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그것이 알고 싶다. (3)
한 권이 끝날 때, 가슴에 남는 글이 되길 바랍니다.
Ⅲ
예상대로 북궁에서 호출이 온 것은, 그로부터 몇 시간이 흐른 밤이었다.
칙명을 가져온 자는 황제의 정번시녀다. 영상통화가 있음에도 굳이 찾아온 정도라면...
“듣자니 황녀 전하께서 제이낙을 상처 입히셨다고...”
이미 알고 있는 이유를 묻는 쿄우카에게 답한 시녀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늦은 밤이지만, 반드시 지금 들라고 하십니다.”
“큰일이네요. 제가 먼저 뵙고 사정 설명이라도 드리고 싶지만... 그건 예법에는 크게 어긋나고...”
제이낙이 고자질했을 리는 없지만, 상처를 본 황제가 묻는다면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을 그녀들이 아니다.
올 것이 왔다. 쿄우카는 가슴이 철렁했지만, 실내복 차림으로 차분히 듣고 있던 세리사는 담담하게 말했다.
“옷 갈아입게 도와줘. 다녀올게.”
“수행하겠습니다.”
“됐어. 혼자 다녀와도 돼.”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모시겠습니다.”
세리사가 동행을 거부한 이유는 쿄우카도 알고 있다.
황제가 이 밤에 부르는 일은 이제껏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심한 야단을 맞을 확률이 높으니, 굳이 쿄우카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겠지.
부녀간의 불편함. 그 골은 깊다. 하지만 세리사가 울며 떼쓰는 경우에는 황제가 이기는 경우가 없었다.
분명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니 세리사는 가볍게 생각하고 있다. 좋은 현상이 아니지만 야단을 심하게 맞는 것보단 낫겠지. 불안감을 짓누른 시녀장은 고집을 피워 뒤를 따랐다.
전용 지하철을 타고 5분 남짓. 이래저래 드는 시간을 합쳐 10분후, 세리사는 황제의 정침에 섰다.
오래전부터 봤지만 쓸데없이 크기만 한 방이다. 세리사는 그렇게 생각했다.
만약 아버지에게 좀 더 사랑을 받았더라면, 그래서 뭔가 추억이 있었다면, 이 방을 채울 것은 이 냉랭한 공기만은 아니었겠지.
하지만 이제는 별로 상관없다.
병상의 황제는 화난 표정은 아니었지만, 대신 모두가 들릴 정도로 혀를 찼다.
“왜 그랬니?”
고개만 숙인 세리사는 딱히 말이 없었다. 뭘 새삼스럽게 묻느냐는 몸짓이다. 황제의 표정이 엄해졌다.
“묻지 않니...?”
“...잘못했습니다.”
“사과를 듣고 싶은 것이 아니다. 사과는 친위기사에게 해야지. 또한 이제 곧, 너도 정결례를 치르고 세상으로 나가게 된다. 그럼 아비는 둘째치고, 최소한 너 자신에게는 흠이 되진 않아야지.”
“걱정 마세요. 예법은 확실하게 익히고 있으니까.”
“겉만 중요하다면 예법만으로 세상은 돌아가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느니라. 알고 있느냐?”
“모르겠어요. ...가르쳐 주신 적 없잖아요.”
딸의 표정에는 불만과 고집이 가득했다.
“가르쳐 주시지도 않고 물어보신다는 건, 좀 가혹하지 않으신가요?”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것도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다. 슬슬 그럴 나이는 되지 않느냐.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 쿄우카?”
황제를 위한 긍정도, 황녀를 위한 부정도 할 수 없다. 납죽 엎드린 채 굳어버린 쿄우카. 하지만 세리사가 화를 냈다.
“잘못 없는 쿄우카에게 뭐라고 하지 마세요.”
“넌 아비보다 시녀 편을 드는구나.”
“당연하죠. 아바마마는 한 달에 두 번 뵙고, 쿄우카는 항상 옆에 있으니까.”
“사실이긴 하지만, 우린 혈연이잖니.”
“피를 주신 것은 감사해요.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죠.”
“전하...”
무례인 것은 알지만, 당황한 쿄우카는 곁눈질로 세리사에게 눈치를 주었다. 하지만 세리사는 조금 발꿈치를 굴러 그 입을 다물게 했다.
황제는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틀린 말은 아니지. 하지만 그건 아비가 아파서이고, 대신 딱히 네게 무언가 모자라게 한 것은 없다. 너는 많은 것을 갖고 있어. 알지 않느냐.”
“알고 있어요. 갖고 싶은 것은 거의 다 가질 수 있었고, 하고 싶은 것도 그랬지요. 나가는 것 빼고요. 하지만...”
세리사는 조금 더 낮게 고개를 숙였다.
“가족의 식탁이라든가, 그런 것은 없었잖아요. 알아요. 아프시니까 그렇게 못하는 거. 그래도, 하려고 하셨으면 무슨 방법이라도 있었을 거에요.”
“성의가 부족했더냐.”
“많이.”
딸은 단언했다.
“오늘은 제가 잘못한 것은 맞으니까, 기꺼이 야단은 맞겠습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변호하실 생각이라면, 저도 오래는 듣고 싶지 않아요.”
부동자세로 처분을 기다리는 딸의 표정은 여전히 고집스럽다. 황제는 가벼운 한숨으로,
“원래 야단치려는 의도도 아니었고... 네가 야단이라 느낀다면 더는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아무리 친위기사가 인공생명이고 네 아랫사람이라도, 엄연히 고통을 느끼는 생명이자 사람이야. 에이네의 상처가 낫거든 사과하거라. 알겠느냐?”
“...네.”
“대답은 좋다만, 충분히 잘못했다 인지하고 그리 할 것이냐?”
세리사는 대답이 없었다.
“그럴 것 같았다.”
쓰게 웃은 황제가 다시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히 잘못이니라. 황족은 신민을 수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신하라고 해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해서 함부로 상처 입힌다면, 앞으로 황제가 되어서 네 신민에게도 그러할 것이냐?”
“지나치게 무례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원래 그런 녀석들이다. 게다가 지금까지 수련 자체는 받았지 않느냐. 오늘따라 왜 그러느냐.”
“그러면 결국 제가 나쁘다는 것이군요? 원래 그런 사람에게 발끈했으니, 제가 나쁜 거네요?”
“그렇게만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말로 화내도 족할 문제 아니었냐는 거다. 늘 하던 것처럼 네가 울기라도 하면, 그 녀석들이 물러나지 않았을 것 같았니?”
“그렇게 울다간 저는 예전에 장님이 되었겠죠.”
세리사는 고집스런 고개를 돌려버렸다. 황제가 나무라듯 다시 말했다.
“세리사. 영자력은 강력한 만큼 바르게 사용되어야 해. 그러니 다른 것은 몰라도, 폭력 부분에 대해서는 아비가 엄히 말할 수밖에 없어. 아직 어리니 이번에는 넘어가겠지만, 다음에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나빴습니다...”
“그러면 됐다.”
“...라고 하면 속이 시원하시나요?”
뜻밖의 말에 황제는 조금 얼굴을 찌푸렸고, 쿄우카는 아예 고개를 들고 말았다. 이 무슨...
딸이라 해도 엄연히 군신관계다.
“무슨 말버릇이냐.”
“항상 그렇죠. 오늘은 저도 야단을 각오했습니다. 때리시더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오늘도 이렇게 돌려보내실 생각이시네요.”
“...아무리 그래도 딸을 때릴 수는 없잖느냐?”
“그럼 묻죠. 제게 관심이 있으시긴 한 겁니까? 아니면 손댈 가치도 없는 건가요? 야단을 치는 동안 얼굴을 볼, 그런 시간도 아까울 정도로 꺼리시는 건가요?”
황녀의 두 주먹이 꾸욱 쥐어진다.
“항상 그랬죠. 어릴 때는 제가 뭘 잘못했나... 아니면 남들이 말하는 대로, 어마마마는 돌아가시고 저는 살아남았으니 그 때문에 보기 싫어하시는 것 아닌가... 그래도 용기를 내서 다가가면... 어쩌면 조금은 관심을 받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너...”
“그런데 그렇지를 않다는 거, 몇 번 해보지도 않고 알았지요. 그래서... 야단이라도 맞아보고 싶어서... 기억하시나요? 처음으로 제가 심한 장난을 쳐서 여기에 불려왔을 때를.”
이유는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런 일은 있었겠지.
“그때 저는 무척 떨었지만, 기대도 했어요. 하지만 아무 일 없었어요. 그저 어려서 그러니 넘어간다고.”
“...그랬었더냐?”
“네. 그리고 그것으로는 부족한가 보다... 그래서 그 뒤로 만나는 사람마다 심통을 부려보고, 시비를 걸고 소리도 질러보고 말썽도 부려서 계속 불려왔지만, 매번 이렇죠. 그리고 저는 나쁜 아이로 낙인이 찍혔습니다. 하기야 관심도 없으셨을 테니... 상관없는 문제겠죠?”
어느새 작은 눈물이 눈가에 맺혔다.
“그러니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다음에 에이네가 저를 그리 대하면, 이번에는 팔로 끝내지 않을 겁니다. 황녀가 제이낙을 죽이기라도 하면, 그 때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래도 그냥 넘어가실 건가요?”
놀란 황제와 쿄우카가 그녀의 입술을 주시했다.
“너...”
비로소 질린 듯 황제가 말하려 하자, 바로 세리사가 말을 끊었다.
“자질도 성품도 모자란 후계자입니다. 지금이라도 동생을 만드셔도 저는 원망하지 않아요. 저는... 제가 다쳐 봤기 때문에 조금은 알아요. 사람을 해치고 죽이는 자리... 체면인지 뭔지 모르지만, 딸조차도 무관심하게 대해야 하는 자리. 그런 자리는 전 필요 없습니다.”
아버지가 더 말할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듯, 그녀는 서둘러 고개를 꾸벅 숙였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물러가겠습니다. 오늘 일은 제가 잘못했지만 용서하신 것으로 알게요. 에이네에게는 사과는 반드시 하겠습니다. 하지만 저를 조금이라도 생각하신다면, 다음부터는 제게 강요 같은 거 하지 않도록... 그렇게 말씀해 주세요. ...편히 주무세요.”
허락도 구하지 않은 세리사는 도망치듯 발걸음을 돌렸다. 이 무례에 놀란 쿄우카는 황제를 바라보았지만, 딱히 더 끌 것은 없다는 듯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쿄우카는 급히 몸을 일으켜 세리사의 뒤를 쫓았다. 황제는 여전히 팔짱만 끼고 아무 말도 없었다.
정침의 긴 복도를 종종 걸음으로 따라간 쿄우카. 하지만 한참을 따라가도 주인이 보이지 않았다. 마주친 시녀들에게 묻자, 무언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남쪽으로 향했다고 한다.
남쪽? 서궁은 남서쪽으로 방향이 다르다.
스치는 사람들에게 묻고, 황궁을 때때로 순시하는 경비기계들에게 접속하여 파악한 결과, 세리사는 옥좌주탑(玉座柱塔)으로 향하고 있었다.
높이 400테라르(약 350m)가 넘는 탑의 상부에는, 납작한 반구(半球)를 맞물려 붙여놓은 듯한 옥좌주탑궁이 있다. 즉위식이나 결혼식, 중요 축제에 사용하는 황궁의 랜드마크로, 그만큼 평소에는 엄중히 닫힌 곳이다.
하필 왜 그 곳에...?
상당한 거리를 뛰어간 쿄우카가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고르는 사이, 드디어 주인의 뒷모습이 멀리 보였다.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를 휘날리는 모습은 너무나 익숙한, 하지만 때로는 가슴 아프게 바라보았던 것이다.
“황녀 전하!”
쿄우카가 불렀지만 세리사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발을 조금 굴려 허공으로 떠올랐다. 아직 미숙하고 멀리 가지도 못하지만 어느 정도 비행할 수는 있다.
높이, 높이 올라가, 거대한 탑과 그 상층부 너머로 사라진 세리사를 본 순간, 쿄우카는 다시 생각할 것 없이 옥좌주탑의 입구로 뛰어들었다. 누군가 날아올라갔다는 사실에, 입구의 근위대들이 이미 술렁이고 있었다.
“비키세요!!”
기세는 좋았지만 당연히 제지당했다. 두 팔이 잡히고 화급한 질문이 이어졌다.
“사정이 이러니... 저 위로 어떻게 가죠?”
근위대 병사들이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이어 책임자인 중년 남자가 군례를 붙이며 말했다.
“신분은 확인했으니 안내는 붙여 드리지요. 저는 폐하께 보고하겠습니다.”
“...그건...”
“직무이므로 양해 바랍니다. 시녀장을 안내해드려라.”
쿄우카를 구속했던 대원들이 앞장서 주탑의 승강기로 향한다. 더불어 1인승의 작은 비행정 몇 대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드넓은 황궁의 경비용이고, 평소에는 함부로 날지는 못하지만 이건 긴급사태다.
100명도 우습게 탈수 있는 거대한 승강기의 안에서 발을 구르다, 내리자마자 다시 재촉하여 세리사가 있을 곳으로 향한다.
경비정의 보고 덕에 최상단의 첨탑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첨탑은 장식용 탑이라, 보수를 위한 몇 개의 사다리가 있을 뿐 승강기가 없다.
아샤르의 탑승수단 대부분은 공중에 부유할 수 있다. 수리를 할 때도 로봇을 띄우면 그만이다. 때문에 사다리조차 원래는 필요 없지만 만약을 위해서 붙여 놓은 곳이다.
내달린 쿄우카는 첨탑의 사다리를 붙잡았다. 바로 아래에는 옥상의 바닥이 있어 아직 평지와 같다. 하지만 첨탑만으로도 40테라르가 넘어 7, 8층의 높이다. 게다가 고도가 높아 쉴 새 없이 바람이 분다.
사다리를 잡는 순간, 자신이 높이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사실에 쿄우카는 순간 아찔해졌다. 하지만 근위병들이 말릴 사이도 없이 그녀는 사다리를 올라갔다. 궁중용의 겹치마를 입어, 이대로라면 바람에 치마가 날리고 밑에서는 보일 것이지만 그것 역시 신경 쓰지 못했다.
어느새 올라왔을까. 몇 테라르를 더 올라간다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곳에 황녀가 있었다. 저 멀리 주변에는 무인경비정이 돌고 있었지만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첨탑의 가장 위, 가장 뾰족한 부분을 밟고 선 황녀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다. 더불어 사다리가 끝나버려 일반인은 더 올라갈 수 없었다.
다급한 쿄우카가 소리쳤다.
“전하!!”
그때까지 멍하니 주변만 바라보던 황녀가 비로소 쿄우카를 내려 보았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우는지 웃는지 알 수 없는 기묘한 표정이 있었다.
“이거 봐. 쿄우카. 주변을 봐. 이게 세상이래.”
쿄우카는 엉겁결에 고개를 돌렸다. 오금이 저릴 것 같았지만 억지로 참았다.
베라 아샤르의 밤을 밝히는 다수의 조명이 반짝인다. 하늘에는 수많은 별과 함께 북극성이, 비록 영상에 불과하지만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다.
하지만 또한, 마치 우주의 끝에 홀로 던져진 것처럼 몸을 떠는 쿄우카에게 세리사가 쓴웃음으로 말했다.
“여긴 옥좌주탑이야. 내 발 아래 옥좌가 있어. 이 별과 뭇 신민을 다스리고, 우리가 닿는 우주공간을 지배하는 자리가 있다고 해.”
알 수 없이 기괴한 주인의 웃음에 쿄우카는 소름이 돋았다. 단 한 번도 이런 표정을 본 적이 없다.
“황제가 되면... 오늘 저렇게 평안하게 잠든 이들, 저 불빛들을 향해 명령하고, 때로는 다치고 죽으라고 하겠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면서... 때로는 화난 척... 때로는 위엄 있는 척, 그렇게 해야 하겠지? ...그렇겠지!”
세리사는 발을 굴러 첨탑을 걷어찼다. 아직 미숙한 그 힘으로는 꿈쩍할 리가 없음에도, 소녀는 마치 원한이라도 있는 것처럼 몇 번이고 걷어찼다.
“이렇게까지 해도... 아바마마는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 오늘 일로 확실하게 깨달았어. 아무리 잘해도 칭찬받지 못하고, 아무리 못해도 야단도 칠 필요도 없는... 난 그런 아이일 뿐인 거야. 그저 당신이 세상에 살았었다는...! 그런 증거일 뿐인 거야.”
“전하...”
“그 증거가 없어지면... 보기 좋은 장식품이 깨지면, 아버진 조금쯤은 후회하실까?”
물방울이 쿄우카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비라도 내리는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언제부터 흘린 것인지 알 수 없는 눈물이 바람에 날려 쿄우카에게도 날린다. 그 방울방울마다 괴로움과 외로움이 흠뻑 녹아 있다.
설마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심장을 조여 오는 다급함이 쿄우카의 전신을 지배했다.
“내려오세요! 위험해요!!”
“위험한 건 쿄우카쪽이야. 보통 사람이잖아.”
실제로 쿄우카는 두려움을 참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또한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고작 높은 곳에 올라온 자신조차 이렇게 무섭다. 그러니 내 주인은 그동안 얼마나, 공포 속에서 혼자서 울며 보이지 않는 사다리를 붙잡고 있었을까.
“내려가. 쿄우카. 무리해서 올라올 필요는...”
“제발 경솔한 생각 하지 마세요...! 그리고... 저는 올라갈 겁니다. 절대 내려가지 않아요!”
“어떻게? 사다리가 없잖아?”
“어떻게든 올라갈 거에요!”
이 용기는 내 어디에서 솟았을까. 잘 모르지만 어쩐지 알 것 같다.
“무섭지만, 올라갈 거에요! 왜냐면! 거기에는 제 동생이, 딸이 있는 걸요. 낳지도 않았고 피도 섞이지 않았지만,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걸요! 바로 당신!! 그러니 올라갈 거라고요!”
“쿄우카...”
놀란 듯 세리사의 두 눈이 커졌다. 세찬 바람 소리에 지지 않도록 쿄우카는 다시 소리를 질렀다.
“제 얼굴을 봐서라도 제발 내려오세요. 아니면 제가 올라가요. 떨어져 죽어도 할 수 없어요. 전하를 거기에 내버려 둘 수는 없어요. 아바마마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스스로를 가볍게 여기신다면, 이번엔 제가 전하의 주의를 끌기 위해 이 손을 놓을 겁니다.”
“쿄우카...”
“전하는 혼자가 아닙니다. 어렵고 힘드시겠지만, 눈물 정도는 제 품으로 받아드릴 수 있어요. 그 정도는 할 수 있어요. 그러니 제발...!!”
세리사의 눈물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죽을 만큼 아파서 올라왔지만 막상 올라오니 잔뜩 겁이 났다.
창피한 일이지만, 지금이라도 아버지가 말려주기를 기다리며 떨고 있던 차에 쿄우카의 말은 큰 위안이다.
하지만... 역시 아버지는 아무 말도 없다.
지금껏 애지중지, 밤잠을 설치고 몸을 사리지 않고 돌봐왔던 그 아이가 하염없이 울며 애처롭게 떨고 있다. 쿄우카는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거기까지다.”
쿄우카는 물론 세리사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느덧 주변에는, 몸을 감싸는 긴 망토를 휘날리는 다수의 친위기사가 떠 있었다. 그 중 한 명의 팔찌를 이용한 듯, 황제의 얼굴이 입체영상으로 떠올랐다. 아마 근위대의 보고가 지금 올라간 것이겠지.
“...아바마마.”
그녀는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혹시라도... 조금이라도...
황제는 잠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이어 열린 눈동자에는 진노가 흐르고 있다.
“위험하잖니. 그리고, 황제의 옥좌 위에서 대체 뭐하는 거냐. 그게 그렇게 가벼운 자리냐?”
기대가 빗나감에 세리사는 입술을 깨문 채 아무 말도 없었다. 쿄우카가 다급히 소리쳤다.
“아닙니다, 폐하! 사실은...”
“시끄럽다. 닥쳐. 입을 열지 말라.”
쿄우카는 섬뜩해지는 기분과 쿵쾅거리는 심장을 억지로 달래고 있었다. 이렇게, 또 이렇게 알력과 오해가 깊어지는 것일까.
아이의 괴로움을 말하고 싶지만 황명은 지엄하다.
“황녀를 끌어내려라. 날뛰면 기절시켜도 괜찮다.”
“존명.”
지극히 사무적으로 제이낙들이 고개를 숙인다. 그들이 복종하는 것은 오로지 ‘현직’ 황제이며 퇴위하면 더 이상 명령을 듣지 않는다. 아무리 재위 중에 충성하고 복종해도 소용이 없다. 대신 지금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순식간에 달려든 그녀들이 황녀를 에워쌌다. 황족이라 해도 미약한 세리사가 맞설 상대가 아니다.
“싫어!”
당장 붙들려 몸부림치는 아이. 하지만 알리사가 손가락 끝을 세리사의 귀 뒤에 가볍게 대었다. 짧은 비명소리와 함께 아이는 금방 축 늘어진다.
쿄우카에게도 한 명의 제이낙이 붙어 허공으로 들어올린다. 황제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한동안 거처에 연금하라. 그리고 쿄우카.”
“네? 네!”
화들짝 놀란 그녀에게 황제는 담담하게 말했다.
“딱히 관리부실의 책임은 묻지 않겠다. 대신 당분간 황녀를 잘 달래도록 하라. 그리고... 몸이 상할 수 있으니, 너무 울거나 굶진 않도록 해 다오. ...알겠는가.”
“네...”
마지막 말에 쿄우카는 깨달았다. 미처 알지 못했지만, 이 황제는 자신의 딸에게 애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 지금껏 왜...?
하지만 주인의 마음, 그 상처는 한동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쿄우카는 다시 눈물을 떨어뜨렸다.
“녀석...”
통신을 끈 황제는 토오네를 바라보았다.
“반항이 슬슬 나오는가. 자라고 있다는 증거지만, 저 근성은 어디서 나왔을까? ...저렇게 위험한 짓을...”
“폐하겠죠. 따님이니까.”
측근의 웃음에도 황제는 질린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이건 곤란해. 이번엔 위험하니 강제수단까지 썼지만... 아무래도 생각 이상 원망이 깊었던 모양이야. 아니, 그건 당연하겠지만...”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황녀 전하를 보듬어주십시오. 보시다시피 사랑에 굶주리고, 주어진 환경에 저렇게나 떨고 계시지 않습니까.”
“유키나와 쿄우카로는 부족했을까. 칼스도 조만간 붙여줄 터인데...”
“그 어떤 이도 부모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저는... 폐하의 생각을 아는 아마 유일한 사람이겠지요.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노년의 시녀장이 정중히 읍했다.
“어쩌면 계속 미루고 계신 것은 아니온지?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해야 했느냐고... 따님께서 울며 원망하는 그 모습을, 아직은 보고 싶지 않으신 것인지...”
“...없지는 않겠지.”
“감히 말씀 올리자면... 너무 미루시면, 돌아가신 황후마마께서도 슬퍼하실 것 같아요...”
황제에게 있어 보모시녀였고, 지금도 측근인 토오네는 의미가 크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경을 쳤을 말에도, 골몰히 생각한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마냥 어리다고 생각했건만... ...근신을 풀면 그때 한 번 더 부르겠네.”
황제는 거듭 쓰게 웃었다.
“아무래도 짐은 육아가 서툴러. 처음 저 아이를 안았을 때 왜 그렇게 울던지... 녀석 하고는...”
한편, 깨어난 세리사는 화도 내지 않았고 울지도 않았다. 그저 멍하니 누워 천장만 바라보길 며칠이나 반복했다. 의외로 굶지도 않았다.
한동안 마음 졸였던 쿄우카는 비로소 조금 안도했다. 어쩌면 이대로 잘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건 너무 안일한 생각이었다.
휴일에 걸려 상당수의 시녀가 자리를 비운 사이, 그리고 혼자 있고 싶다는 명령 탓에 쿄우카가 한동안 침실에 접근을 금지당한 사이,
황녀는 그야말로 감쪽같이 사라졌다.
수고하셨어요.
- 작가의말
할퀴고 찌르고, 그리고 사고 그 3번째... 집나갔음.
자, 다음 전개는 과연 어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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