.”
“....뭐죠?”
그가 내민 패라면 절대 범상치 않다.
유키나는 움찔했고, 세리사도 방금 사형선고를 받은 듯 절망 속에서도 그의 입술을 주시했다.
“전통적인 규범과 황실의 통례로, 우린 오빠이자 여동생이야. 그건 내게 당연한 것이었고, 그러니 내게 세리사를 받아들이란 건, 성장한 라피스를 여자로 안으라는 이야기와 동일한 이야기야. 서로의 몸을 탐하고 사랑을 나누고... 그런 걸 그 애와 한다는 이야기와 같은 거라고. 이 거부감은 어쩔 수가 없어.
의도된 잔혹함으로 웃은 칼스는 유키나를 보며,
“유키나. 이런 가정을 해서 정말 미안하지만, 만약 내가 지금 네 몸을 원한다면, 사랑한다고 이야기하고 한 사람의 여자로 원한다면 그렇게 할 거야? 세리사의 논리로는 문제가 없어야 해. 그런데 그러니?”
갑작스런 질문에 그녀는 당황했다. 이건 치명적이다.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당장 생각한 느낌만 말해봐.”
“...느낌만 말하라면... 그렇게는 못하겠어요. 물론...”
말하는 입술이 조금 깨물린다.
“오라버니가 정말로 원한다면, 그러지 않으면 죽는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하겠지만, 그래도 정말 많이 망설이고... 그렇게 되겠죠.”
“희생해줄 생각은 고맙다만 덕분에 결론은 나왔어. 네가 굳이 세리사의 편을 들겠다면 너부터 모범을 보여. 마침 동굴 앞이고 여긴 우리들 밖에 없어. 두 사람 다 아무나 들어가서 다 벗고 날 기다려 봐. 그럼 다시 생각해줄 수는 있어.”
노렸던 쇄기를 성공적으로 박은 칼스는 완전한 승리자의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 더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 이건 답이 없는... 아니, 처음부터 답이 정해져 있는 일이야.”
유키나는 생각했다.
두 사람 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 둘 다 상처 입는 것은 보고 싶지 않다. 그래서 차라리 두 사람이 같이 있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던 것은 틀림없다. 이건 단순한 생각이었다고 인정해야 했다.
게다가 세리사의 편을 든 것도 감성이 확실히 앞선 상황이다. 동일한 충격이라면, 더 강한 칼스 쪽이 견뎌내고 이겨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맞아줄 이유는 되지 못한다.
아니, 사실은 있다. 하지만 이건 입이 찢어져도 유키나 자신이 말할 수 없는 부분이다.
“경솔했던 건 인정할게요. 하지만 오라버니도 실책이 커요. 지금 이런 이야기는... 원래 제가 아니라 언니와 해야 하는 이야기에요.”
“애당초 말이 안 먹히잖아. 내게만 책임을 묻지 마. 따지고 보면 내 얘기를 많이 한 네 책임도 있으니까. 쓸데없고 철없는 환상을 심어준 셈이니까.”
물론 딱히 유키나를 탓할 일이 아니지만, 세리사의 마음에 못 이긴 나머지 한 편이 되는 일은 막아야 했다.
두 여자가 같이 덤벼들면 두 배로 피곤하다.
“...유키나를 탓하지 마. 모두 내 잘못이고 내 마음이니까...”
세리사는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지금껏 의기양양 모든 논리를 논파해온 그였지만, 그 표정을 보는 순간 마음속 들뜸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죽을 만큼 아파 보인다.
“그 때의 나는 아직 어렸고... 그래서 내가 당신을 놀라게 해 줄 정도로 변하면... 조금은 다시 생각해주지 않을까... 기대를 많이 했어.”
“기대만으로 끝났다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한동안 당신과 즐겁게 지내면서, 다소 무리한 요구도 해보고 바쁘게도 만들고... 그랬지만 잘 들어주고 해서 더욱 기대했었어. ...이 사람도 날 싫어하진 않는다... 희망은 충분하다고...”
“너도 한동안 애먹었고 노력했으니 보상 차원이었지. 또 네가 말한 대로 내가 노력해야 할 부분도 있었고... 물론 아무리 노력해도 여전히 이해는 안 가지만.”
세리사는 가슴으로, 칼스는 어깨로 한숨 쉬었다. 한참의 침묵 끝에 세리사가 기어들어가듯 물었다.
“...그럼, 여기서 더 어떻게 해?”
“네 마음을 다스리면 되는 거잖아.”
다시 시선을 피한 그녀는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어버렸다. 이어 간신히 배어나온 말...
“....못해...”
“나도 못해. 간단하게 이야기하지. 남자는 말이야, 사랑하지 않은 여자와도 잘 수 있어.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동물이라고. 그런 남자인 나도 지금 말이야, 네가 여기서 알몸이 되어 날 유혹해도 차마 못 건드릴 판이야. 이 거리낌은 정말 어쩔 수 없는 거라고.”
“...난 당신이 아니면 안 되는 거야...”
낮은 울먹임이 묻어나오지만, 이번만은 눈물에 넘어갈 수 없다. 칼스는 다시 못을 박았다.
“이유가 뭐지? 너 정도면 대부분의 남자는 넘어온다. 그 불행한 예외가 나라서 문제겠지만.”
“...마음에... ...이유가 있어?”
“없겠지. 그리고 그것이, 내가 지금 너를 협박하거나 지나치게 윽박지르지 않는 이유야. 시간은 충분히 줄 테니 마음을 접도록 노력해 봐. 그리고 유키나.”
“...네?”
“네가 엉덩이는 가벼워도 생각은 가볍지 않다 생각했는데, 세리사와 무슨 이야기를 얼마나 했는지는 모르지만, 오늘 너는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 이유는 묻지 않겠지만 조금 더 커야 하겠어.”
유키나는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그 표정에는 조금 의문이 들지만 더 이상 말을 섞을 이유는 없다.
“짧았지만 연인 놀음은 여기서 끝이군.”
세리사가 젖은 눈과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당신...!”
하지만 칼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일어섰다.
“...유키나. 조금 진정되면 세리사를 데리고 나와. 나는 비행정으로 갈 테니까. ...너무 늦지는 마.”
이 불편한 장소를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려는 듯, 그는 취사도구를 챙긴 후 바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다시 무릎에 얼굴을 묻은 세리사는 마침내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한숨을 내뱉으며 잠시 주저하던 유키나는 마침내 세리사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차라리 제가 전부 이야기하면...!”
“...안 돼!”
눈물범벅의 그녀가 다급히 말했다.
“절대 말하면 안 돼...!”
“하지만...”
“그러면 그도 슬퍼할 거고... 사랑이 아니라 의무감에서 나를 받아들이려 할지도 몰라. 그건... 그건 너무 못할 짓이잖아.”
“하지만 어떻게 해요? 심정이야 이해하지만, 이대로는 오라버니를 논파할 방법이 없잖아요.”
“...쉽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문제야. 하지만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가슴이 그렇지 않았어.”
유키나는 세리사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이렇게 떨고 있는 손은 처음이다.
“그러니까... 그 심정 이해한다고 했어요. 언니처럼, 머리와 심장이 따로 움직이면 그만큼 괴로운 것도 없어요. 지난 세월의 고통도 충분히 이해가 가요. ..미안해요. 진작 도울 방법을 생각했다면...”
“...아니야. 왜 네가 잘못이야.”
“아뇨. 눈치를 채었을 그 때에 솔직하고 묻고, 오라버니랑 언니랑 많은 이야기를 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설령 어느 한쪽이 상처를 입는다 해도 지금보다는 가벼웠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제가 언니에게 오라버니 이야기를 그렇게 하지 않았어도...”
“아니야. 정말 아니야.”
세찬 고갯짓에 물방울이 땅으로 흩날린다.
“나중에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은 다른 게 아니었어. 네게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그 사람에게 구해지지 않았어도, 그렇게 같이 시간을 보내지 않았어도... 나는 지금 같은 마음일 거란 생각... 그것 때문이었어.”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정말 행복했었다.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느낌.
하지만 이제 그 감정이 그녀를 나락으로 떨어트렸다.
“역시 내가 바보인거야...”
“그럼... 포기할 생각이에요?”
“그건 아냐...!!”
유키나도 답답했다.
입장 때문에 사랑을 거부하는 사람, 사랑 때문에 입장을 거부하는 사람.
이 평행선은 쉬이 좁혀지지 않는다.
“난... 딱 한 가지, 어마마마가 원망스러워...”
“언니...”
“그때 칼스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자기 인생을 그렇게 쓰진 않았을 거야. 또한 아바마마가 날 가두어 키우지만 않았다면, 나도 너처럼 그와 웃고 떠들면서 좋은 친구로만 남았을 수도 있었을 거야...”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끝이 없어요.”
유키나도 인생 경험이 많은 것은 아니다. 누군가를 애타게 사랑한 적도 없고 죽어라고 고민해본 적도 없었기에, 지금은 무척 난감했다.
하지만, 지금은 지옥의 끝에 떨어진 것 같은 그녀부터 구해야 했다.
“그리고 제가 봐서는, 오라버니도 언니에게 감정이 없는 건 아니에요. 다시 기회는 있을 거에요...”
그저 빈말만은 아니라는 듯 단호한 유키나의 말에, 일말의 희망을 품고 세리사는 대답을 구하며 바라보았다.
“언니에게 오라버니가 동화 속 기사님이었듯, 오라버니에게 언니도 지켜야 할 공주님이었다고요. 아무 감정 없이 의무감만으로... 저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아요.”
칼스 본인은 느끼고 있지 않았지만, 그 아기가 성장하여 소녀가 되고 여자가 되고, 자신은 지켜야 한다. 그 역시 즐겁게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조금만 더 발전시킬 수 있다면...
“하지만 지금 오라버니 입장에서도 고민거리가 너무 많아요.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지금보다는 나을 수도 있어요.”
달래기 위해서 그렇게 말했고, 또한 어느 정도 근거가 있다 스스로 생각했지만, 유키나는 내심 강렬한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만약 이 갈등이 더욱 확대되어, 누군가의 사랑이 증오로 변하는 날이라도 온다면? 정치판은 물론 선대가 쌓아온 깊은 유대가 심히 흔들린다.
어쩌면 우리는, 엄청난 혼돈을 예고하는 시대에 태어난 것이 아닐까.
돌아오는 길. 유키나는 물론 뒷좌석에 같이 앉은 세리사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 울지도 않았다. 그저 고집스럽게 비행정의 창문에 머리를 붙이고, 곁눈질로 빠르게 지나가는 하늘과 구름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침묵을 무언의 고집으로 받아들이며, 칼스는 거듭 탄식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결심도 섰다. 그렇다면...
이틀 후, 간부학교에 돌아간 유키나는 분노와 경악에 휩싸였다. 좌현왕세자 세라비 칼스 카이가 첸레이에서 돌아온 그 다음날, 군령본부에 현역 복귀 신청을 하고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달로 향했기 때문이었다.
즉, 도망쳤다.
“에라이! 병신아...!! 아무리 그래도 도망이야...?!”
아무도 보지 않도록 학교의 정원 구석으로 나온 유키나는, 불같이 화를 내며 땅바닥을 걷어찼다.
기세를 못 이긴 신발 한 짝이 하늘로 날았다.
수고하셨어요.
- 작가의말
네, 차마 말 못할 그게 뭔지는 지난 권에 나왔었고... 언제 말할까... 음...
그리고 왕녀님은 빡이 도셨답니다. 병신이래요 병신.(사실 작가도 그리 생각해. 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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