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탄생과 죽음. (1)
한 권이 끝날 때, 가슴에 남는 글이 되길 바랍니다.
Ⅰ
“감축 드리옵니다. 좌현왕 전하.”
“아, 그래. 고마워.”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반복되는 축하에, 좌현왕(左舷王) 세라비 토오르 쇼펜은 수도 없이 화답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여어, 아우님.”
크고도 정교한 문 앞. 대기석에 앉아 그를 기다리던 이가 손짓했다. 약간 어두운 금발. 산호초 가득한 남해(南海)를 연상케 하는 녹색의 눈빛이 일어나 다가왔다.
토로르도 반갑게 다가갔다.
“강녕하셨습니까. 로페르 형님.”
“그래. 그리고 득남(得男)을 감축하네.”
아우의 어깨를 두들긴 이는 우현왕 세라비 로페르 아스페. 토오르보다는 4살 위로 올해 33세다.
토오르는 거푸 뒤통수를 긁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형님도 빨리 후사를 보셔야 할 텐데. 참으로 제가 면목이 없습니다.”
“면목은 무슨.”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살짝 씁쓸한 로페르였다.
그들은 황족. 그 기원은 궤멸전쟁 시대의 생체병기다. 그 힘과 외모는 경이로우며 또한 축복이다.
그러나 병기의 역할이 깊이 새겨진 그들의 유전자는, 대신 자손을 갖는 능력이 상당히 떨어진다. 결혼 2년 만에 득남한 토오르는 기록적으로 빠른 축에 든다.
“그래. 이름은 지었나...?”
“네. 칼스... 입니다.”
“...세계라. 그렇게 지은 이유가 있나?”
이름은 부모의 사랑과 깊은 뜻이 담겨야 하는 것. 그래서 유서 깊은 고어(古語)가 필히 쓰인다.
칼스는 ’넓은 세계‘ 혹은 ’온 세상‘ 이라는 의미다.
“결혼 전부터 아내와 말했던 겁니다. 남자 아이를 갖게 되면 칼스, 여자 아이를 갖게 되면 라피스(물망초)로 지으려고 했지요. 그 뿐입니다.”
“그래. 아무튼 2년 만에 득남이라. ...왕호를 정력왕으로 고치는 건 어떤가.”
“그만두세요.”
형의 짓궂음에 토오르는 난감한 웃음을 지었다.
같은 현왕이지만 성격은 달라, 자신이 재미없는 성격이라면 형님은 진지한 맛이 없다. 그리고 이렇게 대조적인 성격인데도 희한하게도 죽이 잘 맞다. 하기야 비슷한 성격이었다면 오히려 싸움이 났을지도 모르겠다.
나이 든 시녀가 문 안에서 나왔다. 북궁의 시녀장(侍女長)인 토오네에게 로페르가 물었다.
“좌현왕도 오셨으니, 슬슬 폐하를 알현해도 되겠나?”
“네. 기다리실 겁니다.”
안내하듯 앞장서서 걷는 토오네. 시녀 특유의 긴 치마가 뒤로 끌린다. 매번 그렇지만, 잘못 밟아서 시녀장을 넘어뜨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따른다.
물론 몸가짐을 조심해야 할 이유는 또 있다. 이곳은 황제궁인 북궁(北宮), 그 중 정침(正寢)이기 때문이다.
정무(政務)를 보는 남궁과, 황궁의 정 중앙에서 의전을 행하는 거대한 탑인 옥좌주탑(玉座柱塔). 그를 제외한 나머지 구역은 현왕조차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
비어있는 동궁은 후계자의 영역. 그리고 서궁은 황후와 후궁, 황녀의 영역으로 당연히 남자는 들어갈 수 없다. 북궁도 침전은 금역이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아샤르 제국 제 8왕조 47대 황제인 세라비 코에카 쿤세르. 그들의 주군이자 국가원수, 또한 황실의 당주(堂主)이기도 하다.
황제, 아샤르어로는 마리칸. 그 뜻은 왕중왕. 지금 이 시대, 이 성계의 유일한 문명국 아샤르와 그에 속한 모든 신민의 정점. 지고의 존재가 바로 그이다.
로페르보다 2살 위이며 토오르와는 여섯 살의 차이가 나 올해 35세다. 또한 어렸을 적부터 서로 형제처럼 지낸 그들이다. 그러니 대형(大兄)에게 기꺼이 충성해야 함은, 태양이 아침에 뜨는 것처럼 두 현왕에게도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존경하는 형님을, 두 현왕은 언젠가부터 안타깝게 바라보게 되었다.
“어서 오게. 로페르, 토오르...”
너른 침상에 기대앉은, 아직은 젊은 황제가 형제들은 반겼다. 두 현왕도 예를 올렸다.
“황상을 뵙습니다.”
황제를 알현하는 평민의 예는 엎드리는 복례(伏禮). 귀족은 한쪽 무릎을 꿇는 궤례(跪禮)다. 지금처럼 입례(立禮)가 허용된 것은 황족이나 왕작(王爵)을 가진 본인 및 직계뿐이다.
현왕은 황제에 이은 부제(副帝)에 해당하는 지위지만, 대신 뚜렷한 정치적인 실권은 없다. 덕분에 어느 현왕은 이렇게 평가한 적이 있다.
“굳이 말하자면 황실의 종마(種馬)가 아닐까.”
하지만 이번의 대는 다르다. 황제가 특별히 두 현왕을 중용하여 정치적인 권한 역시 일부 위임하고 있다.
오늘의 알현은 나름 중요하다. 황제의 건강을 살필 겸 바로 이번에 태어난 토오르의 아들, 칼스의 존호(尊號)를 받기 위해서다.
새롭게 아이를 낳은 황족은, 황제에게 아이의 출생을 고하고 일족의 증거인 세 번째 이름을 받는다.
이는 황은(皇恩)이기도 하다.
"득남을 축하하네. 그리고 존호에 대해서는...“
비록 침대에 누워 있지만 말소리는 또렷하다. 플라티나 블론드의 머리칼, 아직 한창때의 황제는 형제이자 측근인 두 신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카이로 하겠다. 세라비 칼스 카이. 어떤가?”
“카이... 입니까.”
토오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이름 역시 고어이며, 그 뜻은 바꾸다, 치료하다, 고치다, 라는 것이다.
황제는 웃으며 끄덕였다.
“우리 첫 자식 세대이며, 또 경사스럽게도 남자아이이지. 나는 그 아이가 훌륭하게 자라, 온 세상의 아픔을 고치고 돌봐주기 바라네. ...혹시 마음에 들지 않는가?”
“천만의 말씀입니다. 황은에 감사드립니다.”
감히 존호에 불만을 가질 수는 없다. 설령 황제가 ‘바보’ 라고 지어줘도 말이다. 물론 대놓고 싸우거나 장난치려는 심보가 아닌 이상 그렇게 지을 리는 없다.
듣자니 어감도 괜찮은 것 같다. 토오르는 지금쯤 좌불안석일 자신의 아내, 세라비 니아 샤테라를 떠올렸다.
...존호는 괜찮게 받았으니 안심하라고.
“그리고 우현왕. 올해의 함대 사열(査閱)은 그대가 주관했으면 한다.”
“제가... 말입니까?”
“좌현왕은 이제 막 왕비가 출산했잖은가. 남편이 옆에 있어줘야지.”
5년에 한 번 있는 함대 사열은 실전부대 대부분이 참여한다. 함정(艦艇) 4만 8천여 척에 소속 병력 700만 명에 달하는, 그 대부분을 한 자리에 모아 점검하며 모의 전투를 겸하는 최대급의 훈련이다.
주관이야 대장군들이 하지만, 전군이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자리이기도 하기에 황제가 사열을 받으며, 그게 힘들면 현왕이 받는다.
“우현왕이 간다면 다들 섭섭지 않을 거다.”
황제의 첨언에 로페르는 납득했다.
“칙명 받들겠습니다.”
“잘 부탁하네. 그리고...”
황제는 조금 웃었다.
“다음에는 자네가 꼭 존호를 받으러 왔으면 하네.”
형의 격려에 겸연쩍었던 로페르가 살짝 정색했다.
“저보다도 폐하께서 그러셔야죠.”
쓰게 웃은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이어 자신의 반신을 덮은 이불을 바라본 그는, 이내 초겨울 바람처럼 쓸쓸한 한숨을 내쉬었다.
“알다시피 짐이 이렇지 않나.”
“...쾌차하실 것입니다.”
대답 없는 황제에게 토오르가 말을 보탰다.
“그저 면목 없습니다. 제가 가장 젊은데... 폐하의 신하로도, 형님들의 아우로도 염치없게...”
황제는 손을 내저었다.
“그런 말 말게. 누가 먼저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우리의 아이는 모두의 아이일세. 부디 잘 키우게나.”
“...황송합니다.”
“격리가 끝나면 부부 동반으로 아이를 데리고 오게나. 짐도 조카의 얼굴을 빨리 보고 싶으니.”
“기꺼이 그리 하겠습니다.
알현을 마치고 나온 후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걷는 두 사람. 오랜 침묵 끝에 토오르가 침울하게 말했다.
“지난번보다 더 심해지신 것 같습니다...”
“그러게 말일세...”
우현왕도 침울하긴 마찬가지였다.
황제는 불구다. 아마 다시는 자신의 두 다리로 땅을 밟지 못할 것이다. 대부분의 질병을 정복한 그들의 의학으로도 이는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황족의 거대한 힘, 그 근원은 아카르(영자력:靈子力)이라 불린다. 9단계로 나뉜 오드-아카르와 7단계로 나뉜 에르-아카르가 바로 그것이다.
현실을 조작하며 기적을 만들어내는 초능력. 그리고 그 원천은 영자집합체(靈子集合體)라고 불리는, 대우주를 관통하고 있다고 알려진 거대한 영자력 덩어리이다.
강력한 힘을 가진 황족들도, 바로 영자집합체에서 힘을 끌어다 쓰는 것에 불과하다. 그들 역시 본질은 인간이며, 때문에 인간을 초월하는 이 힘을 익히고 수련하는 데는 상당한 주의가 필요하다.
자신의 한계가 오면 수련을 그만두는 것이 정석이다. 하지만 그 강대한 힘은 사람을 쉽게 매혹시켜, 쓸데없는 욕심을 부려 폐인이 된 경우도 제법 있었다.
코에카 황제도 그런 사람이었다. 또한 노력에 어울리는 적지 않은 성취를 쌓아, 더 젊은 시절부터 이미 강력한 능력자였다.
하지만 욕심이 지나쳤다. 무리하게 수련하던 그는 갑자기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난리가 났었지... 그때...”
기억을 회상하며 로페르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결혼하고 그 직후 황제가 쓰러져, 달콤한 신혼여행을 접고 황급히 달려갔던 것. 그리고 그들의 진단으로도, 황제의 두 다리는 감각은 있지만 완전히 마비되어 모든 의학이 소용없게 되었다는 것.
그를 알아버린 그들은, 땅 끝까지 달려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젊은 모험가처럼 절망했다.
황제는 아직 힘은 쓸 수 있고 여전히 강력하지만, 이제는 몸이 버텨주지 못해 시간은 몹시 짧다. 또한 과도하게 힘을 쓰는 순간 목숨도 위태로울 수 있다.
그러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침대에 누워 있는 것. 그리고 화상을 통해 결제를 하거나 신하들의 의견을 듣는 정도다. 보통 사람에겐 인공근육과 장기가 있지만, 전투병기인 황족의 육체는 인공적인 처치에 무척 취약하고, 강렬한 거부반응까지 있어 결국 쓰지 못한다.
그는 사실상 폐인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우애 깊은 왕들을 물심양면으로 괴롭혔다.
황제와 두 현왕, 그들의 어머니는 모두 자매지간으로, 이는 역사적으로도 무척 특이한 경우였다. 선대 우현왕이 아코르 공작의 장녀와 결혼한 후, 차녀가 황후가 되었고 막내딸이 좌현왕비가 되었다. 그러니 빈말로라도 형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마음의 끈은 그보다 더하다. 코에카 황제는 그들의 진정한 큰 형이다. 힘들 때에 따로 불러 술 한 잔을 따라주며 위로해주고, 사랑에 실패했을 때는 남몰래 격려해주었다. 쌓아온 우애는 두터웠다.
물론 다른 경우도 역사엔 많다. 지금의 황실도 약 2천 년 전에 궁정쿠데타로 황제가 된, 당시에는 우현왕이었던 샤쿠르의 후예다. 당시의 황실은 격하되어 지금의 우현왕가가 되었다.
로페르 역시 그 후손이며, 토오르의 가계인 좌현왕가도 그 시조는 초대황제 아파켄이다. 그렇듯 뒤집고 뒤집어가며 긴 세월을 이어왔다.
하지만 권력 암투는 드물다. 황제는 어렵고 힘든 자리이다. 모든 결정을 내리는 대신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 반면 현왕 정도로도 충분한 명예와 권력이 있다. 제위에 욕심이 있는 현왕이 오히려 이상하다.
하지만 그 무엇이든 장담할 수 없음이 바로 권력의 생리다. 쓰러져버린 황제와 젊고 건강한 현왕 두 사람. 어쩔 수 없이 조정의 경계는 현왕들에게 집중된다.
“저는 폐하... 아니 코에카 형님께서 다시 일어서시리라 믿고는 싶지만...”
토오르는 한숨을 거듭 내쉬며,
“희망이 있거나, 그게 아니면 차라리 무지하기라도 하면 모를까, 뻔히 알고 있는 미래에는 절망하기 쉽습니다. 이제는 폐하 자신이 다시 일어서려는 의지가 없어지실까, ...저는 그게 참 두렵습니다.”
“이미 모든 것은 운명일까. 나도 요즘은 부쩍 그리 생각하네. 허나...”
애써 한숨을 갈무리한 로페르가 말했다.
“황제의 권위가 실추되는 경우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하네. 우리도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네.”
“노력하겠습니다.”
“무거운 이야기는 그만하고...”
우현왕은 피식 웃었다.
“자네 아들의 탄생을 축하하며, 오늘 내가 내 궁에서 한 잔 대접하겠네. 어떤가?”
토오르는 화색을 띄웠다.
“이거 감사하군요. 그렇지 않아도 출산을 앞둔 터라, 한동안은 전혀 마시지 못했지요. 그러고 보니 형님과 같이 한 것도 정말 오래간만이군요. 기대되는데요?”
“흥에 겨워 너무 많이 마시지는 않도록 하세. 그리고 일단 왕비에게 다녀오게. 아버지가 된 날이 어제인데, 애써 받은 존호도 가르쳐주지 않고 술에 절어 들어간다면 권주를 한 내가 원망을 받을 터이니. 다른 왕비에게 엉덩이를 차인 현왕이 되고 싶진 않아.”
“괜찮습니다. 니아는 엉뚱한 곳에 화풀이를 하지 않아요. 형님은 무사하시고, 대신 제가 당분간 근처에도 못 가겠죠.”
“...둘째가 늦어지겠군. 이거 미안하구만.”
로페르의 실없는 웃음소리가 회랑에 메아리쳤다.
수고하셨어요.
- 작가의말
앞으로 3개 파트는 2부에서 주축이 될 두 사람의 탄생 배경을 다루고 있습니다. 1부 2권 4장에서 대략적인 신상 관계가 약술되어 있습니다만, 2부 진행 전반에서 언급되는 이야기라서 지식의 차원에서 서술합니다.
...그 말인 즉 재미없다는 거에요. 부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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