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장. 사람의 길, 왕의 길. (3)
한 권이 끝날 때, 가슴에 남는 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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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프람. 나는 글자를 알지 못해. 이 글도 군리 어르신이 대신 써 준 거야. 알다시피 말도 잘 하지 못해. 그래서 지금 심정을 제대로 남길 수 있을지 모르겠어.’
여전히 서두가 길구나. 칼스는 흡사 그의 음성을 들은 것처럼, 또한 그가 아직도 살아있는 것처럼 핀잔을 주었다. 녀석아...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잖아...
‘나는 항상 프람이 부러웠어. 또한 항상 느꼈어. 프람은 누군가의 위에 있는 사람이다. 나와는 다르다. 타고난 강함과 당당함이 있다. 난 항상 그렇게 느꼈어.’
너무 고평가가 아닐까. 난... 그렇게 강하지 않았어.
‘하지만 너는 나를 다르게 대하지 않았어. 나를 살려줬고 샹을 구해줬고 많은 것을 주었어. 그래서 나는 기뻤어. 생애 처음으로 친구를 얻었던 거야.‘
아아, 나도 그랬다... 너만 그런 것이 아니야...
‘프람이 떠난 것은 실망해서겠지. 왜 실망했는지, 솔직히 전부 알 수는 없어. 내가 모르는, 프람이 소중히 여기며 지키고픈 무언가가 있었을 거라고 짐작만 했어.
하지만 나도 지키고 싶은 것이 있었어. 나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사실은 높은 이들을 위해 태어났기에, 언젠가 적의 칼날이나 고관대작의 매질 아래 죽을 거고, 그 죽음 역시 아무 것도 아닌 걸로 기억될 거야. ...하지만 그건 싫었어. 세상에 내가 태어난 이유가, 고작 그것밖에 안 된다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었어.
우리는 두려운 거야. 왜 태어났는지, 어떻게 살아갈 건지, 언제 죽을 것인지, 그리고 무엇으로 기억될지. 그 모든 것이 두려운 거야. 그래서 남을 돌볼 여유가 없었어. 그래서 나는 프람처럼 강하지도, 똑똑하지도, 여유롭지도 않아. 그저 내 앞길과 샹만을 생각했었어. 나 이외에도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이들이 널렸어. 그들이 어찌 다른 이들을 사람으로 생각해줄 여유가 있겠어. 스스로가 이미 사람이 아닌데.’
칼스는 적군에 뛰어들어서 창을 휘둘렀던 자신을 상기했다. 동료를 지킨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 이전에 자신조차도 사람을 죽인다는 자각을 하지 못했다.
동료라 칭하기도 애매한 사람들을 위해서 지나치게 용맹만 과시한 것은 아닌가, 그런 옅은 후회는 군영에 돌아와서야 할 수 있었다. 이 점을 생각하자 후회는 한층 더했다.
죽음에 대한 위협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자신조차 그러했는데, 그렇지 못한 이들이 자신처럼 생각하지 않았다 탓할 수가 있을까. 그 잔혹함에 분노하기에 앞서, 전쟁에 나서는 힘없는 민초들의 심정을, 자신은 얼마나 헤아렸을까.
그들에게는 여유도 없고 만행을 막을 힘도 없다. 무력한 자에게 불합리한 책임을 요구한 셈이다.
‘먼 옛날, 요(堯)와 순(舜)이 다스렸다는 시대가 있었더랬지. 위도 아래도 없고, 가난하지만 서로 나누고, 그렇게 다들 행복하게 살았던 시대가 있었다고 해. 그래서 많은 이들이 그 때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고 해. 좋았던 시절이라고... 태평성대였다고.
하지만 그런 시절을 다시 만들어낼, 그런 큰 꿈과 힘은 나에게는 없어. 그저 살고 싶고... 굶주리지 않고 싶고, 사랑하는 이들에게서 떨어지지 않길 바랄 뿐이야. 다른 이의 피가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너무나 소박한 이 소망조차 이룰 수 없는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이 미약한 힘으로는 정말 어쩔 수가 없는 거야.
그래서 프람의 옆에 있고 싶었어. 그 옆에서 같은 길을 걷고 싶었어. 하지만 널 언제까지나 힘들게 할 수도 없는 거야. 이미 베푼 것이 크잖아. 그러니 이제는 나 혼자 서지 않으면 안 되고, 그것이 내가 동생으로 키워왔지만, 또한 남모르게 애정을 감추어왔던 샹도 위하는 길이야.
그러니 언젠가는, 나는 프람과는 다른 길을 걸을 것이란 걸 체감하고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어. 프람을 따라 간신히 얻은 지위를 버리고 그냥 돌아간다면, 나와 샹은 또 타인에게 상처를 받으면서 살아가야 해. 그리고 프람이 남기고 간 이들, 지금껏 내 대신 죽은 이들, 특히 무참히 죽은 지오를 볼 면목이 없어.
나도 내 힘으로 살고 싶었어. 프람만큼은 아니지만, 이 어두운 세상에서 스스로 빛나면서 당당히 서고 싶었어. 그래서 고집을 피웠어. 이것이 너를 아프게 했다면, 나중에 혹시라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한 잔 술을 사고 고개 숙여 사과할게. 나는 정말 어쩔 수가 없었어.’
그건 안다. 안다고 자식아...!
칼스는 내심 몇 번이고 외쳤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아는, 그 차이는 너무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좀 더 빨랐더라면 너는 죽지 않을 수도 있었다. 듣자니 30만의 조군이 학살당한 것은 불과 6일 전의 일이다.
힘없는 민초(民草)로 태어나 희망 없는 미래에 두려워하면서 살다가, 간신히 한 번 잡은 기회에 죽자 사자 매달리는 그의 마음을, 나는 그저 어리석다 생각했었다.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난 나는 그 불행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네가 단 한번, 나를 이해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떠나버렸다.
내가 누굴 비난한단 말인가. 너조차 품지 못했는데...
‘...상장군의 명령으로 나는 내일 선봉에 서. 운 좋게 살아간다면, 나와 샹의 미래에도 빛은 조금은 보이겠지. 하지만 내가 죽는다면, 그리고 이 글을 프람이 볼 수 있다면, 지금까지 부탁만 했고 받기만 했던 염치없는 나이지만, 한 번만 더 부탁을 해도 될까 싶어.
...만약 내가 돌아가지 못한다면, 프람에게 샹을 부탁하고 싶어. 단 한 번도 배불리 먹지 못하고, 어쩌다 간신히 먹는 거친 밥조차도 서러운 눈치를 보아야 하고, 조금 예쁘게 태어났다고 갖은 위험을 겪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행복하지 못한, 나보다도 더 불행한 아이야. 나는 그걸 알기에, 내 죽음에 흘려줄 그 눈물을... 나는 도저히 볼 수가 없어.
그러니 프람이 건져주길 바래. 배고픔에서, 위험에서, 무엇보다 절망에서 그 아이를 건져주길 바래.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프람의 나라에 데리고 가줬으면 좋겠어. 말로만 들어도 황홀한, 배고프지 않고 아프지 않고, 누구나 동등하게 행복할 수 있다는, 정말 단 하루라도 그 속에서 살아보고 싶은 그런 꿈의 나라로...
떠나던 날 너는, 그동안 즐거웠다고 했지. 나도 즐거웠어. 짧은 인생을 살면서 항상 괴로웠지만 다행히 너를 만났고, 그러니 지금부터는 그 어느 순간에도 행복할 거야. 이 말은 꼭 하고 싶었어.
...안녕히. 건강하길. 행복하길. ...유일한 내 친구.‘
작은 죽간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리고 췐의 손으로 적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자신의 손에 꼭 전해지길 바라면서도, 또한 전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그 마음은 알 것 같았다.
이 글이 그의 손에 들어온다는 것은 췐의 죽음. 그러니 이 편지 대신, 언젠가 직접 얼굴을 맞대고 한잔 술을 나누면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칼스는 깊이, 깊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아. 췐. 내 친구여. 내가 너를 구했지만, 또 내가 너를 죽게 만든 셈이다. 너를 지켜달라는 샹과의 약속도 어겼으며, 장래의 내 군주에 어울리는 인간이 되겠다는... 나 자신과의 약속도 저버린 셈이다.
칼스는 슬퍼하면서도 격노했다. 그의 죽음에는 자신도 큰 책임이 있지만, 또한 책임을 물어야 할 자가 있다.
이 잔혹한 명령을 내렸을 적의 장수. ...아니지, 놈을 죽여 봐야 또 다른 자가 나올 뿐이다.
더욱 큰 책임을 지울 자는 따로 있다. 이 수많은 유혈을 조장하고 이 엄청난 비극을 만들어낸 이다.
그 장수에게 묻고 싶은 질문은 이미 정해졌었다. 이제는 더욱 위, 바로 진의 왕에게 물을 차례다.
이 모두를 그렇게 비참한 죽음에 몰아넣어야 할 정도로, 너에게는 그렇게 승리가 중요했던 것이냐.
항복한 인간을 죽이고 산 인간을 파묻는 그런 짓을 하고도, 너는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않았던 것이더냐.
그런 이들의 피와 눈물과 비명을 밟고, 너는 대체 무엇을 얻으려 하는 것이냐...!
칼스는 죽간을 말면서 일어섰다.
“지난 사정과 묻고 싶은 질문은 말했으니... 이제 대답해라...!”
칼스의 으름장. 끄덕인 왕은 쓰게 웃었다.
“무안군 그 자가 고에게 쓸데없는 빚을 남긴 셈이군... 그렇다면 무안군을 내버려두고 고에게 직접 온 이유는... 그것뿐인가?”
칼스는 발끈했다.
“그것뿐이라니... 더 이상의 이유가 필요한가?”
“필요하지. 왜냐면 고는 지금, 고의 신하들과도 한 적이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하들은 이해하려 들지도 않고 이해할 수 없어. 그저 봉록을 받아먹고 땅을 하사받아 제후가 되는 것에 욕심이 있을 뿐이지, 천하 만민(天下萬民)의 안위에는 관심이 없거든.”
“...네 신하 중에 그런 이가 없다는 점은 동감하지...”
특히 이번에 이 학살을 저지른 그 백기 자식, 왕을 죽이고 녀석도 죽인다. 반드시 죽인다.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인가.”
칼스는 으르렁댔지만, 애송이의 감정 따위는 가렵지도 않다는 듯 왕은 흰 수염 사이로 웃음을 흘렸다.
“묻겠다. 그대는 과연 천하 만민의 안위에 관심이 있는 자인가? 그렇다면 고는 솔직히 이야기하겠다. 하지만 개인적인 원한으로 고를 죽이고자 온 것이라면, 그냥 곱게 그대의 손에 죽는 것이 낫다.”
이 왕을 과소평가했나. 칼스는 조금 움츠려들었다.
패왕(覇王)이라 칭할 수 있는 이 위압감은, 그를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자신을 밀어내는 경륜이다.
“대답해라. 자객이여.”
“그렇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렇다.”
“그렇다면 이야기를 들려주지.”
왕은 가위전의 벽에 붙은 휘장을 눈짓했다.
“저걸 거둬 보거라.”
누구에게 명령인가 싶었지만 또한 궁금하기도 했다. 연희를 밟지 않도록 조심해서 내려온 칼스는 휘장을 걷는 끈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놀랐다.
“이것은...?!”
지도다. 물론 지상의 측량인지라 축소된 부분도 있고 과장된 부분도 있지만, 함양을 중심으로 북으로는 오르도스, 동으로는 제, 남으로는 초를 그려 넣은 천하도(天下圖)다.
왕의 손가락이 지도에 뻗었다.
“장평이 저 즈음이었지. 여기서 이천 리. 기마로 보름이 채 걸리지 않는 그런 거리다. 그것을 두 번만 더 가면, 동쪽 제의 바다에 도달한다.”
“그것과 이 지도가 무슨 상관...”
칼스의 말을 자르듯이 진왕은 말을 이었다.
“더불어 동남으로 같은 거리를 가면 초나라 수춘에 도달하고, 동북으로 역시 같은 거리를 가면 연나라 계성에 도달한다. 우리가 아는 천하는 고작 이 정도다.”
“그래서, 그 좁은 세상에서도 이렇게나 피를 흘리는 그대들, 특히 너는... 자신이 어리석다 생각해 본 적은 없단 말이냐?”
“아아, 그래... 어리석지.”
“알면서도 그리한단 말인가?”
“아니까 그리하는 것이다.”
이건 무슨 말인가. 의문을 담아 재촉하는 그의 눈빛에 왕은 다시 입을 열었다.
“고는 말일세... 이 좁은 세상에서 왜 이렇게 아등바등 싸우는가... 그것을 그대보다는 좀 더 일찍 생각했다네. ...왕위에 오르기 전에 고는 초의 볼모로 있었지. 볼모란 어떤 것인지 아는가?”
“인질 아닌가?”
“그렇지. 볼모란 것은, 원래 각자에게 소중한 이를 보내 우호를 확인하는 것. 하지만 지금에 있어서는 죽어도 상관없는 사람을 보내는 것이다. 고에게 손자가 되는 놈이 지금 조나라에도 가 있다. ...아마 이인(異人)이란 녀석이지.”
왕에게는 태자로 안국군(安國君)이 있다. 진왕 스스로도 서자 출신이었지만, 안국군에게도 수많은 첩이 있고 이인은 그 서자이다.
왕족 중에서도 가장 떨거지라, 가장 격전이 예상되는 조나라에 볼모로 보냈었고 지금 한단에 거주하고 있다.
“어릴 적 떠났기에, 이인의 얼굴은 나도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다. 올해 열아홉인가, 스물쯤 되었을 걸세.”
“당신 아들은 무슨 여자가 그렇게 많고, 또 얼마나 낳았기에 할아버지가 손자 얼굴도 기억 못하는가. 또 그 혈육을 죽을 곳으로 보내? 무슨 할아버지가 그런가?”
“그러게 말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고가 부왕에 의해 볼모로 적국에 가고, 이번엔 할아버지가 된 고가 손자를 죽을 곳으로 보낸다. 아무리 서자라도 고의 손자인데... 이번 싸움 탓에, 아마 지금 그 아이의 목숨은 바람 앞의 촛불이겠지.”
“그럼 왜 인질 따위로 보낸 것인가? 손자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땅이 그렇게 욕심나더냐?”
만약 그렇다면 그것만으로도 칼스의 마음에는 들지 않는다. 대답 여하에 따라서는 천하고 역사고, 황제의 칙명이고 나발이고 즉각 왕을 죽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왕은 쓴 입맛을 다셨다.
“이인을 조나라에 보낸 것은 신하들의 뜻이다. 그들이야 타국을 침략하고 땅을 빼앗아야, 그 공에 맞추어 땅을 얻을 수 있으니 당연한 것이지. 하지만 손자의 죽음을 감수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고의 의지는 좀 더 높은 곳에 있었다네. 들어보겠는가?”
“...말하라.”
“우리는 지난 수백 년 동안 싸워왔고 서로를 죽여 댔다. 원래는 주(周)의 봉신(封臣)에 불과했지만, 차츰 각자의 세력을 키워 다투기 시작했지.”
“그건 알고 있어.”
“하지만 이곳 진의 말은 북쪽 멀리 연에서 통하고, 동쪽 멀리 제의 귤과 남쪽 초의 포모(包茅)는 서로의 제사에 쓰인다. 한나라의 사람이 위나라에 살아도 구분할 수 없다. 나라가 백성을 가른 것이지만 그 차이는 없다. 그런데 왜 싸우고 다투는 난세로 접어든 것인가?”
“그건 네놈들 위정자들의 욕심 때문이 아닌가? 한 치 땅을 얻기 위해 만 명의 유골을 땅에 묻는... 지금의 전쟁은 그런 것이 아닌가?”
“맞다. 그렇다면 그 욕심을 부릴 인간을 줄이고, 한 치 땅을 얻을 필요 그 자체를 없앤다면, 장차 그런 전쟁은 없어지지 않겠는가?”
진왕은 낮게 웃었다. 묘한 자신감이 표정에 드러난다. 영문 모를 압도감을 느낀 칼스가 나지막이 외쳤다.
“그래서 널 죽이러 온 것이다. 조각 땅에 욕심을 부리고 있는 네가 죽는다면, 앞으로의 전장에서 죽을 인간이 그만큼 더 산다는 거야.”
“그런가. 그럼 죽겠군. 제대로 울어줄 이는 없는 듯 하지만...”
낮은 한숨이 진왕에게서 쏟아진다.
“고는 외로웠다. 왕이라고 하지만 믿을 이는 아무도 없다. 믿는 그 순간에 고의 목숨도 같이 없어진다. 하소연할 사람도 없다. 정치란 이름으로 갖은 술수가 허용된다. 고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그대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아냐. 알 것 같군.”
그것만은 칼스도 수긍했다. 그들의 정치판이라고 해서 그리 깨끗한 것만은 아니다.
누워버린 황제에 팔팔한 현왕 둘, 후계자지만 자질을 의심받는 어리고 어린 황녀, 그리고 보기 드문 재능을 타고나고 현재 유일한 차세대 남성 황족인 자신.
장래의 정치적 혼란은 예정되어 있을지 모른다.
“고는 이미 왕이다. 모든 것을 누리고 있지. 궁궐 안에는 온갖 산해진미가 그득히 쌓여있고, 아름다운 여인들이 침상에서 갖은 교태를 부리며, 모든 인간이 발치에 엎드려 감히 성은을 청한다. 천하를 통일해도 그 자체는 더 나아지진 않아. 오히려 전쟁을 멈추면 손자를 인질로 보내는 것도, 백성들을 죽음으로 모는 짓도 하지 않고... 그저 이 궁궐 안에서 죽을 때까지 편하게 살 수 있는 것이지. 이건 이해하겠는가?”
“그럼 그렇게 하지 그래? 네가 전쟁통을 만드는 덕에, 저 장평에서 백골이 된 원혼이 얼마인지나 아는 것인가? 지금껏 희생된 사람들의 피와 눈물을 아는가 말이다! 너는 대체 뭘 위해서 이런 전쟁을 하는가?!”
“소리 지르지 말라. 시위(侍衛)가 올 수도 있으니...”
도리어 왕이 주의를 주었다. 이젠 왕이 오히려 즐기고 있는 인상까지 준다. 이런 이야기를 남과 최초로 나눈다는 것은 그도 즐거운 걸까.
“그대의 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지.”
침상 위의 왕은 자세를 바로 했다. 늙은 용안에는 젊은 시절의 빛이 다시 돌아온 듯 생기가 넘쳤다.
“고가 전쟁을 하는 이유는, 바로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다. 천하를 통일하고 땅을 통합한다. 무기 대신 농기구를 만들고, 뭇 사졸들을 농민과 상인으로 다시 돌려보내기 위함이다.”
“뭐라....?”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 하지만 칼스는 웃지 못했다. 그만큼 진왕의 표정은 엄숙하고 위엄이 있었다.
“지금의 시대에 고는 폭군으로 원망을 받아도, 고의 아들과 손자의 시대에는 그들이 성군으로 칭송을 받길 원한다. 오늘의 칼을 잡았던 이들이 내일은 쟁기를 잡고, 오늘 병법을 보며 군략을 짜내던 이들이 내일은 백성을 위한 책략을 고민하길 바란다. 그러기 위한 전쟁이자 통일이니라.”
“...지금 흘리는 피는 어떻게 하고? 게다가... 당신이 아무리 강대한 권력을 지닌 왕이라도, 그런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장평의 일은 백기 그 놈의 독단이다. 승전한 자에게 당장 책임을 물을 수는 없어도, 언젠가 반드시 이 죗값은 묻고 말 것이다. 고의 백성이 될 수도 있었던 30만의 사람을 그냥 묻어버린 셈이니. 그리고...”
왕은 무릎위에 올린 손을 조금 움켜쥔다.
“지금 흘린 피에 고가 가치를 굳이 부여하자면, 싸움을 멈추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서로가 말이 통하고 글이 통하고 생각이 통하는 천하 만민이, 더는 갈라져 싸우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 뭉쳐야 살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을... 지금껏 흘린 피로 언젠가는 갖기를 원한다. 그러니 지금의 유혈에 대한 비난과 죄는, 고가 저승에 기꺼이 안고 갈 것이니라. 이것이 고의 생각. 일신의 깨끗함과 편안함을 노리는 사람의 길과는 다른, 고가 생각하는 왕의 길이노라.”
칼스는 부지불식 입술을 깨물었다. 물론 왕이 말하는 길은 잔혹하다. 그 피에 대한 책임을 제대로 지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땅의 전쟁을 직접 겪고 그 비참함을 몸소 맛본 그는... 진왕의 말이 가슴에 닿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점을 탓해 그대가 고를 죽인다면, 이는 천명(天命)이 고에게 닿지 않음이겠지. 그러니 할 수 없는 일. ...자, 이제 고의 처분을 그대에게 맡기노라.”
칼스는 오래 고민했다. 그리고 하나의 결론을 얻었다.
가슴을 내민 왕을 잠시 바라보던 그는, 결국 조금은 누그러진 말투로 입을 열었다.
“진왕... 그대는 죽이지 않겠다.”
칼스는 스스로에게도 다짐하듯 단호하게 말했다.
“다만 그대가 밟게 되는 그 왕의 길이, 그대의 욕심으로 다시 사람의 길로 돌아와 지금껏 흘린 피를 헛되게 한다면, 행여 그릇된 피를 다시 흘리게 한다면... 나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대를 죽일 것이다. 알겠는가?”
“그대가 그렇게 말하며 고를 죽이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네. 왜냐하면...”
별로 놀라지도 않은 왕이 무척 즐겁게 웃었다.
“그대에게서도 고와 같은 정도의 그릇은 느껴지니. 또한 고가 말한 길을 이해할 정도의 마음은 있다고 생각되었으니. 오히려, 잠시 밥을 먹고 술을 마신 정도의 사이를 위해 천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오다니. 고가 그렇게 하지 못함에 비추어, 어쩌면 그대는 고를 능가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대를 온전히는 인정하지 않았어. 그러니 지켜보겠다. 나는 젊은 만큼 보다 오래 살아. 오늘의 내 칼날은 피했지만, 내일은 또 모르지...”
“명심하겠네. 자네를 만난 일도 비밀로 하겠다. ...돌아갈 방법은 있는가? 없다면 고가 손을 써 줄 것이다.”
이 자의 배포도 보통은 아니다. 자신을 죽이러 온 자에게 왕의 길을 설파하고 또한 돌아가는 길을 봐주려한다. 길게 대화한 것은 아니지만 그 그릇의 크기는 범상치 않다.
“필요 없다. ...올 때만큼 조용히 나가지.”
그가 나가자 왕은 소리 없이 일어나, 아직 정신을 잃고 있는 연희의 몸을 안아들어 침상에 눕혔다.
그 옆에 앉은 왕은 생각에 잠겼다.
저 자는 누구일까. 아니다. 그게 중요하진 않다. 오히려 그는 아마도 나의 대의를 조금이나마 이해한, 내 인생 최초로 만난 인간일지도 모른다.
지금은 이렇게 만났지만 언젠가 다시 만난다면, 그 때는 술 한 잔 나누고 싶군.
...하지만 그런 일은 없는 편이 좋다.
잘 가게. 자객이여. 그리고 지켜보게나.
그린 듯 아름다운 눈썹이 흔들리는, 깨어나려는 연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왕은 깊은 상념에 빠졌다.
칼스는 함양궁을 빠져나오자마자 하늘로 비상했다.
돈을 주어 인근에 맡긴, 지치고 병든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자리를 비운 시간은 그저 잠깐의 밤 산책에 불과한 시간이겠지만, 그 짧은 동안에도 자신은 너무나 많은 경험을 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보낸 모든 시간에 그는 감사했다.
나는 재능에 자신이 있었고 모든 것을 이겨 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나는, 재능에 도취해서 타인의 생각과 입장을 이해하지 못했다.
대의를 위하고 세리사를 성군으로 만든답시고, 나보다 못한 이들을 그저 어리석고 허약하고 때로는 악하다고 매도하며, 그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힘든 길로 밀어 넣었을지 모르는... 어쩌면 조괄 같은 그런 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조괄의 재능은 만인에게 칭송받을 정도로 뛰어났지만, 그 결과는 결국 어떠했던가.
그리고 진왕의 말. 천하를 안정시키기 위한 전쟁, 피를 멈추게 하기 위한 유혈, 그것 모두가 궤변이고 자기만족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말이 어쩌면 틀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오랜 전쟁과 고통에 지친 모두를 이렇게라도 통합할 수 있다면, 비록 서로의 의지를 모으지 못할지언정 이런 비극만은 줄여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또한 저들의 역사는 저들의 것이며, 자신이 진왕이라 해도 그렇게 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차마 그를 죽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아직 옅은 후회감도 들었지만, 그건 미련일 뿐일 것이다.
췐. 나는 네 복수를 하지 못했어. 아니, 하지 않았어. 왜냐하면... 그를 죽여 혼란의 시대가 더 길어진다면, 어쩌면 또 다른 네가 더 나올지도 모르기 때문이야.
네 복수를 한다 해도 네가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야. 오히려 그를 살려두고, 앞으로 그가 자신이 말하는 것을 지킬 것인지... 조금이나마 살펴보는 것이 올바른 길일 지도 몰라. 그래서 하지 않았어.
너는 이런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곳은 언제쯤이 되어야 진왕, 그가 말한 대로 될까? 같은 말을 쓰고 관습이 같은 너의 동족들이, 스스로를 하나라고 인정하고 피로 다투지 않게 되는 날이 올까?
10년? 100년? ...아니면 영원히 오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지켜보고 싶다.
오늘 네가 흘린 피가, 네가 그토록 바랬던, 네 아이는 아니지만 네 동족의 아이들에게는 헛되지 않아, 부디 그 아이들은 오늘의 전란과 비극을 다시는 겪지 않기를...
네가 그토록 바랬던, 굶주림과 그릇된 죽음이 없는 평화의 세상을...
모두가 살아 나가기를...
칼스는 그런 세상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그로부터 11년 후, 그는 내전에서 살아남은 두 황족과 함께 아샤르의 문을 일시적으로 닫고, 스스로는 지구인의 삶 속으로 녹아 들어갔다.
하지만 그와 췐이 가졌던 바람은 조금이나마 이루어졌다. 칼스가 노렸던 소양왕(昭襄王) 사후 5년 후, 소양왕의 증손자이자 이인의 아들인 정(政)이 13세의 나이로 진의 국왕이 되었고, 후대에 진시황제(秦始皇帝)라 불린 그의 치세 도중 중국은 통일되었다.
비록 통일 왕조 진나라는 15년 만에 무너져 천하는 새로운 영웅호걸이 겨루는 각축장으로 변했지만, 그 혼란을 잠재운 한(漢)이 건국되어 중국을 하나로 묶었다.
그리고 장평대전이 있은 지 80년 후. 한나라의 두 황제, 문제와 경제는 이른바 문경지치(文景之治)라고 불리는 태평성대를 열었다.
창고에는 곡식이 썩어나고, 길거리에 돈이 떨어져도 줍지 않았으며, 백성들은 노새를 타고 다니며 태평가를 불렀다. 그 기간은 비록 그리 길지 않았지만, 그들이 전설로 남겨 그리워하던 요순시대처럼, 후세에 오랫동안 칭송받는 아름다운 시대로 역사에 분명히 남았다.
비록 그 이후로 그들은 수없는 분열을 반복했지만, 그 때마다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 하나로 다시 뭉쳤다.
그들은 더 이상 진나라와 조나라 사람이 아니라, 중국이라는 나라와 한(漢)이라는 하나의 종족으로 오랫동안 묶였다.
수고하셨어요.
- 작가의말
포모 (包茅) : 종묘 제사에 쓰는 술을 거르기 위한 천입니다. 초나라 특산품이죠.
뒷정리로 에필로그 및 후기 남았습니다. 그건 내일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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