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권. 전장(戰場)의 소년> 프롤로그 : 심야(深夜)의 자객
한 권이 끝날 때, 가슴에 남는 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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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秦).
북으로는 오르도스, 서로는 견융(犬戎)과 강족(姜族)과 접하며, 남으로는 촉(蜀)을 집어삼키고 동으로는 함곡관(函谷關)으로 지켜지는, 그야말로 최강의 대국(大國)이다.
물론 그들이 처음부터 강했던 것은 아니다.
춘추시대에는 주(周) 왕실을 모시는 제후였지만, 워낙 지리적으로 서쪽에 치우쳐 있고 또한 백성 중에 이민족이 많았던 탓에, 중원의 인식으로는 꽤나 야만스러운 나라로 여겨졌다.
하지만 견융의 침략으로 주 왕실이 쇠락했을 때, 진(晉)과 함께 가장 먼저 왕을 도운 공로로 백작으로 봉해진 이래 실질적인 천승지국으로 발돋움했다.
물론 이후에도, 몇 명이나 되는 군주가 전쟁터에서 사망했을 정도로 강국으로의 길은 험난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이겨낸 지금, 그들은 누구나 인정하고 두려워하는 절대강자다. 그리고 그만큼 적도 많았다.
수도인 함양(咸陽)은, 지금 2만 명이 넘는 병사가 배치되어 타국의 세객과 첩자를 가려내고 있었다. 그 중심인 왕궁 역시, 그 강력한 법과 힘을 상징하듯 갑사(甲士) 3천으로 이루어진 친위대가 호위한다.
단 한 사람, 왕을 지키기 위함이다.
지금의 왕은 유래 없는 정복군주로, 그 군대의 발길은 천하에 막을 자가 없었다. 휘하의 장수들도 모두 지혜와 용맹을 겸비해 위엄을 떨치고 있다.
바로 얼마 전에도 그랬다. 국가 대사였던 거대한 전쟁 역시 그들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적은 완전히 힘을 잃었으며 진의 이름은 더욱 세상을 떨게 하리라.
하지만 악명 높은 정복군주에게 암살 시도는 꼬리표처럼 따라붙고 또한 끊이지 않는 법. 아무리 백전에 백승을 거듭한 용맹한 군주라도, 단 한 명의 은밀한 칼날에 목숨을 잃을 정도로 인간의 목숨은 허약하다.
최근의 정치적 문제도 있다. 왕의 외삼촌이자, 병권을 갖고 있던 권신을 정치적으로 숙청한 상황이다. 때문에 평소의 배에 가까운 5천 명의 갑사가 드넓은 함양 궁성을 엄중히 둘러싸고 있다.
그러나 이 많은 병사들도, 함양궁 내전(內殿)인 가위전(可謂殿)의 기와지붕 위에 올라탄 그림자를 발견해내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 그림자는, 여느 자객이 그렇듯 짐수레에 숨거나 월담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하늘에서 떨어졌다.
또한 자객이 지닐만한 날카로운 단검이나, 납을 뭉친 철퇴를 갖고 있지도 않은 그야말로 맨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너무나도 위험하다.
내전을 포위하다 싶을 정도로 둘러싸 침묵을 지키는 갑사의 무리. 이 살벌한 집단에도 자객은 비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 열배가 모여도 그에게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다. 마음 같아서는 정면으로 도전하여 그들을 모두 쳐 죽이고, 또한 그 피를 함양궁의 모든 담벼락에 발라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를 악문 검은 그림자는 어느새 지붕에서 사라졌다.
내궁의 가장 깊숙한 곳.
여인의 급박한 신음소리가 정적을 타고 흐르고 있다. 열락과 쾌락이 뒤섞인 이 교성(嬌聲)은, 최근 왕의 극진한 총애를 받는 후궁이 내지르는 것이다.
“하악...!”
감히 옥체를 타고 앉아 있지만 이는 절대 무례가 아니다. 연로한 왕은 그녀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구름처럼 풍성한 머리카락과 백설 같은 피부를 가진 아름다운 그녀. 왕과는 두 배가 넘는 나이 차가 있지만, 후궁 중에서는 더 어린 여자도 있었다.
연(燕)에서 왔다 하여 연희(燕姬)라고 불리지만 본래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연의 대부의 여식이며, 두려움을 담은 조공으로 바쳐진 여인인 것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지금, 이 위대한 왕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다는 것뿐이다.
검은 머리카락이 땀과 열기로 젖고, 눈에 띄게 아름다운 얼굴은 미묘하게 일그러져 쾌락과 흥분에 떨며, 탄력이 넘치는 육체가 흐느적거리는 이때가, 늙은 왕에게 있어 잠시나마 여러 근심을 잊게 하는 때였다.
처음에는 수줍은 듯 품에 안기고, 이내 못 이기는 척 황송한 척 상위(上位)를 취하고, 그 표정과 눈동자가 차츰 풀려가는 것을 왕은 즐겼다.
“아아, 전하...! 흐읍...! 제게도...! 아이를...! 아흑...!”
아이라...
연희야, 너는 아느냐.
왕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칼 위에서 맨발로 춤을 추는 것보다도 위태하다는 것을.
만약 아이까지 갖는다면, 너는 그것만으로도 여러 후궁의 표적이 될 것을, 아직은 어려서 알지 못하려느냐.
내심 혀를 차면서도 왕은 그녀의 요청을 거부하지 않았다. 곧이어 자신의 가슴 위로 최후의 비명과 함께 쓰러질 그녀를 위해서, 아직 완전히 늙지 않은 몸을 추슬러 그녀의 허리를 잡고 쾌속함을 더한다.
이윽고 왕의 귓가에는 몇 번이고 들어서 익숙한, 하지만 언제 들어도 조금씩은 새로운 헐떡임이 몇 번 이어진다.
마침내 왕이 남자의 증거를 안에 뿌리자 그녀는 무너지듯 왕에게 안겼다. 잠시 숨을 고른 그녀는 고개를 들어 생긋 웃으면서, 지금껏 내질렀던 교성에 뒤지지 않는 교태를 부릴 것이다.
하지만 연희는 그대로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잠든 듯 움직이지 않는다. 아직 자신의 일부가 그녀의 안에 남아 있지만, 왕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물었다.
“그렇게 힘들었느냐...?”
하지만 그녀는 대답이 없다. 대신...
“아니, 별로....”
왕은 무척이나 놀라고 말았다.
항상 애교에 가득 찼던 그녀의 목소리가 아닌, 아직 젊은 남자의 목소리다.
왕이 흠칫 몸을 일으키려는 사이 상당한 무게가 더해졌다. 연희의 위에 다시 사람이 올라타, 어느덧 수도(手刀)가 그의 목에 닿는다.
“웬... 놈이냐...?”
왕은 신음했다.
정적(正嫡)을 처리할 때에도, 전장에서 병사들을 호령할 때에도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공포를 느끼지 않을 이, 그 누가 있으랴...!
연희의 풍성한 머리카락이 흘러내린 어깨 너머로, 얼굴이 불쑥 나타남에 왕은 다시 한 번 놀랐다.
남자임은 분명하며 때문에 미모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깨끗한 피부와 깎은 듯 유려한 얼굴선과 짙은 눈썹.
그는, 자객은 아직 소년임에도 용모가 범상치 않다.
“왕쯤 되시면 말이야...”
회색이 조금 섞인 검정색 눈동자가 어이없이 웃었다.
“웬 놈이냐... 그런 흔해빠진 말은 하지 않기를 기대했건만. ...당연히 자객이잖아?”
“...그건 그렇군...”
왕은 낮은 한숨으로 두려움을 빠르게 몰아냈다.
“왜 고(孤)를 죽이려 하나?”
“목숨 값.”
“누구의 목숨 값이냐...?”
“네가 죽인 40만 병사.”
소년의 웃던 눈매가 급격히 일그러졌다.
“그 수많은 원한과 고통을, 이제 네 목숨으로 받을 것이다. 그 누굴 불러도, 설령 너의 모든 군대가 덤벼도, 그게 네 목숨을 구해줄 수는 없을 거다.”
왕도 직감했다. 어쩐지 이상하지 않다.
수만의 군대를 우습게 뚫고 온 자다.
“이름은 무엇이냐.”
“알아서 뭐하려고?”
“일국, 그리고 장차 천하를 통일할 왕의 목을 가져갈 자다. 역사에 남지 않겠나...”
“남으면 곤란하지. 남아서도 안 되고. 그리고 천하... 통일?”
소년은 쓰게, 낮게 웃었다.
“하기야 너희 세계는 좁지. 하지만 그 좁은 세계를 얻기 위해 얼마만큼의 피가 흘렀는지, 넌 알고 있을까?”
“...40만 병사라고 했었지. 그럼 녀석이 한 일을 말하는가. ...너는 죽은 이들과 무슨 관계냐...?”
“관계? ...사실 별 것 없어. 굳이 말하자면, 같이 밥을 먹고 술을 마신 사이 정도...?”
“그 정도로 고에게 원한을 품었다...? 무언가 대의(大義)를 갖춘 자객은 아닌가 보군.”
“무슨 상관이냐. 뭔가 거창한 뜻을 달아야 사람의 목숨이 귀해진다는 거냐.”
소년의 어금니가 살짝 갈렸다.
“투항한 자를 죽이는 것에 무슨 대의를 주장할지 모르지만... 내게도 대의는 있다. 그것은... 지금 네놈을 죽이면 장차 수많은 목숨이 산다는 것이지...!”
“뭐냐. 그러면 결과는 같은 것이지 않은가...”
“무슨 소리냐...?”
“고가 살아 있어도 많은 이들이 산다. 그것이야말로 고의 대의다.”
“노망이라도 들었나?”
소년의 입가에 실소가 지어졌다.
“궤변을 늘어놓아 늙은 목숨을 연명하려 든다면...”
“틀렸다. 고에게도 자부심과 수치심은 있어. 다만, 듣지 않는다면 굳이 이해시킬 생각은 없다.”
왕은 목을 길게 늘어뜨렸다.
“자, 죽여라.”
몇 년 더 있었다면 즉위 50년을 바라보았겠지만, 여기서 10년을 더 보탠대도 줄인대도 어떠리.
천하를 통일한다는 젊었던 꿈도, 이렇게 덧없이 사라질 줄 알았다면 꾸지 않았을까.
아니다.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왕은 눈을 감았다.
하지만, 조르든지 쳐오든지 해야 할 손은 움직이지 않는다. 대신 소년은 낮게 웃었다.
“제법 배짱은 있군. 과연 왕이란 이름값은 한다는 건가. ...그러면, 네놈의 그 대의가 과연 어디에 있는지, 지금부터 말해봐라. ...물론,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죽이겠다.”
어디서 배워먹은 손버릇인지, 소년은 기절한 연희의 엉덩이를 찰싹 쳤다.
“그러자면 이 여자는 방해겠지...”
소년, 아니 칼스 왕자(王子)는 연희의 허리를 잡아 침상 밖으로 미끄러뜨렸다. 이어 이불을 던져 그녀의 몸을 덮어준 그는 침상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옷 입을 시간은 주지. ...진왕(秦王).”
“...와, 뻔뻔해. 그럼 남의 침실에 뛰어 들어갔단 말인가요? 그것도 왕의 침실에?”
루이코는 어이없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때는 그랬지. 아니면 대놓고 습격하련?”
난잡하게 누운 칼스 황제는, 특유의 장난기어린 눈매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그들의 거주 문화는 입식(立式)과 좌식(坐式)이 혼용된다. 편하게 쉬는 공간은 좌식, 공적인 공간은 입식인 편이 많다. 그가 있는 곳도 푹신한 카펫이 깔려, 그냥 뒹굴어도 되도록 격식 없는 북궁 거실의 일부다.
하지만 일국의 군주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세는 난잡하고, 그것도 모자라 황후의 무릎까지 베고 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조만간 차비 책봉을 받을 루이코가 앉아 있었다.
저녁을 물린 후 티타임. 하지만 그의 난잡함을 세리사도 루이코도 탓하지 않았다. 지금의 그는 게으름을 피울 자격이 있다.
지난 전쟁 동안 그가 잠 못 이룬 밤은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겨우 찾아온 약간의 여유다.
아샤르의 대표로 지구로 내려간 우현왕. 그녀를 배웅한 황제가 모처럼 한 잔의 차를 제안했다. 그동안 못다 한 가정사도 조금은 돌보고 싶었을까.
대화의 시작은 단순했으나 차츰 화제는 두 이성인, 이제는 루이코의 새로운 가족의 지난 이야기로 옮아갔다.
그리고 과거, 황제가 진심으로 남을 죽이려 들었던 때가 있었다는, 바로 이 이야기에 이르렀다.
“내 나이 열 셋. 왕세자 책봉을 받기 전이었어. 하지만 상급 학교에 진학하려면 2년이나 남아서... 그 동안 말로만 듣던 지상에 가보자고 생각했지. 그리고 생각해보면 그 때 그 일은, 바로 오늘의 나를 만든 큰 계기가 아니었나 싶어...”
황제는 아련히 웃었다.
“그 때가... 지금 기준으로 기원전 260년... 이었지.”
하나의 만남이 다음 만남을 낳고, 그 만남이 이어져 인연을 만들고, 그 인연이 짧은 기쁨과 긴 슬픔을 안겨주고, 또 그 모든 것이 한 소년을 어른으로 성장하게 만들었던...
그 때 그 시절,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추억의 강물 따라 흘러내렸다.
수고하셨어요.
- 작가의말
그림은 이번 권의 무대가 될, 기원전 260년 경의 중국 전국시대의 세력도입니다. 참고하시면 도움이 되실 듯 합니다.
...근데 도입부가 좀 야시시 한가요, 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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