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장. 분열의 조짐. (1)
한 권이 끝날 때, 가슴에 남는 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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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세리사는 타는 속을 달래고 또한 기대하며 유키나를 기다렸다.
부디 사고는 없어야 하는데...
한 달 전의 유키나는 굉장히 화를 냈었다.
“생각 같아서는 함대라도 빌리고 싶어요. 돌아오는 도중에 쏴버리게...!”
물론 아무리 왕녀라도 함대를 빌릴 힘은 없다. 군함 한 척이라면 이동용으로 어떻게 빌릴 수 있을지 몰라도, 전투용으로 쓴다면 당연히 거부당한다.
우주에 간 인간에게는 따로 손을 댈 수 없는 지라, 유키나도 그동안 이를 갈고 주먹만 쥐고 있었다.
다만 몹시 의외였던 것은, 세리사가 의외로 꽤나 담담했다는 점이다.
이유를 묻자 세리사는 그저 차분히 대답했다.
“그도... 고민하고 갈등하고 있지 않다면 도망칠 이유가 없잖아? 그렇다면 아직은 그 눈 안에 내가 있는 거고, 오히려 전보다 더 의식할지도 모르지. ...어떻게든 한 발은 나아간 거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막상 유키나가 그를 맞이하러 나갔다고 하니, 그동안 눌러왔던 담담함이 일거에 불안으로 바뀌었다.
잔뜩 벼르고 있는 유키나다. 칼스도 여전히 날카롭다면 무슨 충돌이나 나지 않았을까.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던 차에, 드디어 응접실로 유키나가 들어오자 세리사는 달리듯이 다가갔다.
“그는...?”
“폐하를 알현하러 가셨어요. 그리고...”
“그리고...? 혹시 좀 달라졌다던가...”
기대하던 표정에 대고 말하기 미안한지, 유키나는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오면서 이야기를 해 봤는데, 오히려 경계해야 할 대상이 생기긴 한 것 같아요.”
“뭐?”
상세한 이야기를 들은 세리사는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건 더 나빠진 것 아닌가.
“...아직 깊은 정도는 아니지만...”
유키나가 위로했다.
“너무 걱정 말아요. 뭐, 저도 한 번 보았지만 언니에 비하면 한참 딸리고... 뭐랄까, 그냥 봐도 재미없는 여자에요. 오라버니처럼 활달한 사람과는 반대 성향이죠. 그저 잠시의 흥미일 테니...”
“...그럴까...? 그래도...”
불안감에 몸을 들썩이는 그녀를 유키나가 제지했다.
“일단 며칠은 쉬게 해 주세요. 오라버니도 다시 이야기할 필요성은 느낄 테고, 그래도 뭉개고 있다면 제가 엉덩이를 차서라도 데려올 테니까.”
“...부탁할게.”
세리사는 여전히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자신이 그랬듯, 정말 사소한 것부터 사랑은 시작된다.
사실 그를 끌어올 방법은 간단하다. 그러나 그 방법은 영원히 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변수에 뾰족한 수 역시 없다. 그녀는 거듭 불안에 휩싸였다.
그로부터 5일 후, 칼스는 동궁에 입궁했다.
무슨 일에선지 그는 군복 차림이다. 물론 군복도 정복(正服)이므로 무례는 아니지만, 그 신분을 생각하면 궁색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우주에서는 많은 것이 제한된다. 거대 전함이라고 해도 개인을 위한 편의시설은 많지 않다. 장성은 개인실이 있지만 왕궁과는 비교할 수도 없다. 천 명이 넘는 준제독 중의 하나일 뿐이니 갖은 간섭을 받아야 한다.
그것을 기꺼이 감수할 정도로, 그는 갈등하고 또한 피하고 싶었던 걸까. 세리사는 괜히 섭섭했다.
그래도 모처럼 만난 반가움은 어쩔 수 없었다.
“어서 와...”
“...잘 있었어?”
칼스는 그때처럼 차갑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홧김에 집을 나간 아이가 배가 고파지자, 은근슬쩍 현관문을 열고 밥상에 끼어드는 것처럼 멋쩍어 하고 있었다.
따뜻한 부모라면 아무 말 없이, 모른 척 아이의 자리를 만들어주겠지. 그리고 그렇게 정이 깊어가겠지.
자신도 그렇게 해야 한다. 원망하지 말아야지.
하지만 오히려 칼스는 먼저 고개를 숙이고 사과했다.
“미안. 말도 없이 도망간 처지에 할 말은 아니지만.”
“아냐...”
세리사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도망가게 할 정도로 괴롭힌 처지에 오히려 사과를 받는다. 민망하고, 또 괴로울 정도로 아프다.
“난...”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자. 이렇게 세워 둘 셈이야?”
칼스는 모질게 먹었던 마음이 다시 아팠다.
못 본 사이 세리사는 조금 야위었다. 황태녀가 된 후 하는 일도 훨씬 늘어났을 거다. 제대로 된 측근도 없는 터에 고생이 심했을 거다.
한 모금 마신 차를 서로 내려놓았지만, 누가 먼저 말을 꺼내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유키나가 있었다면 중재할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방학이 끝나 학교로 돌아가야 했다.
결국 칼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 그동안 생각은 좀 해봤어...”
세리사는 끈기 있게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만약 너와 내가 많이 일찍 만났더라면, 그래서 같이 자랐더라면... 아니면 좀 더 이성과 감성을 조정할 수 있는 어른으로 더 늦게 만났다면, 이런 결과는 나오지 않았을지 몰라. 하필이면 그때 경험부족인 나와, 사춘기인 네가 만나 이렇게 된 거라고 생각해. ...그러니, 저번에 말한 건 취소할게.”
“어떤...?”
“네가 이상하다고 한 거. 우주로 가서 생각해보니,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었는데... 생각해보니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우리는 같이 자라지 않았으니까. 내가 처음부터 네겐 남자일 수 있었으니까.”
칼스는 피곤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이 굴곡과 번뇌는 언제쯤 사라질까.
“하지만 나도 이런 문제는 무척 미숙하고... 그리고 도망친 내내 생각했지만 역시 이건 아니야. 우리는 장벽이 너무 많아.”
“...그렇게 높은 장벽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해. 역시 힘들 것 같아.”
태도는 정중해도 나가있던 시간동안, 갈등한 만큼 오히려 생각이 굳어진 것을 확인하자 그녀는 급격히 실망했다. 칼스가 재빨리 덧붙였다.
“네가 포기하라고는 하지 않겠어. 너의 마음은 너의 것이니까. 하지만 나도 할 수가 없어. 내 마음 역시 나의 것이니까.”
“그래서...?”
“그래도 참... 어렵더라고... 결국은...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은, 네가 미워서 하는 말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역시... 당신 생각은 변함이 없는 거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생각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겠지. 그래... 마음의 문제야. 이걸 머리로 생각하니 답이 나올 리 없지.”
한번은 더 독해져야 한다. 그는 단언했다.
“내게 노력을 강요할 생각이라면 너 스스로도 노력해. ...내가 왜 군복을 입고 온 줄 알아? 대답 여하에 따라서는 다시 우주로 나갈 생각이기 때문이야. 군령본부에 찍히는 한이 있더라도 할 수 없어.”
“...심해.”
“매정하다 말하진 마.”
이제는 그녀에게 남은 최소한의 자존심을 기대해야 한다. 싫다는 남자에게 매달릴 정도로, 그녀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앞으로도 네 옆에는 있겠지만, 연인 놀이는 여기서 끝이야. 나는 네가 좋은 군주가 되면 그걸로 족한 사람이고... 하지만 여기서 고집을 피운다면, 나도 널 떨어뜨리기 위해서 조금 바빠질 거야.”
“무슨...”
“...여자를 만들어볼까 해. 너한테 어울릴 사람도 찾아볼 생각이고...”
“그런...!”
칼스는 여전히 시선을 피한 채 말했다.
“너도 네가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에게 가야지. 나처럼 잘하지도 못할 사람이라면 명백하게 손해야.”
제발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라도 챙기기를. 이쯤에서 포기해 주기를...
하지만 칼스의 기대는 간단하게 빗나갔다. 그녀는 부쩍 언성을 높였다.
“그건 내게 포기하라는 것과 같은 말이잖아. 절대 싫어...! 난... 당신 아니면 안 된다고 말했었어...!”
“나는 너 아니라도 많다.”
“아직 없잖아?”
“지금부터라도 만들면 되지.”
“그냥 내게서 도망가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고...?”
“그런 것 아니야.”
세리사의 두 손이 마주 움켜쥐어졌다.
“그런 거잖아! 결국 날 피하고자... 날 받아들일 그 용기를 다른 데 써서... 억지로 그 마음을 누군가에게 주겠다...? 그게 옳은 방식일까? ...솔직히 말해...! 당신은 나를 두려워하는 거야? 아니면... 앞으로 맞이하게 될 시련이 두려운 거야?”
이 녀석, 이렇게 서릿발은 처음이다. 칼스는 움찔했다.
“둘 다...”
“뭐?”
“뭐랄까... 나라고 해서 꿈이 없어? 내가 한눈에 반하고... 말을 걸고 싶고 자꾸만 보고 싶고... 그런 사람을 찾고 싶다고. 누구에게나 미래를 축복받을 수 있고, 내가 편하게 대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을 원해. ...넌 그렇지는 않잖아.”
“...올 때 같이 온 사람 같은...?”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 같다. 칼스는 내심 투덜댔다.
유키나 이 녀석, 다 커서 엉덩이를 맞고 싶은가.
“그런 거 아니야. 그저 난 네가 부담스러워서...”
“나라는 여자가 부담인 것은 아니잖아. 내 입장, 우리 입장 때문이잖아. 그렇게 내 아버지와 당신 부모님의 눈치가 두려워?”
“몸은 다 컸어도 우린 아직 애송이야. 만약 우리 둘이 합의를 했다고 쳐도, 너는 네 아버지에게 뭐라고 말할 작정이야? 갖은 고생으로 지켜온 딸이 자리를 버리겠다면, 그 분이 받을 충격은 생각도 하지 않았어?”
“물론 당신은 내 아버지를 잘 알지. 하지만 나도 이제 적지 않게 알아. 내 미래를 생각해서 당신을 키우고, 금기를 어기고 힘을 전수할 정도로 아버지는 나를 충분히 사랑해. ...자신할 수는 없어도, 내가 당당히 밝히면 허락될 거라고 생각해.”
“그 분은 아버지 이전에 군주다.”
“그렇지 않아. 아버지가 황제의 역할을 더 우선시했다면, 어머니를 위해서 그렇게 되진 않으셨을 거야. 그 분 스스로도 겪으신 일이야. 사랑하니까 다 넘어설 수 있다고 하셨던... 그런 분이라고. 그러니 괜찮아.”
“그럼 내 부모님에게는 뭐라고 할 거야? 우리 아버지는 세상이 다 아는 고지식한 사람이고, 우리 어머니는 좀 낫지만 그래도 상식적인 사람인 건 확실하다고.”
“내가 가서 무릎 꿇고 빌 거야. 이렇게 되었으니 받아달라고... 양쪽 부모님도 내가 책임질 수 있어. 당신은 그냥 가만히 있어도 돼.”
“그게 그렇게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잖니?”
“내가 바라는 건 다른 것이 아니야. 당신이 편견 없이 나라는 사람, 한번쯤은 진지하게 바라봐주길 바래. 황태녀 같은 자리나, 있으나마나한 남매 취급 같은 거 말고 사람으로, 여자로...! 당신은 내가 본 누구보다 바른 눈이 있는데... 왜 내게는 그렇게 봐주지 않느냐는 거야...! 다른 사람은 다 그렇게 해 주면서 왜 나만?!”
칼스는 새삼 뜨끔했다. 솔직히 편견이라면 편견이다.
재미없는 여자로 평해지기 딱 좋은 아미에조차도 대화를 통해 친분을 이끌어냈는데, 세리사에게는 거의 시도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게 쉽지 않아...!”
“...단 한 번 용기를 내기 힘들 정도일까? ”
잠시 생각했지만 그렇지는 않다.
“그렇지는 않아... 말했지? 유키나만큼은 예뻐한다고... 쌓아온 추억은 적어도 그 질을 따지자면 괜찮았고...”
“그럼 된 거 아냐? 아무도 차지하지 않은, 당신 마음의 비어있는 자리를 노리는 내가 이상할까? 당신은 지금껏 그저 입장에 부모 핑계만 댔어.”
“또 있었어... 아무리 그래도 거리낌은 어쩔 수 없는 거라 했잖아?”
“거짓말...! 바로 도망칠 정도로 갈등했으면서...! 당신도 나한테 사랑받는 것... 좋아했잖아, 즐거워했잖아...! 나도 그 정도 눈은 있어...!”
입을 다문 그에게 그녀는 비로소 어조를 낮추었다.
“...당신이랑 싸우긴 싫어. 그저 잠시라도, 먼저 약속한 시간만이라도 좋으니까... 당신도 노력해. 언젠가 당신 본심에 물어서도 거짓 없는 대답이 나온다면... 나도 포기할 테니까.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지금의 거부는... 당신이 당신 본심에 단 한 번도 묻지 않은 거야.”
“...본심이라...”
“당분간 귀찮게 하지 않을게. 하지만 다시 도망가지는 마. 평소처럼 지내면서 대신 내게도 충분한 기회를 줘. 기회도 주지 않고 핑계나 대고... 그대로는 못 물러나.”
“그래도 변함없을 걸...?”
“세상에 절대라는 것은 없어. 당신도 알잖아?”
그녀는 처참함 속에서도 묘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칼스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풍성한 꽃밭처럼 보이는 그녀. 하지만 품 안에는 의외로 독초가 무성하지 않을까.
내가 원했던 네 모습은 이런 것이 아닌데...
볼 수 없던 공포를 그의 눈에서 읽은 세리사는, 결코 다시 갖고 싶지 않았던 원망을 다시금 품었다.
지난 5년, 나는 당신만 보고 살아왔는데, 지상인에게조차 눈길을 주었던 당신은 전혀 날 보고 있지 않아.
...대체 왜?
돌아가는 길에 칼스는 계속 생각했다.
조건 같은 것은 따지지 말고 순수하게 자신을 봐달라는, 세리사의 요구는 일단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녀의 장래는...? 자기야 괜찮다지만 내가 안 괜찮아.
그 어머니가 그렇게 눈물로 부탁한 핏덩이다. 그 아버지가 별 짓을 다해가며 지켜온 딸이다. 그 정당한 자리를 내가 차지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세상의 눈도 문제다. 철없는 사랑에 빠져 배를 맞춘 두 철부지들이 과연 좋은 평가를 받을까. 두고두고 정치적 약점이 될 것이며, 그래서는 장차 그녀와 함께 해보고 싶은 정치적 과제들을 스스로 망치는 일이다.
세리사 이 철부지는, 우리들이 황족으로 태어난 것을 우습게보고 있다.
권력은 만인에게 인정받는 자가 쥐어야 가치가 있는 법이다. 그러니, 배우고 익혀도 모자랄 지금 처지에 사랑 타령이나 하다니. 제법 좋은 자질을 스스로 썩히면서, 자신이 지켜야 할 국가나 신민에게는 관심이 없다.
이대로는 그가 원하는 바른 군주가 될 수가 없다. 게다가...
자신은 장난은 좋아해도 행동은 고지식한 남자였다. 그런데 이번의 일은 생애 가장 큰 일탈을 요구한다.
어쩌면 나는 내 생각보다 훨씬 나약한 인간일 것이다. 카샴 원수가 말했듯 실패를 모르는 자는 실패 앞에서 한없이 나약해지며, 이는 천재로 칭해지던 자가 오히려 쉽사리 나락으로 떨어지는 보편적인 패턴이다.
큰 일탈 없이 살았던 만큼 이번의, 그것도 더할 나위 없이 거대할 일탈은 엄청난 심적 갈등이 되었다.
이러단 그녀뿐만 아니라 나도 망가진다. 서로를 구원할 방법을 찾지 않으면...
아무래도 이 일에는 상담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고지식하고 딱딱한 편인 부왕은 안 된다. 모후는 나름 현명하다고 생각하지만, 자식 문제에서까지 냉정하게 생각해준다고 기대하기 힘들다.
냉정하게 생각해 줄 사람만 따진다면 몇 사람이 있기는 하다. 자신의 공부회에서 고른다면 아비에르 리비와 오베레이 콘베르, 그 두 사람이라면...
리비는 자신이 인정하는 최고의 인재다. 가장 신중하고 확실한 판단을 내려줄 수 있는 두뇌가 있다. 같은 여자니 여자의 심리나 사고방식을 알려줄 수도 있다.
하지만 리비는 사적으로 비밀을 나눌 수 있는 관계는 아니다. 학문적 토론은 즐거웠지만 서로간의 사생활을 이야기한 적은 거의 없다.
오베레이 콘베르는 그보다 두 살이 많았다. 입학의 학년은 같았고 졸업 성적은 관학부 4등으로, 리비와 비교하면 독창력에서 조금 처지는 면이 없지 않지만, 대신 두뇌 회전과 분석력, 행정 능력은 그에 필적하는 우수한 인재다.
신분은 달라도 서로 말을 놓고 있고, 남이 보면 기겁할 정도로 서로 욕을 해가면서 싸울 때도 있었다. 반면 음담패설도 스스럼없이 나누곤 한다.
다만, 남자들끼리 이야기하는 여자 문제란, 편견이나 잘못된 정보가 많다. 결코 객관성을 담보할 수 없다.
특히 녀석은 허리 아래로는 전혀 신뢰할 수가 없다. 특유의 언변과 여자 한정 자상한 태도로 자빠뜨린 여자가 기십을 넘는다. ...역시 이 녀석은 안 된다.
칼스는 마지막으로 한 사람을 떠올렸다. 지적 수준도 충분하고 신중하며 입이 무거운, 무엇보다 세리사와 동갑인 여자다.
바로 아미에였다.
하지만 겨우 며칠 전에 헤어졌을 뿐이다. 돌려보내자마자 다시 부른다는, 자존심의 문제도 약간 걸렸다.
그래도 한번 이야기를 해 볼까. 떠 볼까.
과연 그녀는 무슨 답을 내놓을 것인가.
유키나는 기숙사의 밖으로 나왔다. 공부벌레들만 모인 이 학교도 이제는 대부분 깊은 잠에 빠진 밤이었다. 그녀는 한참동안 밤공기 시원한 외진 산책로를 배회했다.
오늘쯤 두 사람은 만났을 것이다. 결과는 어떨지.
그는 너무나 바쁘게 살았다. 그 덕에 유키나 자신은 충분히 알고 있는, 그녀의 장점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다. 다소 소심하고 고집이 센 것은 사실이지만, 그 안에는 충분히 달콤한 생크림이 넘치도록 있다.
하지만 저 바보는, 나중에 살찐다는 핑계만 대고 전혀 맛을 보려 하지 않는다. 굉장히 강직하고 도덕적인 남자니 무리도 아니지만...
반대로 세리사의 마음속에서는, 지난 5년간 그는 이미 연인이었고 피를 토하는 그 노력을 지탱해주었던 것은 상당한 기대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서투르기 그지없고, 줄곧 조급함에 시달리고 있었다.
유키나는 거듭 한숨지었다. 나이는 내가 가장 어리지만, 심야 연애방송 애청 10년의 경력은 그냥 쌓은 것이 아니다.
충분히 시간만 주어지고 서로가 고집을 조금만 꺾는다면 좋은 결과가 나올 텐데도... 그저 자기 눈 앞 밖에 보지 않는다.
저 바보천치들...!
답답한 마음에 그녀는 몇 번이고 발에 걸리는 돌멩이를 차냈다.
끼어들고 싶지만 두 사람 다 자신보다 손윗사람이다. 그나마 세리사는 말을 잘 듣지만 저 옹고집 오라버니는 다르다. 자신을 귀여워는 해 주지만 실제로 의견은 거의 듣지 않는다. 이미 혼자 잘난 사람이니 내 역할은 당분간 없겠지.
그래도 언니는 머리를 잘 쓴 셈이다. 겪은 기간이 너무 짧은 만큼, 시간을 두고 잘해준다면 그도 사람인만큼 마음이 동하지 않을 리도 없다. 그녀가 추억 쌓기에 열중했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가 설령 마음에 거리낌이 있더라도, 독한 마음을 먹고 돌아서려 해도, 그동안 쌓은 즐거운 추억이 발목을 잡아줄 테니.
다만 가장 확실한 패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혀 쓸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남자에게 부담을 주기 싫다는 마음가짐은 칭찬할 만은 하지만, 유키나 본인 같았으면 당장 썼을 수이다.
뭐, 그 점이 그녀다운 점이려나...
이대로 큰 변화 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서로가 성급함을 조금 억누를 수 있다면 훨씬 좋은 결과가 나올 거다.
부디, 태어나서 편할 날이 없다 이제 겨우 마음 붙일 이를 갈구하는 그녀가 행복을 걷기를.
인생의 외길만 고지식하게 걸어온 그에게도, 가슴 뿌듯한 애정을 심어주기를...
하지만 아무래도 그 여자, 오라비의 옆에 어느새 다가와 있는 존재가 마음에 걸린다.
진짜 인연이 닿으려면 없던 만남도 생기게 마련이다. 남녀가 가까워지는 것은 의외로 순식간이다.
부디 그 방향이 어긋나지 않기를.
그녀는 항상 사랑하는 밤하늘에 열심히 빌었다.
수고하셨어요.
- 작가의말
오늘은 그녀와의 대화. 결국 말로 떼내는 것에는 계속 실패. 내일은 또 다른 그녀와의 대화. 앞으로의 배경이 되는지라 늘어지긴 해도, 오늘과 내일의 대화에 약간의 스포가 있습니다... 과연? 사실 1부가 2부의 스포니까 큰 의미 없음. 내일 뵙겠습니다.
* 올리는 시간을 조정해봤는데 일독수는 더 바닥이군요. 아침이 나으려나. 으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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