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장. 대타협. (2)
한 권이 끝날 때, 가슴에 남는 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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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9월 19일 회의석상에서 나타난 황제. 그 옥음(玉音)은 여러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정체된 전선을 내버려두고 달려온 사령관들도, 황제를 기다리던 관료들도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정전(停戰) 혹은 종전 제의라... 정말 하실 겁니까?”
신하들을 대표한 가이츠 총재에게 황제가 끄덕였다.
“요는 하루빨리 전쟁을 끝내는 것이다. 이미 지구 측의 누적 사망자도 군인만 10만 명 이상, 수억 인구가 이재민이 되고 많은 이가 불안에 떨고 있어.”
옥좌에 높이 앉은 그는 좌우에 도열한 문무 관료들을 내려 보았다. 외견은 젊지만, 아주 오래 살아온 관록은 녹록치 않다.
“우리 누적 사망자도 10명을 넘어섰고, 모두가 봉인에서 깨어나자마자 전쟁에 내몰렸다. 그 사망자들은 새로운 세상을 보지도 못하고 죽은 셈이야. 짐은 하루라도 빨리 전쟁을 종결시켜,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이가 새로운 세상에서 살길 바란다.”
모두가 웅성거렸다.
지구의 신병기가 있지만 그건 딱총에 맞은 정도다. 이제 곧 진군 명령이 내려지고, 앞으로의 전쟁도 순조로울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슬슬 때가 왔다. 지구를 통째로 태워버릴 요량은 처음부터 아니었잖나. 특히 인구가 집중된 북반구는, 민간인을 방패로 삼은 이상 더는 치기 힘들잖아.”
“그건 적들이 고의로... 차라리 이 사실을 공표해 내분을 일으키는 편이 낫지 않습니까?”
총재의 이의에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가는, 방패가 된 것을 알고 탈출하려는 민간인과, 그걸 막아서는 군이 어우러져 대규모 유혈이 발생할 수 있어. 또한 이후 책임 문제 등 정치적 혼란도 상당할 터. 우리도 전후에는 체제 정비를 해야 하는 만큼, 외교 관계를 맺게 될 타국들이 지나치게 혼란스럽다면 이래저래 입지가 곤란해져.”
또 다른 의견을 구하는 듯 황제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말씀 올립니다.”
시선을 받은 우현왕이 말했다.
“이대로 전쟁을 지속해도, 앞으로도 필요 이상의 피를 흘리지는 않을 거라, 저는 자신할 수 있습니다. 굳이 이렇게 손해를 봐 가면서까지 정전해야 하는지는...”
“그대가 짐의 의지를 잘 알고 있고, 스스로도 잔혹한 명령을 내리지 않을 거라 믿고 실전 지휘의 전권을 주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 병사이자 국민의 미래도 생각해야지. 이미 흘린 피는 어쩔 수 없지만, 굳이 더 보태어 필요 없는 증오를 받게 할 필요는 없잖은가.”
개인감정이긴 해도, 과거의 일로 유키나는 자신의 병사들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그래서 강경파의 대표 격이었지만, 다른 의미로는 황제의 가장 큰 동조자다.
오라버니는 언제나 바른 선택을 하고 있다고, 믿고 또 믿어 왔다. 못마땅하게 웃었지만 그녀는 수긍했다.
“5함대 사령관, 야베타 칸타이가 아룁니다.”
늙지도 젊지도 않은, 검은 구레나룻이 인상적인 사령관이 입을 열었다. 그도 강경파다.
“전선의 병사들이, 신민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무엇 때문에 지금껏 피를 흘리고 싸웠는데...”
“알아. 하지만 경의 질문대로, 과연 우리는 무엇 때문에 싸우는 걸까?”
“...예?”
의아한 그에게 황제는 웃으면서 물었다.
“땅을 뺏기 위해서,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서, 아니면 좀 더 숭고한 목적으로... 지구라는 시궁창에 뒹굴면서 우리들 스스로의 가치를 재정립하기 위해서?”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가장 중요한 목적은 따로 있지 않은가? 우리는... 지난 내전을 겪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지 않은가. 동족의 피로 얻은 교훈은 뼛속 깊이 새겨졌다. 차별은 우월감을 낳고 우월감은 오만을 낳는다. 그 오만이 다시 차별을 낳고 피를 부르지. 악순환이야...”
황제는 거듭 씁쓸히 웃으며,
“아샤르와 지구 인류, 그 공존의 미래는 변화의 계기다. 분명 우리는 지구의 주인이었지만, 이제 지구 인류의 주인은 아니야. 그리고 주인의식이라는 것은, 권위와 힘을 앞에서 다른 이를 속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바르고 옳은 일에 솔선수범하고 그것으로 만인이 따르게 함이지. 그렇다면, 자존심 운운 이전에 먼저 칼을 놓아 앞으로의 평화, 그 의지를 보임이 마땅하다고 본다. 신민이 문제라면 짐이 직접 설득하겠다.”
“...옳은 말씀입니다만, 심적으로는 쉽지 않겠지요.”
대제독의 푸념이자 항복 선언이 뱉어지자 이어 온건파인, 흰 색의 전포를 입은 인물이 입을 열었다.
“통합지원본부장 엘리후 로이아드가 아룁니다. 만약 정전이 이루어질 경우, 조건대로라면 당분간 군의 임무가 전투가 아니라 노동이 되는 셈인데 괜찮을까요? 우리가 민간 우주선을 다수 갖고 있지 않은 이상, 결국 우주함대가 나서야 하는데... 전투가 본분인 우주함대가 일꾼이 되는 셈이니 자칫 병사들의 자존심이...”
“군의 본분은 자국민을 지키고 권익을 보호하는 것이다. 또한 폭력으로 비폭력을 지키고, 평화의 시대를 위해 전장에서 싸우는 것을 본분으로 한다. 그렇다면 그 임무가 조금 달라진대도, 평화를 건설한다는 대의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지 않은가.”
황제가 내놓은 정전(停戰) 조건은 파격적이다.
기존에 기술상서에게 맡겨 검토했던 것. 지구 인류에게 유리한 조건, 즉 자원과 기술을 상당히 전수하는 것 이외에도, 아샤르가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던 6대 조건의 수정과 추가조건이 들어가 있었다.
바로 지구 성왕(星王) 칭호와 권한의 포기이다.
성왕 칭호는 아샤르의 대(對) 지구권 국가의 우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를 포기함은 아샤르가 지구의 지배자라는 인식을 포기함을 것을 의미한다.
추가되는 양보로, 일본 열도에는 덴노(天皇) 일가의 독립 황실의 권리와 권위를 인정하고, 역시 형식적이긴 하지만 아샤르 황제와 동일한 의전 위치를 부여한다. 즉 황제의 신하가 아닌 위치로 일본 황실은 그 가계를 계속 보장받는다. 아샤르가 존속하는 이상 영원히.
한반도의 두 국가에 대해서도 좋은 조건이 있다. 북한은 현재 김씨 정권의 핵심 인사에 대한 차후 안전보장과 생활을 위해 향후의 연금 지급 및 과거의 학정(虐政)에 대한 기록을 말소하는 혜택이 주어진다. 한국에 대해서는, 수도성에 해당되는 베라 아샤르를 현 한국령 안에 두어 한반도 전체에 수도국(首都國)의 위치를 부여한다. 만주지역과 러시아 지역은, 비교적 낙후된 지역임을 감안하여 향후 개발에 최우선권을 준다.
또한 세계 전반에 대한 혜택으로는, 3개월에 이르는 아샤르의 침공에서 입은 물적 손해에 대해 대대적인 지원이 있을 예정이었다. 이를 위해 우주함대가 파견되어 각종 대민지원(對民支援)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엘리후 원수가 말한 전투가 아닌 노동이란 이것이다.
더불어 다소 뒷거래가 되겠지만, 비록 저들이 인간 방패라는 비정한 작전을 썼지만, 향후 지구권 국가의 내분 방지를 위해 이번은 그 치사함을 비밀로 하여 묻지 않고 넘어간다.
도덕적 우위를 선전할 좋은 카드를 스스로 버린 셈이지만, 황제의 말대로 바빠지는 미래다. 세상은 되도록 조용한 편이 좋다.
한 마디로, 전쟁에서는 압도적으로 이겼지만 상당한 손해를 감수한다는 이야기다. 승자의 입장에서 내놓는 조건으로는 역사에 없다.
대신, 이것마저 거부하면 완전한 전면전으로 방침을 바꿀 것이고, 이 경우 지구는 화려하게 불타오를 것이다. 이 사실도 지구 측에 알려주어 강력하게 정전을 요구한다.
물론 내부의 반발도 있을 것이다. 애당초 아샤르의 6대 조건은 제국인들이 당연하다 생각하고 요구했던 것이다. 이제껏 멋대로, 마치 지구가 우주에 하나 더 있는 것처럼 생각 없이 망가뜨린 녀석들에게서, 그들의 소중한 별에 대한 관리권을 되찾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부 관철시키기는커녕, 하나는 대폭 수정했으며 다른 여러 부분에서도 상당히 양보한 셈이다.
또한 지구측 역시 이런 저런 자존심의 상처는 있을 것이다. 손에 넣는 영토와 국민은 모두 지난 세월 서로를 무시하고 싸워온 이들. 아마 어느 누구에게 조금만 잘해줘도 무척 반발하겠지.
일본인의 삶만 살아온 루이코도 쉽게 예상할 수 있었으니, 황제가 이를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그 사실에 대한 아샤르 인들의 지식은 얕다.
황제는 지구에 살며 이런 저런 경험이 많지만, 그렇지 않은 국민들을 설득하고 달래는 것은 앞으로 예정된 고생길이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로, 침략자의 딱지는 아마 오랜 세월이 지나도, 많은 것을 베풀어도 희석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정말, 무엇 때문에 이리 애를 쓰며 전쟁한 걸까요.”
우현왕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황제가 달래듯,
“목숨의 값보다는 이런 저런 조건들이 훨씬 싸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를 낮추지 않으면 저들이 따라오지 않아. 그건 우리가 바라는 바가 아니잖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뜻을 따를 것을 천명합니다.”
“다른 의견을 내놓을 사람은...?”
더는 없다. 이미 황제의 결정은 절대적이다.
이와 동급의 조치에 반발해 과거 반란이 일어났지만, 그들의 시간 감각으로는 불과 3년 전에 내전이 벌어진 셈이다. 과오를 반복하는 어리석은 자는 없을 것이다.
“1함대 사령관, 아코르 미를레인이 아룁니다.”
아코르 공작이 힘차게 일어났다.
“만약... 이 조건조차 적이 거부할 경우, 재침공의 선봉은 소관에게 필히 맡겨 주시기를 청원합니다.”
황제는 딱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알았다. 그 때에는 반드시 그러하겠다.”
그녀는 깊이 배사했다. 총재가 쓴웃음으로 물었다.
“그럼 저들에게 전달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특사를 보낼 것이다.”
“누구를 보내실 겁니까? 누가 가든 위험할 텐데...”
“생각해뒀다.”
배석한 루이코는 내심 웃고 말았다.
이틀하고도 반나절, 함께 식사를 하고 같은 침대를 쓰며 또 수줍은 사랑을 나누고, 그 동안 틈틈이 나눈 이야기의 내용이라 그녀는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쉽고 단순한 길, 강압적인 정복자의 길이 있건만, 황제는 이 어려운 길을 굳이 가려고 한다.
하지만 더는 걱정하지 말아야지. 대신...
그가 가시밭길에 다친 발을 아파하더라도, 무력한 자신의 알량한 힘으로는 그를 대신 업고 갈 수는 없다. 오히려 그 등에 업혀서 무게를 더할 확률이 높다.
하지만 같이 걸으며 격려 정도는 해 줄 수 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같이 나누면서 때로는 웃고 울며 공감하며, 그와 앞으로의 세월을 견뎌나가야지.
솔직히 아직도 자신은 없다. 어쩌면 오늘 느끼는 사랑의 감정보다 훨씬 뼈아픈 시간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오늘의 내 마음은, 역시 그와 같은 길을 걸으라 말하고 있다.
어째서 그가 전쟁을 그만둘 것을 결심했는지는 모른다. 아레아의 불행 때문일 수도 있고, 전부터 생각해온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 눈물과 나에 대한 애정으로 멈추었어도, 그래서 설령 내가 뭇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대도, 이 사람에게 받은 온기만으로 나는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
“축하해. 가족이 된 것을...”
루이코가 하루 다음으로 찾은 이는 황후궁의 주인이었다.
이 웃음은, 역시 그녀도 알고 있었던 걸까. 내심 움츠러든 루이코가 물었다.
“저기... 아무리 저번에 그렇게 말씀하셨어도, 솔직히 화가 나지 않으세요?”
“전혀. 아예 모르는 사람보다 훨씬 낫고, 그리고 나도 네가 마음에 들어. 부담 갖지 말아.”
태연스럽게 대답하는 그녀에게 조금 질렸지만, 또한 크게 안도했다.
그녀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익히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기꺼이 그를 나누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그럼 조만간 정식으로 책봉을...”
어쩐지 들뜬 그녀에게 루이코가 급히 말했다.
“도중에 끊어서 죄송합니다만, 저는 정식 후궁이 될 생각은 없는데요?”
“어째서...?”
“그냥... 고작 이틀 밤을 보낸 것 가지고, 제게는 너무 과분하고... 육체관계로 팔자를 고치는 것 같고...”
무엇보다 황후를 볼 면목이 없다. 자신이 그와 갖는 사랑의 행위는, 지금의 그녀에게 얼마나 간절할까...
“하지만 승은(承恩)이잖아. 그리고 차비 건은 예전부터 이야기 했던 것이고...”
“조금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알 수 없는 이 고집이 의심스럽지만 이건 황제와 루이코, 두 사람이 풀 문제다. 세리사는 수긍했다.
루이코의 상념을 현실로 돌아오게 한 것은 황제의 담담한 목소리였다.
“아쉬움은 알겠지만 잃은 것에 연연해하지 말자고. 대신 얻은 것도 많으니까.”
“무엇을... 얻었다고 하시는 거죠?”
유키나의 말에 황제는 즐거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지상의 푸른 바다와 하늘과 흙빛 대지, 찬란한 태양빛과 푸근한 달빛과 상쾌한 바람을, 우리는 다시 얻지 않았는가. 어찌 잃기만 했다고 할 수 있겠나.”
대체 황제가 왜 자신을 부르는 것일까. 이영은 의심스러웠다.
비록 다시 부르겠다고 했지만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다. 지난번 끌려갔던 그 방. 단상 위의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자식이. 얼굴이 조금 멀끔해졌다.”
아주 정확한 발음의 한국어다. ...그리운 언어군.
“그렇...습니까?”
“어라? 웬 경어냐?”
어쩐지 놀리는 물음에 이영은 입술을 내밀며,
“그냥... 어쨌든 당신은 황제고... 저야 집도 절도 없는 몸이고... 그 사람의 남편이기도 하고.”
“그래도 조금 격이 뛰었군. 그저 씨발 새끼에서, 그 사람의 남편 놈까지는 말이야.”
서로가 코웃음을 쳤지만, 확실히 전보다는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졌다.
“자, 그럼 올라와서 여기 앉아라.”
바닥이 열리더니 의자 하나가 올라온다. 권하는 대로 앉고 나자 황제가 재차 질문했다.
“그런데... 집도 절도 없다니?”
“저희 조직은, 당신이 지구에 내려가자마자 박살이 날 것 아닙니까. 절대로 그냥 놓아둘 순 없겠죠.”
“서울의 집은 무사하잖아?”
“생각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조만간 내려올 당신이니, 그대로는 꼼짝없이 당신 국민이 되는 거니 과연 머물러야 하나 생각도 들고... 그런데 왜 부른 겁니까?”
“일 좀 시키게... 그동안 여기서 먹은 밥값은 하라고.”
“뭡니까?”
고작 며칠 먹이고 뭘 시켜먹으려는 걸까.
“간단해. 심부름이다.”
“빵셔틀입니까. 여기서 지구는 너무 멀어요.”
“어느 시대 농담이야? 아무튼 일이란 건...”
황제는 지구에 내걸 조건을 설명한 후,
“이 일을 네게 맡기고 싶다. 지구에는 사전 통신을 보내고, 네게 관련된 제안서를 들려 보낸다. 너는 증인으로 참석하고 다시 돌아와라. 네 능력이라면 목숨 하나는 건사하겠지.”
“만약 결렬되면... 역시 전면 공격인가요?”
“그건 강경파 신하들을 달래는 조건이지만, 결렬이 되어도 어떻게든 다독거릴 거고 황후도 도울 거다. 그러니 그 점은 안심해도 된다. 다만, 그래도 여기선 더 양보 못해. 따로 지침도 줄 테니, 그대로 전한다면 저들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걸. 일단 조건도 좋고...”
이영이 생각해도 나쁜 조건은 아니다. 전쟁이 멈추고, 이후 대량의 자원과 상당한 기술을 얻게 되는 이득은 크다. 하지만 그는 다시 반문했다.
“항복 권고 때부터, 처음부터 이렇게 했으면, 그나마 싸움을 안 할 확률이 높았을 것 아닙니까?”
“그건 우리 국민들이 납득하지 않았을 거다. 주인이 집을 비운 사이 빈 집을 차지한 들짐승... 지구인에 대한 인식은 그런 정도였거든. 자기 집을 찾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하니 그런 조건이 나온 거고... 짐도 집권 초기부터 국민과 대립하긴 힘들었거든.”
“그게 그동안 흘린 피에 대한 이유는 되지 않습니다.”
“알아. 하지만 짐은 일국의 군주다. 선택지는 많지 않았어. 대신 전쟁으로 인한 피를 줄이려고 제법 노력했다. 그리고 갚아 나갈 것이다. 우리 국민이 섞이게 되는, 앞으로 살아갈 터전인 이 별에 우리의 많은 것을 나눌 것이다. 그 증거가 이번의 정전 조건이다. 또한...”
황제는 쓰디쓴 입맛을 다셨다.
“다치지 않으면 깨닫지 못하는 것도 있어. 이번 전쟁으로 양자가 모두 얻는 것이 있기를 원했어. 우리에게는 내전에 이은 전쟁으로 인한 혐전(嫌戰)의 인식과, 모습이 같고 감정이 있는 사람을 죽이고 빼앗은 거라는 부채의식을 지우고, 지구에는 제 살 깎아먹는 내분을 줄이고 우리라는 강대한 존재를 깨닫고, 당연하게 독점하며 망가뜨리던 이 별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기를... 그래서 전쟁 자체는 되도록 많은 이들이 접하며 그 공포를 깨닫고, 더불어 유혈은 최소한으로 줄이는 방법을 써보고자 했던 거야.”
“하지만 우리는 당신들에게 증오를, 당신 국민들은 우리에게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공존이나 융합이, 과연 가능하리라 보십니까?”
“원한과 멸시로 묶인 서로 다른 종족이지만, 세리사는 네게 편견을 갖고 있더냐? 너는, 세리사가 짐의 아내인 것을 알고 있지만 지금 증오하느냐? 증오와 편견은 누구나가 갖고 있지. 하지만 어떻게 다루느냐가 중요한 거다. 짐은 할 수 있다 생각하고 있어.”
너무 이상적이다. 하지만 자신의 증오를 씻어버린 세리사의 눈물, 그리고 웃음을 떠올리니 아주 부정하고 싶은 기분이 들지는 않는다. 이영이 다시 물었다.
“제게... 당신은 뭔가 할 말이 없습니까? 당신의 아내는 그 날의 일을 미안하다고... 그렇게 말했습니다만...”
황제는 풋 하고 웃었다.
“그럼 짐이 똑같이 눈물을 흘리면, 믿어주려나.”
“아뇨. ...상상하니 끔찍한데요.”
“짐도 그렇다. 그리고... 눈물만이 속죄와 사과의 방식은 아니지. 짐은 짐의 방식대로 할 거다.”
“어떤 것이지요?”
“지금까지 흘린 피를 뛰어넘는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하지.”
“고작?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을 가지고...”
“황후는 물론이고 루이코도 믿어줬는데... 너는 좀 무리겠지. 뭐, 할 수 없는 일. 다만...”
황제는 몸을 숙여 다짐하듯 말한다.
“그녀들이 원하는 세상이라면, 네게도 그리 싫지 않은 세상일 거다. ...아닐까?”
이영은 생각했다. 확실히... 그리 다르지 않을 거야.
“그럴까요...? 하지만 어느 세월에...”
“되도록 빨리 어느 정도 성과를 볼 수 있게 노력할 생각이다. 루이코도 그렇지만, 세리사도 짐이 엇나간다면 슬퍼할 테니, 그녀들을 봐서라도 열심히 할 거야.”
이영은 고민에 빠졌다.
세리사, 그리고 루이코. 모두 그를 사랑하고 또한 사랑받는다. 그녀들이 빠진 이 녀석만의 장점은 분명 있겠지. 그리고...
세리사가 한 말이 다시 떠오른다. 그녀가 그 때 자신들을 감쌌던 것은, 바로 이 녀석이라도 같은 행위를 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는 것.
이 녀석은 침략자의 황제로 많은 목숨을 앗아갔지만, 자칫 전쟁이란 이름으로 모른 채 하거나 충분히 죽일 수 있었던 목숨은 또 여럿 살려주었다. 전자가 군주의 입장이라면, 후자는 아마도 개인적인 심성이겠지.
아직 다 믿어볼 수는 없지만, 그 주변을 보면 그 사람의 인물됨은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강대한 힘이 바르게 다뤄진다면, 그의 말대로 세상은 조금은 더 좋게 바뀔 거라 기대할 수 있을까. 그리고...
친구의 죽음에 대해 루이코는 그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고, 험한 일을 당한 아레아는 증오해야 마땅할 사람들을 용서했다. 황제와 우현왕은 부모형제를 죽인 원수도 용서했다. 세리사는 그녀에게도 미운 이들일 터인, 죄를 저지른 동족들을 대신해서 눈물로 용서를 빌었다. 모두 그러지 않아도 될 그런 사람이었음에도...
그렇다면 나는, 나는 언제까지 증오에 파묻힐 것인가. 돌고 도는 원한은 언제쯤이나 멈출까. 그리고 어쩌면 이제, 원한을 씻고 증오를 벗을 노력을 스스로 해야 할 때가 왔는지도 모른다.
속 모르는 황제는 그의 고민을 재촉했다.
“받아들여 주겠는가?”
“...생각할 시간은 주지 않는 겁니까?”
“응? 지금까지 생각한 건 뭐냐. 네가 망설이는 이 시간에도 사람들이 죽어간다고.”
왠지 초조해 보이는 그 모습이 낯설지만 조금 우습다.
황제가 불편한 표정을 짓는다.
“웃어?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버릇없네.”
“누가 어른입니까?”
“녀석. 짐의 아내가 널 아들처럼 생각한다. 그렇게 따지면 내가 니 애비다. I am your father이란 거지.”
“별 꼴이군요. 누가 아들입니까. 그리고 그냥 웃긴 걸 어찌 합니까.”
“누가 할 소리. 사실 짐도 너 같은 아들놈은 싫다.”
전에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약간의 웃음이 서로에게 흐른다. 이영도 마음을 굳혔다. 일단 전쟁이 멈춘다.
“그럼 받아들이죠.”
“잘 해봐.”
“그런데... 제게 뭔가 떨어지는 건 없습니까? 일단은 일을 하는 셈인데...”
사실 이득을 바라지는 않지만, 녀석에서 뭔가 손해를 끼칠 수 있다면 나쁘지 않지. 솔직히 심술이었다.
“짐을 상대로 장사라...”
황제는 쓰게 웃었지만 기분 나쁜 표정은 아니었다.
“그럼... 측근이 되련? 자리 하나는 마련해 줄 테니.”
뜻밖의 제안에 이영은 당황했다.
“제가... 그렇게 탐나는 인재는 아닐 텐데요?”
“루이코는 그리 볼 것 있었나. 물론 루이코는 장점이 많았다. 그리고 앞으로 더욱 짐의 옆에 있는 이상 많은 이야기를 해 주겠지. 그러나... 그래도 싫은 소리는 이제 자제할 거잖아. 그러니 짐에게 싫은 소리를 해 줄 사람이 더 필요하다. 그것도 지구인 중에서...”
“싫은 소리... 라고요?”
“네가 최적임자일 것 같은데.”
잠시 생각한 이영은 문득 심술궂게 웃었다.
“욕해도 됩니까?”
“남이 보는 앞이 아니라면 마음대로. 솔직히 지난번 싸움은 나름 재미있기도 했고...”
수틀리면 욕을 할 수 있는 직업이라... 매력적이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럼 특사로 가겠습니다.”
“그래라. 그리고 이대로 사령장관, 우현왕 유키나를 만나라. 돌아가는 방법 및 정전 제안서, 그리고 네 행동 지침을 담은 밀서를 줄 것이다.”
“그 여자... 말입니까.”
이영은 난처했다. 보자마자 개 패듯 두들기는 건 아닌가. 에라, 맞으면 맞는 거지. 한 짓이 있으니...
아파켄의 사령장관실에서 만난 그녀는, 예상과는 달리 대뜸 손을 쓰진 않았다. 대신 내던지듯 금속제의 원통을 넘겼다.
“우리는 종이는 거의 쓰지 않지만, 일단 적어서 넣었으니 가져가. 내일 오전에 통신을 보내고 답이 오면, 약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너를 지구군에 넘길 거다.”
줄곧 불편한 여왕의 표정에 이영은 내심 생각했다.
일단 사과 정도는 해 둘까. 아무리 그래도 여자의 입술을 함부로 훔쳤으니. 하지만 요구하지 않는다면 내버려 둬도 무방할까.
“알겠습니다. 그럼... 가 봐도 될까요?”
“잠시만.”
유키나는 고운 아미를 꽤 찌푸리고는,
“아무래도 못 참겠어. 뺨이라도 한 대 맞고 가...!”
“저기, 저는 이제부터 황제 폐하의 특사인데요...?”
“그래서?”
“얼굴에 손자국이 있는 채로 돌아가면 누군가에게 의심을 살 겁니다. 제가 진실을 말하기라도 하면, 당신의 처지가 난처해지지 않을까요?”
그녀는 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나중에 돌아와서 맞아!”
“안 됩니다. 당신께 얻어맞는 미래, 그 공포에 질린 제가... 과연 하명하신 일을 잘 해낼 수 있을까요. 그건 서로 곤란한 일 아닐까요.”
자신이 생각해도 꽤나 능글맞게 척척 대답한다.
아마 황제를 제외하고는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는 그녀지만, 지구를 향해 즐겁게 공갈과 협박을 내던졌던 이 표정이 망가지는 것을 보면 즐겁다, 쌤통이다.
부르르 떨며 분을 참는 그녀를 앞에 두고, 이영은 일부러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의 없으시다 알고 물러가겠습니다. 아, 그리고...”
“...뭐야?”
샐쭉하게 쳐다보는 그녀에게 이영은 쿡쿡 웃으며,
“좋은 걸 쓰셨나 봅니다. 나중에 상표는 가르쳐 주시길. 지금은 없지만 나중에 애인이 생기면 사주게요.”
“무슨 소리야?”
“뭘 바르셨는지 몰라도, 딸기맛이더군요.”
최후의 일격을 날린 그는 즉시 물러났다. 발걸음을 빨리 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가 그 뜻을 생각하는 사이, 잠시의 시간이면 이미 도주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던 유키나는 비로소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차마 소리는 지르지 못했지만, 분노와 수치가 섞여 홍당무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저 자식이...!”
그녀는 체통도 순간 잊고 방방 뛰었지만 이미 늦었다.
새장을 탈출한 새는 쉽게 잡을 수 없다.
수고하셨어요.
- 작가의말
지못미 여왕님. 딸기향이라니 취향이 너무 어려요.
...아마 그의 행동이나 조건들 중에 독자여러분의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만 할 수 없는 거죠. 그는 앞으로 많은 것을 통합해야 하는 사람이니까...
자 그럼, 종막을 향해 달려갑니다, 브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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