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장. 가지 않았기에 걸어야 할 길. (2)
한 권이 끝날 때, 가슴에 남는 글이 되길 바랍니다.
Ⅱ
덴노는 명백히 긴장하고 있었다. 말로는 서로 동격이라지만, 실제로 누가 주군이고 누가 신하인지는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또 그는 아직 젊은 반면 상대는 수천 년을 살아온, 어떤 의미에서는 닳고 닳은 사람이다.
서로의 태도에서 느껴지는, 승자와 패자의 입장뿐만 아닌 그 여유의 차이는 상당했다.
“이리로...”
상석으로 안내받은 황제는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여기 주인은 폐하시니 그럴 수는 없습니다. 굳이 예를 갖추시겠다면... 서로 조금 물려 앉지요.”
“그러시다면야...”
굳이 굴종을 택하지 않아도 된다면 바라는 바다.
미리 깔린 방석을 약간 옮겨 정중앙에 앉은 그들.
루이코는 다소 망설였지만, 황제가 옆자리 방석을 두들기자 다소곳이 앉았다.
옅은 웃음의 황제가 넌지시 서두를 떼었다.
“무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부디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아닙니다. 제가 찾아가도 모자란 셈인데... 그런데... 이 분은?”
중요한 자리에 굳이 동행시킨 여자인데 명단에도 없다. 이 외계인들이 지구 예절에 무지하다고 쳐도, 이쪽에서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덴노의 시선이 주어지자, 잔뜩 긴장한 루이코 대신 황제가 대답했다.
“제 차비, 제 2황후입니다. 아직은 예정이지만 조만간 정식으로 책봉될 겁니다. 오는 김에 인사는 시켜야 할 것 같아서 부러 동행했습니다. ...인사해야지?”
마지막은 루이코를 향한 것이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사카와... 루이코입니다.”
“네... ...아사카와?”
덴노뿐만 아니라 주변 취재진의 낮은, 하지만 뚜렷한 경악을 담은 웅성거림이 들렸다.
“저희 이름으로 들리는데요...”
덴노의 의문에 황제가 답했다.
“맞습니다. 홋카이도 현 삿포로 시 출신입니다.”
루이코는 마이 페이스를 유지하느라 애를 썼다.
아아, 모두의 이 반응은 예상은 했지만...!
역시 어색해...!
반대로 황제는 꽤 즐거워했다.
“어쩌다 연이 닿아서... 그렇게 됐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지만 성질이 꽤 괄괄해서...”
아, 이 인간이...? 그렇게 말했는데도...!
절로 손가락이 꼬집기 포즈로 변환되었지만...
“예전에 오키나와 공격 때에, 절 붙잡고 늘어져서 애를 많이 먹었어요. 자기 고향이라고 울고불고 난리가 났거든요. 물론 그런 건 안 들어줬습니다만...”
루이코는 금방 이해했다.
이것은 아마 두 가지를 노린 것일까. 지구인들에게는 저 황제를 감히 가로막은 여자로, 동시에 아샤르 인들에게는 베개머리 송사 운운을 걷어내는 것이리라.
자칫 나라를 팔아먹은 여자가 되기 전에 미리 수를 쓴, 앞으로의 내 평판을 위한 거다.
잠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지만, 간신히 평정을 찾은 듯 덴노는 비로소 조금 웃었다.
“그랬었습니까. ...노력에 감사드립니다.”
덴노의 인사를 받자니 무척 어색하다.
“...아닙니다. 오히려... 면목이 없다고 해야 할까요.”
루이코는 입을 다물었다. 어느덧 뇌리에 울리는, 영파를 통한 그의 말 때문이었다.
‘자, 이제 내가 알아서 할게.’
이어 황제가 말했다.
“나중에 저희 황궁에도 한 번 오시기 바랍니다. 제 정실황후도 소개할 겸... 그리고...”
이번엔 황제마저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조약에 따라, 앞으로 폐하와 저는 동격에 섭니다. 이유는 알고 계십니까?”
“...저희를 위한 조치였겠지요. 하지만 누가 승자인지는...”
“아샤르 황실은 여러분을 존중할 겁니다. 그 정도 의미로 상호존중하면 되는 것이죠. 승패는 이제 의미가 없습니다.”
황제는 잘라 말했다.
“저희는 비록 전쟁의 승자이긴 하지만, 정복자의 역할은 취하지 않겠다고 미리 말씀드립니다. 비록 전쟁으로 얻은 영토지만 마냥 군림할 생각도 없습니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처음부터 깨끗하게 지구 인류를 절멸시키고 우리끼리만 살았겠죠. 그 쪽이 훨씬 편하고요.”
덴노는 꿀꺽 목젖을 울렸다.
이 황제는 이리 무서운 말을 벌써부터 태연하게 한다.
“하지만 저희는 그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평화로운 공존을 원할 뿐이죠. 그러니 폐하께서는 너무 심려하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 뵙고자 한 것은 이를 말씀드리기 위함입니다.”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만...”
덴노는 겨우 웃었다.
“무척 솔직하게 말씀해주셨다고 생각하니, 저도 솔직하게 말씀드리지요. 저는 꼭두각시입니다.”
취재진의 낮은 웅성임이 다시 일었다.
“그 탓이라고만 할 수는 없지만 선조도, 그리고 저도, 별로 할 수 있는 일도, 한 일도 그다지 없지요. 때문에 나라를 잃은 책임은 피해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묻는 이는 거의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이제 모두가 폐하의 신민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이상... 그저 잘 부탁드린다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무력한 자의 부탁이지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받아들이기에 따라서 겸손일수도, 아니면 군주로 있던 자의 마지막 체면 차리기일 수도 있다.
특히 꼭두각시 운운은 책임 회피일까, 아니면 자조일까.
하지만 지금껏 만난 이들 중 처음으로 민중을 논한다. 이것만으로도 오늘 자신이 요구할 일은 희망이 있다.
황제는 무난하게 받았다.
“말씀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합니다. 앞으로는 제 신민이니까요.”
덴노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감사드립니다...”
“예상 이상 솔직하게 대해주심에 감사드리고...”
황제는 잠시 숨을 골랐다.
“오늘 뵙고자 한 것은, 사실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가장 어려운 부탁이면서도... 오늘의 폐하를 보니 그 부탁이 그리 무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들어서 이제 말씀드립니다.”
“무엇입니까?”
“하나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아샤르의 신영토에는 여러 나라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00년 전의 아주 큰 전쟁... 알고 계시나요?”
2차 세계대전을 말함을 안 덴노는 흠칫했다.
“...네.”
“말씀드리기 죄송하지만, 그 가혹한 지배와 점령지에 대한 수탈은 분명한 범죄입니다. 아무리 패권을 다투고 군사로 경쟁하던 것이 당연시되던 시대라도 말이죠.”
각국 취재진 쪽의 웅성거림이 뚜렷했다. 덴노도 어느덧 식은땀을 보였다.
하지만 황제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100년의 갈등, 그 주된 원인이 바로 그 무렵에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피해자고 누군가는 가해잡니다.”
아마도 이 자는 몹시도 무서운 말을 하려고 한다...!
그 자리의 모든 이가 그렇게 느꼈다.
덴노는 황급히 말했다.
“폐하께서는 지구 역사에 정통하신가 봅니다.”
“직접 겪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네?”
“직접 겪었다고요. 지구 시간으로 1932년 11월...”
회상하는 황제의 표정이 어둠에 물들었다.
“저는 난징에 있었습니다. 중국인의 인생으로, 그저 이름 없는 촌부에 불과했죠. 그리고 쳐들어온 군대...”
난징대학살. 그것을 지칭하는 시간과 장소를 들은 덴노의 표정도 급격히 어두워졌고, 또한 짧은 신음이 취재진의 무리에서 뱉어졌다.
“그야말로 인외지옥. 누가 얼마나 더 많이, 더 빨리 베는가, 저 임부의 뱃속 아이의 성별은 무엇인가 내기하고 배를 갈라 죽이고... 어미가 보는 앞에서 딸을 겁탈하고 울부짖는 아들 앞에서 아비의 창자를 산채로 꺼냈죠. 그리고 아기를 벽에 던져 죽이고 일가족을 차례로, 천천히 생매장하고...”
“...그만...!!”
고함을 지른 덴노는 문득 정신을 차린 듯 식은땀의 이마를 닦았다. 황제가 물었다.
“괜찮으신가요?”
“...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럼 다시 말씀드리자면... 제가 산 증인이니 부정할 수 있는 이는 없을 겁니다. ...감히 없기를 바랍니다.”
역시 그는 전혀 멈출 생각도, 상대의 사정을 봐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제 저는, 그 가해자와 피해자를 모두 제 신민으로 두게 됩니다. 하지만 그 덕에 이대로는, 아무리 한 나라가 된다 해도 서로의 통합이 불가능합니다. 물론 세상의 갈등이나 시시비비는 명백하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허나 절대로 눈을 돌려선 안 될 것도 분명히 있지요. 그러니 바로 이 자리, 진정 모든 것을 시작하는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정전의 다다미를 가볍게 두들기는 그 손에는, 이미 적지 않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따라서, 이들을 화해시키고 제 통치 하에서 통합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을, 이제부터 폐하께 권고 드릴까 합니다. ...들으시겠습니까?”
“:..무엇입니까.”
이미 마른 목소리로 덴노가 물었다. 평정심을 찾으려는 노력이 거듭 엿보였다.
황제가 차분히, 하지만 준엄히 말했다.
“폐하의 사과입니다. 식민지배, 중일전쟁,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벌어진 수탈과 학살, 억압에 대한... 그 사죄입니다.”
약간은 예견하고 있었다. 하지만....
덴노 이전에 취재진들의 신음이 거듭 흘러나왔다. 하지만 눈도 주지 않은 황제가 말했다.
“물론 어렵다는 것은 이해합니다. 시대가 그랬다 항변할 수도 있고,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주장할 수도 있으며, 그건 조상 탓이지 내 탓이 아님에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자체가 변호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고개를 숙이란 겁니까?”
불편한 어조는 어쩔 수 없었지만, 황제의 다음 말에 덴노는 흠칫했다.
“불편하시겠지요. 하지만 국제연합에서의 제 연설은 보셨을 겁니다. 제가 할 수 있었으니, 분명 폐하께서도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 자의 대담함은 어디까지인가.
덴노는 기가 질린 가운데에서도 내심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황제는 살짝 어깨를 흔들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우선 진심이 담기지 않았다, 폐하의 말씀에 따른 것뿐이다. 그리 생각하는 이들이 없지 않겠지요. 그럼 효과가 의심되며...”
덴노는 주변을 곁눈질하며,
“...이쪽에서도 분명 엄청난... 반발이 있을 겁니다.”
“압니다. 물론 사죄에 진심이 빠지면 의미가 없겠죠. 제게도, 비록 고개를 숙였다지만 가식이라 생각하는 이도 제법 있겠죠.”
“그럼 어째서...”
“하지만 고개를 숙였단 사실은 남습니다. 이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사죄를 완성시키고 증명해 나가는 것은 앞으로의 행동이겠죠. 그러니 이번 침공 역시 저희 교과서에, 기록에, 역사에 새길 겁니다.”
“역사에...?”
“네. 이 땅을 얻기 위해 얼마만큼의 피를 흘려야 했는지, 또한 우리는 침략자로 이 땅에 내려왔으며, 그렇기에 결코 지난 전쟁이 저희 아샤르의 영광으로 남아서는 안 되며, 그만한 빚을 현재와 미래에 모두 지고 있음을 분명히 남길 겁니다.”
너희들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한다.
아쉬움과 후회가 적힌 일기장은 그 자체로 부끄럽지만, 그러기에 다시 들춰볼 가치가 있다.
“그리고 반발이라... 하지만 말씀드리자면, 저희는 성간을 지배했던 국가이며 훨씬 강대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희는 지구 인류를 절멸시킬 수도, 아니면 북극에 다시 자리를 잡고 세계에 패권을 행사하며 뭇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 수도 있었습니다. 또한 저도 제 신민을 위해서 전쟁한 거죠. 정치란 그런 것이니 얼마든지 고개를 뻣뻣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황제의 표정이 매우 진지하게 바뀌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과연 이유가 뭘까요?”
“잘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말씀하시니 저도 물어보겠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가 과연 뭡니까? 폐하께서는 승자가 아닙니까?”
“승자가 패자에게 고개를 숙이는, 그런 첫 사례를 만들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사례...요?”
“물론 이해하시긴 힘들겠죠. 혹자는 저 외계인 황제가 미쳤다고 할 겁니다. 그러나... 강자 및 승자가 겸손을 갖추고 아량을 베푸는 것. 그것이 꼭 필요한 덕목이라는 것은 동의하는 이가 많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껏 아무도 그렇게 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진실이다. 이긴 자가 왜 숙이는가.
“왜냐하면 모처럼 이겨놓은 싸움, 그 과실을 그렇게 허공으로 사라지게 할 이유가 없었거든요. 하지만 저희는 다릅니다. 지구 전체를 상대로 압승하는 전력과, 여러분들을 아득하게 뛰어넘는 기술, 나중에 아시게 되겠지만 인간을 초월한 부분도 많습니다. 여유가 넘치죠.”
“말씀 그대로... 그만큼 강하면서도 어찌 이렇게...”
“강하기 때문에 해야 하는 겁니다. 다들 옳다고 알고 있지만 하지 않은 일. 하지만 누군가는 해봤어야 하는 일이며, 아무도 갈 생각을 하진 않았지만 누군가는 한 번은 걸어야 할 길입니다. 지구 역사 이래로, 어쩌면 인류 역사 이래로 이어진 패권과 쟁투의 시대를 끝내기 위한 걸음을 걷는 지금 이 순간, 제가 강자이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희는 여러분들과 같이 살아갈 것이지만, 그렇다고 이제껏 여러분들이 걸어왔던 길은 밟지 않을 겁니다.”
정전 안에 깔리는 무거운 공기.
하지만 그것은 공포로 인한 것이 아닌 오직 이 인물이 뿜어내는 중압감.
그리고 그 말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무게 탓이다.
“과거로부터 이어 내려온 쟁투와 증오와 질시를, 장차 거대한 변혁의 시작이 될 바로 지금...! 지금 끊지 않으면, 단언컨대 저희 기술로도, 열심히 해나갈 저의 통치로도 그 분노와 증오와 질시가 만들어낸 균열은 메울 수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뭇 사람들이 행복할 기회는 상당히 박탈당할 것입니다.”
황제는 루이코에게 시선을 주었다.
“밝혔듯이 제 차비는 일본인이고, 모르시는 일이겠지만 제 첫 친구는 중국인, 그리고 상당히 공을 들여 옆에 둔 이는 한국인이죠. 차비와 그는 친구이고, 제 중국인 친구는 아샤르 황족이었던 저와 친구였었습니다. 그렇듯 조건과 종족과 과거가 아닌, 그저 작은 인연과 서로의 진실이 닿아 만드는 소중한 관계. 설령 잘못을 했더라도 솔직하게 사죄하고 화해의 손을 내민다면, 누구나 친구도, 가족도 될 수 있습니다.”
무릎 위에 놓인 황제의 손이 움켜쥐어졌다.
“저는 그런 것을... 제가 다스리는 곳에 시행하고 확대시켜보고자 합니다. 그 누구라도 만나서 즐겁게 한 식탁에 앉으면 가족의 만찬이 되는, 그런 경우를 만들고 또 가능하면 전 세계로 늘려보고 싶습니다.”
“너무나... 꿈같은 이야기군요.”
덴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황제도 긍정했다.
“압니다. 허나 불가능한지 아닌지, 용기를 내어 발을 들이밀지 않고는 알 수 없습니다. 저는 되지도 않은 일에 손을 댄 어리석은 군주일 수 있겠지만, 반대로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준 이로 역사에 남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 일로 인해, 일본 국민들의 자존심은 거대한 상처를 입을 겁니다. ...혹여 폐하께서는 과거의 그 개인 경험으로 인해... 이 땅에 무언가 감정을 갖고 계신 것은 아닌지...”
이건 무척 용기 있는 발언일 것이다.
“갖고 있지요.”
황제의 웃음에 덴노는 역시나 하고 탄식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가 증오나 편견을 가져도 어쩌면 이상하지 않다. 자칫 모든 일본인들이 그 때의 그들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황제는 옆자리에 앉은 루이코의 손을 잡았다.
손길에 흠칫했지만 그녀는 손을 빼지 않았다.
“제가 아끼고 사랑하는 차비의 고향 아닙니까. 엎드려 입 맞추어도 모자랄 땅이며 사람들 아닐까요?”
덴노는 크게 눈을 뜨며,
“그럼 어째서...”
“아끼고 사랑하는 차비의 고향, 그 군주에게 모욕을 주기 싫었다면, 그저 모든 것을 덮고 과거 일어난 모든 것을 이제부터는 한 국민이라는 명분으로 그냥 용서하라, 그렇게 모른 척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덮어서 될 문제가 아니니 권고하는 겁니다.”
그녀의 손을 잡은 그 손, 차츰 힘이 들어간다.
태연해 보이던 그도 이제는 꽤나 긴장하고 있다.
“당신의 백성이자 앞으로 제 백성이 될 그들이, 더는 과거의 굴레에 얽매이지 않고 제 신민으로 하나 될 그 날, 우리 기술과 제도의 혜택을 받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그 날을 위해, 염치없이 무례하지만 감히 폐하의 사과를 원합니다.”
고민의 그늘이 덴노의 미간에 깊은 밤을 만든다.
“이야기가 엇나가지만... 제가 북한의 지도자, 고 김정은에 대해서 아쉬웠던 점이 그 점입니다. 저는 살려주겠다고 했습니다. 대신 폐하와 같은 행위를 요구할 셈이었습니다. 하지만, 한번 고개를 숙이고 과오를 인정하는 것과, 인질이나 잡아 저항하는 두 가지 선택지. 그는 후자를 택했고 그게 그의 한계였지요. 그리고 그 최후 역시 좋지 못했지요. 그렇게 목숨뿐만 아니라, 역사에 이름을 잘못 남기게 되었지요.”
상실감과 분노에 차 있던 북한 주민들에게 폭정을 휘둘렀던 지배자의 눈물의 참회는, 그 동안의 고통과 마음의 상처에 좋은 약이 될 수도 있었다.
반드시 살려서 시키고 싶었는데...
“하지만 히사히토 폐하께서는, 그와는 다르실 거라 생각합니다. 제 생각이 틀렸을까요?”
부드럽지만 쏘아보는 황제의 눈빛에, 덴노는 침을 삼키며 대답을 준비했다.
“만약... 제가 거부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수고하셨어요.
- 작가의말
네. 바로 이 장면을 위해서, 1부 시작 때에 배경을 일본, 황제의 여자가 될 여주 중 하나인 루이코를 일본인으로 설정했다고 해도 그리 틀리진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한반도가 그의 직할령이 된 처지에 루이코가 한국인 캐릭터였다면 이 장면에 설득력을 부여하기가 참 힘들거든요.
덴노 입장에서는 ‘아놔, 한반도를 안방으로 삼고 일본은 뒷방으로 밀어버리더니, 이제는 조센징 여자에게 홀딱 넘어가서 날 갈구러 왔구나, 아 시발 더러워...’ 라고 느끼기 딱 좋지 않습니까? 하지만 아끼는 여자의 고향이지만 그것은 별개 문제, 과오는 과오이니 묻겠다고 하는 거니 명분이 서겠고, 루이코가 일본인 캐릭터여서 얻을 수 있는 장점은 이게 정말 크겠죠.
그래서 설정을 그렇게 짰습니다만, 덕분에 초반 배경을 일본으로 잡아버려 한국인 독자에게는 상당한 진입 장벽이 생겨버렸습니다. 하지만 꼭 필요한 조치였다고 생각하고... 원하는 장면을 만들어 냈으니 즐겁게 감수할 수 밖에요.
...그리고, 이 장면을 아싸~ 쪽바리 황제에게 굴욕을 줬다... 라고 해석하는 분은 그다지 없으시길 바랍니다. 저는 일반 판소에서 노릴법한, 작가 개인으로는 싫어하는 이런 류의 카타르시스를 노리고 이런 장면을 넣은 것이 아닙니다. 독자 여러분들이 이 글에서 느끼실 카타르시스는 좀 더 다른 종류의 것이 되길 바랍니다.
그건 남은 파트 3과 에필로그에서 밝히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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